소설리스트

클로저스-159화 (159/517)

00159  뒷 이야기.  =========================================================================

금요일 오후 7가 다되어가지만, 회사에서 퇴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8층에서는 타임리버 직원들이 퇴근도 미룬 채 사무실에서 티비를 통해 뉴스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고 수백 명은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1층 홀에서도 타임리버 능력자나 생활 보조 능력자들이 모여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뉴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1층에 모인 능력자들 틈에는 나와 프랑, 화연이도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두 명의 부대장과 1팀 2팀 3팀 10팀의 4명의 팀장, 그리고 40명의 팀원과 그와 같은 숫자의 생활 보조 능력자들도 있었다.

이번 발표는 이혜령 부장이 직접 한다고 하던가.

10분을 남겨둔 6시 50분에 화면이 전환되더니 화면이 청와대 춘추관에 있다는 발표회장을 비추고 있었다.

넓은 발표회장 안에는 동양인과 서양인 구분 없이 수많은 사람이 가득 차 있었으며 회장 뒤편에는 방송국 카메라가 줄줄이 가득 서 있었다.

“시작한다.”

누군가의 말에 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와 동시에 화면에 익숙한 모습의 할아버지가 정정한 모습으로 단상 위에 올라서고 그 옆으로 한국 총괄 지부장 강현우와 처음 보는 외국인, 그 옆으로 이혜령 부장과 김표충 부장이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총리실 소속 국가 이능력혁신처 장관 김학준입니다.

최근 일어난 대한민국 소속의 특수 능력자, 블루 지니어스의 암살시도가 있었음을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시 발표 때도 습격자의 배후를 알아내지 못해 국민 여러분들의 질타를 받았음에….]

김학준 사무차장은 미리 준비해둔 발표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약 5분간, 내가 3회차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에서부터 그저께 돌아왔을 때까지의 일을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요점만 집어 설명해갔다.

[그리고, 블루 지니어스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홀로 이형종의 사냥을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위상 세계 입장 28시간 중 4시간이 채 되지 않는 사냥의 결과물입니다.]

이혜령 부장은 손안의 패드를 조작하더니 김학준 차장의 뒤편에 있는 거대한 패널에 내가 잡았던 이형종 들의 종류와 숫자를 띄우고 그 옆에 획득한 위상석과 부산물의 종류 등을 좌르륵 띄웠다.

대략 위상석은 약 29만 TP의 상위급 위상석 1개와 중상위 중위 중하위급들에서 채집한 위상석이 11만 TP였다. 거기에 상위 이형종 솔리드 스네이크의 사체와 부산물, 중상위, 중위, 중하위 이형종 들의 부산물을 포함해 총 1조 원 상당의 이익을 냈다는 내용이다.

고작 4시간 만에 이뤄낸 성과에 기자들은 경악하며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김학준 차장은 손을 들어 질문을 멈추게 하고 이어서 한쪽을 바라보면서 손짓을 하니 발표회장이 어두워지며 대형 스크린이 김학준 차장의 뒤편, 패널 앞에 내려오고 5명은 스크린 앞에서 자리를 피해줬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형종 사냥 영상.

검증단이 위상 세계에 도착한 직후부터 시작된 영상 기록은 여러 가지 화면으로 나뉘며 검증단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처음, 웜 드릴러를 잡는 순간을 본 기자들은 말도 못 꺼낼 만큼 놀랐지만 뒤이어 나온 모습에 할 말마저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숲에서 달려 나온 나와 프랑, 화연이 자리를 잡는 모습, 그 뒤를 이어 수십 마리의 이형종 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재생되기 시작하고, 다른 쪽은 화연의 시점으로 수십의 이형종 들을 향해 내가 가벼운 손짓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기어오는 이형종 들이 토막 나버리는 모습이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었다.

[저, 저게 어떻게 된 거지? 손짓만 하는데 이형종 들이 죽어 나가고 있잖아…?]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오자 주변 사람들이 중얼거린 사람을 노려본다.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쓸어버린 나와 화연이, 프랑은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재생 속도가 5배속과 20배속을 오가며 십수 분간 수백 마리의 이형종을 간단하게 요절내버리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타임리버 빌딩의 홀에는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사람들의 경악한 표정은 모두 날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한밤중이었다.

보초의 시야였는지 100배속으로 주둔지를 부산물을 해체하는 모습이 빠르게 지나가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새벽 1시가 됐을 때 빠르게 감기를 멈추고 1배속으로 재생이 시작됐다.

어두컴컴한 밤하늘,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천막을 뚫고 프랑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시야에 잡히고, 순식간에 되돌아온 프랑이 천막 안으로 뛰쳐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화연이가 튀어나오며 습격이라고 소리친다.

삽시간에 주둔지가 깨어나며 능력자들이 천막에서 달려 나오고, 시커먼 포스레더 아머를 걸친 내가 프랑과 함께 천막에서 나오며 한곳을 향하는데, 시점이 바뀌며 내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보초의 시야에 잡힌 나와 프랑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비치지만 빗소리 때문에 안 들린다.

곧이어 프랑이 숲 속으로 날아가고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상한 느낌의 내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영은이를 부른다.

곧이어 이형종의 습격 소식을 내가 알리고, 내 고개가 숲 쪽을 향하는 것과 동시에 우르르릉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한쪽 밤하늘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그 순간 내가 땅을 박차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숲 쪽으로 달려간다. 그 뒤를 화연이와 영은이도 뒤따르고 시점은 화연이의 시점으로 바뀌는데,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의 강이 흘러내려 주변의 이형종 들이 깡그리 죽는 모습이 담겼지만, 그보다 내가 왼쪽으로 튀어나가며 손을 뿌리니 투명한 무언가가 빗속을 가르며 날아가고 빗속을 가르는 모습이 담긴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시야 너머 검고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벼락같이 튀어나가며 피해버리고 마나 탄은 헛되이 날아가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직후 무언가가 빠르게 내게 접근하는 모습이 담기지만 나는 자세를 잡고 가만히 서 있었는데, 갑자기 내 모습이 일렁이는 파문에 휩싸였다.

내 주변에서 화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고 숨을 격하게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영상 재생 속도는 0.2배속까지 줄어들었다.

곧 팔을 여러 번 휘두르며 무언가를 쏘아내는 내 모습이 보이지만, 순간 뒤쪽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고 솔리드 스네이크의 모습이 시야에 담기는 순간 솔리드 스네이크는 s자를 그리며 마나 탄을 죄다 피해린 후 몸을 꽈리처럼 움츠렸다가, 번개같이 튀어날라 온다.

그리고 날 스쳐 지나가는 순간 어느새 솔리드 스네이크의 머리통 절반이 사라져서 피를 뿜으며 바닥을 나뒹굴고 나 역시 놈과 부딪치며 한쪽으로 튕겨 날아간다.

내가 땅에 튕겨 나가는 순간 푸른 물결이 내 몸에서 퍼져 나오더니 벌떡 일어난 내가 대지를 박차고 20m 가까이 뛰어오르며 왼팔에서 무언가를 쏟아내고, 오른손에서도 투명하지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윤곽이 대충이나마 드러나는,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내가 뛰어오름과 동시에 푸른 물결을 맞은 솔리드 스네이크도 재생을 시작하며 발악하듯 발버둥 치는 모습과, 두구궁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재생 중인 솔리드 스네이크의 몸 이곳저곳에서 지름 십수미터짜리 폭발이 중첩되며 일어나지만, 폭발의 반절은 일그러지며 솔리드 스네이크의 비늘과 돌덩어리 껍질을 타고 흐른다.

시뻘건 육질이 부풀어 오르는 머리통 부분에 연결된 선이, 솔리드 스네이크의 머리에 새하얀 점을 만들고 있었지만 솔리드 스네이크는 계속 재생을 하며 온몸을 뒤틀고 꼬리로 대지를 후려친다.

다시 한 번 내가 뛰어오르는 모습과 함께 내 손바닥에서 약간이지만 푸른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며 그 빛기둥이 솔리드 스네이크의 머리통을 뚫어버리고 왼팔에서 튀어나온 마나 탄들이 재생 중인 살점과 그 주변의 돌덩이와 비늘들을 폭발시켜버리는 모습이 스크린에 드러났다.

동시에 벼락같이 하늘로 치솟은 솔리드 스네이크의 꼬리가 부르르 떨더니 땅으로 쓰러지며 축 늘어지는 것으로 사냥 영상이 끝났다.

1배속으로 돌아오며 내가 비에 젖은 대지에 내려앉는 모습과 두 다리로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솔리드 스네이크를 잡는 데 걸린 시간은 1분. 고작 1분 만에 결판이 나버렸다.

발표회장이 밝아지지만, 기자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도 잠시, 폭발적인 아우성과 함께 수많은 기자가 김학준 차장에게 질문하지만, 단상에는 이혜령 부장이 올라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우성 중인 기자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점점 소란이 줄어들다가 조용해지자 이혜령 부장이 입을 연다.

[세계 위상 능력자 연합에서는 이번 검증과 기록된 영상을 통해 이례적으로 정서하 씨를 스페셜 타입 혼합능력자로 인정했습니다. 모든 것은 정부와 세계 위상 능력자 연합, 그리고 타임리버의….]

…뭐, 그 뒤로는 내가 전 세계 유일한 혼합 능력자임을 능력자 연합이 인정했고, 능력자 연합과 IWO에서는 나에 대한 적대적 행동이 일어난다면 그에 관한 국제 수사권은 우리 한국 정부에 있음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 있던 지부장이 인증하는 것으로 발표는 모두 끝났다.

그 이후 잠시간의 질의시간을 가졌는데 내용은 대부분 나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어떻게 스페셜 타입이 될 수 있었는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몇 클래스인데 상위 이형종을 잡은 건가.

A클래스라면 홀로 상위 이형종을 간단히 잡을 수 있긴 하지만 A 클래스는 전 세계에 고작 6명뿐이다. 게다가 내가 C클래스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발표회장은 다시 벌집을 쑤신 것 마냥 소란스러워져 버렸다.

[저희 레이드 팀의 정서하 씨에 대한 능력은 발표된 영상을 잘 보신다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발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내가 스페셜 타입이라는 건 영상을 보고 다시 확인해보라는 이야기만 남긴 채 발표는 끝나버리고, 아우성 중인 발표회장 화면에서 뉴스 데스크로 전환됬다.

뉴스 데스크에서는 미리 초빙해둔 전문가를 통해 저 영상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분석에 들어갔지만 얼마 안 가 모두가 진실임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인증기의 영상 기록은 조작이 들어갈 일체의 여지가 없고, 해당 장면을 기록한 사람들도 많으며, 이번 발표를 위해 내용을 편집하고 위증을 하고 받는 대가는 너무 미약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인증기 영상을 조작한다는 건 그로키스 연구소, 나아가 영국과 싸우자는 것과 마찬가지라던가.

난리가 나버린 타임리버 빌딩 1층 홀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으로 이동했다.

19층의 화연이 집무실로 올라온 나와 프랑, 화연이와 두 부대장은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파에 앉은 소피아는 금방 휴대폰을 꺼내더니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으려니 인터넷에서도 난리가 나서 대체 내가 누구냐는 온갖 이야기가 올라오며 내 신상털기에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곳은 한 두 곳이 아니었다. 덕분에 내 과거 행적이라거나 인터넷에 떠돌던 옛 사진 같은 건 정부에서 모두 회수하고 삭제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다 검증단이 위상 세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정부에서는 각종 매체와 대형 포털 사이트에 공문을 보내서 나에 대한 무분별한 비방과 허위 사실 유포가 이루어지는 건 국가 희귀 능력자 보호법에 따라 사이트 자체가 폐쇄되거나 관련자들이 엄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고 했다.

…솔직히 이쯤 되니까 부담이 막대하다.

난 그냥 남들이 얕보지 않게 강해져서 내 연인들이랑 내 맘대로 살고 싶었을 뿐인데 점점 스케일이 커져간다.

지금 주머니에 든 저장 매체가 화연이나 영은이 손에 들어가면 또 폭탄이 돼서 터질 거 같은데…. 물론 날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다섯 명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가만있을 생각은 없지만.

“복잡한 어른들의 뒷일은 화연과 영은에게 맡겨두시고 서하는 계속 강해지시면 돼요. 누구도 얕볼 수 없고, 누구도 수작 부릴 수 없을 만큼.”

“갑질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된다는 거야?”

“갑질…. 그거 좋네요! 싸움 걸어오면 그냥 밟아버리구 갑질 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시는 거예요!”

갑질을 하려면 못해도 A 클래스는 되어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지금 고위 이형종을 상대하긴 부담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솔리드 스네이크를 상대하면서 느낀 거지만, 고위 이형종 정도가 되면 내 마나 탄은 거의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신체 강화 타입 이형종이라면 1.5km 밖에서 마나 탄을 쏘아낸다고 해도 피하면서 순식간에 접근할 테지.

공간 조작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발표를 무르진 못하겠네.”

생각보다 열띤 반응에 좀 얼떨떨한 기분으로 중얼거리니 옆에서 내 말을 들은 소피아가 입을 연다.

“무르긴 왜 무르나요~? 우리 달링이 이렇게나 강하다! 하는 것을 계속 널리 널리 퍼트려서 우리 타임리버가 세계 랭킹 1위가 되어야지요~!”

“정서하 씨의 능력이 강하다는 건 인지했습니다. 하지만 솔리드 스네이크와의 싸움에서는 어쩐지 불안함이 느껴졌습니다만….”

음. 차소영이 저리 느꼈다면 다른 사람들도 내 약점이 접근전이라는걸 눈치챘을 거 같은데.

“차소영 부대장의 말대로입니다. 우리 서하의 유일하 약점은 접근전이지요. 하지만 신체 강화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통해 우리 타임리버는 서하의 약점을 메꿔주며 B 클래스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차소영 부대장과 소피아 부대장은 그 점을 주지하시고 앞으로의 타임리버 행동방침을 그에 기준으로 삼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에~!”

차소영과 소피아는 나중에 보자며 손을 막막 흔들며, 정확히는 소피아만 손을 흔들면서 집무실을 나섰다.

“흠…. 발표도 끝났으니까 영은이도 집으로 돌아가겠지?”

“아마도. 못해도 주말에는 집에 돌아갈 거다.”

화연이의 말을 듣고 영은이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자기도 곧 퇴근할 거라는 답변이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럼 영은이 집으로 가자. 화연이도 주말은 쉴 수 있지?”

“음.”

고개를 끄덕이는 화연이와 프랑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나왔다. 수고한 영은이에게 시험해볼 게 있기도 하고 고생한 그녀를 위로도 해줘야지.

20층에 들러서 곤을 가지고 갈까 말까 하다가…. 프랑이랑 화연이도 다 했는데 자기만 빼놨다는 걸 알면 삐질 거 같아 결국 챙겨가기로 했다.

화연이의 차를 타고 방배동의 저택에 도착하니 집사 할아버지가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연락을 받았습니다.”

“응. 이제 가서 쉬세요. 오늘은 저희끼리만 있을 거예요.”

“네.”

영은이의 연락을 받았다는 건가? 화연이도 집사 할아버지랑 메이드 누나들을 모두 내보내고 집에는 우리 셋만 남았다.

나는 3층 욕실에서 씻고 프랑이랑 화연이는 1층에서 씻고서 3층 응접실로 올라왔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9시가 다 돼간다. 프랑이 타온 차를 마시며 한숨을 돌리고 있으려니 영은이가 탄 전용 차량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메이드 누나들을 모두 퇴근시킨 집사 할아버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영은이가 도착하니 상체를 숙이면서 인사하는데 영은이는 그대로 뭔가를 지시하더니 바로 3층으로 올라왔고, 집사 할아버지는 그대로 저택을 나섰다.

“아….”

그런데 날 보자마자 달려들어서 날 끌어안을 줄 알았는데, 영은이는 날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영은이 안 오면 내가 가주지!

“히양?!”

살짝 눈을 피하는 순간, 번개같이 날아서 영은이의 품에 뛰어들었더니 영은이답지 않은 새된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불어.”

“읏. 무, 무슨 일은?! 아아아무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당황하고 눈도 못 마주치는데 아무 일도 없어?”

좀 더 힘을 줘서 허리를 세게 끌어안으니 영은이는 얼굴을 점점 붉히면서 상체를 뒤로 피하고 나랑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움찔움찔 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웃으면서 구경하던 프랑이 살짝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영은이의 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밀어댄다.

“후후. 영은은 서하의 고마워 한마디에 마음이 녹아내린 거에요. 그저께 통화 중에….”

“프라아앙!”

“영은도 이제 솔직해져야 해! 계속 그렇게 야한 은이 인척 하는 건 안돼!”

“…야한 은이?”

“그만! 중요한 이야기가…히익?!”

뭔지 모르지만 계속 괴롭히고 싶어지는 반응이다! 그래서 엉덩이를 살짝 쥐었더니 퍼득하고 몸을 떨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입을 연다.

“조기 진입! 조기 진입에 관해서 진짜 중요한 이야기니까, 일단 그 이야기부터 하자. 응?”

“알았어.”

영은이답지 않게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 어버버하고 당황하는 모습이라서 여기서는 일단 한발 물러기로 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도 잡은 손은 놓지 않고 응접실의 소파로 걸어가니 영은이도 엉거주춤하면서 따라왔다.

화연이는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새빨개진 영은이와 시선을 마주치니 피식 웃으면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훗. 저에게 감정을 숨기라고 그렇게 가르친 분이 그런 얼굴을 보니까 재미있군요.”

그러면서 빙긋하고 웃는데 영은이는 그게 무척이나 굴욕적었는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너도 100년 넘게 혼자 살아보렴. 나 같아지나 안 지나.”

“그야 같아지겠죠.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니까요.”

“으….”

할 말이 없어져 버렸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길래 기습적으로 입술을 훔쳤더니 눈을 흡 뜨더니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그만 봐줘…. 진짜 못 버티겠어….”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빨갛게 익어서 만져보니 뜨끈뜨끈하다. 게다가 귀를 만지니 또 흠칫해버리는데, 반응이 참 새롭네.

처음 화연이가 성적인 반응을 보일 때랑 비슷한걸?

“그럼 얼른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말해봐. 다들 기다리잖아? 안 그러면 프랑이랑 화연이 보는 앞에서 계속 괴롭힐 거야?”

계속 빨갛게 익은 귀를 만지작거리니 점점 목이 움츠러드는 게 진짜 재밌다.

“그, 위상 세계, 무신고 진입에 관한 거야. 그런 허가가 난 이유에 대해서 이상함을 느껴서, 나름대로 인맥을 통해서 알아봤는데에, 휴우.”

진짜 중요한 이야기라서 손을 물리고 영은이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제야 한숨을 쉰 영은이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립을 중히 여기는 고위 위원회에서 어째서 그렇게 개인의 편의를 봐주는 의제를 발의했는지, 게다가 그 의제를 받아들여서 고위 위원회가 위원회의까지 개최한 이유랑 제한적인 조건을 걸면서까지 편의를 봐주려 한 것인지 알아봤지만…. 그 발신지가 예지감 부서였다는 것만 겨우겨우 알아낼 수 있었어.”

“…….”

영은이는 비록 얼굴이 붉어져 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내 목을 꼬옥 안아준다.

“제랄 패커드가 사라진 뒤로 보수적이라 할 만큼 변해버린 능력자 연합인데, 어째서 서하에게 이런 예외에 특혜를 내려주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이번에 결정된 사항도 결론을 제외한 내용은 1급 극비로 지정되서 도저히 알 방도가 없었어.”

영은이의 입에서 흘러나온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다.

============================ 작품 후기 ============================

제가 뽕빨물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걸까요?

등장 인물들이 (주로 주인공이) 육체의 꽃을 피우면서 그걸 목적으로하는걸 뽕빨이라고 생각했는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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