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6 Solid Snake =========================================================================
이형종의 생태는 보잘것없는 요소 하나로 크게 변하기도 하는 곳이니까 미리 사전조사를 해뒀다 하더라도 이번 경우는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반성하겠습니다.”
“저도 비 때문에 서하를 도와주지 못했어요….”
“아냐. 내가 성급하게 달려들어서 그래. 프랑도 기습을 피했으니까 공중으로 몸을 띄우면 안전했을 텐데, 프랑이 공격을 받았다는 생각에 생각도 없이 달려들었어.”
나른한 내 목소리를 들은 영은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서하는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겠어. 그 부분은 앞으로 천천히 고쳐나가자.”
“판단력은 타고나는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서하는 판단력이 좋으니 경험이 조금만 더 늘어나면 확실히 실력이 늘어날 겁니다.”
“이번 경우에는 검증 때문에 서하의 스타일대로 못 싸운 것도 원인이 커요.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싸워야 하는데 영상 기록 때문에 근접 전투를….”
“그건 그렇군요. 만약을 대비해 근접 전투 훈련도….”
“수련장이 있으니 그럼….”
머리가 조금 멍해서 대화를 나누는 세 연인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화연이 내 쪽을 보더니 다가와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졸린 가보군. 눈이 조금 풀렸다.”
그런가.
“응.”
“목표인 상위 이형종 사냥은 끝났다. 내일은 오전에 정리하고 오후에 복귀할 예정이니까 서하가 할 일은 이제 없어, 푹 자두도록 해.”
화연이의 말을 듣고 침낭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세 여인이 팬티 바람인 내 몸을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지만, 피곤하고 머리가 멍해서…. 생각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빗속에서 이무기를 떠올리게 하는 뱀과 근접전투, 싫어하는 거 3개가 다 섞인 싸움이었다.
싸울 때는 긴장하고 흥분해서 몰랐는데, 흥분이 식으니까 급속도로 피곤해진다.
“그럼 수련장에 집을….”
“이번 수입으로….”
“집 바로 옆에 수련장이….”
눈을 감으니 귓가에 프랑과 영은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뭔가 부산스러운 느낌에 눈을 뜨니 날이 밝아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봤지만 아무도 없고 내 몸 위에는 모포와 침낭이 순서대로 덮어져 있었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취사용 화덕 쪽에 있던 프랑이 뭔가를 쥐고 날아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이것 드시고 조금 더 주무세요.”
프랑이 내미는 뜨거운 컵 수프를 받아들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프랑이 다시 내 손에서 머그잔을 뺏고는 내 허벅지 위에 올라오며 머그잔을 내 입에 대준다.
“응…. 지금 몇 시야?”
“10시에요. 점심 먹고 복귀할 예정이니 좀 더 주무세요.”
8시간을 잔 건가. 따뜻한 수프를 마시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거 같다.
부산스러운 주둔지를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니 비는 그쳐있었다.
능력자들은 이형종의 부산물을 백팩에 담거나 용기에 가득 든 상자를…. 저건 독주머니? 용기의 용액 속에 독주머니가 둥둥 떠다니는 수백 개의 용기가 담긴 상자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고 생활 보조들은 천막을 해체하고 있다.
영은이는 솔리드 스네이크가 해체된 곳에 있었는데 대지 속성 능력자들이 솔리드 스네이크의 몸에 붙어있는 돌덩어리를 떼어내면 물 속성 능력자들이 물을 이용해 잘게 부수고 부순 돌덩어리를 진흙과 섞어 판처럼 만드는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다.
화연이는 그 옆에서 거대한 톱으로 솔리드 스네이크의 몸통을 절단하고 있었고.
“흐읍…. 후우.”
프랑의 손에서 머그잔을 받아서 후루룩하고 수프를 한 번에 마셔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일어났으니까 좀 움직이다 보면 잠이 깰 테고, 천막 해체하는 데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프랑이 포스레더 아머를 입혀주려고 했지만, 손을 내밀어서 거절했다. 어차피 옷 같은 건데 입기 힘든 것도 아니고 나쁜 버릇 들어.
근데 프랑은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게 내가 혼자 입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보다.
귀여운 표정에 피식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프랑의 입술을 살짝 꼬집어 준 다음 옷을 입으면서 말했다.
“한 두 살 먹은 코흘리개도 아닌데 너무 챙겨주려는 거 아냐?”
프랑도 내 말에 할 말이 없는지 배시시 웃기만 했다.
포스레더 아머를 다 걸치고 영은이가 선물로 준 단검도 허리에 차고 천막을 나섰다. 천막을 나서니 주변에 작업 중이던 사람들이 죄다 날 바라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늘 어두침침한 곳은 아니구나.”
하늘은 완전히 비가 그쳤는지 잿빛 구름 사이사이로 푸른 하늘이 드러나며 햇빛이 내려쬐이고 있었다.
문득 3회차 때 꿨던 꿈이 생각났지만,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 영은이에게 다가갔다.
“우리 왕자님 일어났니?”
환하게 웃으면서 나한테 손을 흔들어 주는 영은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주둔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능숙하게 철수 작업을 지시하는 영은이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허 참. 이게 고작 반나절의 성과라니.”
화랑 보스는 24인용 천막 하나 분량의 부산물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부산물의 절반은 뱀의 비늘이었고 특정 부위를 표본처럼 용기에 담은 것들이나 독주머니를 넣은 용기 박스, 뼈 무더기들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솔리드 스네이크의 몸에 붙어있던 돌덩어리들을 갈아서 진흙에 갠 다음 판으로 만든 것들과 내장을 발라내고 몸통을 통째로 토막 쳐놓은 것들이다.
유채린과 모르는 사람 세명이 부산물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면서 수량을 재확인하는 게 보였다.
“솔리드 스네이크의 돌덩어리 속에 뭔가 좋은 게 있나 봐요?”
“많죠. 희귀 금속 비율이 굉장히 높으니까요. 그리고 돌덩어리라기보다는 2차 비늘이라고 보는 쪽이 정확할 겁니다.”
그렇군. 돌덩어리가 아니라 비늘 같은 거라서 락 스네이크가 아니라 솔리드 스네이크였구나.
솔직히 어제 솔리드 스네이크와의 싸움은 내 마음에 안 드는 싸움이었다.
게다가 비가 내리는데 비마저도 공간 보호막에 지장을 줄 줄은 몰랐고 프랑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
반성하자.
날 보더니 고개를 숙이는 유채린에게 나도 고개를 숙여서 인사해주고 눈알이 뽑힌 반 토막 난 솔리드 스네이크의 머리통을 발로 툭툭 건들고 있으려니 영은이가 다가와서 화랑 보스에게 말을 걸었다.
“부산물을 다 챙기려면 가져온 식료품과 일회용품은 모두 두고 가야겠다. 두고 가는 목록을 서류화시켜서 정부에 제출하도록 해. 지부장에게도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는 존칭을 해주더니 단둘이 이야기할 때는 말을 놓나 보다.
화랑 보스는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연합의 천막으로 향했고 영은이는 날 돌아보더니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회의용 천막으로 가버렸다.
철수 준비는 금방 끝났다. 점심으로는 뱀고기 만찬을 벌이고 능력자, 생활 보조할 거 없이 개인이 들 수 있는 최대한의 짐을 짊어지고 귀환 포인트를 향해 이동했다.
일회용품이랑 식품을 전부 땅속에 파묻어버리길래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비싼 부산물을 챙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돌아섰다.
출발 전에 다 먹지 못한 뱀 고기들은 아까워서 눈물을 흘리는 화중강 아저씨를 비롯한 어른들을 뒤로하고 마나 탄을 날려서 지웠다.
식료품들은 진공밀봉 포장이 되어있어서 이형종 들을 끌어당길 일은 없지만, 저 고기들은 다르니까.
그리고 1시간의 행군 끝에 귀환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낙오된 인원이 없는지 체크를 시작했다.
나도 타임리버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니 소피아가 날 보더니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왜 그렇게 소변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이에요?”
“으?!”
그런데 그건 김가민 2팀장이나 유민희 3팀장도 비슷한 표정이다. 어제 내가 싸우는 걸 봐서 저러나?
“달링이 맞지요오?”
“아닌데요. 그러니까 제가 왜 소피아의 달링이냐구요.”
조금 화난 표정으로 소피아의 귀를 잡아당기니 "후에에에!" 하면서 떫은 매실을 먹은 표정이 됐다.
“제, 제 달링이 아니라! 보스! 보스의 달링!! 줄여서 달링이에요!!”
“그런 건 줄이지 말아요!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귀를 놓으면서 소리치니 소피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걸 노렸, 후꺅?!”
번개같이 소피아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더니 이마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수한 너는 왜 얼굴이 상기되는 건데?
김가민 2팀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감탄했다는 표정이었는데 목소리에도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가득 묻어있었다.
“오늘 새벽에 본 모습은 너무 멋있어서 정서하 씨가 아닌 줄 알았어요.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정도였는걸요?”
“남자도 비밀은 몇 가지 가지고 있어야 멋진 법이잖아요? 숨기느라 조금 힘들긴 했어요. 훗훗훗.”
슬쩍 옆머리를 쓸어넘기는 척했더니 …내 말을 들은 유민희는 고개를 돌리고서 "우웩."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해!!
“플랑드르 씨?”
김가민도 내 말은 못 들은 척 내 옆에 서 있던 프랑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부터 계속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거 같더니, 드디어 말을 걸었네.
사실 프랑이 너무 내 곁에만 붙어있으려는 게 조금 안쓰러웠다. 이제 몸도 생겼으니까 주변 사람들이랑 인맥을 넓혀가도 될 텐데 말이지.
남자 놈이 접근하면 당연히 박살 내버릴 테지만 여자들이랑 어울리면서 같이 놀아도 좋을 텐데.
김가민이 프랑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시작하니 소피아랑 유민희도 프랑에게 다가가 걸즈 토크를 시작했다.
타임리버 소속의 생활 보조 능력자들은 날 보며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거나, 부러워하는 모습이 조금 쑥쓰럽…. 어?
“저, 저기….”
순하게 생긴 속성 타입 생활 보조 아가씨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머뭇머뭇 말을 걸어왔다.
“네?”
“소, 소희 앞에 국화꽃을 놓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서하님 덕분에 소희가 꽃을, 많이 받을 수 있었어요.”
“…소희 씨 친구신가요?”
“네에. 타임리버 들어와서 사귄 친구였어요….”
정소희 생각이 나는지 보조 아가씨는 조금 풀이 죽은 모습이 되었다.
“잠깐이지만 대화도 나눈 분이셨으니까요. 정소희 씨는 착한 분처럼 보였으니까 틀림없이 천국에 가셨을 거에요.”
“흑…. 가, 감사합니다….”
훌쩍거리면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보조 아가씨를 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소피아가 다가오더니 음흉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면서 입을 연다.
“으흥~? 양파 왕자님께서는 하렘을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을 하는 거시여따~?”
“정소희 씨 친구분이시래요. 영정 앞에 국화꽃을 놔드렸는데 그걸 보시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어요.”
“…미, 미안해요.”
내 말에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시무룩한 표정이 된 소피아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뭘요. 벌은 화연이가 내려줄 테니 저는 그냥 넘어갈게요.”
“히익?! 잘못했어요!! 함만 봐주떼영!!”
울상을 지으면서 내 팔에 매달리려는 소피아의 머리를 잡고 막고 있으려니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싸악 사라지면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한다.
“소피아는 우리 서하한테 관심이 있는 거니~?”
영은이는 싸늘한 눈에 입만 살짝 웃는 모습이 소피아에게는 사신 같은 모습인가보다.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린 소피아는 애써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 우리 타임리버의 톱이 되실 분이라, 치, 친목 삼아서…!”
“응. 친목 좋은걸? 나중에 나랑도 친목을 다져보자꾸나!”
“히이이…!”
마지막으로 새하얀 얼굴로 '망했다!' 하는 표정을 지은 소피아를 째려본 영은이는 주변을 돌아보며 정렬을 시켰다.
“복귀를 위한 자리를 잡습니다! 강현우 지부장! 박지웅 화랑 보스! 유화연 타임리버 보스!”
입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중심에는 화연이가 서고 거미줄 모양으로 자리를 잡은 검증단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영은이가 다시 외쳤다.
“만약 불의의 사고로 위상 세계에 남게 된다면, 이곳에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20km 지점에 다른 귀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복귀하세요!”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다른 귀환 지점을 알려준 영은이는 화연이한테 신호를 보내고, 신호를 받은 화연이는 귀환 포인트에 손을 대고 위상력 운용 기술을 사용한다.
“귀환하겠습니다!”
화연이의 손바닥이 닿아있는 빛 덩어리는 점점 커지고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공간이 바뀌기 시작했다.
공간이 바뀌고 현실로 돌아온 직후 공간 지각을 최대한으로 가동해서 만에 하나의 위협에 대비했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눈부심이 사라지고 눈을 뜨니 안전 요원들이 여전히 바리케이트를 치고 일정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게 보인다.
우리가 복귀하니 방송차량에서 기자들이 쏟아져나오고 플래시가 연신 터지기 시작했다. 방송 카메라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게 지금 우리 모습을 전부 찍고 있는 거 같다.
고작 하루하고도 몇 시간 밖에 안 지났지만 어째 직접 싸운 나보다 지부장이 더 피곤해 보인다.
“…정서하 씨.”
“네.”
“그날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연합과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테니 잘 부탁하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지부장은 돌아서서 걸어가고 그 뒤에 화중강 아저씨랑 유채린이 다가오더니 눈을 반짝인다.
“으하하. 참 대단한 소년이로군. 덕분에 몸보신 자~알 했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같이 다녀보고 싶구먼!”
화중강 아저씨는 여전히 호탕한 웃음으로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고는 지부장의 뒤를 따라갔는데, 유채린은 잠시 감정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박물관 때는 고마웠습니다.”
“뭘요.”
유채린은 내게 붙더니 가슴 속에서, 아니 아니 가슴 속이 아니라 가슴 쪽 포켓에서! 손가락 굵기와 길이의 저장장치를 다른 사람이 안 보이게끔 건네주었다.
“…함의 유입 경로와 그에 관련된 자들 정보입니다.”
그리고 내 귀에 살짝 속삭이고 가버렸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저장장치의 감촉에서,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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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슬라임도 초반부를 읽어봤지만 어느순간 분위기가 갑자기 확 달라져버려서 ^^;; 아쉽더군요.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 선작 /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