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직무유기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
“나도 연이 누나가 좋아.”
엄마가 화연이 누나를 연이라고 불렀는데, 나도 애칭으로 불러버려야지!
그랬더니 누나가 또 움찔한다.
“여, 연이라니…. 날 말하는…건가?”
“여기 누나 말고 누가 있어?”
내 말에 화연이 누나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는데 홍당무같이 빨개진 얼굴이었다! 저러다 얼굴이 녹아버리는 거 아냐?
누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입술을 옴찔거리다 말을 꺼내는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왜…왜? 나랑 결혼하기 싫다고 했었잖아….”
언젯적 이야기를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누나답지 않은 약한 목소리에 조금 놀라고 설렜다.
아니 다르게 생각해보면 아직도 날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거잖아. 무진장 예뻐진 소꿉친구 누나가 어렸을 때 한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그때 내 감정을 말하라면, 누날 좋아하고 있었고 또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반반이었어. 그날 말 한 것도 홧김에 꺼낸 이야기일 뿐이었지! 진짜 싫었으면 누나랑 말도 안 했을 거야, 안 그래?”
화연이 누나는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움찔하면서 놀래버렸다.
“하지만 머릴 다친 이후에는 누나에 대해 잘 기억하지 않았고 누나도 나랑 이야기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 날 이후로 나랑 전혀 연락도 통화도 안 됐었잖아.”
화연이 누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만 보고만 있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누날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다시 깨달았어. 내 첫사랑은 누나였다고. 다시 만난 뒤로는 누나가 너무 예뻐지고 대단해져서 가까이하기 힘들었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서 누나가 다시 좋아져 버렸는걸? 거기다 누나가 과거 이야기를 해주면서 누나에 대한 내 기억도 모두 돌아왔는데 누날 신경을 안 쓰면 누구한테 신경 쓴다는 거야.”
“으으….”
“글구 계속 날 신경 써주면서 날 좋아해 주고 있었단걸 알아버렸는데, 그런 여자를 싫어할 남자는 없을 거야.”
화연이 누나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상체를 숙여서 나에게서 얼굴을 가렸는데, 기쁘고 가슴이 벅차다는 표정이 공간 감지로 그대로 보인다!
저렇게나 날 좋아해 주고 있었던 건가? 나도 조금 감격해버렸다.
근데 프랑은 내 말에 눈을 반짝 반짝거리면서 "그거에요! 고백하는 거예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진짜 프랑은 바보다. 나한테 목구멍까지 범해져 놓고는 내가 다른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도 저런 모습이라니.
“누나 입으로 다시 말해줘. 날 어떻게 생각해?”
“윽….”
“난 누나가 좋아. 누나는 날 어떻게 생각해?”
홧김에 말해버렸다. 나도 이제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프랑은 꺄아꺄아 거리면서 좋아하고 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누나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상체를 세웠다. 그런데 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얼굴도 새빨갛게 붉어진 채 눈은 계속 감고 있는 게, 정말 눈을 마주치기가 부끄럽다는 표정이라 사늘해 보이는 표정과 어우러져 정말 귀여워 보인다!
“…뿐이야.”
어? 첫 부분이 잘 안 들렸는데.
“어렸을 때, 니가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이후로, 내가 좋아한 사람은 너뿐이야….”
…진짜 놀랐다. 그 말대로면 7살 때부터 지금까지 나만 좋아했다는 거야?
“…사실, 네가 19살이 되면 이번엔 내가 너한테 고백하려고 했었어…. 얼굴이랑 몸매도 예전이랑은 많이 달라졌으니까. 지금이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거 같아서.”
아….
화연이 누나의 고백에 프랑은 차 안이 아니었다면 나와 화연이 누나 주변을 빙빙 날아다녔을 만큼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화연이 누나 일도 그렇고, 프랑의 반응도 이래서 조금 가슴이 아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 애들의 놀림에 그만 홧김에 말해버린 걸 누나는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는 거니까.
…저런 말을 들어버린 이상 이제 되돌릴 수는 없어. 이번에도 거절하게 되면 아마 누나는 결혼 같은 건 포기하고 평생 혼자 살지도 모르겠다.
아니, 화연이 누나가 알몸으로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걸 상상하니까 피가 거꾸로 솟을 거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난 프랑을 좋아하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연이 누나의 옆에 앉아 누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왠지 모르지만 이래야 할 거 같다.
…프랑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하는 건가?
“읏!”
가냘픈 신음을 흘린 누나는 새빨간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뜨거워져서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더니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몸이 뜨거운 게 체온이 39도를 넘어가는 거 같다!
“누나.”
“…응.”
“누난 이제 내꺼야.”
나도 모르겠다. 낚싯바늘을 물어버린 물고기가 있는데 그냥 낚아버려야지.
“몸도 마음도 다 내꺼니까, 내가 누나보다 강해져서 지켜줄게. 나 믿지?”
“흑. 응.”
누나는 살짝 눈물을 흘리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강인하고 사늘한 모습을 보이던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가녀린 모습이다.
…지금보다 키가 30cm 정도만 더 컸으면 좋겠다. 누나를 품에 안아줄 수 있게.
잠시 후에 누나는 물기가 한가득 들어찬 눈을 나와 맞추더니, 나에게 입맞춤을 해왔다.
쪽
누나의 입술은 뜨겁고, 자두 향이 나서 무척이나 달콤했다.
“날 받아줘서 고마워.”
“난 지금까지 날 기다려준 누나가 더 고마운걸?”
누나와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다는 거에 가슴이 설렌다. 이렇게나 나만을 생각해주는 여자가 내 여자 친구가 됐다는 사실에 또 기쁘다.
눈을 감고 나에게 몸을 기대어온 누나의 무게는 앞으로 내가 지켜야 할 삶의 무게라는 생각을 머리에, 몸에 새겼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는 프랑의 일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한참을 자동차 전용 도로를 달려 여의도 타임리버 빌딩에 도착했더니 입구에 이혜령 부장과 처음 보는 남자 30대 남자 2명이 서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내가 내리고 뒤에 화연이 누나가 내렸는데, 이혜령 부장은 물론이고 남자 2명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화연이 누나를 보는 게 보인다.
지금 누나가 좀 사기적으로 예쁘긴 예쁘지?
차 안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내 팔을 품에 안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누나의 모습은 천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은 이런 거였구나.
프랑은 옆에서 흐뭇한 얼굴로 나랑 화연이 누나를 보면서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있는데 이렇게 심란한 기분이라니, 에휴.
그나저나 누나한테 고백하고, 누나한테 고백받아버렸는데 프랑은 어쩌지? 나중에 화연이 누나한테도 프랑에 관해서 다 알려줘야 하나?
지금 누나의 얼굴에는 예전의 냉막한 표정이 사라졌다. 거기다 살짝 상기된 얼굴과 치마를 입은 겉모습에 남자 둘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거 같다.
“아…. 축하드려요 보스!”
으잉? 이혜령 부장은 뜨거운 눈빛으로 화연이 누나랑 날 번갈아 보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화연이 누나한테 달려와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 여자도 눈치 귀신이구나!
“아. 음 고마워요. …준비는 끝났겁니까?”
누나는 머쓱한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는데 금세 예전의 사늘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도 나랑 눈을 마주치니까 살짝 눈웃음을 지어주는데 저런 미녀가 나한테만 웃어준다는 게 살짝 가슴 떨린다.
“네! 총리실의 김학준 사무차장께서 직접 연합 빌딩으로 향하셨다는 연락이 3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총리실? 국무총리실 말하는 거야? 사무차장이면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사무차장님은 국가공무원 1급 이상의 직책, 즉 국회의원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새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날 보며 설명해주는 이혜령…! 누나에 버금가는 눈치 귀신은 처음 봤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누나는 금세 원래의 사늘한 모습에 사늘한 목소리로 돌아가 버리더니 다시 리무진에 올라탔다. 누나의 뒤를 따라 타서 누나 옆에 앉았더니 누나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사람 앞에서 감정 드러내길 싫어하는 누나가 이러다니, 놀래서 누날 돌아보니까 살짝 풀이 죽으려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싫어?”
나는 대답 대신 누나의 손에 손가락을 깍지꼈다.
“…….”
그 모습을 본 30대 남자 두 명은 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혜령 부장은 화사하게 피어난 꽃처럼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와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꼭 남자친구를 사귄 막내 여동생을 보는 눈빛이다!
그래도 할 일은 잊지 않았는지 나와 화연이 누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가는 데 25분가량 걸리니 그동안 약간이지만 브리핑을 해드리겠습니다. 한정문 씨.”
아, 진짜 집중해야지.
“네.”
한정문이라 불린 평범하게 생긴 30대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서류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나와 화연이 누나한테 건네주었다.
“서류철에 보시면 나와 있지만, 대략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세계 위상 능력자 연합에서는 이번 일을 빌미로 정서하 씨를 능력자 연합 소속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훗.”
서류를 보면서 이혜령 부장님의 말을 듣다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더니 날 빼고 전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한데 저런 소릴 들으니 절로 안 좋은 반응이 튀어나오네.
“약점 잡고 협박하는 건 타인은 안되지만 같은 능력자 연합 소속은 되나 보네요.”
“아, 후후후. 이 정보는 유영은 대통령 각하의 언질로 알게 되었기에 혹시 모를 사태를 상정해 대응 시나리오 2와 3도 만들어두었습니다만. 정서하 씨는 심의기관원들 앞에서 위상 세계로 끌려가기 직전의 상황에 대해 정확한 대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혜령은 내 이야기에 자기가 설명해줬던 일이 떠올랐는지 잠시 웃음을 지었다가 마저 설명을 해주는데, 심의기관에서 해올 것 같은 행동이랑 내가 해야 할 일만 간단하게 알려줬다.
화연이 누나는 이혜령 부장의 말이 끝나자 칼날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혜령 총무부장, 한정문 주임, 최진식 씨 세 사람은 곧 만날 김학준 사무차장님과 연계해서 세계 위상 능력자 연합이 두 번 다시 서하에게 손을 뻗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날 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서하에게 매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판단이 듭니다. 김학준 사무차장님도 경계순위에 올리도록 하세요. 지금 서하는 우리 타임리버에 꼭 필요한 인재이며, 앞으로 타임리버가 세계 1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소중한 존재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세 사람은 누나의 한기 어린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더니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런데 이혜령 부장이나 한정문 주임이라고 불린 평범한 남자는 괜찮은데, 조금 외모에 신경을 쓰는 듯한 최진식이라는 남자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날 힐끔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정서하 씨는 현재 나이 때문에 객원 임시 멤버로 가입했다는 건 들었습니다. 물론 보스의 말씀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 능력이 워낙 대단하기에 총무부에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혹시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확인시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와아. 그냥 이름 옆에 직급이 붙지 않은걸 보면 일반 직원 같은데 저런 발언이라니, 유능해서 이 자리에 끼인가? 슬쩍 날 보는데도 적대감이나 시기심 같은 건 안 보이는 게 정말로 화연이 누나를 신뢰하나 본데, 그런데도 내 능력에 대해 의심을 보내고 있다.
450m 부채꼴 모양 기감 능력이 진짜 사기인가 보네.
“지금까지 다른 팀들에게 빼앗긴 인물들을 다 합치더라도 서하에게는 못 미칩니다.”
화연이 누나의 단호한 말에 질문을 던진 최진식은 물론이고 이혜령 부장과 한정문 주임의 눈마저도 뜨악한 표정을 짓는 게 보인다.
“능력이 감지 타입이다 보니 이 장소에서 확인은 불가합니다. 하지만 정식 멤버가 되고 위상 세계에 진입하게 되면 확실히 이해가 될 테니 그때까지 대기하세요.”
“네….”
최진식은 좀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날 못 믿으면… 믿게끔 능력을 보여주고 싶긴 한데, 근데 뭘 보여주나?
잠시 보여줄 만한 능력이 있나 싶은데 남들한테 보여줄 만한 능력이 없다…. 월요일에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조금 좌절할 거 같다.
아무튼, 증거를 보여주려면 마나 탄이나 마나 레이저를 보여줘야 하나, 하지만 아직은 딜러 능력은 숨겨야 하니까 마나 시브라도 집중해서 물빛을 보여줄까?
“진식 씨, 정서하 씨는 정시하 양의 친동생이에요.”
“헉?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어?! 그게 납득할 만한 이유인 거야?!
대체 울 누나가 타임리버에서 무슨 일을 했길래 누나 동생이라는 이유가 의구심을 납득시키는건데?!
이혜령 부장의 말을 듣더니 최진식은 '아아! 어쩐지…. 그래서 그런 거였군!' 하는 표정을 짓는데 옆에 한정문 주임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울 누나한테 열등감 가질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열등이가 고개를 들 뻔했어.
내가 뾰로통한 표정이라도 지었는지 이혜령은 날 보고 싱긋 웃기만 하고 설명은 안 해준다.
쳇. 남자 몸은 스캔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 몸도 스캔할 수 있다는 건 알리고 싶지 않지만, 은근슬쩍 몸이 안 좋아 보인다. 병원 가봐라 하는 정도로 말해주는 건 괜찮겠지.
…울 누나 때문에 이러는 거 절대 아니다!
눈에 마나 시브를 집중해서 최진식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내 파란색으로 빛나는 내 눈동자를 보더니 흠칫하고 놀랐다가 눈을 떼지 못하고 날 마주 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이혜령 부장과 한정문 주임도 침을 꿀꺽 삼키고 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해봤더니 양쪽 엄지발가락에 내성 발톱이 심각한 수준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왼쪽 무릎 연골이 반쯤 쪼개진 게 보인다. 허벅지랑 허리는 근육이 심각하게 뭉쳐저있었다. 거시기는 보기 싫어서 패스하고 뼈도 조금 삭아 보이고 폐에 니코틴이 가득하고 검게 변색한 폐가 보인다.
헤비 스모커인가?
성대에도 약간의 상처가 보이는 게, 저리 두면 성대 결절이 될 거 같다. 뇌에는 피로 물질이 가득해서 만성 피로에 찌들어있는 거 같다.
절레절레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서 최진식을 향해 말했다.
“최진식 씨한테서 안 좋은 느낌이 많이 드네요. 일찍 종합병원에서 정밀 건강진단을 받아보셔야겠는데요.”
최진식은 움찔하고 놀랬고 이혜령과 한정문도 놀란 눈으로 최진식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에잉, 그러니까 적당히 눈치채고 묻지 말란말야! 옆에 눈치 귀신은 벌써 눈치챘잖아!
“정서하 씨…. 진식 씨의 몸에서 안 좋은 기운을 느끼신 건가요?”
“네, 특히 다리랑 무릎 아래쪽에서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아직 마나 시브를 눈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내 눈동자에서 푸른 빛이 하늘거리며 흘러나오는 게 보일 거다. 그러니까 저 세 명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내 눈동자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걸 테고.
최진식도 내 말에 짐작 가는 게 있는지 표정이 흐려지면서 가슴이랑 왼쪽 무릎을 만지작거린다
…괜히 말했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표정인데.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건강한 이혜령 부장님이랑 비교하면 몸 전체에서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말이에요. 그중에 가슴이랑 무릎 아래쪽이 더 그렇구요.”
“…최진식 씨는 오늘 일이 끝나면 바로 월요일에 정밀 검진을 받고 보고서를 제출하십시오.”
화연이 누나도 내 말을 듣더니 표정을 굳히고 사늘하게 이야기했고 최진식도 표정이 굳어진 채 긴장하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보스.”
암튼 담배 빨리 안 끊으면 진짜 요절할 거에요. 아니면 폐 대부분을 들어내고 산소호흡기에 연명하거나.
잠시 후에 집 근처의 능력자 연합 빌딩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뒤편의 고위 클래스 & 생환자 전용 입구가 아니라 정문 쪽에서 내렸다.
리무진에서 내렸더니 60대 초반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양복 차림의 신사와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 넷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좀 젊어보이는데. 아무튼 아저씨가 나와 눈을 마주하며 말을 걸었다.
“으음. 정서하 군 맞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각하께서 정서하 군의 칭찬이 대단하셨기에 어느 정도인가 궁금했는데 확실히 범상치 않은 모습이군요. 총리실의 사무차장을 맡은 김학준이라고 합니다.”
여사님이 날 칭찬했다고…? 칭찬받을 일 같은 건 안 한 거 같은데.
김학준 차장은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고 나도 공손하게 손을 잡아 악수했다. 외모는 할아버지 같은데 손에 느껴지는 악력은 상당한데?
“안녕하십니까, 사무차장님.”
화연이 누나도 김학준 차장에게 살짝 고개를 꾸벅이면서 인사를 했고 그 뒤에 이혜령과 2명의 남자도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하니 김학준 차장의 뒤편에 있던 5명도 같이 허릴 숙여서 인사했다.
“허허허, 아가씨도 잘 지내셨습니까. 3년 만에 뵀더니 새벽의 촉촉한 꽃봉오리에서 만개한 장미로 개화하셨군요. 허허허.”
김학준 차장의 말에 화연이 누나는 얼굴을 붉히더니 시선을 돌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서 보나 마나 서하를 회유하라는 언질을 아닌 척 하면서 내리셨겠지요.”
“각하의 인재 욕심에는 당할 자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무차장님께서는 이제 서하에게 접근하지 말아주세요.”
“이런~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김학준 차장은 누나의 말에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역시 정치인인지 인척 아닌 척 말 흐리기가 끝내준다!
“10시가 다 되어가니 능구렁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심의관으로 이동하실까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김학준 차장은 누나를 다 큰 손녀를 보는듯한 흐뭇한 얼굴을 숨기지 않더니 앞장서서 타임리버 빌딩으로 향했다.
사무차장이 가장 앞서 걷기 시작하고 그 뒤를 화연이 누나와 나 뒤에 이혜령 부장이 서고 한정문 주임과 최진식, 이름도 모르는 수행원? 비서? 남자 다섯이 뒤를 따라왔다.
정문에서 들어간 새하얀 홀에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일반인 반 능력자 반이라고 할 정도였다. 족히 600명은 되어 보이는데 그만한 숫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거나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고 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거나 문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는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50명이 넘는 안내 직원들이 능력자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안내 직원들 뒤로 정장을 입은 사람 20명이 부동자세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홀에 들어가니 능력자들 대부분이 화연이 누나와 앞에 선 김학준 차장을 보기 시작했다!
“엇, 타임리버 보스…인가? 치마를 입었네?!” “저 앞에 사람은 이 능력부처의 김학준 사무차장 아냐?”
“무슨 일이지? 유화연은 바지만 입던 거 아녔어?” “진짜 이쁘다….”
“타임리버 보스 옆에 있는 꼬맹이는 뭐야?” “눈에서 파란빛이 흘러나오네…?” “타임리버 보스가 국내 제일의 미녀라더니 진짜 예쁘다….”
“저런 여자랑 한 번만 자봤으면 좋겠다.”
칵! 마지막은 어떤 놈이야!! 화연이 누난 내꺼라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고는 바로 누나의 손을 잡아서 깍지를 꼈다!
그랬더니 화연이 누나는 얼굴을 사르르 붉히면서 깍지 낀 손가락을 꿈틀거리는데 엄지로 누나의 손등을 살짝 쓰다듬었더니 움찔해버렸다.
“!!”
그 모습을 본 이혜령은 '진짜였네!!' 하는 환희에 찬 표정이 돼버렸고 김학준 차장은 '좋을 때지. 흘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머지 남자 일곱은 일제히 좌절과 절망하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물론 우릴 바라보던 사람들도 경악했지만!
허릴 끌어안으려다 화연이 누나가 폭발해버릴지도 몰라서 손을 잡아주는 걸로 참았다.
“아, 뭐야. 동생이었나?” “타임리버 보스한테 동생? 그 말은 유영은 대통령의 자식이란 말이잖아?” “조카 아냐? 아니면 친한 동생이라던가?”
억! 이, 이 인간들이!
화연이 누나는 갑자기 손을 잡아오는 날 잠깐 놀란 눈으로 봤다가 금방 미소를 지어주었는데 그런 모습을 본 비서들이랑 한정문과 최진식은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끄응…. 사방에 적들이 가득하네.
홀에는 여러 클래스가 있었지만 G 클래스가 무척 많았는데 300평은 되어 보이는 홀의 이곳저곳에서 인증기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듯했고 삼삼오오 모여서 안내 데스크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라거나, 입장용 엘리베이터라고 써져있는곳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그런 G 클래스 사이사이에 몸통의 서너 배는 될 법한 백팩을 짊어진 I 클래스나 H 클래스들도 보이고 대여섯 명이 모인 그룹 사이에도 커다란 백팩을 짊어진 H 클래스 사람들도 보였다.
…저번에 이혜령 부장이 말한 생활 보조원들이 저 사람들인가보다.
엘리베이터를 따라 2층과 3층 4층을 공간 지각으로 감지해봤더니 5평 정도의 수많은 방에서 뭔가 출렁출렁하면서 능력자들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위상 세계 출입은 연합 빌딩에서 해야 한다는 걸 본 기억이 나는데 저렇게 출렁거리는 게 위상 세계 입장하는 모습인가보다.
비어있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위상 세계로 이동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홀에 내려왔는데,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안내 데스크에서 등록해야 하나 보네.
어? D 클래스 20명이 능력자 연합 빌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공간 지각에 캐치 됐다. 홀에 있는 G 클래스 능력자들과는 장비에서부터 소모품의 준비 상태가 차원이 틀리다!
D 클래스… 20명인 줄 알았는데 D 클래스에서도 하급이 12명에 5명은 E 클래스 최상급이다. 그리고 3명은 H 클래스고.
H 클래스는 역시나 생활 보조인지 자기보다 더 큰 배낭을 지고 있었는데 정말 한 톨의 틈도 없이 꽉꽉 들어찬 배낭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진다. 저거 무게만 해도 200kg이 넘어갈 거 같은데….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비어 있는 안내 데스크로 이동했는데 그들이 이동하니 G 클래스 능력자들이 좌우로 퍼지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무슨 일인지 슬쩍 귀를 기울여봤다.
“알람포스 레이드 7팀입니다. 오전 10시 입장 예약했는데 확인 좀 해주세요.”
“알람포스 레이드 7팀 팀장 안세군 씨 인증기 확인 부탁드립니다.”
“여기.”
“확인되었습니다. 노력에 보답 받는 하루가 되시길.”
“넵.”
아, 레이드 팀이었구나. 7팀인데 20명인가? 타임 리버는 한 팀에 11명이랬는데?.
그들은 팀 입장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버렸는데, 4층 이하는 소규모 그룹의 위상 세계 입장 지역이고, 5층 이상은 레이드 팀의 입장 지역인가보다.
“뭘 보고 있지?”
우리는 업무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연이 누나는 내가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으니 말을 걸어왔다.
“위층에서 사람들이 막 사라졌다 나타나고 그러네?”
일행들은 내 말을 듣더니 날 돌아보는데, 여러 가지 감정이 보인다. 그게 보여? 같은 거에서 부터 역시 각하가 탐내는 인재구나 라던가. 감탄이나 슬쩍 질투 같은 것도 보이고. 물론 비서진에서는 압도적으로 질투가 많다! 아니 전원이 날 보고 질투하고 있었다!
내가 화연이 누나의 손을 잡고 깍지 낀 게 충격이었나 보다.
“위상 세계 입장은 안내 데스크에서 등록하고 능력자 연합 빌딩에서만 출입해야 하는 법이 있으니까.”
“그럼 지금 홀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전부 임시 그룹을 꾸려서 위상 세계에 들어가려는 거야?”
“맞아. 지금 경제를 꾸려나가는 실생활에 쓰이는 많은 재료는 저들이 채집해서 나오는 걸로 이루어지고 있지.”
“아…. 그래서 I 클래스나 H 클래스도 생활 보조 겸 짐꾼으로 데려가는 거구나?”
“응.”
“나도 감지 타입이 아니었으면 저 사람들 틈에 끼어있었겠다.”
애초에 그런 위상 세계에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면 탐색 능력도 못 얻었을 테고, 프랑도 못 만났을 테고 평범한 능력을 깨닫고 평범하게 살아나왔겠지? 그리고 저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서 채집 의뢰 같은걸 받아서 위상 세계에 들락거리다가 화연이 누나한테 낚아채 져서…. 흠흠.
“감지 타입이 아니었더라도 너라면 특별한 능력을 얻어서 금방 두각을 드러냈을거다.”
화연이 누나는 날 내려다보면서 믿음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런 예쁘고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여자가 내 여친이라니, 완전 행복하다!
…근데 프랑은 나와 누나의 뒤에서 김학준 차장과 똑같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랑 화연이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이 날 좋아하는 건 확실하긴 한데, 프랑이 화연이 누나한테 똥고집이라고 할 처지는 아닌 거 같다. 나더러 다른 여자를 찾으라고 말한 게 비록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사이에 둘이서 많은 걸 교감하고 사랑도 나눴는데 아직도 생각이 안 바뀌다니.
다시 프랑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얌전히 서 있는 프랑과 화연이 누나, 두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려면 뭔가 수를 내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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