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아…. 욕나온다. =========================================================================
진짜 욕 나온다.
가로세로 100m 정도 넓이의 섬, 주변에 이형종의 시체 조각이 둥둥 떠다니는 호수, 피딱지가 굳어가는 땅과 썩어가는 이형종 시체 더미.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어째서?!
…씨발.
씨바아아아아아알!!!
따끔.
으응…. 뭐야, 뭔가 팔이 따끔했는데…. 우웅, 좀 더 잘래.
따끔!!
아으. 뭐야아.
나는 달아나려는 잠을 억지로 붙잡으며 따끔거렸던 팔을 휘휘 저었다.
쿠울….
파즈즉!
“으그아아악!”
전신에 퍼지는 갑작스러운 전기 충격에 심장이 펄떡거리면서 놀란다!
전신을 짜릿하게 흐르는 고통에 눈을 번쩍 뜨고 발딱 일어나서 무슨 일…인가 살펴봤는데 내 머리 위에서 프랑이 울상을 짓고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파직 거리는 전기를 보니까, 따끔한 거랑 전기 충격을 먹인 게 프랑이었나 보다.
프랑의 뒤로 파란 하늘과 눈 부신 태양이 보인다.
“아…. 프랑, 왜 그래? 한창 자고 있었는데…. 응?”
하늘? 거기다 피 냄새랑…. 뭔가 썩는 냄새?
그제야 주위로 시선이 가면서 공간 지각 능력이 발동되며 주변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뭐야, 이게?”
-서하…. 어떻게 해요?-
프랑이 울상을 지으며 날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내가…. 생환에 성공했던 위상 세계의, 마지막에 서 있었던 섬이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짜증 나고 분노가 엉망으로 뒤섞여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속으로 연신 쌍소리를 내뱉으면서 발밑을 내려다봤다.
두 꼬리가 잘려서 뿌리만 남아있고, 허리도 반 토막이 나서 죽어있는 두 꼬리 여우.
고개를 조금 들었더니 악취를 풍기면서 썩어가고 있는 이형종 시체 더미가 보이고 그 주변으로 섬 주위가 누런색이 되어가고 있는 호수가 보인다.
“…프랑.”
-네에.-
“우리, 귀환했던 거…. 꿈은 아니지?”
-꿈이 아니에요!-
내가 귀환하기 직전의 모습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섬의 모습. 진짜로 위상 세계에 다시 떨어져 버렸다.
프랑의 말에 따르면, 내가 마악 잠들고 프랑도 영혼석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갑자기 내 주위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직후 내 모습이 그 출렁거림에 빨려 들어가더니 자신도 함께 빨려들어 와버렸다고 했지.
내 모습을 내려다보니 진짜 한숨과 함께 허탈한 심정이 몰려온다.
“…진짜 큰일 났다.”
복장이라곤 하안색, 아니 등에 피가 좀 많이 묻은 하얀색 목욕 가운에 스패츠 타입의 속옷 하나뿐. 하다못해 신발도 없고 무기도 없다.
그나마 E 클래스가 돼서 늘어난 3733의 위상력과 공간 지각 능력, 마나 시브가 있는 게 다행이다. 만약 1회차처럼 여기다 아무 능력도 없었다면 진짜…. 엿될뻔했다.
-서하.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저번과는 다르게 직접 전투 능력도 갖추셨으니까, 서하라면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을거에요.-
그래. 프랑이 옆에 있어 주니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고 머릿속도 차분해지는 거 같다. 프랑이 옆에 있어서 진짜 다행이야.
“하아. 정말 프랑이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나 혼자였다면 또 패닉에 빠졌겠지. 프랑은 내 말에 그냥 배시시 웃어만 주었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위상 세계로 빨려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방법은 알고 있어.”
-어떻게요?!-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이세계 생존학의 한 귀퉁이에 쓰여 있던 건데, 두 번째부터는 빛덩어리를 직접 찾아야 한대. 그러니까 빛덩어리를 찾아서 현실로 돌아가야지.”
나는 프랑에게 내가 아는 단편적인 지식을 설명해주며 시체 더미에서 튀어나와 있는 노 헤드 맨티스의 뒷다리를 바라봤다.
빛덩어리라지만, 15일째에 봤던 그 빛덩어리와 똑같이 생겼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반대로 공간 지각이 있으니까, 반경 1km를 움직이지 않고 조사할 수 있으니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빛덩어리라면 주변과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질 테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빛덩어리라고 했으니 똑같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이마를 쓰다듬으며 프랑의 걱정되고 긴장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일단 무기부터 만들어야겠지. 비상식용 벨트가 없지만, 수분 나무가 있으니까 식량은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제길…. 속성 타입이랑 회복 타입이 능력을 쓰는 모습을 좀 더 일찍 봐뒀어야 했는데….”
아니, 위상 세계의 입장 조건과 퇴장 조건을 먼저 봐뒀어야 했어! 대체 뭐 때문에 다시 입장한 건지 짐작이 안가!
후우. 진정하자. 내가 흥분하고 짜증 나는 표정을 지으니까 프랑도 덩달아 어쩔줄 모르면서 울상이 되잖아.
조금 전에 인증기를 켜보고 알게 된 거지만, 당연하게도 위상 세계에서는 능력자 커뮤니티가 활성화가 안 된다.
인증기를 켜봤자 홀로그램 중앙에 =접속 종료 Disconnected= 라는 단어가 뜨면서 네모나고 커다란 창 하나만 떴었다.
이게 적당히 손으로 쓱쓱 움직이면 그림 그려지듯이 그려지는 단순한 그림판 기능의 지도 창이랬지.
난 지도 기능이 머릿속에 있으니까 이런 건 필요 없지. 아무튼, 들어온 건 들어온 거니 일단 생존 준비부터 해야지.
당연하달까, 마나 시브로 신체 강화 타입처럼 위상력을 움직이면 피부가 굉장히 단단해졌다. 신발이 없어도 이런 깨지고 뾰족한 돌조각이 있어도 돌아다니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덕분에 옷과 방어 구에 대한 미련은 금방 떨쳐냈지만…. 역시나 무기, 특히 뿔 송곳이 무척이나 아쉬워졌다. 발톱 검이야 저 시체 더미 속에 파묻힌 다른 노 헤드 맨티스의 앞발을 잘라 쓰면 되니까.
시쳇더미에 다가갈수록 악취 때문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지만, 참으면서 노 헤드 맨티스를 찾았다.
맞다. 제길, 아래쪽에 있었지….
이놈은 그래도 곤충이라 그런지 다른 것들에 비해 몸이 거의 썩지 않았다. 단지 배 부분만 물렁물렁해지고 밟으면 푸직! 하면서 터질 것 처럼 보라색으로 부풀어 올라있었다.
나는 무릎 밑으로 마나 시브를 돌려 맨발로도 땅바닥을 걷는 데 무리가 없게 단단하게 만들고 똑같이 마나 시브를 돌려 경화시킨 두 손으로 노 헤드 맨티스의 앞발을 잡아당겼다.
왠지 뒷다리를 잡아당기면 뭔가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거 같았거든.
우두둑 뿌직. 철퍽 주르륵.
“으웩…!”
앞발을 잡아당겨 시체 더미에서 잡아 끌어낸 건 좋은데 덕분에 썩어가던 살덩어리가 쏟아지고 썩은 물이 줄줄 흐르면서 악취가 무시무시하게 피어올랐다.
코를 막고 싶지만…! 순간 마나 시브로 어떻게 안 될까 생각했는데 곧장 거시기가 커졌던 경험을 떠올리고는 생각을 접었다.
후각을 막는 게 아니라 후각을 민감하게 만들어버릴 거야.
앞발이 달린 큰 노 헤드 맨티스의 뒷다리를 잡아끌고 섬의 반대편까지 끌고 가서 모닥불을 피웠던 자리 근처에 집어 던져놓고 바닥에 깔린 육지 펭귄의 모피 위에 주저앉았다.
“하아…. 좀, 아니 냄새 때문에 무진장 역겹지만 의외로 썩어가는 시체 더미를 봐도 정신적인 충격은 없네. 역시나 능력자가 되면서 정신력이 강화됐나 보다.”
-서하는 원래부터 대단하셨으니까요. 앞발로 다시 검을 만드실 건가요?-
솔직히 중2 중3 때랑 고등학교 2년동은은 무진장 찌질하게 살았었는데…. 프랑한테 절대 알려주면 안 될 흑역사가 생겼다!
“응. 솔직히 만들어도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무기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
-만들어 두면 굉장히 도움이 될 거에요!-
두 손을 꼭 쥐며 격려해주는 프랑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얼마나 강한 이형종들이 나올지 모르잖아. 타임리버 빌딩에서 신체 강화자들 훈련을 공간 지각으로 잠깐 봤었는데, 나랑 같은 E 클래스 사람들 움직임을 보니까 난 진짜 근접전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보기보다 무진장 몸치니까.”
잠깐 타임리버 빌딩에서 공간지각으로 살펴본 E 클래스 신체 강화자들의 움직임을 머리에 떠올려봤다.
“타임리버 빌딩에서 나랑 같은 클래스의 신체 강화자들이 훈련하는걸 공간 지각으로 봤었는데. 공간 지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나 현란한지 도무지 상대할 엄두가 안 날 정도였어. 그렇게나 대단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신체 강화자들도 여럿이 모여야 동급 이형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하잖아.”
나 같은 몸치는…. 에휴.
-우우…. 하지만 긴 주둥이 마른 늑대나 큰 들쥐를 잡으실 때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여주셨었는데….-
“그건 기습이었지 정면대결이 아니었는걸? 솔직히 말해봐. 저 두 꼬리 여우랑 마지막에 싸울 때 어땠어?”
내 질문에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리는 프랑.
“킥킥. 주제를 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거야.”
조금 울상을 지은 프랑은 내 등에 매달려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래서 마나 시브를 머리 쪽으로 돌려 프랑에게 요구했다!
“좀 더 쓰다듬어줘!”
-풋. 네에!-
턱걸이도 온몸을 비틀고 두 다리를 버둥거려서 겨우 10개를 채우던 체력에 축구나 농구 같은 몸을 쓰는 운동은 짧은 인생 동안 거의 해보질 않았다고. 거기다 내 정신 상태도 근접전을 할 만큼 신경이 굵고 튼튼하지가 않단말야.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노 헤드 맨티스의 시체로 다가갔다.
잠시 어떻게 날이 달린 앞발만 뽑을까 살펴보다가 마나 시브를 전신으로 돌려서 신체 능력을 늘린 다음 노 헤드 맨티스의 몸통에 붙은 관절을 잡고 한쪽 발은 몸통을 밟아 고정시킨 뒤에 그대로 잡아당겼다.
“으헥.”
뽑힌 앞발에서 뭔가 신경이랑 내장이 주르륵 딸려 나오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곤충이라 그런건지 내장이 거의 썩진 않았지만….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아무튼, 빌딩에서 본 그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근접 전투 훈련을 하는 건지 같은 신체 강화자랑 대련을 하는데 움직임이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어. 그러니까 몸치인 나는 일단 무기는 하나 장만해놔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지 않겠어?”
프랑은 내 모습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훌륭하세요! 저는 그저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해야 할 일을 정리하시다니!-
“뭘. 잡생각이 많다는 건 이럴 때 유용한 거지. 아, 뿔 송곳이 그립다.”
이…. 내장? 을 손으로 잡아끊으려니 굉장히 꺼림칙한데….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시금 날이 달린 앞발의 관절 부분을 잡고 힘을 줘서 부러트렸다. 죽고 몸에 위상력이 다 빠져나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부러졌다.
뿌직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근섬유 비슷한 것들이 찢어지면서 떨어져 나갔고 부러진 절단면이 꽤… 그로데스크했지만 내장 같은 게 달라붙은 것도 아니니 억지로 신경을 돌렸다.
그리고 목욕 가운의 소매를 잡아 뜯어서 손잡이 부분에 둘둘 감고 붕붕 휘둘러 보니 처음 만들었던 발톱 검이랑 크게 다른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이놈은 몸체가 좀 더 가늘어서 그런지 손잡이로 잡을 수 있는 부분이 내 손아귀에 딱 들어맞았다.
이건 좋군.
한쪽 앞발이 사라진 노 헤드 맨티스의 시체를 잡아서 멀리서 시쳇더미로 집어 던져버리고 되돌아와서 육지 펭귄 모피에 주저앉았다.
으음. 일단 해야 할 거는 속성 탄을 쏠 방법을 연구해봐야겠다. 몇 가지 실험해 볼게. 생각났으니까. 그리고 이동을 해야 하니, 체력 소비를 줄여줄 마른 통나무도 구해야 하나?
“…프랑은 뭔가 좋은 생각이 있어? 앞으로 해야 할 거라던가, 챙겨야 할거라던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걸 프랑이 말해줄지 모르니 물어봐야지. 프랑은 주먹을 쥐고 살짝 입에 붙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서하는 속성 타입과 회복 타입의 위상력 모양을 파악하셨죠?-
“응.”
-그럼 마나 시브를 컨트롤해서 속성 탄 발사 방법이나 회복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나는 싱긋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저건 나도 생각해뒀던 건데 프랑도 같이 생각하다니. 내 능력에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거겠지?
-윽. 생각해두셨던 건가요….-
프랑은 내 반응에 조금 시무룩해졌다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나 시브로 수분 나무를 말려보시는 건 어떤가요? 저번에는 조각이 터져나갔었지만 조금 연습해보면 바짝 말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마른 통나무를 기대서 이곳, 분지 형태의 숲을 벗어나시는 거예요. 어쩌면 이동 중에 빛무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짝짝짝!
“오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프랑이 내 능력에 대해서 이해도가 나랑 같아서 기쁜데?”
-윽!-
프랑은 내 칭찬에 기뻐해야하는건지 슬퍼해야하는건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내 등에 달라붙어 칭얼거렸다.
-너무해요. 생각해두셨다면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시구.-
“흐흐. 미안미안. 혹시 내가 생각해두지 않았던 걸 프랑이 생각해낼까 봐 물어봤던 거였어. 그거 외에도 이 모피로 옷이나 신발을 만들어볼까 생각했는데 곧 수영해야 하고, 마나 시브를 신체 강화 타입으로 회전시키면 복장 같은 건 문제가 안 되니까. 패스했지.”
-아….-
“나머지는 프랑이 말한 거랑 똑같아. 이제 2번째라 그냥 버틴다고 해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귀환하게 해주는 빛무리? 빛덩어리?들을 찾아다녀야지.”
등으로 은근히 느껴지는 프랑의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 슬쩍 거시기가 발기되려고 했지만 잽싸게 생각을 전환한다.
“일단 생존에 최대한 집중하자. 그리고 나가면 최수한을 좀 갈구는거야. 명색이 생환자 보호관리부면서 위상 세계 입장과 퇴장에 관한 방법 같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해주고 말야.”
근데 최수한은 갈구면 오히려 흥분해서 애액을 질질 흘리는 거 아냐?
프랑도 조금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중요한 걸 어떻게 알려주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 두 사람은 정말 너무해요!-
“응. 거기다 난 미성년자라서 사냥과 관계된 일체의 행동이 금지랬잖아? 돌아나가면 날 처벌하려 드는 놈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미리 산 제물로 두 사람을 바쳐야지. 킥킥”
산제물이라는 말에 프랑이 어색하게 웃는 게 보였다. 슬슬 진지하게 가볼까.
“속성 타입의 위상력은 부정형의 불규칙한 움직임들이었고, 회복 타입은 여러 덩어리의 위상력들이 좁게 밀집되어있는 타입이랑 멀찍이 떨어져 있는 타입 두 종류였지.”
흐음…. 역시나 회복은 전혀 감도 안 잡히지만. 속성은 아까부터 몇 가지 실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속성 타입의 능력은 신체 강화자와 마찬가지로 나이테 모양이었는데, 심장을 중심으로 수십 겹의 위상력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나이테가 이리저리 출렁출렁 거리는 모습이었지.
신체 강화 타입이 빠르게 소용돌이처럼 회전시키면 육체가 강회되고 신체 능력이 올라가는 식이었으니까.
비슷하게 생각해보면 속성 타입은 톡톡 퉁기는 모양으로 쏘아내는 건 아닐까?
눈을 감고 몸 내부의 위상력을 지각하기 시작한다.
내 위상력은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가득 차있는 모습이었는데, 일단 병원 입구에서 처음 봤던 두 명의 속성타입 여성 능력자처럼 위상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너무 신체 강화 타입으로만 움직여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마나 시브를 회오리처럼 돌려버려서 자꾸 실패했다.
“으음. 좀 어렵네. 연습이 필요하겠어.”
-서하!!-
어!! 시체 더미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프랑도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는지 동시에 날 불렀는데 공간 지각이 시쳇더미가 조금씩 움직이는 걸 감지했다!
“뭐야? 시체가 움직여?”
공간 지각으로 움직이려는 시체를 감지해봤는데, 위상력이 조금씩 모이는 게 보였다! 5? 12? 계속 모여든다!
“좀비?! 설마 유령계열은 아니겠지?!”
탐지 기술에 관해서 검색해봤을 때 유령 타입의 이형종은 죄다 중위급 이상이랬다! 유령 타입이면 바로 도망가야 해!
잠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뱃살이 다 사라진 육지 펭귄이 태양 아래에서 그르러럭 거리며 일어나는 게 보인다!
“큭!”
전신으로 마나 시브를 신체 강화 타입으로 돌리면서 발톱 검을 움켜쥐고 육지 펭귄 좀비에게 달려갔다!
좀비 펭귄의 위상력은 187! 미친! 그사이에 순식간에 늘어났어!
놈의 모습은 황갈색의 털은 회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노란 부리도 하얀색으로 변한 데다 눈깔은 썩어서 회백색의 탁한 눈동자였다. 갈라진 배 사이로 반쯤 썩은 내장을 줄줄 흘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구역질이 치밀어오른다!
놈은 완전히 일어섰는데, 1m에 불과하던 키가 내 머리 하나보다 더 커져서 2m에 육박한다!
“하앗!”
마나 시브의 힘으로 4초 만에 좀비 펭귄의 앞에 다다른 나는 있는 힘껏 발톱 검을 사선으로 내려 베었다!
부드드득!
“큭!”
발톱 검이 좀비 펭귄의 뼈와 살을 가르고 지나가다가 손에서 강한 반발력이 느껴지면서 속도가 줄어들더니 좀비 펭귄의 가슴께에서 검이 멈춰 버렸다!
그와 동시에 좀비 펭귄의 왼쪽 날개가 움찔하는 게 보여서 황급해 발톱 검을 놓고 뒤로 점프했는데 내가 있던 자리로 놈의 날개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휘둘러 쳐졌다!
바우우웅!
“흐억?!”
풍압으로 몸이 밀리는 게,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미친?! 신체 강화 타입으로 검을 휘둘렀는데 못 잘라?!”
“그으에에…. 게르르르륵.”
잽싸게 거리를 20m까지 벌렸더니 좀비 펭귄은 비척비척 나에게 걸어오기 시작하는데, 생전의 날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위상력은 그새 늘어서 518이 되었는데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은걸 보니 저 이상은 세지지 않는 거 같다.
“518이라니…. 중위급이잖아!”
-서하!-
“쓰지 마!!”
프랑이 내 모습을 보더니 두 팔을 쫙 뻗었는데 벼락을 쓰려 하는 거 같아서 소리쳐서 막았다!
“느리잖아! 일단 상황을 살펴보자!”
그제서야 발톱 검이 가르고 지나가질 못한 게 이해된다. 중하위급 중에서도 최하급의 두 꼬리 여우의 허리를 단번에 반 토막 내버린 발톱 검인데, 살이 아니라 마치 쇠를 자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TP를 더 쓸 생각으로 마나 시브를 힘껏 회전시켰다. 머리에도 마나 시브를 돌려 정신을 가속한다!
주변의 움직임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0.8배속이 되는 게 느껴진다!
큭. TP가 초당 38씩 줄어들고 있어!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뛰어 느릿하게 움직이는 좀비 펭귄의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놈은 날 따라 느릿하게 오른쪽으로 따라 돌려고 했지만 이미 등 뒤에 선 나는 힘껏 점프해서 좀비 펭귄의 등에 드롭킥을 먹였다!
퍽! 쿠웅!
생각대로 앞으로 넘어지며 가슴에 박혀있던 발톱 검이 등으로 불쑥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벌떡 일어나 바로 달려들어서 왼발은 좀비 펭귄의 등을 밟고 오른발로 발톱 검의 칼등을 힘껏 질렀다!
푸지직
기이한 파육음이 들려오면서 좀비 펭귄의 등을 반쯤 저미며 발톱 검의 손잡이가 육지 펭귄의 몸을 가르고 튀어 올라왔기에 잽싸게 손잡이를 잡고 이번엔 전력으로 마나 시브를 돌리며 땅에 발톱 검의 끝을 박아넣고 땅을 긁으면서 좀비 펭귄의 몸통을 가로로 갈라버렸다!
추촥!
큭! 뼈에 걸리면서 손목에 과부하가 걸리는데, 장난이 아니게 단단해!!
“게에에르르으으으으윽….”
좀비 펭귄이 꿈틀하는 게 발바닥으로 느껴져서 힘껏 뒤로 점프해서 물러나며 정신 가속을 해제하고 TP를 소비해서 가속하던 마나 시브를 통상 속도로 내렸다.
고작 30초도 안 됐지만 전체 위상력의 절반이나 써버렸다. 정신 가속에 신체 강화 타입으로 전력으로 돌려서 그런가?
가슴이 가로로 반 토막이 난 좀비 펭귄은 상체만 움직여서 내 쪽으로 천천히 기어오는데, 몸통에서 내장이 줄줄 흘러나와 질질 끌려오는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어오른다!
하체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좀비 펭귄의 약점은 머리통의 뇌일 가능성이 높겠지? 아니면 조심해서 날개를 잘라버리고 그냥 다진 고기로 만드는 수밖에!
모닥불을 피웠던 곳으로 뛰어가서 바닥에 놓여있던 투창기와 꼬지로 쓰던 나무 창을 들고 다시 달려왔다. 심호흡을 하고 투창기에 나무 창을 끼운 다음 마나 시브를 전력으로 돌리며 아직도 날 향해 기어오려는 좀비 펭귄의 머리통을 향해 날렸다.
“흐앗!”
쑤아악! 뻐억!
나무창은 그대로 좀비 펭귄의 머리통을 뚫고 지나가며 바닥에 박혔고 머리통에 난 구멍으로 뇌수를 줄줄 흘리며 좀비 펭귄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허억, 허억…. 후우우…. 역시 난 근접에 재능이 없나 봐.”
거칠게 뛰는 심장으로 마나 시브를 돌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서하….-
착찹한 기분을 느끼면서 죽은 좀비 펭귄을 내려다봤다.
머리로는 몸치라는 걸 이해하지만, 막상 실질적인 비교 데이터가 나오니 넌 근접전투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는 거 같아 기분이 더럽다.
“중위급 이형종을 잡는데 비슷한 수치의 F 클래스 다섯 명이 필요하다고 했었나? 근데 난 E 클래스잖아. 따지고 보면 8명분의 위상력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TP를 절반이나 써버렸어. 그것도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좀비 펭귄한테….”
-…….-
내 이야기르 들은 프랑은 날 보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너무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웃으면서 슬쩍 말을 돌렸다.
“역시 빠르게 발톱 검을 만들어두길 잘했어. 그치?”
-네, 맞아요! 그리고 서하는 자랑스러워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518이라지만 엄연한 중위급 이형종인데 서하는 별다른 전투 훈련을 안 했는데도 잡으신 거잖아요. 절반의 TP는 50분만 휴식하면 금방 차오르니까 서하는 잘하신 거에요!-
“응, 위로해줘서 고마워.”
프랑은 내 말에 살풋 미소를 지었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내 능력은 누가 봐도 사기라고 할 정도다. 이형종을 감지하고, 정신이 생각하는 속도를 가속해서 1.2배 빠르게 생각하고 주위를 파악할 수 있다.
거기다 감지 타입 주제에 마나 시브를 이용해서 신체 강화자보다 못하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강한 수준으로 몸을 강화할 수 있잖아? 이런 능력을 갖추고도 TP를 절반이나 쓴 건…. 에휴.
-그러니까 서하는 훈련하면 훨씬 나아질 거에요!-
“으응. 고마워.”
계속 날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프랑을 보니 조금 우울한 게 가신다.
좀비 펭귄을 죽인 직후 놈의 시체에서 위상력이 퍼져 나왔는데 역시나 나한테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어제 화연이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쳇, 힘겹게 잡아봤자 나보다 한 단계 낮은 놈이니까 위상력이 안 들어오는 거지.
다시 육지 펭귄 모피로 되돌아가서 털썩 주저앉아 조금 전의 싸움을 되새겨봤다.
으음…. 그러고 보니 방금 전투 때 분석 능력이 발동 안 한 거 같은데….
탐색 능력일 때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공격 궤도라거나 모션이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떴었는데 지금은 그게 보이지 않아서 좀비 펭귄의 날개 공격을 못 피할 뻔했다.
-서하?-
나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더니 프랑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긴장하면서 날 바라고 있었다.
“아? 응. 공간 지각 능력을 다시 살펴봐야 할 거 같아.-
-네?-
프랑은 내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탐색 능력이 합쳐지면서 공간 지각 능력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더니 프랑도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궤적안이 없어졌다구요…?-
“궤적안…. 뭔가 있어 보이는 기술명인데?”
-그, 그런가요?-
“응. 중2병틱한게 무진장 멋진거 같아!”
내가 3년 전이었다면 눈을 번쩍이며 환장했을… 흠흠!
-으윽!-
중2병이라는 말에 울상으로 변한 프랑은 잠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다시 말했다.
-창을 던지실 때는 어땠나요? 궤도가 보였었나요?-
“아니…. 그때도 안보였어. …공간 지각 능력으로 진화했다고 해도 이러면 활용 면에서는 효율이 더 떨어진 거 같은데. 그러고 보면 지도 기능도 내 기억력과 암기력에 주변 풍경을 감지해서 기억해버리는 거지, 탐색 능력의 일부라고 보기도 힘들잖아.”
슬쩍 시쳇더미 쪽을 바라봤다가 프랑에게 말했다.
“일단, 여긴 아무래도 분위기가 흉흉한 거 같아. 지금 시간은 대충 오전 10시쯤 된듯하니까 마른 통나무를 만들어보고 밤이 되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자. 이야기할 시간은 많으니까.”
-네. 좀비가 일어난 게 걱정스러워요.-
“응. 같은 중위급이지만 유령 타입이 안 나타난 게 다행이었어.”
속성 타입을 연구하고 싶었지만, 좀비가 일어난 게 굉장히 신경 쓰인다. 연구하는데는 정신을 집중해야하니 이 장소에서는 무리야.
일단 도망칠 준비를 하자.
섬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내 몸통만 한 두께의 나뭇가지를 마구 쳐내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 정도면 마나 시브 연습용으로도 충분하겠지?”
내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통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하. 힘내요!-
“응!”
육지 펭귄 모피를 가져와서 자리에 앉아 일단 작은 나뭇가지부터 집어 들고 마나 시브로 위상력을 밀어 넣어봤는데 역시나 퍽 하는 소리를 내면서 터져나갔다.
수분 나뭇잎을 열심히 뜯어먹으면서 수 시간을 위상력을 움직이다 보니 조금씩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무턱대고 한 곳만 잡고 위상력을 밀어 넣는 게 아니라, 통나무를 쓰다듬듯이 한쪽으로 계속 쓸어내듯이 쓰다듬으니까 수분이 빠르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으음. 일단 수분은 빠져나왔는데…. 어째 통나무가 압축된 거 같아.”
조금 더 무거워지고 단단해져 버린 통나무를 들어 올려봤는데, 이거 물에 뜨려나?
-한번 물에 띄워봐요.-
프랑의 말에 통나무를 물에 집어 던져넣었는데 풍덩! 하고 입수하더니….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
-…….-
“큰일 났네.”
-큰일 났네요….-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 3시 정도 된 거 같은데, 감을 잡는데 3시간을 쓰고 말리는데 2시간을 쓴 거 같다. 그리고 2시간을 먹은 그 통나무는 깊게 깊게 가라앉아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어쩔 수 없어. 다르게 말릴 방법은 생각나지 않으니 쓰던 통나무를 다시 가져와야겠어.”
-어디에 놔두셨는지 기억나시나요?-
“응. 위치는 기억하고 있어. 처음 섬을 살펴보고 나무 창을 만들 때 근처 나뭇가지 위에 올려놨었으니까.”
또다시 헤엄쳐야 하는 게 싫어서 한숨이 나왔지만 표현해봤자 프랑한테 걱정만 시킬 테니 속으로 삼켰다.
그 통나무가 잘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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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 쿠폰과 후원 쿠폰을 주신 분들,
그리고 추천과 선작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이야기지만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