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프랑의 이야기. =========================================================================
저의 이름은 플랑드르 에반스라 합니다.
제가 속한 가문은 영국의 여왕이신 아르세이어 2세께서 알디온의 성을 가문의 시조이신 로버트 멜드님께 하사하셨었고 시조께서는 다섯의 능력자를 이끌고 알디온의 이름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우시며 현재의 알디온 가문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드셨지요.
알디온 가문에는 세 무력집단이 존재합니다.
가문에서 가장 강력하며, 가주님께서 주축이 되어 마흔 일곱 명의 C 클래스 능력자들을 이끌고 계시는 레이드 팀 알디온.
그런 레이드 팀을 보조하며 뛰어난 전투 수행 능력을 바탕으로 레이드 팀을 후위에서 보조하는 알디온 정기사단 200명.
도시 인근에 생성되는 최하위, 하위 이형종의 처분과 도시의 치안 확보 및 기타 업무에 투입되는 알디온 평기사단 800명.
그 외의 기타 전투 인원들은 경비대로써 존재합니다.
그 외 레이드 팀과 기사단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인들 다수가 존재하며 그 외 가문의 기둥이 되어주시는 서른 다섯분의 장로가 계십니다.
저는 신기력 118년 5월, 가주이신 알버트 멜드 알디온 백작님의 셀 수 없이 많은 첩들 중 한 분이었던 어머님의 배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B 클래스의 뇌 속성 능력자셨던 가주님께서는 가문의 세를 늘리기 위해 왕가와 이어져 있는 한 분의 마님을 본처로 맞이하시고 수많은 여인을 첩으로 거두어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수많은 아이는 자질에 따라 나누어져 부족한 자질을 가진 아이는 모친과 함께 내쳐졌고 저와같이 약간의 자질이 있다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거두어 기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아이들 중 뛰어난 자질을 지닌 소년 소녀들은 본가의 훈련시설에서 집중교육을 받으며 알디온 기사단의 정 기사분들의 종자로 지낼 수 있었지만, 다소 부족한 자질인 아이들은 평기사로써 가문의 힘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지냈었지요.
저는, 다행히 가주님의 재능과 어머님의 자질을 다분히 이어받아 어린 나이에 기사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어 어머님과 함께 가문에서 관리하는 작은 마을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에게 안식의 장소와 순간은 고된 훈련이 끝난 밤 어머님과 함께 있는 시간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르트고 찢어진 손아귀를 쥐고 집으로 달려가면 어머님은 약 상자를 꺼내어 치료해주셨고, 방금 만든 따뜻한 빵과 맛있는 수프로 저녁을 해결하고 나면, 오늘 훈련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어머님께 자랑하듯 이야기하고, 작지만 푹신한 침대에서 어머님의 품에 안겨 잠드는 시간이…. 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행복의 순간도 잠시.
열 두 살이 되던 해 겨울의 늦은 밤. 고된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달려가 어머님의 따뜻한 품에 안길 생각으로 가득 찬 저의 마음은 10평 남짓한 작은 방에 도착하는 순간 산산조각나버렸습니다.
…빨랫감을 개던 도중이셨는지 어지럽게 널려진 옷들 사이로 공중에 떠 있는 무지개색 물방울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손에 쥐고 있던 가검을 떨어트리고 차디찬 바닥에 주저앉아 물방울만을 멍하니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문득 뺨에서 생기는 충격에 정신을 차려보니 본가의 정 기사분들이 저와 어머님의 보금자리를 흙발로 뭉개며 접근 금지를 뜻하는 노란색 띠를 물방울 주위로 두르고 있었습니다. 뺨에 받은 충격은 정기사단 한 분이 제가 정신을 차리도록 가볍게 두드려주었던 겁니다.
그 순간 어머님과 저의 하얀 옷 위로 얼룩진 발자국은 마치 현실의 낙인처럼 느껴졌습니다.
백금발의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빨려들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빛 눈동자가 미소와 어울리던 어머님은….
서른셋의 나이로 위상 세계에 빨려 들어가 생환하지 못하셨습니다.
가주께서는 비정상적인 학대와 착취 같은 미개한 행동은 철저히 배제하며 어디까지나 혈연으로 이루어진 강대한 가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를 마다치 않으셨지요.
무엇보다, 가문의 기반은 사람들과의 유대감에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저희 첩의 자식들에게 많은 신경을 쏟으셨습니다.
비록 이해가 되지 않는, 수많은 첩을 통해 많은 자식을 보셨지만, 기본적인 인품은 그야말로 귀족으로서의 본보기가 되는 분이셨습니다.
모자란 저의 판단으로 생각해보건대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가주님의 노력으로 수많은 자식은 비록 아버님이라 부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아버님이라 여기며 고된 훈련을 이어나갔는데 그중에는 저도 포함되어있었지요.
한번, 검술 훈련 도중 휴식시간에 평기사조차 되지 못하고 쫓겨난 아이들이 어찌 되었는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어두워진 분위기에 그만 휴식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대화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었습니다.
뒤늦게 그 모습을 지켜본 교관님께서는,
“그 아이들과 모친은 모두 생활비 지원과 함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주셨습니다만, 가문의 어르신들은 며칠 후 정기사의 종자로 들어간 소년 소녀들과 평기사 훈련 중인 저희를 한데 모아 정식으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난 3년간 태어난 아이는 768명, 그중 326명은 자격 미달이라는 판정과 함께 원하는 자에 한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었으며, 모친이 키우길 거부한 아이들은 모두 가문의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와 우리가 자라서 성인이 된다면 자유와 함께 가문을 지킬 검과 방패가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평범한 신분이셨던 어머님이 가주님과 같은 고위 능력자의 씨를 받아 저를 낳으셨는지가 궁금했던 저는 열일곱. 평기사가 되던 해 기사단장님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어려운 집안 사정에 불치병을 얻은 동생의 치료를 위해 그 댓가로 몸을 바치는 계약을 하셨다는 것과, 제가 성인이 되어 정식으로 평기사 교육을 수료할 경우 정식으로 계약이 완료되며 어머님은 자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이 완료될 경우 원한다면 남은 인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가문에서 원조를 해주거나 돈으로 보상해준다는 조건이었지요.
그것은 가주님의 씨를 뱃속에 품은 여인들과 공통되는 점이었습니다.
치료를 위해, 빚을 갚기 위해, 돈이 필요했기에.
…평기사단장님께서는 어머님께 가야 했을 보상금이 제 앞으로 나왔다는 것과 원한다면 어머님의 가족에 대해서도 알려주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도 몰랐던 가족에 대한 일을 알게 된 저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생각했습니다. 대신 딸을 잃은 할아버님과 할머님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보상금 전부를 어머님의 가족 앞으로 보내달라 요청했습니다.
그것으로 인연의 갚음은 다 했다 생각하며 앞으로의 인생은 가문의 기사로서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평기사가 된 이후 저의 삶은 극히 간단해졌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훈련으로 이루어진 하루와 현실에 나타난 최하위 이형종의 사냥에 투입되거나, 하위 이형종의 사냥 보조에 투입되거나, 국가의 요청으로 차출되어 영국을 지키는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만….
신기력 135년, 평기사가 됨과 동시에 저는 일본에서 온 둘째 마님의 호위와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저 백금발의 여자아이도 평기사인가요?”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둘째 마님은 저에게 관심을 표하셨고, 저는 곧 둘째 마님과 독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백금 발과 하늘빛 눈동자를 이어받고 미남자로서 사교계에 유명한 가주님의 외모를 물려받아 뛰어나다 칭하는 미색을 갖추게 되었는데 마침 평기사로써 무기 술을 훈련 중이던 저는 근처를 지나가시던 둘째 마님의 눈에 띄어 그분의 요청으로 호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플랑드르는…. 고향의 제 딸 같은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둘째 마님께서는 저보다 10살이 많은 분이신 분이셨습니다.
둘째 마님은 몇 년 전 일본의 잘못을 배상하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된 특수 능력자셨는데, 저의 생모와 같이 알디온 가문에 팔리듯 시집오신 분이셨지만 동양인 특유의 아름다움이 몸에 밴 흡사 백합처럼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여장부이신 첫째 마님과는 다르게 유한 성품을 지니신 둘째 마님은 짧은 범위의 기감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기감으로 헤아려 부드러운 마음으로 포용하시는, 마음이 넓은 분이셨지요.
그래서 과중한 업무에 심신이 지친 가주님을 마음으로 감싸주셨는데 그로 인해 가주님의 총애를 많이 받으시며 비록 저택에 매인 몸이셨지만 불편함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시곤 했습니다만….
조국을 잊지 못하였는지 간혹 달과 별이 무수하게 피어나는 밤, 하늘을 바라보며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곤 하셨습니다. 저와같이 이제 만날 수 없는 어머님이 생각나기로 하신 거였을까요.
일본에서 영국으로 올 때 둘째 마님께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셨는데 평기사에 불과한 저를 수양딸처럼 여겨주신 고마운 분이었지요. 저 또한 둘째 마님의 호위로써 그분께 생모께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 가져야 할 몸가짐과 신하된 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세계가 넓어지고, 저 역시 나이를 먹어 자람에 따라 저에게 많은 이들이 다가와 사랑을 이야기하였지만 모두 거절하며 일평생 기사로 살며 둘째 마님을 모시겠다 밝혔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늘어남에 따라 둘째 마님께서도 종종 칭찬해주시는 외모로 인해 저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은 많아져만 갔고, 그중 저에 대한 매파를 가문의 어르신들께 보내오는 귀족 가문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지는 구애와 러브레터에 가문의 어르신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비록 가문의 흔한 평기사이지만 저의 몸 한켠에는 가주님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섯불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 곤란해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을 무렵.
직접 가주님과 대면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플랑드르 에반스.”
“예, 주군이시여.”
“너의 미색은 나로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구나. 녹색 물결의 들판에 핀 한 송이 금잔화와 같도다.”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가문의 장로들은 네가 고귀한 이들의 반려로써 자리를 잡기를 바라나, 나는 그에 동의할 수 없다. 비록 성은 다르나 너는 나의 자식. 네 의지를 존중하니 네 처우는 너의 의지로 정하라.”
가문의 어르신들과 동석하신 가주님께서는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저의 판단에 맡긴다 하셨기에 그렇다면 가문의 기사로서, 둘째 마님을 모시며 살게 해달라 간청을 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은은히 웃으시며 그리하겠다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날의 대면은 끝이 났지만, 다른 가문에서 끊임없이 보내오는 구혼에 가문의 장로들께서도 저를 설득하여 정략결혼으로 보내려 하는 일들이 많아질 무렵, 저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위상 세계로의 문이.
가문의 정규 기사단인 알디온 기사단의 종자로서 교육을 받던 자들과 평기사로써 교육을 받던 자들이 위상 세계로 흘러들어 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습니다.
전문 전투 훈련을 받은 이들조차 생환율이 30%를 밑도는 수준이었지만, 생환한 이들이 가문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제가 열 일곱 살이 될 무렵 위상 세계로 빨려 들어간 소년 소녀들은 스물이 넘었으며, 스물 일곱 살이 될 무렵에는 그 숫자가 일흔이 넘어갔습니다.
442명 중 77명. 무려 17%가 넘는 이들이 위상 세계로 끌려들어 간 겁니다.
그리고 15일간의 사투 끝에 생환한 소년 소녀들과 기사들은 능력자 연합의 검사와 인증을 통해 능력자가 됨과 동시에 가문의 이름인 알디온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고 가주님 직속의 레이드 팀에 합류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45년 가을.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눈앞으로, 시야가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치며 세상의 빛을 삼켜버리는 듯이 캄캄해지는 모습이.
한켠에는 놀랍고 안타까워하는 둘째 마님의 모습이 보였지만, 15일간의 시험을 끝내고 능력자가 되면, 어쩌면 둘째 마님을 어머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되진 않을까 설렘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현실로 돌아오겠다고.
눈앞에 드러난 풍경은 언제나 보던 삼림 지역과 별다를 것 없었습니다. 알디온 가문의 저택이 있는 곳은 란티드 웰스의 이스트레드핀. 조금만 걸으면 구릉 지역과 나무들이 무성한 곳이었지요.
위상 세계로 빨려들어 올 때 비록 전투에 적합하지는 않은 예식용 갑주 차림에 무기로 쓰던 롱소드는 현실에 떨어트린 채 와버렸지만, 위상 세계에서의 생존법과 최하위 이형종의 전투법은 대부분 숙지하고 있었고 맨손 전투 술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네, 서하도 본 것처럼 그곳은 기괴한 비틀림을 지닌 위상 세계였지요.
저는 도착하고 이틀 뒤 우기를 맞이했습니다.
후후. 아니요.
가문의 생존 책자에는 수많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이 완벽하게 수록되어있었습니다. 비록 서하가 보여준 나무 방 같은 것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비를 피할 장소는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지요.
비는 4일간 퍼부은 끝에 절벽 아래 숲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호수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네? 아니요. 우기 때마다 동쪽에 보이던 거대한 산에서 많은 양의 물이 흘러넘쳐 절벽 아래 숲을 주기적으로 호수로 만든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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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