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6 3회차 위상 세계. =========================================================================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슴 산 중턱까지 차올랐던 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산 아래 골짜기를 가득 채운 물을 제외하면 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번 달 17일에 귀환하고, 오늘이 5월 15일이니까 한 달 만에 물이 다 사라진 건가?
귀환했던 장소에 돌아온 나는,
“씨…발.”
떨리는 손으로, 거칠어진 호흡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교복 앞섬이 그 누나의 피와 뇌수의 파편으로 얼룩져있었다.
흙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보다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서하….-
프랑이 내 머리를 안아 가슴에 품어주지만, 눈앞에서 머리가 터져나가던 경호원 누나의 모습이, 경직된 몸이 내 품에 안겨지던 그 감촉이 머리를 찌르고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다.
100m까지 접근했던 능력자들이다. 남은 4명의 형과 누나들도 모두 죽었을 거다.
나…때문에.
“아니, 나 때문이 아니야. 날 노리고 암살자들을 보낸 개자식들 때문이야.”
-맞아요.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지만, 영은이라면 틀림없이 그 배경에 누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으드득.
…프랑의 말을 들으면서 이빨을 갈았다. 두고 보자. 절대로 가만 안 두겠어.
-입장하기 직전에 들린 말은 러시아어였어요.-
“…그 자식들은 동양인이었는데? 얼굴에 복면을 쓰고 몸을 다 가리고 있었지만, 복면 아래 얼굴이 문둥이처럼 화상에 잔뜩 녹아내린 얼굴이었지만 일곱 남녀 전부 몸의 피부색은 황인종의 그거였어. 그러니 동양권 국가중 하나가 범인이 아닐까?”
-으음.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단정하면 안될지도 몰라요. 영국에서도 한국이나 일본계 2세가 많으니까요. 무엇보다 능력자가 되면서 외모와 피부색이 조금씩 달라지니 능력자들의 외모만으로는 국가를 지정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거기다 얼굴을 일부러 불로 지진듯한 모습이었으니까…. 마지막에 러시아어로 외친 건, 그냥 혼란을 주기 위한 거였겠다.”
프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영은이가 배후를 캐내는 게 중요 하단 거네. …그나저나 화연이가 준 위상석 조끼가 아니었으면 허리뼈에 금이 갔을지도 몰랐겠는걸.”
나는 터져서 피가 흐르는 뒤통수와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를 힐링 터치로 회복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끼를 입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응. 마나 모드를 켰다 껐다 하면서 다니고 있었는데, 이제 무조건 마나 모드를 켜놓고 있어야겠어. 마나모드가 1.5km 밖에서 날아온 저격도 막을 정도로 몸을 튼튼하게 해줄 줄 몰랐어.”
프랑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에 섰다.
어느새 캄캄하게 어두워진 주변을 살펴보니 가슴 산이 의외로 높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반경 1.5km로 늘어난 공간 지각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산꼭대기로 되돌아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보이는 건 어둠에 잠겨가는 수해였다.
“…바람 너구리 고기가 육포가 돼버렸네.”
나중에 구워 먹으려고 피를 빼둘 요량으로 나뭇가지로 삼발이를 만들어 그 위에 걸어놨었는데…. 나무막대기를 하나 들어서 콕콕 찔러보니 딱딱하게 굳어버려 꿈쩍도 안 한다.
살짝 냄새를 맡아보니 별 냄새도 안 나지만 먹었다간 큰일 날 거 같은 색이니 그냥 공중으로 집어 던져서 마나 탄을 날려 소멸시켜버렸다.
바람 너구리 가죽은 뽀송뽀송하게 잘 말라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이후로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거 같다.
그 옆에 얌전히 놓여있던 노 헤드 맨티스의 앞발로 만든 발톱 검을 들고 나무를 잔뜩 해와서 모닥불을 다시 피워놓고 바람 너구리의 모피에 드러누웠다.
교복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가만히 내버려뒀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잔뜩 수놓아진 별을 올려다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 가장 강렬한 생각은….
“프랑.”
-네?-
위상 세계로 들어오자마자 알몸으로 돌아가 버린 프랑은 내 옆에서 팔베개를 하며 같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좀 오래 버틸까 봐.”
-…네?-
“C 클래스가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내 말에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프랑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다.
-C 클래스가 되기 위해서는 상위 이형종을 잡아야 해요. 하지만 화연도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레이드를 시도한 게 상위 이형종이잖아요….-
위험하니까 하지 말란 말은 안 하는구나. 프랑도 강해질 필요성을 느낀 거겠지.
“중상위 이형종인 소울 리퍼만 봐서는, 중상위급까지는 나 혼자서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내 곁에는 프랑이 있잖아? 속성 능력자들에게서도 희귀한 번개를 다루는 프랑이.”
내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힌 프랑은 말없이 가만히 날 내려다본다.
“프랑이 벼락을 쓴다면 크게 도움이 될 거야. 나도 영혼석에 TP를 충전시키면서 최대한 도와줄게. …도와줄 거지?”
-물론이에요. 후후후. 화연이랑 영은이 절 많이 시샘하겠는걸요?-
“어?”
-그동안 제가 서하를 독차지하는 거잖아요?-
살짝 야릇한 미소를 짓는 프랑을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돌아가면 두 사람도 말을 못할 만큼 쎄게 안아주면 돼.”
-킥킥.-
품에 안겨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프랑을 보며 결심했다.
귀환 포인트를 찾더라도 당분간 나가지 않겠다고.
다음 날 발톱 검을 챙겨 들고 가슴 산 인근을 돌아다니며 능력 테스트를 위해 이형종을 찾아봤는데 이형종은 물론이고 동물마저 한 마리도 없었다.
거기다 산 위에서 보던 거랑 다르게 땅은 살짝 질척한 게 물이 마른지 얼마 안 된 거 같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뭘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매겨봤다.
이번에는 교복도 입고 있고, 새로 산 고급 식용 벨트도 있으니까 먹을 거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수분 나무들도 많으니 물의 확보도 어렵지 않고 날 쫓아오는 최고위 이형종도 없다. 물에서 헤엄칠 일도 없고, 늦게 나간다고 해서 문제가…. 조금 있으려나.
가족이 걱정할게 마음에 걸리지만, 화연이가 잘 다독여줄 거야. 그리고 화연이랑 영은이는 둘 다 마음이 강하니까 괜찮겠지. 무엇보다 내 능력에 대해 자세히 아니까 크게 걱정하진 않을 거야.
…영은이가 뒷일을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는 2회차처럼 급하게 나갈 필요도 없겠지.
날 습격한 놈들이 우리 가족을 건드리진 않을까 했는데, 그 점은 화연이와 영은이를 믿기로 했다. 능력자 연합도 있고.
마지막으로 마나 포를 시험해보기로 하고 가슴산 정상에서 화중강 아저씨의 연염옥을 흉내 낸 마나 포砲를 산 아래쪽 물이 가득 차오른, 크레바스 같은 절벽에 발사했다.
…그리고 프랑 말대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꾸구구궁. 쿠르르르르.
투명한, 주먹만 한 TP 덩어리가 무시무시하게 회전하면서 절벽에 닿는 순간 번쩍하더니 절벽 한쪽이 크게 패이고, 무너져내렸다.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들이 물속으로 잠겨 들면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모습에 꼴깍하고 침을 삼켰더니 프랑도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그때 공간 조작으로 삭제하지 않았다면, 도시 한 쪽에 지름 1km의 크레이터가 생겨날 뻔했는걸.”
-하늘로 쏘아냈더라면 아마, 다음날 서하의 능력이 모두 들통났을지도 몰랐겠어요….-
흉흉한 필살기까지 확인한 나는 상위 이형종도 잡을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뭣보다 위급할 땐 공간 조작도 있으니까.
…공간 조작의 위력은 다른 이형종을 찾으면 테스트해봐야겠다.
동쪽으로 가면 이무기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프랑의 도움을 받아 귀환 포인트를 찾아 표시해나가며 서쪽으로 나아갔다.
내심 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이야 위에 들어가면 소화가 아니라 분해가 되어버리는 수분 나뭇잎이 있으니까 걱정 없고 식사도 일단은 식용 벨트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발밑을 살짝 적시는 물만으로도 어째 기분이 안정되지 않는 느낌이다.
정말 아빠 말대로 PTSD 초기 증상이 맞나보다.
사실대로 프랑한테 이야기해주면서 안아달라고 했더니, 프랑의 왕가슴 사이에 내 목을 끼우고 계속 내 등에 매달려있기 시작했다.
-조, 좋죠?-
“응 좋아!”
목에 느껴지는 프랑의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과 심심할 때마다 프랑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니 기분이 안정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PTSD 따위 어찌 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 시브를 돌려 조금 빠른 걸음으로 3일간 우거진 숲 속을 걸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이형종 들이 한 두 마리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게다. 가랏, 프랑! 100만 볼트!”
-에잇!!-
빠지지지직!
프랑은 내 말을 듣고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휙 날아가더니 두 손에 전기를 집중해 게처럼 생긴 하위 이형종을 노릇하게 구워버렸다.
그리고 뒤쫓아온 날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100만 볼트는 뭔가요?-
“어, 옛날에 주머니 괴물이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거기 나오는 금색? 노란색? 아무튼, 굉장히 귀여운 동물이 쓰는 기술 이름이야.”
-귀여운, 동물인가요? 그럼 저는 서하의 펫이네요. 후훗.-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껴안는 프랑의 모습에 문득 엉덩이 구멍에 꼬리 모양 액세서리를 끼우고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최곤데?
아무튼 잘 마른 땅 위에 길이 70cm 정도의 노릇하게 구워진 게를 들고 와서 등딱지를 벗기고 게살을 파먹으며 프랑에게 물었다.
“몸은 어때? 달라진 점이 느껴져?”
어째서인지 이형종이 죽을 때 프랑의 영체가 가까이 있으면 위상력이 프랑의 영체로 모인다는 걸 눈치챈 건 그저께였다.
내가 마나 탄을 날려 소멸시킨 자리에 위상력이 뭉클거리면서 퍼져 나왔는데 그 근처에 있던 프랑의 영체로 위상력이 흡수되는 걸 발견했거든.
2회차 가슴 산에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영체로 위상력을 흡수하기 시작하는 모습에 좀 당황했었다.
-으음. 조금씩 전기의 위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 뒤로 프랑이 직접 수십 마리의 하위와 중하위 이형종을 죽이고 위상력을 전부 흡수하게 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나 비전을 끄고 프랑의 몸을 봐도, 회백색이 아니라 조금씩 색감이 살아나기 시작한다는거다.
“아무튼 이대로 계속 가면, 프랑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에 보이게 되는 건 확실한 거 같아. 그러니까, 여기서 최대한 버티면서 내 위상력을 쌓고 프랑도 위상력을 되는대로 모아보자.”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프랑은 하위와 중하위를 가리지 않고 위상력을 모두 흡수한다는 거다. 여기서 2가지 가설을 잡을 수 있는데, 하나는 프랑의 영체는 최하급…. 이형종일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프랑은 특수한 존재라서 위상력 그 자체를 흡수한다는 거.
-네. 하지만 서하의 마나 시브로 흡수하는 위상력은 기본적인 흡수 조건을 따르는 게 아쉽네요.-
“응.”
프랑 말대로 3일 전에 처음 중하위 이형종을 만나는 순간 잽싸게 마나 탄으로 죽인 다음 공기 중으로 퍼져나온 위상력을 마나 시브로 흡수하려 했지만, 위상력들은 내 쪽으로 끌려와서는 내 피부 위만 흐르다가 도로 퍼져나가 버렸었지.
만약 죄다 흡수할 수 있다면 C 클래스가 아니라 B 클래스까지 오를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크게 기대는 안해서 실망까지 하지는 않았다.
결론은 하위나 중하위 이형종의 위상력은 내 피부만 맴돌 뿐, 몸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역시 내가 C 클래스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나와 동급인 상위 이형종을 잡는 수 뿐인 거 같다.
어쨌든 안된다는 걸 확인하고 그 부분은 신경을 껐다.
고소하고 감칠맛이 한가득 나는 게살을 모두 다 파먹고 잔해는 마나 탄으로 처리했다. 어째 마나 탄을 공격용이 아니라 청소용으로 더 쓰는 듯한 기분이….
어쨌든 주변을 공간 지각으로 감지해 물을 찾아 물을 마시고 손을 씻었다.
“프랑, 이리와.”
마르고 평평한 곳에 앉아 프랑을 부르니 그녀는 얌전히 다가와서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프랑의 허리를 잡고 손에서 TP 뽑아내 프랑의 몸 안으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흐…읏. 하앙….-
그리고 이게 프랑의 영체에 위상력, TP를 쌓는 다른 방법이다. 전에도 말했던, 프랑의 몸에 직접 TP를 주입하는 거.
이렇게 주입한 TP 역시 영혼석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이형종에게서 퍼져나온 위상력처럼 프랑의 영체에 축적이 되는 게 공간 지각으로 보였다.
TP가 가득 차면 절반인 17,500을 프랑의 영체에 주입하고, 50분이 지나서 가득 차면 또 주입하고. 그러길 3일 동안 반복하다 보니 프랑의 영체에 색감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마나 비전을 껐는데도 회백색의 머리카락에 금빛이 물들기 시작하고 회색의 피부와 진한 회색의 눈동자도 흰색과 벽옥 색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3일 동안 주입한 TP만 100만이 넘어간다. 앞으로 얼만큼 더 주입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위상 세계에 있는 동안 계속 TP를 주입할 생각을 하고 있다.
…C 클래스에 오르는데 너무 오래 걸리면 출석 일수 모자라서 유급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에이, 영은이가 손 써주겠지. 권력자 애인을 두고 있으니까 나도 이번 기회에 권력 맛 좀 보자.
아무튼, 영체에 축적되는 TP가 많아질수록 전기… 번개? 으음, 좀 헷갈리는데 이름을 통일해야 하려나. 벼락으로 해야겠다.
아무튼, 벼락이 점점 강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영체에 응축된 TP는 내 공간 지각과 마나 시브로도 파악이 안된다는 거다.
혹시나 TP가 응축될수록 프랑의 몸이 파랗게 빛나는 건 아닐까 했는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얼핏 보면 사람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이는 프랑이니까, 접촉이 가능할 수준이 된다면 평범한 육안으로는 프랑이 정령인지 사람인지 구분을 못 하겠지.
-하윽! 서, 서하앙! 그, 만!-
아차. 실없는 생각 하다가 너무 주입해버렸네.
영혼석에 직접 TP를 주입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몸에 TP를 주입하니까 프랑도 꽤나 흥분해버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발그레해진 나신으로 나한테 기대서 할딱이는 모습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중천이다. …살짝 한숨을 쉬고는 얌전히 프랑을 껴안고 있으려니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진정됐어?”
내 말에 프랑은 살짝 몸을 꼼지락거리더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지만…. 여긴 위상 세계다. 이런 모습에 매번 발정나서 프랑을 괴롭히면 안돼.
나도 참을성을 길러야지. 그리고 만나는 여자들마다 몸을 스캔하는짓도 이제 관두기로 했다.
모르는 여자들 알몸을 엿보는걸 서서히 줄이면서 자제하고는 있었는데, 확실한 계기가 된건 누날 엿보던 놈의 가족을 작살내던때였다.
생각해보니 남자의 로망 어쩌구 하면서 귀환 한 직후에 진짜 발정난 개처럼 만나는 여자들마다 알몸을 훔쳐봤으니까…. 내가 그자식 욕을 할게 아니더라고.
뭐, 참을 수 있었던 이유도 나만 바라봐주는 연인들이 있기때문이었지만….
암튼 매일밤마다 조금 가혹하다싶을만큼 영혼석에 TP를 충전시키면서도 위상 세계 안이라는 이유로 안아주질 않았더니 점점 프랑의 정욕이 쌓이는게 좀 곤란하긴 하다….
지금도 날 뜨거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고.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내 말에 움찔해버린 프랑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날 보다가 내 입술을 살짝 훔쳤다.
-아니에요. 이정도는 하나도 안힘들어요!-
말과는 반대로 눈에서 열기가 흘러내리는 걸 보니 음탕 프랑 스위치가 켜진 거 같아 걱정되기 시작했다.
“응? 저거…. 연기지?”
안정을 찾은 프랑과 서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푸른 하늘에 한 줄기 하얀 줄이 구불구불 솟아오르는 희미한 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얼핏 보면 구름 같지만, 세로로 피어오르는 구름이 있을 리 없지?
-그러네요. 제가 올라가서 보고 올게요.-
그러면서 몸을 띄워 나무 위로 날아올라 간 프랑은 1분도 안 돼서 다시 내려와 남남서 방향을 가르키며 활화산이 하나 있다고 알려줬다.
“활화산?”
-네. 그곳도 기억에 남아있어요. 거기에는 켄타우로스처럼 하반신이 말 대신 코끼리고 상체는 인간인, 굉장히 거대한 이형종이 살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그 산이 화산이었을 줄은…. 어쩌면 휴화산이었다가 얼마 전에 분화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프랑의 말을 듣고 마나 모드 - 가속을 발동시켜 발을 굴러 주변에서 가장 큰 수분 나무를 타고 30m가량을 파바밧하고 올라갔더니 새삼 2달 전이랑 달라진 모습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나무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말대로 남남서 쪽에 연기를 풀풀 피워올리는 산이 보였다.
근데 오늘처럼 구름도 없고 맑은 날에 저렇게 흐릿한 산의 모습이라면 굉장히 멀다는 건데…
“그 이형종 들은 어떤 놈들이야?”
-허리를 기준으로 위로는 사람과 똑같아요. 그 아래는 코끼리의 목 아래쪽과 똑같은 모습이구요.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속성 능력도 사용할 줄 아는 개체가 있는, 부족단위 이형종이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중위와 중상위 이형종 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하지만 기억이 잘 안 나는 거 같다.
켄타우로스 코끼리 버전이라니, 인증기로 가끔 살펴보던 이형종 도감에도 없던 놈이다.
“으음. 이형종 도감에서도 못 본 놈인데.”
다시 산 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산꼭대기 움푹 팬 곳에서 연기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1/3 정도 아래까지 눈이 쌓여있는 모습을 봐서는…. 산 높이도 꽤 높은 거 같다.
으으음
“끄응…. 만년설은 보통 해발 3천 미터부터 쌓인다고 했던가? 그걸 보면 저 산은 높이가 4500m 정도라는 거지?”
-으음. 이형종일 때만 가봐서 높이는 잘 모르겠어요….-
만년설이 덮이지 않은 곳은…. 물론 덮인 곳도 나무 같은 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군데군데 황갈색이 보이는 걸 보면 벌목도 한다는 이야기인가? 벌목하면 집을 짓거나, 불을 쓴다는 말도 되니….
후음.
“응. 켄타우로스의 코끼리 버전이니까 그냥 코끼리우로스라고 하자. 그 녀석들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어?”
나는 나무 꼭대기에서 적당히 내려와 나뭇가지에 걸터앉으면서 프랑을 보며 물었다.
-킥킥. 코끼리우로스라니, 이상한 이름, 앗!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 작명 센스를 비웃는듯한 모습에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리면서 간지럽히려 하니까 황급히 정정한다.
-코, 코끼리우, 풋. 로스는 10m 정도일 때의 저랑 비슷한 크기를 자랑했었어요. 주로 둘 셋씩 뭉쳐 다녔었고 둘은 신체 강화. 하나는 속성인 3인 1조로 다니는 거 같았어요. 그 당시에 개체 수는 300 정도 됐던 거 같은데 어느 순간 빠르게 도망가버려서 절반 정도 밖에 못 잡았답니다.-
“주기적으로 잡으러 가진 않았고?”
-당연히 본능은 분노하면서 습격도 해보고 기습도 해봤지만, 언제부터인가 제가 나타나면 몇몇 강한 녀석들이 절 막아서는 사이 다 도망가버려서 잡지는 못했어요. 포효를 울려도 잠시 멈칫하고 흐느적거리긴 했지만 금방 도망가버렸구요.-
“그 말은 최소 중하위급 이상이란 말이네.”
-네. 그리고 속성 타입 대부분이 불의 속성 탄을 쏘아냈고, 가끔 바람이나 대지를 쏘아내는 개체가 있었지만 물을 쏘아내는 개체는 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무기로는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이나 둔기를 많이 쓰고, 강한 녀석일수록 돌도끼나 금속 무기를 쓰는 걸 확인했었지요.-
“좋아. 그쪽으로 한번 가보자. 위험하면 도망가는 걸로 하고.”
내 말에 프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솔직히 마나 포를 쏘면 상위 이형종도 막을 수 있을 거 같진 않아요. 제가 벼락으로 굳혀놓는 사이에 마나 포를 맞추면 잡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네요.-
“응. 안돼서 도망간다고 해도 뒤에서 프랑이 벼락을 마구 떨어트리면 못 쫓아올 거야.”
나머지는 근처에 다가가서 확인해보는 걸로 하고, 그럼 남남서 쪽으로 향해볼까.
그날 밤은 지름이 7m가 넘어가는 거대한 나무를 발견해서 중간까지 기어올라 마나 탄 최소 출력을 쏴냈더니 나무 기둥에 지름 2m의 동그란 방이 생겨났다.
…솔직히 충격파 때문에 나무가 반으로 톡 하고 부러지진 않을까 했는데 충격파에 좀 크게 흔들리긴 했지만, 워낙 두꺼워서 그런지 부러지지는 않았다.
“좋아. 오늘 밤은 편히 쉬겠는걸?”
마나 모드 - 가속을 발동해서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 넘…는 묘기 같은 건 못하고 발발거리면서 나뭇잎이 잔뜩 달린 나뭇가지를 잘라와 구멍 바닥에 잔뜩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누우니 꽤 아늑해서 단순 버티기라면 여기서 오래 지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기가 시작될 때 뿔 송곳이랑 발톱 창을 들고 몇 시간 동안 나무 기둥을 파냈었는데 손짓 몇 번에 이렇게 아늑한 구멍이 생기다니, 새삼 능력이란 거 중요하구나 싶어.”
-후후.-
프랑은 누워있는 내게 다가와 무릎베개를 해주며 싱긋 웃었다.
“내일부터는 빠르게 달려서 코끼리우로스가 있는….”
-푸훗!-
…….
말을 멈추고 가만히 프랑을 올려다보니 프랑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다.
번개같이 두 손에 마나 시브를 집중해서 프랑의 허리를 낚아채고 밀어 넘어트리며 말했다.
“프~랑~?”
-읏, 네네?-
“아까도 비웃었지?”
-아, 아니에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으며 프랑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 품 안에서 꼬물거리던 프랑은 애써 당황을 숨기고 평범을 가장하며 날 올려다본다.
“진짜?”
-진짜!-
“…좋아. 옛날부터 내려오던 시험 방식에 따라, 내 시험을 통과하면 믿어줄게.”
-읏, 좋아요. 무슨 시험인가요?-
이 아가씨가 끝까지 발뺌하네! 좋아! 그럼 진짜 시험을 해주지!
솔직히, 프랑이 계속 발정나있는것도 곤란하고 그 모습을 보면 나도 욕망을 참기 힘드니까. 한번에 강한 욕망을 참는건 괜찮은데, 짧고 길게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욕망은 진짜 견디기 힘들어.
그러니까 여기처럼 안전한 장소가 생겼으니 프랑의 정욕을 해소시켜줘야겠다.
“간단한 거야. 내 TP를 프랑의 보, 지로 받아들여서 흥분 안 하면 사실, 흥분하면 거짓인 간단한 시험.”
-네, 넷?!-
“옛날 중세시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방식인데 몰라? 물에 가라앉으면 사람, 떠오르면 마녀 이런 거.”
-그, 그건 마녀사냥이잖아요!!-
“난 멍청해서 그런 거 몰라. 자 그럼 시작한다?”
-아, 아앙! 잠시만요! 서하아아앙!!-
프랑의 애처로운 신음이 흘려 퍼지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어른의 밤이 지나간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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