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국립 중앙 박물관이 살아있…나? =========================================================================
타임리버 빌딩 앞으로 돌아와서 출입증을 목에 걸고 1층으로 들어갔다. 1층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는데 벽 한쪽의 유리 장식장 안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정소희의 영정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그 앞에는 몇 송이의 국화꽃과 곱게 접힌 쪽지들이 있었고 작고 귀여운 향로에는 세 개의 향이 그녀를 닮은 곱고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절반쯤 피어난 흰 국화꽃을 내려보고, 날 보며 웃고 있는듯한 정소희의 사진을 한번 본 다음 가져온 국화꽃을 조용히 올려놨다.
빌딩에 들어온 뒤로 많은 사람이 날 힐끔거리며 보는 게 공간 지각으로 보였는데 그중에는 유리장 식장을 처음 봤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도 있었다.
처음 봤으면 다음에 올 때 국화꽃이라도 사서 올려놔요.
…그, 발인이라고 하던가? 정식으로 조문이라도 가볼까 생각했는데, 별다른 사이도 아니고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 하나 가지고 장례식장까지 찾아가는 건 아닌 거 같다.
이렇게 흰 국화꽃을 바치는 걸로 끝내자.
정소희는 착해 보였으니까, 천국에 갔겠지?
…그녀의 추모장소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죽으면 말짱 황이다. 살아있어야만 불쾌감도 느끼고 분노할 수도 있는 거니까. 거기다 죽으면, 프랑도 화연이도 더는 볼 수 없다는게 가장 싫다.
지금의 나는 10살 먹은 꼬맹이가 값비싼 보물을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보물을 눈치채거나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들어갔다간 나쁜 어른들에게 당장에 보물을 뺏겨버리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어떤 안 좋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까딱 잘못하다간 고작 E 클래스인 나는 찍소리도 못하게 뭉개질 거다.
그러니까 기다려야지. 그들 같은 어른이, 어른들도 함부로 손을 못 댈 강한 어른이 될 때까지.
일단 타임리버 빌딩에 오긴 했는데, 딱히 용무도 없고…. 어쩐다. 이혜령 부장은 여전히 자기 집무실에서 서류들과 패드에 열심히 적고 사인하는 중인데 올라가면 또 일 방해하는 거 아냐?
프랑은 공중에 떠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슬쩍 프랑 아래로 이동해서 원피스 속을 봤지만, 그 속에는 공허함만이….
-서하?! 무, 뭐하시는 거예요…!-
프랑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다리를 모으고 원피스의 허벅지 부분을 눌러서 가리려 했다.
“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데 부끄러워할게 뭐가있어?”
예상 밖의 광경에 조금 뚱한 표정으로 조용하게 말했는데 프랑은 내 입술을 읽었는지 '진짜?'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원피스를 슬쩍 들어 다리 사이를 봤다!
말 그대로 프랑의 원피스 아래 다리 사이에는 남자들의 판타지, 환상의 삼각지도 없이 그냥 뿌연 안개 비스무리한게 가득 차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어마…?-
매끈한 허벅지나 피부, 새하얀 팬티도 뭐도 없는 공간이지만 어째선지 저 모습이 내 상상력을 자극해서 노팬티 원피스를 입은 프랑이 떠올랐다!
프랑의 고간에서 정신을 돌려야 해!
어째 프랑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게 보였지만 외면하고, 일단 화연이가 망테크 타버린 강우혁 차장이랑 최수한 대신 날 보살핀다고 했으니까,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줘야 하긴 하겠는데 어떡한다.
우선 오늘 있었던 일을 이혜령 부장에게 알려주고 일자산으로 가던지 집에 가서 놀든지 해야겠다. 이혜령 부장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내가 모르는 걸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바빠 보이지만 내가 바쁜 게 아니니 난 몰라~.
가득 찬 일반 업무용 엘리베이터 앞을 잠시 보다가 텅 빈 능력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호출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대해서 말한다는 걸 자꾸 깜빡하네.
이번에는 헤비메탈 코스튬의 그 남자도 안보이…는 데 어떤 남자가 뜨거운 눈빛으로 내 쪽을 보고 있길래 시선을 돌리니 윤성혁이라고 했던 남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저 인간은 울 누나한테 관심을 보이던 인간이었지?
괜히 저 잘생긴 면상에 어울리는 미소를 보니 질투심이…!!
-저분은 시하 님에게 관심을 보이던 분이네요.-
“흥!”
-아, 아하하하!-
고개를 팩하고 돌려버리니 윤성혁은 잠시 당황하고 멋쩍어하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는데 그의 주변 사람들이 '너 뭐 하는 거냐?'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좀 부끄러운가 보다.
내가 왜 아는 척 해줘야 하는데?! 누나한테 흑심을 보이려면 적어도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에 능력자는 돼야지!
…아니! 흑심을 보이면 내가 당장 박살 내버릴 거고! 흑심이 아니라 호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대충 누나한테 어울릴만한 남자의 조건을 생각해봤다.
일단 내가 질투심도 느끼지 않을 만큼 잘생겨야지. 거기다 나보다 능력도 뛰어난 능력자라야 하고 돈도 많고 집안 빵빵하고 성격도 착하고 이해심과 배려심도 높고 누나를 그야말로 여왕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겠지?
당연히 폭력은 절대 안 되고 바람도 안 피고 누나만을 바라보며, 누나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야겠지.
목숨까지도.
음음. 이 정도면 될 거 같다.
-…서하는 시하 님을 시집보낼 생각이 없으신 걸까요…?-
응? 프랑이 내 생각을 읽은건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보는 프랑을 나도 올려다보니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가슴까지 내려오는 사이드 테일의 아가씨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먼저 걸어 나오길래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걸어나오는 아가씨를 살펴보니, 되게 어려보인다.
나보다 좀 더 작은 키에 귀여운 머리 스타일답게 얼굴도 귀여웠는데 머리카락 끝이 조금 붉게 물든 게 보인다. 게다가 위상력 110만의 C 클래스 화염 속성 능력자였다!
아무래도 클래스마다 1줄씩 나이테가 늘어나나 보다. 화중강은 D 클래스 6줄이었지? 이 여자는 7줄의 나이테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화연이를 따라온 4명의 팀장 중 하나라던 그 여자인 걸까?
얼굴은 귀여운 타입인데 몸은…. 그야말로 베이글녀군!
“…!”
여자는 옆으로 살짝 비켜선 내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가슴에 달린 내 출입증을 보는 거 같았다.
으응? 갑자기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지? 얼굴은 귀여운데 저런 사나운 표정이라니, 안 어울려서 하나도 안 무섭네.
이 여자는 출입증도 목에 안 걸고…. 가슴은 F 컵은 돼 보이는데 검은색 타이트 원피스에 앞섶을 벌린 하얀 셔츠를 입은 모습이라서 일부러 투시 안 해도 타이트한 원피스가 가슴을 가득 끌어올려 주고 몸의 라인을 노골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차림이다.
흐뭇한 가슴이나 방긋 웃음이 나올 거 같은 골반을 보니 참 눈이 즐겁다.
내 출입증에서 눈을 뗀 여자는 날 매섭게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서하?”
“그런데요?”
목소리도 얼굴이랑 어울리게 발랄하고 상큼한 게 귀엽다. 그런데 반응은 안 귀엽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날 보는데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용납 못 해…!”
“엥?”
“큭…! 기억해둬! 난 널 용납 못 하니까!!”
어어? 그러더니, 여자는 팔목에 찬 금색 뱅글 형태의 팔찌들이 짤그락 소리가 날 만큼 날 세게 밀쳐버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타이트한 원피스 때문에 살랑거리는 엉덩이 골이나 골반이 움직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그걸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프랑의 화가 난 표정이 공간 지각을 통해 보였다.
-저 무례한 여자는 뭐죠?!-
날 밀치면서 가버린 프랑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어느덧 밖으로 나가버린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화가 나서 얼굴이 살짝 붉어진 프랑의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18층을 눌렀다.
“위상력 110만의 속성 능력자야. 화연이랑 같이 왔다던 4명의 여자 중 한 명이지 않을까?”
-팀장급이면서 서하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감정이 있는 건 둘째 치고 팔을 들어 밀치다니요! 용서할 수 없어요!-
으응? 어쩐지 프랑이 과도하게 화를 내는 거 같다. 아, 혹시….
“프랑은 그 여자 복장이 싫어서 화내는 거야?”
-…!! 아, 아니에요! 무, 물론 보기 싫은 복장이긴 하지만….-
그러면서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본다. 저 여자처럼 전신의 굴곡이 드러나는 복장에 나한테 화내고 밀치기까지 하니까 저리 화가 난 거였구나.
왠지 웃음이 날 거 같다.
“프랑이나 화연이에 비하면 그냥 절구통 같은 몸매야. 가슴도 엉덩이도 프랑에 비하면 축 늘어지고 모양도 나쁘잖아. 관심도 없어. 아까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본 건 왜 저렇게 화내는지 몰라서 그랬던 거야.”
반쯤은 사실이니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네에.-
그제서야 얼굴에서 분노어린 기색이 줄어들더니 내 등에 달라붙어 두 손을 뻗어 목을 살짝 감싸 안았다.
근데 진짜 왜 날 보고 화낸 거지? 근데 공간 지각은 적의가 없다는 듯이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18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분주한 사무실에서 한두 명씩 날 바라보기 시작하더니 이내 죄다 내 쪽을 힐끔거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몇 번을 더 와야 시선이 안 모일까?
찌리리링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일들 하세요!]
귀를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벨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혜령 부장의 호통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금방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자신들이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누님 나이스.
그래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있네. 아무튼, 이헤령 부장을 보니 그녀는 작은 마이크를 들고 있었는데 저걸로 말한 건가 보다.
[김표충 사업지원부장님은 잠시 제 집무실로 와주세요.]
찌리리링
다시 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혜령 부장은 결제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다 내보내는 게 보였다.
발걸음을 옮겨 이혜령 부장의 집무실로 가고 있으니 어딘가 우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후줄근한 양복 차림의 50대 남자가 터벅거리며 집무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가 있던 자리를 보니 직원들이 훤히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김표충 부장이라는 명패가 있었다.
머리도 부스스하고 수염도 생각날 때마다 미는지 여기저기 들쭉날쭉한 게 되게 후줄그레하다. 옷이든 사람이든.
-어서 오세요 김 부장님.-
후줄근한 차림의 김표충 부장…이 먼저 이혜령의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투명한 칸막이 너머로 이혜령과 인사를 나누는 게 보인다.
-김 부장님. 저번에는 자릴 비우셔서 못 만났지만 이번엔 인사시켜드릴 수 있겠네요.-
-저 꼬맙니까?-
꼬마라고오오?
-…정서하 씨 앞에서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보스 앞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저도 목 졸려 죽기는 싫으니까요.-
김표충 부장은 목을 쓱쓱 쓰다듬더니 집무실 한쪽에 비치된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받기 시작했다.
-방금 연합에 있던 친구한테 들었는데, 저 꼬…. 흠, 블루 지니어스가 한 건 했다더군요.-
-블루 지니어스?-
아악! 저, 저 별명!! 안돼!!
나는 이혜령 부장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저 주둥이를 닥치게 해야 해!!
-아?-
갑자기 달려오는 날 발견했는지 이혜령이 놀란 눈으로 날 보는 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이혜령 부장님 김표충 부장님!”
“어,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블루 지니어스.”
그마아안! 내 흑역사를 자극하지 말아줘…!
비칠거리면서 소파에 가서 앉았더니 내 모습에 이혜령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김표충 부장을 번갈아 본다.
“그, 그 별명은 부르지 말아 주세요. 계속 들으니까 못 버티겠어요.”
으으. 내게 정신적인 데미지를 주는 저 별칭을 못 버티겠다는 생각만 가득 든다….
이 별명을 소피아가 들으면 "어마마~? 블루 지니어스?! 오호호호홋!!" 하면서 내 별명을 사방팔방 퍼트리는 모습밖에 안떠올라!
피식 웃은 김표충 부장은 곧 각설탕 일곱 개를 커피잔에 집어넣더니 이혜령 부장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혜령 부장도 쓰게 웃으면서 안쪽으로 자리를 비켜주더니 입을 열었다.
“김 부장님이 방금 말씀하시기로…. 아, 그전에 소개해드릴게요. 여기 계신 분은 타임리버 사업지원부의 김표충 부장님이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표충 부장은 내게 꾸벅 상체를 숙이며 인사했고 나 역시 마주 인사해주며 입을 열었다.
“정서하에요. 부탁이니까 그 별명이 타임리버 안에 돌지 않게 해주세요...!”
“으음.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이미 연합에서 나온 칭호라 세계에 퍼져나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거든요.”
크헉! 세, 세계에…?
“연합에서 칭호를 붙이는 거의 없지만 그만큼 붙인 칭호는 예외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니까 저희가 입을 다물고 있는대도 다른 데서 다 퍼질 겁니다.”
“아직 정식 활동도 시작하지 않은 사람에게 연합에서 칭호를 붙이다니, 이례적이네요.”
“그렇습죠. 저도 듣고 무척이나 놀랬습니다.”
두 부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진심으로 한숨이 나온다!
“끄으으으응….”
프랑은 등 뒤에 둥둥 떠서 킥킥거리고 웃고만 있었다. 두고 보자 프랑.
부루퉁해진 내 얼굴이 재밌는지 이헤령 부장은 작게 킥킥 웃더니 옆에 앉은 김표충 부장을 돌아보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김 부장님의 사업지원부에는 임무보조 사원 700명과 전투보조 사원, 통칭 생활 보조의 130명이 있답니다. 생활 보조에 관해서는 아시나요?”
“어, 능력자들이랑 같이 입장해서 전투 외의 부분을 보조해준다고만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전투는 능력자들에게 맡기고 그 외의 모든 부분을 생활 보조들이 다 처리하죠. 이렇게 말하면 힘들어 보입니다만, 요리와 짐 나르기, 잡은 이형종의 부산물 회수와 돈이 될만한 것들의 채집활동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임무보조들은 말 그대로 현실에서 각종 정보를 수집, 해석하며 탐색 팀이 확보한 자료를 통해 지형에 대한 정보로 존재 가능할 동식물과 곤충 군에 대한 분석 작업을 시행합니다.”
그리고 총무부는 사내 운영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거고?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일이 분담되어있는 걸.
“그리고 방금 김 부장님을 통해 들었는데, 정서하 씨가 한 건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이혜령은 무슨 일인지 매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고 물었다.
“아, 오늘 야외수업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갔었는데요.”
“크으음. 소울 리퍼라니.”
“이건 감지 능력으로 몰래 훔쳐본 거에요.”
침음성을 흘리는 김표충 부장에게 덧붙이며 박물관에서 겪고 본 이야기를 적당히 능력에 대한 부분은 숨기면서 알려줬다.
“중상위 이형종이 출몰하다니, 매스컴에서 난리가 나겠네요.”
“난리 나도 연합이 난리 나지 우리와 상관이 있겠습니까. 크크크, 정서하 씨 덕분에 우리 회사의 이름값이 더 높아지겠군요.”
…크크 거리면서 웃는 김표충 부장을 보니 꽤 음흉해 보인다.
“그래서 화연이가 제 담당관이 될 거란 이야기를 들어서 일단 이혜령 부장님한테 알려주러 온 거에요.”
“아, 그건 각하께서도 공동으로 맡으신다고 들었어요. 보스께서 안 계시니 직접 알려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도 그 생각은 안 해본 게 아닌디…. 이혜령 부장도 다른 사심은 없어 보이니 말해줄까.
“어쩐지 여사님은 상대하기가 좀 그래서요. 가능한 만나고 싶지 않, 으?”
어, 어라? 국회의사당 쪽에서 여사님이 대통령전용차를 타고 나오시는 게 공간 지각으로 보인다. 이 시간에는 청와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청와대에 집무하러 가시는 거겠지?
하는데 이쪽으로 오는 거 같다!
“정서하 씨? 무슨 일인가요?”
아, 말을 하다 말았더니 두 부장이 날 의아하게 바라보는 게 보였다! 이런, 지금 나가면 입구에서 마주치겠지?
그래. 빌딩 안으로 들어오면 계단을 통해 도망가버려야지.
왜 도망가려는 마음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면 안될 거 같다. 특히 일요일에 2회차 위상 세계 결과를 듣고 난 뒤에는 그런 마음이 더 들었다.
“아, 아니에요. 알려드릴 건 다 알려드렸으니까 전 이제 야외 수업에 돌아가던가 해야겠어요.”
야외수업에 돌아가긴, 집에 가서 프랑이랑 뒹굴어야지! 보니까 마블레스 신작 영화가 최고화질 디스크로 나왔다던데 그거나 사서 볼까? 액션 영화라서 프랑도 좋아할 거 같은데.
그런데 역시나, 타임리버 빌딩이 목적인지 일직선으로 쭉 내려오는 게 보인다! 앞뒤로 호위 차량까지 보이는 게 뭔가 심상치 않은데? 아니 그보다, 화연이도 없는데 왜 여기 오는 거지?
“일부러 알려주러 오셔서 고마워요. 정서하 씨.”
“뭘요. 담부턴 문자나 전화로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아무튼 여사님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나중에 제가 알려드리던가 할 테니까요!”
“후후. 그러세요.”
그새 타임리버 빌딩 앞에 도착한 여사님은, 주변에서 여사님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을 막 찍는 시민들에게 미소 지으며 우아하게 손을 흔드시는데, 어우 진짜.
저 모습만 봐서는 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현숙한 모습이다. 게다가 머리 스타일이랑 몸매만 약간 다르지, 쌍둥이같이 똑같이 생기니까 경계심이 막 풀리려고 한다!
일어서서 두 부장이랑 악수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내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두 부장님이 보였지만, 이내 신경을 끄고 비상 계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하? 엘리베이터를 안 타시고….-
“여사님, 화연이네 아줌마가 빌딩에 도착했어! 어쩐지 만나면 안 될 거 같아!”
-아.-
직후 마나 시브 가속까지 돌려 날듯이 뛰어 내려가고 있으니 프랑은 영문을 모른채 날 따라 내려오다가 내 말을 듣고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벽을 뚫고 나가 도로를 살펴보는데, 이미 여사님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좁은 공간에 반향되어 울려 퍼지는 내 발소리와 목소리를 들으며 미친듯이 달려내려가며 공간 지각으로 경호원들이랑 여사님 위치를 감지해보는…데, 하나뿐인 중앙 현관 출입구와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곳에 경호원 형이랑 누나들이 지키고 서 있다!
왜? 어째서?!
게다가 들어오는 차는 안 막는데 나가는 차는 잠시 막아서고 양해를 구하더니 내부를 살펴보는 게 보인다!!
저 모습을 보니까, 어쩐지 날 잡으러 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곧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는 여사님 표정을 살펴보지만 은은한 미소를 짓고만 있으셨고, 옷 안을 살펴봐도 그냥 평범한 옷과 속옷일 뿐, 무기나 뭐 그런건 안 보인다.
경호원 형과 누나들도 다들 평범한…. 아니, 평범한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경호 도구를 소지한 것만 보이고!
마치 내가 도망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처럼 지키고 있는데…. 여사님이 시킨걸까? 시킨거겠지? 시킨게 맞을거야.
10층에서 잠시 멈추며 1층을 지켜보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여사님이랑 5명의 경호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는 게 보인다.
다행히 감지 능력자 경호원은 입구에 있는 한 명뿐인데, 기감 능력자라면, 나에 대해서 알…수 있으려나? 긴가민가하는데. 으음. 분석 능력자라면 시야에 들어와야 하니까 여깄는 날 모를 테고.
곧 18층에서 내리는 걸 보고 확신했다. 여사님은 내가 빌딩에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일단 제쳐두고 다시금 날듯이 내려가며, 7층까지 뛰어 내려가서 타임리버 소속의 능력자 개인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들어갔다.
방은 7개 층에 총 84개가 있었지만, 빈 사무실이 절반 정도고 나머지는 가구는 들어있지만, 사람은 몇 없었다.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도착해서 교복 마이를 벗고 손에 든 다음 출입증도 포켓에 집어넣고 마나 비전까지 껐다.
그리고 앞머리도 뒤로 쓸어넘겨서 반 올백으로 만들고 다음 업무용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기다렸다.
-와아, 서하가 머리를 넘기니까 인상이 전혀 달라졌어요!-
“그래? 좀 볼만해?”
-굉장히 멋져요!-
…아, 그래.
프랑한테 멋있게 보인다니 다행이긴한데 역시나 프랑의 콩깍지는 불치병인 거 같다. 아니, 고쳐지면 안 되지!
곧이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천히 안내 데스크로 가서…. 있다, 김지수 안내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내원 김지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에요, 정서하.”
“네, 정서하니…임?!”
좋아. 날 못알아봤지? 날 몇번 본 안내원 누나도 몰라 볼 정도니까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꺼야!
“잠시 교복 마이 좀 맡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당황한 김지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기에 잽싸게 내 교복마이를 맡기고 입구로 걸어나갔다.
입구에는 5명의 경호원 누나와 형들이 감지 능력자랑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입구에 나가니까 슬쩍 날 바라보더니 시선을 돌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다시 체크한다.
좋았어. 안 들켰다.
이상한 낌새를 못 차리게 천천히 택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여사님의 위치를 찾아봤는…데, 여사님은 어느새 옥상으로 올라가 있으셨다.
게다가, 날 보고…. 있어?
살짝 웃음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사님은 그대로 빌딩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작품 후기 ============================
항상 재미있게 봐주시고 후원, 추천 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