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비오는 날. =========================================================================
“이제, 여사님은 내가 나서기 전까진 어제 있었던 일을 화연이한테 말을 꺼내진 않을 거라 생각해.”
-잘하셨어요. 만약 그녀가 화연에게 먼저 접근해서 말을 꺼낸다면 최악을 염두에 뒀어야 했을 거에요.-
침대에 누워 프랑의 자상한 표정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프랑도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원해 고고한 늑대에서 사육당하는 강아지가 되었으니, 앞으로 서하에게 위협이 될만한 일은 못 하겠지요.-
“…으응.”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프랑을 올려다보니까 어쩌면, 혹시 정말로 어쩌면…. 프랑은 여사님이나 우리 누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까닭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을 먹고 거실에 앉아 창밖으로 회색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누나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
머릴 쓰다듬으면서 누날 올려다보니 샐쭉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딱콩 하고 꿀밤을 먹였다.
“왜에?”
“됐고! 잠깐 기다려봐.”
누난 내 옆에 쪼그려 앉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주먹 크기만 한 달걀 형태의 검은 물건을 들어 올렸다.
그건 내 펜던트 알처럼 달걀 중앙에 가로로 홈이 파여 있고 그곳에서 파란빛이 몇 초 간격으로 깜빡이는 게 보였다. 내부를 살펴보니 복잡한 기계장치가 되어있고 중심부에 100 TP 정도 되는 중하위급 위상석이 장착되어있었다.
홈을 중심으로 오른손은 홈의 윗부분을 잡고 왼손은 아랫부분을 잡아서 돌렸는데 끼리릭 하더니 홈에서 파란빛이 계속 흘러나오는 게 보인다.
흘러나오는 건 TP다. 거기다 묘한 느낌도 같이 들고 있고.
“이건 도청 방지 장치야. 여기서 나오는 신호가 도청기나 감청기를 무효로 하는 거야.”
헤에? 그, 첩보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나오는 그런 건가? 되게 작고 귀엽게 생긴 기곈데?
“사용하는데 위상석을 쓰는 거라 되게 비싼 거니까 빠르게 말할 테니 집중해서 들어!”
그리고 누나는 수 목 금 3일 동안 알아봤다며 수련장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남쪽으로 9km 정도 내려가면 옛 군부대 터가 남아있다고 했다. 그곳은 물방울 사태가 일어난 뒤로 유독 이형종이 자주 나타나면서 난동을 피운 덕분에 기존에 존재하던 군은 위치를 옮기고 그 뒤로 인근에 사는 사람도 이형종의 출몰 때마다 난리가 나니 다들 이사가버리고 해서 인구가 줄어들어 점점 인적이 끊기기 시작했단다.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접근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나라에서도 서울 인근에 위성도시에 투자와 확장을 시작하면서 버려지게 됐다던가.
“옛 성남시가 있던 곳인데 인구도 줄고 사람들도 빠져나가니까 성남시청도 이전해서 지금은 슬럼화가 진행되고 있대.”
“서울에서 충청도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인데 거길 내버려둔다고? 군부대가 주둔했을 정도면 중요한 지역이란 말 아냐?”
“중요 지역인데 이유 없이 이형종 들이 잊을 만 하면 출몰해서 난동을 피우잖아.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능력자 연합이랑 정부에서 직접 나서보기도 했다는데, 능력자들만 가면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가도 능력자들이 철수하면 "옳지!" 하면서 나타나니까 어쩔 방법이 없었다구 해.”
능력자 연합이랑 정부가 나서서 조사했는데도 알 수 없었다고?
“그러니까 이형종이 등장하면 당장 달려가서 잡을 수는 있지만, 도시를 재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능력자들한테 팔거나 임대해서 민심과 안전을 확보하려 했는데 일부러 그 먼 곳까지 가려는 사람도 없구, 굳이 인적이 드물고 치안도 안 좋은 곳까지 와서 하려는 사람도 없구 땅값도 싼 편이 아니니까 버려져 버렸대.”
“언제부터 그랬는데?”
“이제 40년 가까이 되어간대. 그동안 이형종 발생이 열 건이 넘었어. 열 건 모두 중하위급 이형종이구, 모두 단독 개체로 출몰. 종류는 닭 이형종이 2번, 개 이형종이 4번 고양이 이형종이 3번 멧돼지 이형종이 한 번이야. 신체 강화 타입으로 짐작되는 게 7번이구 3번은 속성 타입이었어.”
“와아. 그걸 누나는 3일 만에 알아온 거야? 진짜 대단하다.”
요 며칠 누나가 자리를 종종 비우더니 저걸 알아보려 했었나 보다.
“에헴. 아무튼, 중하위 이형종 정도면 서하 너라면 이형종이 나타나더라도 잡을 수 있지?”
“응. 마나 탄 한 번이면 잡을 수 있어.”
내 칭찬에 누나는 가슴을 쭉 펴며 으쓱으쓱 하는데 참…. 도드라지는 부분이 없어서 동생으로서 진짜 안타깝다. 저 가슴만 어찌 해주면 진짜 신의 작품이 될 수 있을텐데.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그쪽으로 알아봐 줄까?”
“40억으로 땅도 사고 위성에서도 못 보게 할 수 있어?”
“시세를 알아봤었는데 네 계약금으로 전부 사는 건 무리야. 어차피 1.5km 정도 해서 니가 연습할 공간만 확보하면 안 돼?”
잠시 누나 말을 듣고 생각해봤는데, 나중에 내가 능력을 밝히고 나면 주변 땅값이 확 오르지 않을까?
“…쪼그만 게 벌써 땅 투기에 눈을 돌리구….”
앗, 그게 땅 투기가 되는구나.
“하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어. 성인이 되고 B 클래스에 올라서 능력이 공개되면 네가 사는 곳 근처는 정말 지각변동 수준의 땅값의 변동이 일어날 테니까. 무엇보다 네 능력의 기밀성을 생각하면 그 근방을 전부 매입하는 게 맞지만, 자금이 없잖아?”
순간 화연이나 여사님이 생각났지만 바로 생각을 돌렸다. 특히 화연이한테는 천억짜리 조끼도…. 아, 위상석 충전.
으으으으음.
“누나, 위상석 거래는 어떻게 이루어져? 그냥 수십만짜리 위상석 갖고 가서 팔래요 하면 돈으로 주는 거야?”
“말이 되니? 고위 이형종 위상석 몇 개 풀렸다간 세계 금융 무너지겠다.”
“그, 그런 거야? 그럼 거래는 어떻게 되는 건데?”
“현물거래. 위상석의 일정 비율을 현금과 귀금속, 희귀 금속류를 거래해. 위상석 거래 시장에 대해 전부 알려주려면 4시간짜리 집중강의 코스가 되는데…. 가르쳐줄까?”
“아니.”
무슨 위상석 거래에 4시간짜리 강의가 필요한 만큼 복잡한 거지?
“간단하게 말하면, 위상석의 1/3은 현금으로 즉시 받아. 그리고 2/3은 귀금속이나 어음, 혹은 좀 더 작은 위상석으로 거래하게 돼.”
“… 현금이랑 귀금속 어음은 이해했어. 하지만 위상석은 가만히 두면 점점 줄어들잖아? 그걸 현물 거래한다고?”
가치보존이 되지 않는 현물거래라니, 말이 안 되잖아?
“특수한 물질을 바르면 위상력의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봉인 조치가 있어.”
아하, 그런 거군. 그렇게 사용할 때만 봉인 장치를 푸는 건가?
“그러니까 일정 크기 이상은 개인이 거래하기 힘들단거네?”
누나는 조금 의심스럽단 눈으로 날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무시하면서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지만…. 돈을 따로 모을 방법이 없네.
끙끙거리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누나가 피식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 땅을 전부 사려면, 방법이 하나는 있어.”
“그런 건 빨리 말하라고!”
“요게, 어디서 큰소리야? 안 알려준다?”
“부디 누님의 지혜를 우둔한 동생에게 알려주십쇼.”
흥. 한 걸음 전진을 위한 두 걸음 후퇴다!
“킥킥. 간단하게 타임리버에서 대출받으면 돼.”
…진짜 간단하네. 근데 대출이 되나? 뭐, 누나가 잘 알아서 해주겠지. 나는 방에서 통장이랑 도장을 가져와 누나한테 건네주면서 부탁했다. 그리고 달걀형 도청 감지장치의 위상력을 봤더…니, 그새 10이나 줄었어!
“헉. 무슨 TP 소비량이 이래? 30분 정도 지났는데 TP가 10%가 줄었어!”
“으음…. 진짜네? 어휴, 무슨 능력이 기계같니? 아무튼 능력 이야긴 그만! 기계 끈다?”
“응.”
누난 혀를 내두르더니 달걀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 사러 누나가 직접 다니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슬럼가라며! 어디 젊은 처자가 함부로 다니려고 그래!”
조심성 없게! 가족들 속 뒤집어지는 거 보려고 그러냐? 내 말에 누나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짓더니 곧 실실 웃으면서 내 뺨을 토닥거렸다.
“누나 걱정해준 거야? 기쁘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실제 땅 보고 다니는 건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어쩐지 누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 같아서 표정을 굳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런 거면 다행이고. 누나가 다치거나 하면 한두 명 죽는걸로 안 끝나. 기억해둬.”
진심 어린 내 말에 누나는 흠칫하더니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알았어, 알았어. 조심할게.”
하지만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으려니 누나는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진짜 몸조심해야겠네? 험한 곳 다닐 땐 경호원도 데리고 다닐게.”
…누나의 저런 모습을 보니까 왠지 믿음이 안 간다. 휴대폰에 위치 추적장치를 달자고 아빠한테 말해봐야겠다.
누나는 옷을 갈아입고 타임리버에 간다고 엄마랑 아빠한테 말하더니 나한테도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나가버렸다.
-후후. 서하는 시하 님을 과보호하시려는 거 같아요.-
“능력이 있으니 이제 지켜줘야지. 어느 정신 나간 늑대가 달려들지 모르잖아?”
-그래도, 화연이 서하의 가족분들을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아 참. 그랬지.”
그새 깜빡했네. 그러자 프랑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서재로 향하는 내 뒤를 따라왔다.
서재로 들어가서 책을 보면서 논문을 쓰고 있는 아빠한테 누나의 휴대전화에 위치 추적장치 다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아빠 왈,
“이미 달아놨다.”
…역시 아빠야.
그렇게 주말에는 별다른 일 없이 담달에 있을 시험에 대비해 목요일 학교에서 가져온 태블릿으로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처럼 그냥 객관식과 주관식 비율이 7:3면 좋을 텐데, 우리 학교는 대부분 주관식에 서술형이고 객관식은 거의 없어 참…. 그지같다.
이런 시험 방식을 고집한 여사님이 새삼 떠오르는데, 그때 엉덩이를 좀 때려줄 걸 그랬나?
…대신 젖무덤을 때려줬긴 하네.
교과서를 외우다가 지치면 프랑이랑 장난치면서 쉬다가 다시 교과서를 외우니 일요일 점심을 먹을 때쯤에는 모든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할 수 있었다.
“에휴. 다 외우긴 했는데 쓸데가 없을 거 같아. 이런 지식을 어디에 쓰는 걸까?”
마지막으로 다 외운 전통 윤리 교과서를 종료시키며 한숨을 쉬었다.
-사, 사회 나가면 다 쓸데가 있을 거예요.-
“없을 거라 생각해.”
-아하하.-
“생각해봐. 윤리는 말 그대로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게 주된 내용이잖아.”
-후후.-
“웃지만 말고!”
-꺄악?!-
아우. 홀랑 벗은 프랑 위에 올라타서 막 간지럽히니까, 거시기가 미쳐 날뛰려고 하네. 프랑도 그걸 눈치챘는지 얼굴이 발그래해져버렸지만 그녀의 입술만 살짝 훔쳐주고 일어났다.
“아무튼, 밥 먹고 헬스장이나 가봐야겠어.”
-운동하시려구요?-
일어나서 돌아앉으니 프랑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풀면서 내 등에 매달리며 물었다. 3cm 두께의 조끼 너머로도 살짝 압박감이 느껴지는 가슴이라니…!
“응. 일주일 동안 놀고먹었다고 조금 살찌려는 거 같아서 땀 좀 뺄려구.”
젖혀져 있는 커튼 너머로 회색 구름에 뒤덮인 하늘에서 빗방울이 계속 떨어져 내리는 게 보여서 조금 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택시 타고 가면 상관없겠지?
누나는 수련장 때문인지 아침 먹구 또 나가버렸었다. 비 오는데 그냥 쉬다가 비 그치면 다니지….
엄마가 차려준 점심을 맛있게 먹고서 병원 헬스장에 갈 건데 엄마도 갈 거냐고 물어봤더니 갈까 말까 굉장히 고민하는 거 같았다.
“엄마는 비가 와서 그냥 쉬어야겠구나.”
결국, 안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아빠는 이제 학술회의가 얼마 안 남았는지 논문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냥 혼자 가야지.
예전에 산 워커처럼 생긴 레인 부츠를 신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왔더니 프랑은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빗속을 둥둥 떠서 뒤를 따라왔다.
“…빗속에 소복 같은 긴 원피스라니, 처녀 물귀신 같아.”
-?!-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 프랑을 보고 킥킥거리면서 아파트 단지 앞에 대기 중인 택시에 걸어가니 프랑도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쫓아왔다.
그러면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아파트 상점가에 있는 옷가게를 유심히 보다가 몸을 바꾸기 시작했다.
하늘색 프릴 원피스에 검은색 스타킹, 내가 신고 있는 레인부츠와 똑같은 걸 만들더니 이번엔 어떠냐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휴. 복장이랑 표정 덕분에 덮치고 싶을 만큼 귀여운데…. 빗방울에 흠뻑 젖은 회색빛 세상에서 혼자 반짝반짝 빛나는 프랑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주변을 돌아보니 비 때문인지 다니는 사람도 없고 이쪽을 보는 사람도 없다.
프랑의 허리를 잡아당기고 우산을 조금 내려서 얼굴을 가린 다음 콩닥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프랑의 입술을 진하게 훔쳐버렸다.
병원 탈의실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으로 들어갔더니, 저번이랑은 상황이 반대가 되어있었다.
-여자분이 많네요….-
실제로 운동 중인 남자는 6명뿐인데, 여자가 14명이다. 남자들은 운동하러 온 게 맞는 거 같은데 운동하면서도 쫄쫄이 트레이닝 복을 입은 여자들을 훔쳐보는 걸 보니 눈도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여자들은 운동하러 온 게 아니군.
게다가 내가 도착하자마자 안보는 척하면서 날 힐끔거리면서 보고, 내가 지나가자 노골적으로 내 뒷모습을 살펴보는 여자들의 눈빛이 공간 지각으로 보인다.
저 눈빛은…. 맞아, 그날 봤던 여사님의 눈빛과 비슷한 눈동자가…. 순간 오한이 들어서 그냥 되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파란빛을 뿌리는 내 눈을 봐도 안 놀라고 오히려 더 강렬한 눈빛을 보내오는데 몸에 찰싹 달라붙는 타이트하고 노출이 높은 운동복들이라 눈을 둘 곳이 없어 난감하다.
사실 노골적인 알몸보다, 이렇게 은근히 가리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 더 야하다는 걸 깨달아 버렸는데, 여자들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 복이 딱 그 꼴이다!
몸에 찰싹 휘감겨있는 트레이닝 복은 몸매 교정 효과까지 보여주는 모습이라, 의식적으로 여자들의 몸을 무시하면서 비어있는 러닝 머신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문이 진짜였어!” “능력자야!” “꺄아~! 부모님은 병원 원장에 총무부장이시고 본인은 감지 능력자라니~.” “파란 눈 좀 봐.”
“애인 있을까?” “아유, 풋풋한게 한입에 잡아먹어도 비린내도 안 날 거 같아!” “꺅! 변태! 호호호!”
귓가에 들려오는 소곤거림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프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날 보는 여자들을 살짝 노려보고 있었다.
…자, 잡아먹는다는 건 그쪽 이야기겠지?
러닝머신에서 최대 속도로 맞춰서 달리기 시작하니까 여자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내 엉덩이를 뚫어질 듯 노려보기 시작한다!
-…이제 여자가 무서워질 거 같아.-
-…….-
프랑은 더욱 날카로워진 눈으로 헬스장에 있는 여자들의 얼굴을 다 기억해버리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한 명 한 명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요란스럽게 짖는 개가 안 무섭다는 말처럼 날 보며 음담패설을 내뱉는 여자들이나 내 몸을 스캔하는 거처럼 보는 여자들은 그저 수군거리고 잡아먹을 듯 한 눈빛만 보낼 뿐 접근하지 않고 있는 게 다행이다.
그, 근데 진짜 음담패설의 수위가 장난이 아니다. 자주 가던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간혹 19금 게시물이 올라왔다가 삭제되기 전의 글을 보면 그냥 누구누구랑 놀았다느니 밤에 콜걸? 그런 여자를 불러서 정기가 빨렸다느니 그런 글에 댓글로 낄낄거리면서 몸 보시 했다거나 남자가 조루라거나 하는 정도였는데….
그런 남자들 이야기는 애기들 소꿉놀이 수준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무진장 노골적이고 야릇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던 프랑은 화나다 못해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일반인들인데 폭발해서 벼락을 날리진 않겠지?
“그만들 하세요.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어? 홈짐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운동하던 여자가 일어서더니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여자들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하는 게 들렸다.
무척이나 맑고 청아한 목소리라 공간 지각이 절로 그 여성을 살펴버렸다.
“무, 뭐에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은 둘째치고 저 아이는 아직 미성년자인데,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런 음담패설을 내뱉는 게 창피하지 않냐고 물었어요.”
20대 중반의 단정한 외모에 어깨까지 내려올 거 같은 머리카락을 포니 테일로 묶은 여성은 노출이 거의 없는 긴 팔의 운동복 상의와 러닝 팬츠를 입고 있었다. 유일하게 드러난 허벅지에 근육이 도드라져 보이는 게 몸 단련이 취미인 여성으로 보였다.
“별꼴이야 정말!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이 병원에서 근무 중인 박효은이에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한 말을 병원장님의 부인께서 듣는다면 형사고발까지 들어갈 수위라는 걸 알아서 하는 말이에요.”
담담하게 땀을 닦으며 입을 여는 여성의 입에서 형사 고발이라는 말이 나오자 음담패설을 내뱉던 무리의 안색이 일제히 꺼멓게 죽어간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환자로 입원하셨나요? 못 본 얼굴들인 걸 보면 직원분들은 아니신 거 같은데, 어떻게 여기에 오셨죠?”
그러고 보니 저 여자들은 어디 아프거나 다친 곳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헬스장을 쓰고 있는 거지?
“흥! 진짜 별꼴이야. 당신! 그렇게 살지 말아요!”
“재수 없어서 정말.”
“반반하게 생기면 다야?”
…박효은의 말에 음란녀들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해대며 홈짐에 있던 박효은의 어깨를 부딪치거나 밀치면서 우르르 나가버렸다.
7명의 여자들이 우르르 나가버리니까 헬스장에 어느 정도 공간이 생기고 빈 운동 기구들도 많이 나와서 남자들이 자릴 옮기며 운동을 시작했다. 남은 여성들도 날 훔쳐보는 걸 그만두고 운동에 신경을 돌리는 게 보인다.
“역시 효은 씨야. 장난 아닌데?”
그중에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탄탄한 근육을 가진 남자가 박효은이라는 여자를 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같은 여자 망신을 다 시키는 사람들이었어요.”
한명 두명 박효은을 보며 말을 거는데 박효은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여전히 달리고 있는 날 한번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총무부장님이 헬스장을 폐쇄할까 고민 중이시잖아요…. 이런 일이 총무부장님 귀에 들어갔다간 바로 결정 내려버리실 텐데, 그럼 제 밥줄 끊겨요.”
“푸하하하.” “호호호호.”
아, 저 누나가 헬스장 시설 관리인인가? 나는 연달아 한숨을 폭폭 내쉬는 박효은을 보며 말했다.
“엄마한테는 헬스장 문 안 닫게 잘 말해놓을게요. 저도 곤란했었는데 쫓아내 줘서 고마워요. 누나.”
“…!”
내 말에 직원들이라고 생각되는 남은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본다.
“아…. 네. 고맙습니다.”
프랑은 박효은 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러닝 머신의 계기판 위에 살짝 내려앉았는데 하늘색 프릴 원피스를 입은 예쁜 모습을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쫓아내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 누나가 나서줘서 다행이야.-
-네에.-
-중간에 돌아가자고 하려 했지?-
-…그 여자들은 정말 같은 여자로서 창피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서 꽁알거리는데 이런 모습도 처음 보니까 무척이나 신선하고 귀여워 보였다.
쭉 달리기만 1시간쯤 하고 있으려니 서서히 위상력이 저절로 몸 안을 순환하면서 몸속에 생기는 피로물질을 제거하면서 몸에 활력을 북돋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마치…. 성행위를 하는 느낌이랑 비슷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 발기는 되지 않는데, 이건 무슨 효과지?
아무튼 굉장히 하이high한 기분이라서 머릿속으로 마나 시브와 위상력의 효과를 정리하고 수련장이 생기면 앞으로 연습해볼 항목의 우선순위를 매기면서 끊임없이 달리고 있으려니 누나가 타고 있는 차가 병원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여자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불벼락이 떨어졌겠네.
뒤늦게 헬스장에 헐렁한 운동복을 입은 누나가 도착하니 남자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헬스장을 나가버리고 여자들도 하나둘씩 나가더니 나와 누나, 박효은 셋만 남았다.
“효은 언니, 오랜만이에요.”
“네, 아가씨. 여전히 몸매가 좋으시네요.”
“후후, 다 언니 덕분이에요.”
어라, 아는 사이였나? 누난 박효은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꽤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잠시 누나의 운동 자세를 교정해준 박효은도 나랑 누나한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에고 누나도 박효은한테 손을 흔들어주고 내 옆으로 와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운동하고 있었어?”
“이제 1시간 좀 넘었어. 일은 다 끝난 거야?”
“응. 서류 준비는 끝났으니까 나머진 휴일 끝나고 관공서 문 여는 평일에 처리해야 해. 그러니까 넌 이제 수천억 원의 빚쟁이야. 돈 열심히 벌어야겠네? 호호.”
“켁?!”
수천억이라는 말에 기겁하면서 누날 돌아봤더니 악동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120만 평에 가까운 대지야. 그걸 전부 사는데 드는 돈이 얼마라고 생각한 거니?”
“나 1월에 계약금 5천억 들어온댔잖아? 그거 빼고도 수천억 빚이 생긴 거야?”
“아, 그걸 빼면 빚은 없지.”
“…놀랬잖아!”
“그래도 땅값이 폭락 수준으로 떨어져서 다행이었어. 그게 아니었다면 진짜 계약금을 포함하더라도 수천억의 빚이 생겼을 거야. 평범한 임야였다면 여기저기 구역이 나뉘어서 사람들한테 사들이고, 누군가 큰 손이 땅을 사들인다고 소문이 나서 땅값이 더 오르고 했겠지만, 다행히 시에서 전부 소유 중이라 오늘 책임자를 만나서 정식 계약을 맺을 수 있었어.”
“뭐 뒷돈 요구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
“얘는? 그런 짓 했다가 아주머니한테 걸리면 당장 옷 벗고 3대까지 관직 진출 금지야. 그래도 고급 음식점에서 한 끼 식사는 샀지만.”
“수작 안 부려서 다행이네.”
“네가 감지 수련용으로 산다고 하니까 책임자랑 시장분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오히려 편의를 봐주시려구 하던데? 네 유명세는 좀 비정상적으로 퍼지는 거 같아.”
으음. 누나도 나랑 여사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니까, 저 눈치 귀신 능력도 발휘를 못하나 보다.
슬쩍 공간 지각으로 주변을 싹 훑고, 누나의 러닝머신 속도를 줄이면서 내 입을 가리켰다.
-이건 비밀인데, 여사님이 뒤에서 날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시기로 했어. 아마 내 이야기 관련 뉴스도 여사님이 영향력을 발휘한걸지도 몰라.-
-뭐어?! 언제? 어디서?!-
내 입술 모양을 읽은 누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러닝머신 속도를 줄여서 걷기 시작했다.
-저번 금요일, 박물관 사건을 마무리 짓고 여사님이 나 찾아오셨어. 그래서 점심 먹고 이야기를 나눈 거야.-
-그랬구나…. 네 이름이 나오니까 성남시장님도 그렇고 관리 책임자분의 태도가 확 바뀌길래 무슨 일이 있구나 했거든. 손을 쓴 건가, 시장님에게 영향을 줄 정도면 아주머닌 걸까 했는데…. 역시 아주머니가 뒤에서 손을 쓰신 거였구나.-
…이런 눈치 귀신이라니, 진짜….
-아무튼 화연이 앞에서 그 이야기 꺼내지 마. 화연이한테는 내가 직접 말할 거야.-
-왜?-
-화연이는 여사님을 라이벌로 여기잖아. 내가 도움받는다는 말을 꺼내면 기분 상할까봐 그래.-
-그 정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걸?-
-알고 있지만 내가 직접 말하는 거랑 누날 통해서 듣는 거랑은 다르잖아?-
-알았어.-
자…. 그럼 수요일 화연이가 돌아오면 그날이 결전이군.
누나랑 이야기를 나누며 4시까지 달렸더니 몸이 굉장히 상쾌해졌다. 프랑의 말로는 근섬유에 활력이 들어가서 활성화된 효과라고 했는데 집에서 푹 쉬고 다시 운동을 반복하면 점점 근육이 붙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낮잠도 좀 자고 컴퓨터를 켜서 오랜만에 레전드 오브 리그도 하고 트롤들이랑 키보드 배틀도 하면서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수요일까진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겠다.
============================ 작품 후기 ============================
첫 글이라서 강약 조절이랑 그런게 좀 미흡하긴 했네요^^;; 다른 작가님들 글을 보니 시작부분에 경고글 같은것도 쓰시던데 미리 봤으면 저도 참고했을텐데 말이에요ㅠㅠ
다음부터는 다음화에 거북한 씬이 나온다면 전편 후기에 글을 남기겠습니다. 근데 수위가 어느정도까지가 평범인지를 모르니;;
떠나시는 분들은 조금 가슴이 아프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덧, 저는 한국의 윤리 사상을 존중합니다! 132화를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