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복귀, 그리고.... =========================================================================
타임리버 빌딩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데 사람들이 날 보며 수군거리는 게 보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정소희의 추모 장소를 공간 지각으로 보니 수북하게 쌓인 흰 국화가 동그랗게 아치를 그리며 정소희의 영정사진을 둘러싸고 있었다.
많은 사람의 추모를 받고 있는 거 같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몇 번을 더 와야 사람들이 날 보면서 수군거리지 않을까?”
“포기하렴? 이제 네 능력이 알려지면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진 않을 거니까!”
영은이가 살짝 웃으며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9층의 화연이 집무실에 도착해서 소파에 앉으니 무사 귀환했다는 안도감과 이제 시작이라는 긴장감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C 클래스가 될 수 있었는지, 저분은 누구인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지부장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얼른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눈을 빛내면서 날 재촉하지만 내 옆에 좌우에 앉은 화연이나 프랑, 상석에 앉은 영은이를 돌아보다가 화연이를 보며 말했다.
“차소영 부대장이랑 소피아 부대장도 불렀으면 좋겠어.”
“…그래.”
화연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인터폰을 들어 두 부대장을 호출했다. 그 모습에 지부장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데 그 모습을 영은이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호통치듯 말을 꺼냈다.
“그놈의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군! 필요한 상황이 되면 어련히 말하지 않을까, 좀 얌전히 있어라!”
“…네.”
영은이의 호통에 슬쩍 딴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건가? 아니, 그보다 영은이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봐서 신기한 기분이 든다.
“여사님은 지부장님을 잘 아는 거에요?”
“안다기보다, 저 녀석이 지부장이 될 수 있게끔 뒤에서 힘을 써준 게 아줌마란다.”
그 말에 지부장은 한숨을 푹 내쉰다.
“…당시에 나는 그저 능력만 뛰어난 꼬맹이였지. 큰 누님 덕분에 사람을 보는 눈이 커지고 조력을 받아서 한국 지부의 지부장이 됐다. 내게는 은인과도 같은 분이다.”
그런가. 새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내 눈빛을 받은 영은이는 싱긋 웃어주었다.
잠시 잡담을 하다 보니 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피아가 뛰어들어오고 그 뒤를 차소영이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피아는 날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달려들었는데 바로 두 손을 뻗어 내 품에 안길 듯이 달려드는 소피아의 허리를 잡아채서는 지부장의 옆에 앉혔다.
“부우~!”
허릴 잡히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부끄러워하던 소피아는 강제로 소파에 앉혀지니 두 뺨을 뽈록 부풀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해주고 옆에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차소영한테 인사했다.
“차소영 부대장님, 소피아 부대장님, 오랜만이에요.”
“건강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아잉~! 부대장이라고 부르면 시져시져!”
차소영은 부드럽게 인사해오는데 소피아는 팔을 겨드랑이에 붙이더니 바동거리면서 혀짧은 발음을 내뱉는 촐싹거리는 모습이 진짜 비교된다….
그 모습을 본 화연이는 소피아에게 다가가더니 오른손을 뻗어 아이언 클로를 먹이기 시작했다!
“후꺅?!!”
“몸가짐이 단정치 못한 여성에게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피아 부대장.”
“죄죄송해요오오!! 안 그럴게요!!”
화연이 잠시간 소피아를 응징하는 시간이 지나고 빨간 손자국이 난 얼굴을 비비면서 울상을 지은 소피아는 옆에 앉아있는 프랑이 누구인지 궁금한 표정이다.
“우선 모두에게 소개할게요. 1회차 위상 세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저와 함께한 정령, 플랑드르에요,”
내 소개에 프랑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정령이라고?!”
“정령….”
“퍼펙트 우먼은 시하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소피아의 진지한 모습은 있긴 한 걸까 생각이 든다. 내 말이 끝나자 내 옆에 앉아있던 화연이가 나와 프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거지?”
“원래 프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이 보이지 않고 나만 보였었는데, 이번 3회차 때부터는 중하위, 중위 이형종을 계속 잡다 보니 위상력이 프랑의 몸으로 흡수되는 게 보였었어. 그걸 반복하다 보니 모습이 점점 갖춰지게 된 거야.”
하지만 강현우 지부장은 뭔가 가슴이 막힌다는 듯이 답답한 표정을 짓다가 말이 안 된다며 소리쳤다. 그 모습이 어째 프랑에 대해 처음 들은 화연이 반응이랑 비슷하다.
“정령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런 존재가 나타났다는 건 아직 어디에서도 보고된 적이 없다!”
“제가 보여드린 우두머리는요?”
“…!”
“프랑은 번개의 정령이에요. 못 믿겠다면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세요?”
“…그, 새카맣게 탄 건, 그럼 플랑드르 씨의 능력인가?”
“네, 터져나간 부분은 제 능력이지만요.”
“…….”
말문이 막혀버린 지부장을 냅두고 다른 이형종에 관해서도 말하려다가, 의아한 표정이 된 차소영과 소피아에게 내 휴대폰에 찍힌 우두머리의 사진을 꺼내서 건네줬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어쨌든 습격당해서 위상 세계로 피신한 다음 내가 갖춘 능력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했었어요.”
“코, 코끼리우로스…. 풋!”
“…….”
“피식.”
“으흠. 흠.”
“쿡쿡쿡.”
…내 작명이 그렇게 엉망인 걸까.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는 5명을 보고 있으니 얼굴이 붉어진다…! 저 차분하고 침착한 차소영마저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 주위가 떨리고 있어!
“왜!! 뭐!! 켄타우로스는 말 하체니까 그냥 직관적으로 코끼리 뒤에 우로스를 붙인 건데 뭐!”
“너희, 정말 나쁘구나. 첫 발견자가 이름을 붙이는 건 당연한 권리야. 거기다 이름만으로 모습이 연상되는…풋. 큭큭큭.”
“우이씨!!”
영은이는 내 작명 센스에 칭찬을 하려다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면서 웃어버린다.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쨌든 설명을 계속했다.
소굴 입구에서 기다리며 나오던 중위급 코끼리우로스들을 죽이다가 중상위급이 나오는 보고 소굴 입구를 무너트리려 한 점.
소굴을 무너트리려다 오히려 산사태를 일으켜버린 점.
토사로 묻힌 소굴 입구에 수십 마리의 중상위 이형종과 갓 상위 이형종이 된 코끼리우로스들을 멀리서 마나 포를 날려서 통째로 날린 점.
갈 길을 가려 하다가 우연히 산을 되돌아봤을 때, 흙먼지가 피워 오르는 모습을 발견하고 되돌아가니 우두머리가 나타나 있었고, 다시 마나 포 두 발로 데미지를 주고 프랑과 함께 우두머리를 잡았다는 것까지.
소굴에서 나 있던 구멍을 따라가다가 용암 속의 위상력 330만의 고위 이형종으로 판단되는 흔적을 발견했다는 건 숨겼다. 이 부분만은 나중에 따로 말해줘야지.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지부장과 차소영, 소피아는 할 말을 잃고 나만 보고 있었고 화연이와 영은이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군. 그런 능력을 숨기고 있다가 이제 밝힌 건, 네 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겠지?”
“네. 제압 같은 건 특성상 못하겠지만 제 몸을 지키기 위해 공격한다면 B 클래스라 해도 절 이길 수 없어요.”
내 말을 들은 지부장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입을 연다.
“B 클래스를 너무 얕보지 않는 게 좋아. 다들 자신의 비기 하나쯤은 가진 존재들이니까.”
“지부장님이 보시기에 저는 어떤가요?”
“…….”
그 비기, 나도 있다! 라는 듯이 노골적으로 물어보니 지부장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 지금까지 우리 서하 군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너도 돌아가서 할 말이 있겠지? 내가 모아둔 자료와 몇 가지 내 사견을 첨부해서 써놓은 게 있어. 이걸 네게 메일로 보내줄테니 돌아가서 연합 내부에서 발표하도록 해.”
영은이는 인증기를 켜서 뭔가 조작을 한 다음 지부장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자기 집무실도 아니면서 자연스럽게 축객령을 내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당연한 걸로 보이는 게 영은이의 위엄이랄까….
“이대로 발표하면, 무시무시한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공간 지각 능력에 신체 강화에, 공간 지각에서 파생된 속성 탄 같은 능력이라니….”
“그쯤은 이미 대비하고 있으니 넌 네 위치에서 네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물론 우리 서하를 가로채려 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고.”
나한테 수작 부리다간 능력자 연합 본부가 꼭대기 층에서부터 차례차례 사라지는걸 구경할 거다.
화연이의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날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은 지부장은 한숨을 푹 쉬더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지부장은 위상력이 1,285만인데 어째서 랭킹에 등록 안되어있는 거야?”
지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화연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능력자 연합 소속 고위 능력자들은 기본적으로 랭킹에서 제외되어있다. 그리고….”
화연이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맞은편에 늘어진 자세로 편히 앉아있는 소피아나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차소영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서하의 안전을 위해 능력을 감추려다 보니 언니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흐~응?”
“…….”
화연이의 사과를 받은 두 사람은 그냥 빤히 화연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고개 숙인 화연이를 보던 소피아는 내게 시선을 돌리면서 입을 연다.
“아 뭐 그런 거에요! 여자들의 우정이란 사랑 앞에서는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거죠! 흥흥! 우리 달링은 할 말 없어요?”
“화연이가 비밀로 했다는 부분에서 화 안 났다는 거요?”
내 말에 차소영은 살짝 웃음을 지었고 소피아는 날 보며 다시 부루퉁한 표정으로 만들고 말했다.
“아이참,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요! 달링은 정말 눈치도 없군요!”
“왜 화연이가 사과하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면서…. 그리고 절 계속 그렇게 부르다간 화연이한테 또 아이언 클로에 당할지도 몰라요?”
정말 소피아의 장난기는 못 말리겠다. 화연이는 여전히 고개를 못 들고 있어서 얼굴을 보니 잘 익어서 콕 찌르면 빨간 물이 묻어나올 거 같다.
소피아는 그냥 흥흥거리면서 화연이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발딱 일어서서 프랑의 옆자리에 옮겨 앉으면서 연신 감탄을 터트린다.
“실버블론드라니…! 화아아,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에델베르그 양.”
“앗?!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물론이에요. 당신과 서하가 처음 만난 날에는 저도 옆에 있었는걸요?”
프랑과 소피아가 대화를 나누는 걸 바라보다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연이의 손을 잡았다. 잠시 몸을 꿈틀한 화연이는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붉어진 얼굴로 날 바라보는데 눈에는 민망함과 부끄럼이 한가득이었다.
그 부끄럼을 조금 해소해줄 요량으로 지부장이 있을 때 말하지 않은 부분을 꺼냈다.
“코끼리우로스 우두머리를 잡은 건 D 클래스였을 때야.”
“…뭐?”
내 말을 들은 4명의 아가씨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내 능력 덕분에 죽인 이형종에게서 위상력을 흡수할 수 있는 경우에는, 모든 TP를 흡수할 수 있어. 그래서 2마리의 상위 이형종을 죽이고 모든 TP를 흡수해서 C 클래스에 올라선 거야. 아니라면 12일 만에 C 클래스가 될 순 없었겠지?”
“그 말은, 우두머리 코끼리우로스의 위상력이 20만이 넘었다는 이야기구나. 맞니?”
“응 맞아, 요. 우두머리는 26만, 갓 상위 이형종이 된 2인자는 2만5천이었어요.”
하, 하마터면 말 놓을 뻔했다. 하지만 소피아와 차소영은 내가 위상력을 모두 흡수한다는 말에 놀라서 말을 놓을 뻔했다는 사실도 눈치 못 챈 거 같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정서하 씨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믿을 수밖에 없군요.”
“이, 이럴 수가…. 세상의 중심은 제가 아니었던 거에요…! 큭! 이렇게 되면 달링을 쓰러트리고 제가 세상의 중심이 되겠, 캭!”
영은이는 좌탁 위에 비치되어있는 사탕 한 알을 집어 들더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 소피아의 이마에 사탕을 날려서 맞췄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홱 젖혀진 소피아는 이마를 부여잡고 어지럽다는 듯이 헤롱거리다가 소파에 늘어져버렀다.
사탕을 맞은 자리가 빨갛게 부어오른 소피아의 이마를 보다가 영은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래 흡수율은 20%인 게 맞아요?”
“20%가 맞단다. 10명이 들어가서 이형종 한 마리를 잡는다면 10명이 공평하게 갈라먹는건 아니구, 전열이 3% 정도, 가장 후열이 1% 정도를 흡수하게 돼. 요즘 새로 떠오르는 논문 중에는 거리 문제가 아니라 위상력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사람이 그 흡수 정도가 많다는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어, 그거 맞아요.”
“…그게 맞다는 거니?”
차소영과 소피아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못 하지만,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내 마나 시브로 위상력을 소용돌이치듯이 돌리면 주변 위상력이 죄다 끌려들어 오니까. 활발하게 움직이는 위상력에 이끌린다는 그 가설이 확실한 거겠지.
“하아아. 모든 위상력을 흡수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걸? 살짝 계획을 수정해야겠어.”
영은이는 눈빛이 살짝 빛났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데 드물게도 차소영이 얼굴이 붉어진 흥분한 모습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보스와 정서하 씨, 소피아와 보조만 붙는다면 고위 이형종도 잡을 수 있겠군요. 그렇게만 된다면, 국내 1위는 물론이고 세계 랭킹 10위권 안에도 드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차소영. 너는 당장의 시류를 읽는 것은 나름 잘하는데 조금 더 미래를 보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살짝 흥분해있는 차소영은 영은이의 핀잔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영은이를 돌아본다. 그 모습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하는 표정이다.
“아까 들은 우리 서하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렴.”
“…?”
차소영은 영은이의 팁 아닌 팁에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영은이가 하고 싶은 말은 딱히 고위 이형종 사냥이 아니더라도 내 존재 덕분에 세계 순위권에 들게 될 거라는 이야기일 거다.
화연이는 이제 조금 진정했는지 날 돌아보며 말한다.
“서하. 복수에 대한 것은 잠시 가슴에 묻어둬라.”
“…왜?”
의외의 말에 살짝 얼굴을 굳히면서 말하니 화연이는 물론이고 프랑과 영은이도 살짝 긴장하면서 날 본다.
이제 힘이 있잖아. 영은이랑 화연이가 뒤에서 도와주면 날 습격한 배후 놈들을 결딴내버리는데 충분 할 건데?
“물론 네 힘과 여사님과 내가 뒤에서 받쳐주면 심증이 가는 것들을 부숴버리는데 충분할 거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심증 뿐이라는 거다.”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는 화연이를 두고 영은이가 말을 받았다.
“명분이라는 건 많은 사람이 볼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중요한 무기가 된단다.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저놈이 날 공격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가만안둘꺼야!" 하면서 공격하면, 그 순간은 기분이 풀릴진 모르지만, 상대방의 여론몰이로 피해자였던 우리 서하가 가해자로 변해버리게 돼.”
영은이는 한숨을 쉬더니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가져와서 살짝 입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일본은 여론몰이에 유능한 데다 저자세 대처로 서방 국가들에 동정표를 사는 데 성공했단다. …애초에 제 놈들이 저지른 일을 가지고 동정표를 얻어내다니, 다른 나라 수뇌부는 머저리들뿐인가…! 아무튼 그러다 보니 되려 가해자인 그놈들이 피해자가 되는 일이 발생할 거야. 그리고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을 전 세계적으로 퍼트려버리면, 우리 서하만 나쁜 놈이 되는 거예요.”
순간 돼지 새끼랑 멸치 아줌마의 일이 생각난다. 아빠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치밀하고 완벽하게 상대방을 파멸시켜버릴 계략을 만들어내셨지.
상대를 아작내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아빠한테서 배웠다.
“그러니까 물증이 확실히 드러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때까진 우리와 함께 레이드를 다니자. 레이드를 다니면서 네가 B 클래스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무력으로 조지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하지만 두 연인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 줄 거야.
그게 아니면 B 클래스가 되는 순간 배후에 있던 개자식들을 박살 내버리면서 데몬 스트레이션을 한번 펼쳐주면 되겠지.
“응.”
내가 화연이랑 영은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자 그녀들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그럼, 밖에 기자들이 잔뜩 서 있는 거 같은데, 서하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뭐,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하나?”
…난 장난삼아 말을 꺼낸 건데 영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이도 손에 쥔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한다.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게 좋겠지. 그렇지 않으면 널 귀찮게 쫒아다닐테니까.”
그런가…. 그때 생각이 끝난건지 차소영이 영은이를 돌아보며 입을 연다.
“…그러니까, 각하께서는 정서하 씨의 존재만으로 이미 세계 레이드 팀 랭킹 10위 안에 들었다고 생각하시는겁니까?”
“그래. 넌 우리 서하와 플랑드르 두 명이 상위 이형종 토벌이 가능해졌다는 점에 대해 어떤 효과가 일어날지를 좀 더 생각해보는 게 좋겠구나.”
영은이의 말에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하는 차소영을 두고 영은이는 자리에 일어서며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우리의 호프 hope께서 프린스 prince가 되어 귀환하셨으니 그에 맞춰 나도 준비해야 할 게 많은걸? 아줌만 먼저 돌아가 볼 테니 우리 서하도 당분간 푹 쉬도록 해?”
화사하게 웃던 영은이는 나에게 다가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갔다. 차소영이나 소피아가 없었다면 좀 더 진한 입맞춤을 해줬을 텐데.
화연이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걱정이 많으시다. 일단 먼저 씻고 집으로 가지.”
“응.”
프랑은 기절한 소피아를 흔들어서 깨우고 차소영은 영은이가 한 말을 과제로 삼은듯한 모습이었다. 차소영은 아직 헤롱거리는 소피아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나는 화연이와 함께 20층으로 올라가 더러워진 교복이랑 속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씻던 도중에 화연이나 프랑이 들어와 주지 않으려나 살짝 기대했지만 두 사람은 내가 입을 옷을 챙기더니 샤워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랑은 다른 사람들 앞이라서 숨겼던 이야기를 화연이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역시 서하의 위상 세계는 평범하지 않군요.-
-네, 인어도 그렇고 코끼리우로스 산 지하의 유적 공동이라거나, 용암과 일체화해있는 고위 이형종이라던가….-
-그래도 프랑의 영혼석이 서하의 위상력을 받아들이면서 프랑까지 공간 지각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거기에 벼락의 위력까지 범상치 않으니 서하의 안전이 계속 확보되는군요.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저와 서하는 둘 다 원거리 전투에 특화되어있어요. 어서 화연도 합류해서 선두에 서줘야 안심이 되요.-
-오히려 서하와 프랑의 전투에 제가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럴 리가요. 저도, 서하도 컨트롤과 적중률은 매우 높아요. 목표로 한 곳을 빗맞춘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선두에서 화연의 강인하고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이형종이 접근하지 못하게 저지만 해줘도 충분해요.-
-그렇군요. 서하는 회복 능력도 있으니, 저도 보다 몸을 단련해야겠습니다.-
-저도 좀 더 강해질 수 없을까 고민을 해야겠어요. 이대로면 저희는 서하의 발목만 잡게 될 테니까요.-
-영은도 불러서 같이 고민해보도록 하지요.-
-네.-
…나는 그녀들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그녀들은 그걸로는 부족한가 보다.
그나저나 내가 위상 세계에 들어가 있던 동안 화연이는 영은을 결국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건가. 호칭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네. 아까처럼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여사라고 부르고.
씻고 알몸으로 걸어 나오니 프랑과 화연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 심볼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 화연이는 날 위해 준비해놨다던 속옷과 옷을 건네줬다.
흰 티와 흰색과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흰 벨트와 검은 면바지를 입으니 몸에 딱 맞다.
“이건 어쩌지?”
손에 위상석 조끼를 들고 화연이를 바라보니 내게서 조끼를 받아가며 말했다.
“위상석을 빼고 다시 재가공하면 이보다 얇게 만들 수 있다. 좀 더 입고 다니기 편하도록 고쳐놓지.”
“응. 솔직히 3cm는 조금 두꺼웠어. 위상석은 따로 챙겨서 나한테 줘.”
“…80개의 위상석이면 25조가 생기는 건가. 그 돈이면….”
뭔가 머리를 막 굴리는 거 같은데 회사 일이겠지?
화연이와 프랑을 좌우에 대동한 채 타임리버 빌딩을 나오니 20m 밖에서 40명이 넘는 기자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플래시 세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뒤에서는 카메라맨들이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가져온 발판 위에 올라서서 이쪽을 촬영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날 보면서 질문을 던지는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말을 내뱉으니 그냥 소음공해만 된다.
마이크에 찍힌 보도국 마크를 보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뉴스 방송국들도 보이는 걸 보면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특파원들인가보다.
타임리버의 경비원들이 그들을 막아서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는 있지만 저대로 두면 바리케이트가 무너지면서 혼란이 일어날 거다.
역시 아까 영은이 말대로 지금 몇 가지 질문을 받아두는 게 좋으려나?
============================ 작품 후기 ============================
글 잘쓰시는 분들 보면 완전 부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