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프랑의 이야기. =========================================================================
우기는 4일째 되던 날 끝이 났었습니다.
맞습니다. 한번은 그 산 아래까지 가본 적도 있지요.
…네? 아니, 아니에요. 그! 그것은…. 그게…. 절벽에서 그때 한 키스의 의미는…! 그, 그러니까! 이, 잊어주세요!!
네? 아앗! 그, 그 키스의 의미는…! 그게, 그러니까!! 서하에게…. 그게…!
에? 추, 춤이요? 아 그, 춤은, 그러니까! 둘째 마님께 배운… 그그그그. 네! 네? 구애의 춤 같았다고…. 으윽!
…정말, 짓궂은 질문은 그만해주세요.
절은 공경과 존경의 염을 담아 하는 것이라고 둘째 마님께 배운 거였어요. 네? 그…게, 서하는 저에 대한 걸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절 이해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많은 것을 주었잖아요? 그래서….
잇! 정말! 서하는 틈만 나면 제 몸을 몰래 살펴보고 그랬잖아요! 네? 그런! 제 잘못이라니….
아아! 저도 다 알고 있었다구요! 시치미떼지 말아주세요! 나무 방에서 영혼석으로 일부러 절 괴롭힌 것, 다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나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아, 아무튼 그 이야기는 그만해주세요!!
으윽…!
으으…. 그, 때의 부탁을 여기에 사용하는 건 반칙이 아닌가요…!
하아…. 그,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네? 어떤 감각이었는지…. 자세히 말해달라…구요? 그, 그러니까 서 하의 엄지가 움직일 때면 마치 아랫배가 찌릿찌릿하고, 으으…. 가, 가슴도. 네?
잘, 모르겠…다구요? 그, 그러니까아, 여, 여기 아랫배가…아? 다, 단어로 지칭해달라구요?
그, 그러니까…. 자…. 자, 궁…이요….
…으윽!
이익!!
자궁이요 자궁! 질의 끝에 붙어있는 손바닥 반도 안 되는 크기의 자궁!! 아기가 자라고 태어나는 아기방이요!! 서하의 손가락이 움직이면 자궁이 찌릿찌릿하고!! 푹푹 찌르는 느낌에 머릿속도 하얘지고!! 가슴도 희롱당하고 허리를 쓸어내리는 느낌은 하체의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눈앞은 캄캄해지고 서하의 손이 제 몸을 희롱하는 느낌에 이성을 잃고 덮쳐버리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단 말이에요!!
…….
몰라요. 흥!
…정말, 서하는 가끔 장난이 지나쳐요. 늘 음흉하게 제 몸을 훑어보기나 하고….
하아.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에요.
이잇! 그만! 더이상 그러면 저도 묵비권을 행사하겠어요!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나요?
…우기는 난데없는 큰일이었지만 식사는 나뭇잎으로 해결했고 부족한 식수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빗물을 받아마셨지요.
하지만 버티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별다른 일도 없이 6일이나 지났기에 조금은 위상 세계를 얕보고 있었다고 할까요.
시작은 우기가 끝난 다음 날부터였습니다.
하나씩 둘씩 최하위 이형종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8일째 되는 날에는 너무나 많아진 최하위 이형종의 숫자에 감당하지 못하고 피해 다니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폭우가 지나간 흔적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들고 싸우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도구가 있었더라면 우기일 때 나뭇가지를 잘라 창이라도 만들었겠지만, 도구도 없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요.
셀 수 없이 많은 이형종들에게 쫓겨 다니며 죽인 이형종의 생살을 뜯어 먹고 피를 받아마시며 싸우다 보니 어느 순간 기력이 솟고 체력이 늘어나더니 근력도 크게 오르기 시작한 걸 느꼈습니다.
네, 신체 강화자로 각성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후로 이틀간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끊임없이 싸우니 기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공격을 허용한 갑주는 이미 제 기능을 잃고 폐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지요.
신체 강화 능력자가 되어서 맨주먹으로도 최하위 이형종의 뼈를 부고 살을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만, 힘을 압도하는 숫자로 밀려오는 것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기까지 하니 더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신체 강화자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존재인 이상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니까요.
네, 이형종들끼리 서로가 싸워서 잡아먹기도 했지만 유독 저에게 적대감을 비추며 덤벼오는 이형종들과 싸우느라 기력이 고갈될 정도로 싸웠었습니다만, 결국 버티지 못한 저는 근처에 있던 나무 위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라면 그것이 악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타난 이형종의 종류는 버디 치킨, 노 헤드 맨티스, 큰 들쥐, 긴 주둥이 마른 늑대, 육지 펭귄, 투스 버니 등의 최하위 이형종이었습니다.
버디 치킨은 그날 섬에서 죽인 닭 이형종입니다.
이제 신체 강화 능력자가 되었다고 해도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순히 신체 능력만 월등히 높아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지만…. 수백은 족히 넘는 이형종들 사이를 헤치고의 탈출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오려는 것들은 생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만든 봉으로 후려쳐서 떨어트리고, 짧은 거리를 날아오려는 것들은 짧게 만든 나무 막대기를 날려 떨어트렸는데, 그러기를 얼마간 반복했더니 나무 아래쪽에 모여있던 최하위 이형종들끼리 심각하게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네. 죽는 이형종의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얼마 안 가 하위 이형종으로 진화한 녀석이 나타났습니다.
사방으로 퍼진 피 냄새 때문에 주변의 이형종들도 몰려들고, 몰려든 이형종끼리 싸우고, 싸워서 살아남은 이형종은 진화하고…. 계속되는 악순환에 그만 겁에 질린 저는 나무를 타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차라리 그때, 뛰어내려 그 자리를 피했었다면….
이미 이형종들은 저에 대한 것을 잊었는지 이틀 밤낮을 저희끼리 싸우고, 죽이고, 먹고, 진화하면서 끝없이 끝없이 싸우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둘째 마님께서 사후 세계의 이야기를 해주며 한 폭의 지옥도, 라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지옥도가 현세에 나타났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요.
눈에 보이는 곳은 모두 이형종의 시체, 바닥에 흐르는 것은 이형종의 피, 살아있는 것은 이형종이며 죽은 것도 이형종, 싸우고 있는 이형종과 죽어가는 이형종들….
흐르던 피는 강이 되고 못이 되어 사방으로 피비린내를 뿌리고 자신의 피와 다른 존재의 피에 뒤덮여 광기를 뿌리며 끊임없이 싸우는 이형종들.
…….
이형종들이 싸우기 시작한 지 13일째,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싸우다가 진화하는 존재들이 가장 먼저 공격당하기 시작한 겁니다. 최하위 이형종이 진화하여 하위 이형종이 되면 주변에 있던 최하위 이형종들이 모두 하위 이형종에게 달려듭니다.
하위 이형종은 그때 죽거나, 몰려드는 것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결국 죽게 되면 주변에 있던 최하위 이형종들이 하위 이형종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위상력을 흡수하고 진화하게 됩니다. 그러면 주변의 최하위 이형종과 죽이고 죽이고 죽이다가 죽고, 주변의 이형종이 또 진화하고….
그런 상황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는데, 정말 숲에 존재하는 모든 이형종들이 다 모여든 것은 아닐까 싶은 상황이었습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피어가 섞인 허스키한 울림의 하울링을 통해 실버 나이트 울프가 나타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아뇨, 실버 화이트 울프가 아니라 그 상위종인 실버 나이트 울프입니다. 딱 한 번 영국 윈체스터 인근에 나타난 적이 있는 존재였는데, 그때의 토벌에 후방 지원으로 참가를 했었기에 하울링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네?
그… 귀엽게 말해달라고 요구하셔도…. 보고에는 규칙이 있는 법입니다.
무, 물론 지금은 보고 중인 상황은 아니지만….
우우….
실버 화이트 울프는 하위 이형종이지요. 실버 나이트 울프는 실버 화이트 울프의 아종으로 그보다 상위 이형종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가문에서는 실버 나이트 울프를 중상위 이형종으로 분류하고 있답니다.
인증기에서 검색을 해보더라도 알 수 없을 거예요. 이런 변종과 아종들은 정보 공유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네. 생성되는 개체도 그 수가 극히 적고, 나타날 확률도 드무니까요.
당시 저희 가문에서도 파악한 변종과 아종, 희귀종의 숫자는 10종류가 채 안 된다고 알고 있어요.
네, 굉장히 놀랐지요. 부끄럽지만 피어만으로도 살짝 소변을 지릴 정도였어요. 그러나 곧 이어질 일에 비하면 실버 나이트 울프의 하울링은 정말 별것 아니었답니다.
하울링에 대항하듯 어디선가 음산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기운은 제가 숨어있던 나무 둥치에서 벌어지고 있었어요.
…경악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주변의 생기가 급격히 한 지점으로 뭉치더니 레이스의 변종인 이블 고스트가 나타나고 곧이어 시체들이 한곳으로 모이더니 구울의 변종인 나이트 크로울이 나타난 겁니다.
나무 아래에 나타난 이블 고스트의 생김새는 생김새가 다른 이형종들의 영혼이 억지로 꿰메붙인듯한 형태였습니다.
나이트 크로울은 큰 들쥐의 형상이었지만 크기가 4m를 넘어가며 피부 이곳저곳에 이형종들의 머리와 다리가 튀어나와있고 썩어가는 듯한 형상에 장기가 흘러내리는 끔찍한 모습이었지요.
변종과 아종의 차이점은.
아종은 뿌리는 같지만 다른 갈래로 뻗어져 나간 독특한 이형종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변종은 한 종이 전혀 다른 존재로 재탄생되는 것 같다고 가문의 연구자들은 파악했는데 아종보다 변종이 더 희귀하고 강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상위의 변종과 아종 셋이 동시에 나타났는데, 심각한 건 셋 다 생육을 지닌 존재들을 극도로 적개하는 언데드 계열인 점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이트 크로울, 실버 나이트 울프는 주변에 싸우고 있는 살아있는 이형종 들을 덮쳐갔습니다. 아마도 같은 언데드 부류였기에 비등한 힘을 지닌 서로와 싸우기보다는 증오스러운 살아있는 생명체를 노리겠다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블 고스트는 나무 위에 숨어있는 저를 감지했는지 이형종을 덮치지 않고 제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산 자를 증오한다는 듯이 주변 온도가 떨어지고,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서리가 끼는 것이, 산 자를 저주하는 영체의 한기가 저를 감싸는 상황이었습니다.
16m에 가까운 나무 위였기에 도망갈 장소를 찾지 못해 결국, 나무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신체 강화자니 이 정도 높이라면 별다른 충격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이블 고스트는 무엇인가 쏘아내었고, 그것은 저의 오른쪽 허벅지를 맞추었습니다.
무언가에 적중당한 허벅지는 감각이 사라지고 그 아래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대로 있는다면 죽음은 필연적인 상황이었기에 있는 힘을 다해 도주를 시도했는데 어느 틈엔가 실버 나이트 울프가 제 옆에서 나타나 덮쳐들었습니다.
크게 놀랐지만 크기는 저와 비슷한 실버 나이트 울프였기에 놈을 껴안고 뒹굴며 저의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놈의 입에 왼팔을 내밀어 틀어막으려 했지만 물리는 순간 팔꿈치 아래쪽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가 버렸습니다.
상위 이형종의 공격을 왼쪽 팔뚝 하나로 막아낸 것이니 생명에 비하면 싸게 친 셈이지요.
극통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죽는다는 생각과 함께 둘째 마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있는 힘껏 오른발을 뻗어 실버 나이트 울프의 배를 걷어차려 했는데 그 순간 나이트 크로울의 거대한 몸집이 저와 실버 나이트 울프를 깔아뭉개버렸습니다.
구울의 변종답게 지독한 악취와 썩은 피와 고름을 줄줄 흘리는 피부는…. 그야말로 끔찍했습니다. 튼튼한 신체 강화자의 육체답게 4m가 넘는 덩치에 수 톤은 될 법한 몸무게였지만 뼈가 부러지진 않았고 전신에 타박상과 땅에 쓸리는 바람에 몸의 이곳저곳에 생채기를 입는 것으로 끝났었지요.
실버 나이트 울프는 나이트 크로울이 자신을 공격했다 여겼는지 저를 무시하고 나이트 크로울과 싸우기 시작하였고, 나이트 크로울 역시 자신을 공격하는 실버 나이트 울프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해 다가오던 이블 고스트 역시 실버 나이트 울프와 나이트 크로울의 싸움에 휘말려 상황은 3파전으로 번졌고, 그 틈을 타 힘겹게 일어선 저는 뜯겨나간 왼팔을 챙길 틈도 없이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발을 질질 끌며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주변의 최하위 이형종들은 아종과 변종 이형종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도망쳤는지 그 이후, 별달리 어려움 없이 멀리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상위 아종과 변종을 피해 도망가던 중, 체력이 다해 야트막한 언덕 중앙에 나 있던 깊은 굴속에서 몸을 숨겼습니다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블 고스트에게 적중당한 왼쪽 허벅지에서는 냉기가 사라지지 않고 혈관을 따라 하체를 잠식하며 심장으로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고 실버 나이트 울프에게 물어뜯긴 왼팔에서 시작된 기이한 감각이 마찬가지로 혈관을 따라 심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이트 크로울에게 깔린 순간 놈의 체액이 피부에 난 상처에 스며들었는지 지독한 가려움과 함께 통증이 눈과 전신에 걸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타는듯한 통증과 끔찍한 목마름에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은 포기하고 흐릿해져 보이는 오른 쪽 눈에 의지한 채 굴에서 기어 나와 인근을 흐르던 강으로 향했는데,
도착한 강가에서, 인근에 고여있는 웅덩이에 비친 제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었습니다.
옷가지는 다 찢어지고 헤어져 있고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곳곳이 벗겨지고 흘러내려 시뻘건 근육이 노출되었고 진물은 전신에서 흐르며 상처가 난 자리에는 고름이 가득했는데 그곳에서 지독한 악취가 나고 있었습니다.
왼팔의 상처에서는 혈관을 따라 시커먼 줄기가 올라와 심장 근처에 다달아있었는데…. 둘째 마님이 감탄하고 부러워하시던 제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빠져서 빨간 두피가 곳곳에 노출되었고, 얼굴도 마치 나병에 걸린 듯이 피부가 부어오르고 늘어지는 모양이었습니다.
통증도 잊고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던 저는….
생환을 포기했습니다.
위상 세계를 얕본 벌이었을까요.
사람들이 칭송하던 외모는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흉측한 외모와 회복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전신의 상처들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가문에 있을 수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저는, 삶을 포기하고 흐르는 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건 강물에 진물과 고름들이 씻겨나갔고 흘러내리던 피부들도 강물이 뺏어가듯 가져가 버린 것뿐.
문득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때의 저는 숲 속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분명 강 속으로 뛰어든 것이 생각났었지만, 어째서 강이 아닌 숲 속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살펴봤는데…. 왼쪽 눈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남은 오른쪽 눈으로 몸을 내려다보니 옷은 간데없이 벌거벗은 제 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곳곳에 피부가 벗겨진 듯한 흉터와 함께 새빨간 근섬유가 노출되어있었고 군데군데 파인듯한 상처와 찢어졌다가 살짝 아문듯한 상처는 고름이 흐르던 자리였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실버 나이트 울프에게 물려서 잘려나간 왼팔도 다시 자라있었습니다만…. 그 모습은 피부가 전혀 없는, 근육과 뼈와 핏줄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백금 발로 반짝이던 긴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잘리고 뜯어져 흉측한 모습이었는데, 머리카락의 색도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문득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나무에 키를 비교해 보았더니, 어림짐작으로 제 키가 4m까지 자라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 것이 아닌듯한 몸의 근육량도 보았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있을 강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눈에 이형종이 보이면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단번에 잡아 뜯어버리듯이 죽여버리고는 다시 강을 찾아 숲을 헤맸습니다.
신체 능력 또한 이해 불가능 할 정도로 늘어난 걸 알 수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네…. 더는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려 둘째 마님을 더 이상 못 본다고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었나 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크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절망 속에서 한번 포기했기 때문일까요.
그저, 이형 종들에게만 맹목적으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둘째 마님에 대한 일은 한 번도 머리에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숲을 헤매며 닥치는 대로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를 씹어먹고, 이형종이 보이면 이형종을 산채로 씹어먹으며 며칠을 헤맨 끝에 절벽을 찾을 수 있었고, 제가 있던 곳은 절벽 아래였다는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절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먼 곳에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강에 비춰본 제 얼굴은….
외눈이 되어있었습니다.
정말…. 이형종이 되어버렸다는 허탈감과 함께 허무감이 밀려왔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순간부터 또다시 기억이 끊겼는데, 끊겼다기보다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습니다.
낮에는 이형종을 찾아 찢어 죽이고, 밤에는 눈을 감고 잠시간 휴식하길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형종을 찾아 돌아다니는 하루.
이성은 존재하지만, 육체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며, 제가 일체 손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평상시는 이성을 가지고 이형종을 찾아 죽이길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 화가 나면 다시 꿈을 꾸듯 육체가 의지를 벗어나 본능으로 이형종을 찾아 죽이기를 반복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꿈을 꾸듯 몸이 움직이며 이형종을 찾아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다, 분이 가라앉으면 육체의 권한을 되찾는, 그런 삶이었지요.
숲을 돌아다니다 보면 등급을 알 수 없는 이형종들과 사투를 벌이기도 했는데, 싸우면서 생긴 상처는 이형종을 죽이고 곁에서 잠시 기다리면 상처가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금방 회복이 되었었습니다.
회복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둬도 상처는 자연히 완벽하게 아물었으니까요.
나무를 부러트려 몽둥이로 만들어 쓰길 얼마간, 우연히 벼락을 맞아 죽은 나무를 발견했는데 힘으로도 부러트리기 힘이 들 만큼 단단하게 변한 나무였습니다.
어렵게 나무를 뽑아 둔기로 다듬은 이후에는 상처를 입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어지고, 키가 다시 자라 어지간한 작은 나무의 절반 정도 되었을 때,
살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뇌를 쿡쿡 찌르는 듯한 감각을 따라 움직이면 이형종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그날도 감각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었습니다.
평소보다 느껴지던 감각이 희미해서 찾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도망가지도 않고 나무 위에 조용히 있는 것이, 버디 치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나무 곤봉을 쥐고 버디 치킨이 숨어있는 장소에 다가갔었는데, 기이하면서도…. 익숙한 악취에 가슴에 울림이 퍼질 무렵 생각해낼 수 있었습니다.
평기사 훈련 시절, 훈련장에서 동기들에게서 나던 땀냄새와 씻지 않아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였지요. 문득 소변 냄새도 나는 것이….
떨리는 가슴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나뭇잎을…. 헤쳤을 때.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이.
백인 남자였습니다.
며칠을 생존했는지 겉모습은 지저분하고 땟국물이 흐르는 모습인 데다, 이형종의 습격을 받았는지 허벅지와 등에 세 줄기의 기다란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봤을 때,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공격을 받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제 허벅지 높이 정도의 키를 가진 평범한 백인 남성이었는데,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저도 놀라서 굳고, 남자도 놀라서 굳었, 아니. 공포에 넋이 나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놀란 가슴에, 잠시간 바라보다 아, 하고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순간.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제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도망가는 남자를 붙잡으려는 듯이 주춤하고 손을 뻗으며, “잠시만…!”하고 말을 꺼낸 것.
하지만 남자는 제 말을 듣지 못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계속 달려나갔습니다.
저는, 얼마 만에 본 사람인지, 놀라고 뛰는 가슴에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잡고 남자의 뒤를 쫓았습니다.
…실수였지요. 차라리, 그 자리에 앉아버리거나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행동을 취했다면…. 그 남자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을 텐데.
제가 뒤를 쫓기 시작하자 남자는 더욱 큰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 절벽에 다다르더니 망설임 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버렸습니다.
…….
수십 미터 아래, 빨간 꽃이 핀듯한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형종이 되어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던 겁니다.
============================ 작품 후기 ============================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