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복귀. =========================================================================
누나는 한껏 심통이 났지만 한 가닥 기대를 하고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보기엔 누나는 아빠가 막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빠는 누나 말이면 껌뻑 죽는다니까? 누나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걸?
잠시 통화 벨 소리가 울리더니 아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귀에 살짝 위상력을 돌려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 힐끔 본 누나는 아빠한테 최대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내가 이제 퇴원해도 되겠다는 말을 했다.
킥킥킥, 역시나 누나 말을 들은 아빠는 “그러냐? 알았다. 원무과에 전화해놓으마.” 하고 즉답을 했고 이내 아빠가 조금 바빠서 말이다. 잠시 후에 전화하마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나는 폰을 내려다보며 믿을 사람 하나 없네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걸 내가 실실 웃으면서 바라보니 소리를 빽 질렀다.
“뭐가 웃겨!”
“아 글쎄, 아빠는 누나 말이라면 못 들어줘서 안달인데 날 퇴원 못 하게 만들려면 은근히 쉬어야 한다는 쪽으로 말을 돌렸어야지. 그렇게 애교부리면 아빠는 보나 마나 딸바보 웃음을 흘리면서 무조건 OK 해버리는 게 당연하잖아.”
“아… 에이!”
그제서야 누나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지. 킥킥.
나는 침대맡에 있는 서랍을 열어서 검은색 면바지와 감색 셔츠에 물결무늬 검은색 민소매 스웨터를 꺼냈다. 그리고 환자복을 훌렁훌렁 벗으니 누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종이백에 보다만 책과 9일간 지내면서 쌓인 물품들을 챙겼다.
“누나, 차 끌고 왔지?”
잽싸게 옷을 입고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으니 옷이랑 신발 치수가 딱 맞네. 이건 엄마가 사온 건데 언제 내 몸 치수를 쟀대?
옷을 갈아입고 누날 바라봤는데 누난 챙겨야 할 물품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집어넣는다고 물건을 꺼내느라 부산스러웠다.
“응. 근데 물건이 많아서 다 옮기려면 두 번은 왔다 갔다 해야겠다.”
누난 아직도 내가 일반인처럼 보이나 보다. 방금 허릴 잡고 번쩍 들어 올린 건 그새 까먹은 건가?
나는 원무과에 가서 커다란 비닐백을 두 개 받아온 다음 한쪽에는 옷과 책을 다 집어넣고 나머지는 다른 쪽 비닐백에 다 집어넣은 다음 두 개를 어깨에 멨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니 그 모습을 지켜본 누나는 정말 놀랐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힘도 세지고 몸도 바뀌고……. 진짜 능력자구나.”
“그럼 가짜 능력자도 있나?”
누나는 앞장서서 나가서는 퇴원 절차를 밟으려고 했는데 접수 데스크 앞에서 아빠 이름과 내 이름을 말했더니 이미 처리 완료되었다며 조심히 가시라는 사무원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되게 빨리 처리하네.”
누나는 아무래도 병원에서 나와 집에 가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나 보다. 어차피 오늘은 금요일이고 내일은 주말이라 학교 안 가는데 이틀 동안 쉬는 거나 마찬가지구만.
프랑은 내 등에 매달려 따라오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공중에서 날아서 따라오다 사람이 보일 때마다 움찔움찔하면서 몸을 가리더니 결국 나에게 매달려서 오는 걸 선택한 것 같았다. 날 몸가림 대신으로 쓰는 건가?
내 눈에만 보이는 프랑이지만, 남자 놈들이 우연이라도 프랑 쪽을 바라보면 좀 신경이 거슬리긴 한다.
프랑의 존재를 가족들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누나는 유령을 믿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을 누른 누나는 갑자기 유령 타령하는 날보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어렸을 땐 귀신이 무서워서 찡찡거리던 꼬마가 무슨 일이래?”
윽. 프랑이 듣고 있는데! 고개를 살짝 돌리니 고양이 웃음을 짓고 있는 프랑이 보인다!
“귀신이 아니고 유령! 누난 귀신이랑 유령의 차이점도 몰라?”
“네네~ 믿지만, 유령도 귀신도 안 무섭습니다~.”
큭!
내 억지에 휘말려 퇴원하러 나오니 누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날 살살 놀리기 시작했다.
누나는 굉장히 똑똑하고 말빨도 세서 말싸움으로 진행되면 내가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억지 부리며 말꼬리 잡고 말하기보단 그냥 단념하는 게 속 편하지.
그래도 가끔씩 얼빠진 모습을 보여서 그 틈을 찌르면 한두 번씩 내가 이기기도 한다.
“실은 내가….”
삐리링뽀로롱삐롱삐롱
…말을 막 하려는데 누나의 폰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
“엄마다. 잠깐만. 여보세요. 엄마?”
살짝 엿들어볼까?
[딸? 아들이 퇴원한다고 아빠가 방금 말해줬는데 무슨 일이니? 아직 좀 더 먹고 살을 찌워야 하는데 왜 퇴원하는 거니?]
찌워?! 방금 찌운다고 한 거 맞지?!
문 앞에 서 있는 날 힐끔 본 누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바로 검지를 들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응,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얘가 자꾸 집에 가자고 칭얼거려서, 그래서 막으려고 했는데 한숨 쉬는 거 서하한테 들켜버렸어.”
[아휴, 너도 정말 그 버릇 고치랬더니 못고치구, 그러니까 자꾸 아들한테 약점 잡히고 그러는 거잖니!]
약점이라니……. 누가 들으면 누나 약점 잡고 행패 부리는 줄 알겠다!
“아, 엄마도 얘가 떼쓰면 다 들어주면서 나만 갖구 그래.”
떼쓰다니…. 정중하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면서 부탁한 거뿐인데! 그럼 온몸을 손으로 비비면서 안 들어주시는 게 없어서 종종 써먹었을 뿐이구만!
뭐 나라도 평소에 엄마 엄마 하던 아들이 갑자기 어머님이라고 부르면 닭살이 솟을 거 같긴 하다.
띵 소리가 나며 지하 2층 주차장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누나가 내리면서 한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도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 누나의 폰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게 떼쓰는 거니? 부탁하는 거지!]
“아 몰라! 이번엔 나 말구 엄마가 있었어도 이번엔 못 말렸을 거야!”
[그러지말구, 아들은 좀 더 쉬어야 하니까 살살 꾀어서 병실로 돌아가게 해....]
에이, 정말. 나는 잽싸게 손을 뻗어 누나의 폰을 뺏어서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
“어머님.”
[…….]
순간 침묵하는 엄마.
“이제 저도 몸이 건강해져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르다고 사료되어 누님께 억지 부탁을 드린 제 잘못이옵니다.”
[푸흡] “푸흡.”
누가 엄마랑 그 딸 아니랄까 봐 타이밍 맞추는 거 봐라.
“어머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알고 있사오나 소자, 이대로….”
[아, 알, 알았어. 아들! 대신 집에 가면 엄마가 해주는 밥 다 먹어야 한다?]
“응. 안 그래도 식은 반찬은 맛이 없었어. 많이 해줘.”
티비에서나 보던 이상한 고어체 쓰기도 힘들다. 엄마의 승인도 떨어졌으니 원래대로 돌아가야지.
[그래 마, 마치고 엄마가 맛난 거 많이 해줄게. 기다려~.]
결국 웃음보가 터졌는지 끊어지기 직전 엄마가 웃는 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자.”
내가 내미는 폰을 잠시 바라보다가 받아드는 누나는 한숨을 쉬…려다가 날 힐끔 바라보고 숨을 삼켰다.
“아깝다.”
내 말에 누나가 살짝 몸을 떨었던 거 같은데 내 착각은 아니겠지?
아빠가 가족 피크닉용으로 사서 엄마 앞으로 명의를 달아놓은 쉐보레 서버 밴은 평상시에는 주로 누나가 타고 다녔다. 그거 때문에 처음 누나가 타고 학교에 갔을 때 저런 미녀가 저런 밴을 타고 다닌다고 화제가 돌았었지. 그 뒤로는 미녀는 뭘 해도 유행이 된다는 걸 증명한 건지 밴을 몰고 다니기 시작한 여자애들이 늘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누나는 트렁크를 열어주고 비켜주길래 비닐백을 뒤에 싣고 밴에 올라탔다. 앞좌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고 있으려니 누나가 시동을 걸며 말을 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응?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으음……. 프랑에 대해서 살짝 떡밥을 뿌려볼까 했는데, 분위기가 바뀌는 바람에 다시 화제를 환기하는 것도 좀 그러네. 그냥 나중에 틈을 봐서 다시 말을 꺼내거나 해야겠다.
“아, 별거 아냐.”
누나는 잠시 별말 없이 커브를 돌면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서는 대로로 들어서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두 사람도 능력자 맞지?”
“어, 나이 많은 쪽이 선배 젊은 쪽이 후배.”
난 순간 그 두 사람한테 누나가 관심을 보이는 건가 하고 경계단계를 하나 올렸는데 이어서 들린 이야기는 상상 밖이었다.
“지부장이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는 뭐야? 네 능력이 지부장이란 분이 관심을 보일 만큼 대단한 거니?”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어쩌면 누나는 똑똑하니까 해결방법을 생각해줄지도 몰라. 나는 감별실과 측정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누나에게 들려줬는데 집으로 운전하면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누나는 내 이야기가 끝나니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네 능력은 탐색 쪽인데 복합 능력에 희귀한 타입이라서 많은 나라의 레이드 팀이 관심을 보일 거란 말이지? 그리고 넌 그 관심이 나쁜 쪽으로 기울까 봐 걱정인 거구.”
“응.”
역시, 최수한은 그냥 나보다 더 생각이 짧은 거 같은데 누나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딱 집어내 준다.
“넌 레이드 팀에 드는 게 싫어?”
“안 싫어. 그냥 많은 사람이 많은 관심을 보이면 그게 엄마나 아빠나 누나한테 해가 되는 방향이 될까 봐 그게 싫은 거야.”
누나는 내 말을 듣고 살짝 백미러를 통해 내 얼굴을 살피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뭐, 나한테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면 해주겠지.
잠시 이야기가 끊긴 틈을 타서 강우혁이 건네준 종이를 펼쳐봤는데 뭐 간단하게 내 클래스를 인정한다는 거랑 능력자임을 증명한다는 능력자 연합 지부장과 한국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종이들이었다. 누나도 능력자 증명서는 처음 보는지 힐끔거리면서 운전하는 게 보인다.
다시 끈으로 묶고 내려놓은 다음 최수한이 건네준 작은 상자를 열어봤는데 그 안에는 내 손바닥의 1/4만 한 크기의 네모난 까만 씰이 한 장 들어있었다. 그리고 얇은 설명서가 들어있었는데 잠시 읽어보니 능력자 인증기라고 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손목에 붙이면 동작한다고 되어있으며 이 씰은 한번 붙이면 피부와 일체화돼서 붙였다가 떼려면 피본다고 적혀있었다.
게다가 이거 한 장의 가격이 10억. 무료 발급은 첫 1회에만 한하며 그 이후 전투 중에 훼손될 경우 최대한 회수해서 반납하면 형태에 따라 10%에서 80%까지 다음 인증기를 사는데 할인해준다고 했다.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툴이라고 되어있었으며 사용자 등록을 하게 되면 이형 능력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다고 하며 덧붙여 통화기능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강우혁과 최수한이 명함을 주고 간 건가?
그나저나 이 작은 게 10억이라니. 부서지거나 찢어지면 최소 2억 최대 9억이 날아간다는 말이잖아?!
“비싸!” “비싸!”
엥? 난 옆을 보니 누나도 설명서를 봤는지 이어서 다다다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무슨 조그만 인증기가 하나에 10억이나 해?! 만약 일상생활 중에 찢어지거나 하면 꼼짝없이 십수억이 사라진단 거잖아? 협회는 무슨 생각이니? 이런 식으로 능력자들한테 장사하고 능력자들 착취하려고 하는 거야? 말도 안 돼! 항의하려면 IWO에 연락하면 되니?”
어, 어어. 능력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보면, 아니 것보다 훼손될 일이 있나? 능력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연합인데 그런 식으로 등쳐먹는 일이면 이미 소문이 나도 대번에 났겠지.
“잠깐잠깐!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디까지나 능력자 협회는 능력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데 그런 식으로 능력자들을 착취하면 당연히 소문이 나도 당장에 났겠지.”
내 말에 누나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날 힐끔 보며 말했다.
“뒷면에는 뭐라고 적혀있어? 글자가 있는 거 같은데.”
어?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속성 능력자와 회복 능력자, 특수 능력자들은 씰을 훼손당할 위험은 거의 없으며 신체 강화 능력자들은 손목에 붙이는 씰의 형태가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지정 위치의 피하 이식을 통해, 피하면 피부 아래를 말하는 거지? 이식을 통해 체내 삽입형태가 됩니다. 파괴를 위해서는 최소 C클래스 이상의 신체 강화 능력자의 전력을 다한 일격 정도의 충격량이 필요하며, 충격 시, 절단 시의 파괴 모습이 최소 천여 가지 이상의 패턴으로 협회에 등록되어있으므로…. 그러니까 나 같은 감지 타입 능력자는 부술 수도 없고 부서지지도 않는다 이거네.”
그제서야 누나도 수긍한 건지 흥분한 모습이 사라진다. 그냥 보면 되게 청순하고 예뻐 보이는데 속은 이렇게나 왈가닥이라니.
프랑은 내 손에 들린 씰이 신기한지 요리조리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슬쩍 웃어주며 설명서에 적힌 대로 왼쪽 손목에서 10cm 정도 아래 붙였더니 잠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가 씰과 피부 사이의 바람이 빠져나가고 마치 파스가 붙은 느낌이 난다.
신기해서 손으로 문질러봤는데 마치 피부처럼 미끈거리는 게 피부와의 질감이 별로 차이 안 난다.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여봐도 거슬리는 느낌도 없고 그냥 피부 그 자체군.
“느낌이 어때?”
운전이나 신경 쓰지?! 사고 나면 어쩌려구 계속 저러냐.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해주니 헤에~ 하더니 집에 가면 만지게 해달라고 한다. …설마 내 손목에서 뜯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일단 팔목에 붙인 씰… 필름? 은 놔두고 설명서에 적혀있는 사용방법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은 고급 아파트 단지의 8층에서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능력자 연합 지부가 있어서 치안도 좋고 아파트 단지 주변에 의한 재단 소속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다 있어서 누나가 의한 중학교에 들어갈 때 꽤 많은 돈을 주고 이사 왔었다. 그게 8년전이던가?
아무튼 주거환경도 좋고 인근 아파트 주민들도 대부분 상위층이라고 할 만큼 잘 사는 동네라고 봐야지. 우리 집은 50평이 조금 넘는 수준인데 평수가 큰 데는 100평이 넘는다던가?
자동차를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세워두고 짐을 들고 집에 도착하니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내 가슴 속에 가득 차오른다.
프랑은 아파트 내부가 신기한지 여기저기 돌아보기 시작했는데 회색의 정령 같은 아가씨가 거실을 돌아다니면서 가구와 전자제품들을 구경하는 모습은 꽤 진귀한 풍경인 거 같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내가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으니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건 누나는 내 머리를 살짝 건들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거실로 가서 어깨에 메고 있던 비닐백을 내려놓고 내 책을 다 빼고 음료수나 과일 같은 음식은 냉장고에 다 집어넣고 있으니 누나도 방에서 다시 나와 자기 물건을 따로 빼두고 세탁기에 돌려야 할 옷이나 얇은 이불들도 들어서 세탁실에 갖다놓으며 짐 정리를 도와줬다.
둘이서 정리하기 시작하니 내 몸통 두 배만 한 비닐백 두 개도 금방 정리가 끝나버렸다. 정리가 끝나자 누나는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데 외출복을 꺼내는 걸 보면 나갈 생각인가?
나도 모르게 감지 능력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누나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잽싸게 누나 쪽은 신경을 끊고 크고 작은 액자들에 들어가 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있던 프랑을 조용히 불렀다.
“저기가 내 방이야. 들어가서 기다려.”
프랑은 내 말에 눈이 반짝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닫혀있는 내 방의 문을 뚫고 들어가버렸다. 나도 병실에서 보던 책을 다 들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프랑은 내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크흡! 알몸의 미소녀가 내 침대 위에 앉아있다니…!
그 모습에 잠깐 감동을 먹은 나는 근 한 달 만에 보는 내 방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다행히 피규어나 태피스트리를 모으는 취미가 없어서 민망한 상황에는 당면하지 않았다! 거기다 가족들 몰래 수집하던 야망 가는 전부 옷장 구석 상자에 숨겨놨고 야동은 컴퓨터 안에 파일을 숨겨놨으니 내가 눈앞에서 틀지 않는 이상 프랑에게 들킬 일은 없다!
방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은 한쪽 면이 전부 창문으로 되어있었고 엄마가 사서 달아준 살 색 파스텔톤의 커튼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그 아래는 더블사이즈 침대가 놓여있고 왼쪽 벽에는 책상과 책장, 옷장이 순서대로 세워져 있었다.
맞은편 벽은 나무로 된 미닫이문이 벽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문을 열면 바로 누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문이 막히지 않게끔 좌우에 조그마한 책장이 있고 그 안에는 누나가 재밌는 거라며 고전 소설 같은 것들을 채워놨다.
바닥에는 엄마가 산 회색 극세사 카펫이 깔려있었고 책상과 침대 책장, 옷장 같은 것들은 누나의 취향을 반영한 원목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30인치 모니터와 컴퓨터가 올려져 있고 그 옆 책장에는 교과서를 비롯한 문제집과 온갖 잡다한 책이 꽂혀있었다.
내가 잠시 여운에 잠겨 방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책상 위에 대충 책을 올려놓고 문을 닫은 다음 밖에 있는 누나한테 내 말이 안 들리게 조용히 말을 했다.
“누나가 또 나가려는 거 같으니까 누나 나가면 서점에 가보자. 길따라 조금만 나가면 근처에 엄청 큰 서점이 있으니까 거기서 독순술 책을 살 수 있을 거야.”
끄덕끄덕!
지금은 내 침대 위에서 얌전히 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프랑은 현실로 돌아온 게 못내 기쁜지 얼굴이 상기돼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공중을 둥둥 떠다녔었다. 그럼 누나가 나갈 때까지 인증기를 살펴볼까?
나도 침대에 앉아서 아까 읽은 설명서대로 손목에 찰싹 달라붙은 인증기 손바닥을 잠시 대고 있으니 부우웅하면서 내 왼팔 주변으로 네모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오오…. 홀로그램이 벌써 실용화되다니.”
인증기 주변으로 떠오른 각종 정보화면을 보니 마치 내 분석 능력을 보는 거 같다. 하지만 내 분석능력이 초고화질 대형 LED 모니터라면 인증기의 홀로그램은 옛날 뚱뚱한 CRT 모니터 같다.
나는 인증기의 홀로그램보다 더 대단한 걸 봐서 그다지 안 놀랬지만, 프랑도 전혀 놀라지 않았지? 살아있을 때 인증기를 본 적이 있는 걸까?
“그러니까, 조작하려면 씰을 붙인 팔로 홀로그램을 터치하라고 했지?”
나는 줄곧 궁금했던 사항을 알아보기 위해 수많은 자료의 데이터베이스라고 불린다는 인증기를 조작해 나갔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몇 가지는 첫 위상 세계에서 고위 이형종을 만난 사례가 있는가, 인간이 이형종으로 변이한 적이 있는가. 위상력의 감지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였다.
그 외에 초거대 거북이의 존재라거나 클래스를 나누는 위상력 수치의 기준이 있었지만 이제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알아나가면 되겠지.
지금은 4월 중순이고 내가 성인이 되는 내년 1월까지는 7개월이나 남았으니까. 그사이에 나도 헌터로 활동할 지식을 모아야지. 그나저나 내 감지 능력이 그렇게나 귀중하다니. 일자리는 쉽게 구하겠는걸?
아무튼, 프랑도 내가 검색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어서 빠르게 검색어를 홀로그램에 터치해서 입력하고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최초의 위상 세계에서 상위 이상의 이형종… 아 그전에 일단 클래스, 이형종 분할표부터 보는 게 빠르겠다. 내가 위상 세계에서 보고 판단했던 것들은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만의 기준으로 측정됐으니까. 제대로 된 표를 보고 확인하는 게 옳겠지.
등급표와 클래스 표는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상당히 심플하게 나뉘어있었다.
[위상력에 따른 이형종 등급표]
위상급 ??? - ???
초 위 40,000,000 - ???
최고위 3,500,000 - 39,999,999
고 위 300,000 - 3,499,999
상 위 25,000 - 299,999
중상위 2,000 - 24,999
중 위 500 - 1,999
중하위 100 - 499
하 위 50 - 99
최하위 10 - 49
…최고위 위로도 두 단계나 더 있어? 게다가 위상 급은 위상력 수치조차 안 적혀있네….
이형종의 위상력 수치도 등록되어있는 걸 보면 위상력을 감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란 생각은 접어야겠다. 누구인지, 혹은 어떤 기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상력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보다.
위상 급을 보니 문득 초거대 거북이가 생각난다. 틀림없이 그 거북이는 위상급일거야.
나는 다시 클래스 분류표를 살펴봤다.
[위상력에 따른 클래스 분류표]
S클래스 ??? - ??? 전 세계 1명(행방불명)
A클래스 40,000,000 - ??? 전 세계 6명
B클래스 3,500,000 - 39,999,999 전 세계 3천 명 추정
C클래스 300,000 - 3,499,999 전 세계 6만 명 추정
D클래스 25,000 - 299,999 전 세계 50만 명 추정
E클래스 2,000 - 24,999 전 세계 200만 명 추정
F클래스 500 - 1,999 추정불가
G클래스 100 - 499 추정불가
H클래스 50 - 99 추정불가
I클래스 10 - 49 추정불가
와. A 클래스는 6명밖에 없어? 거기다 S클래스는 단 한 명뿐인데, 행방불명중이라고?
C 클래스 이상으로 올라가니 숫자가 갑자기 팍 줄어든다. B 클래스부터는 진짜 귀족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나저나 위상력 수치 분류를 보니 이형종이랑 똑같은 걸…. 최고위 이형종과 위상급처럼 수치가 가려져 있다.
나는 지금 F 클래스라고 측정실에서 들었는데 F 클래스는 위상력이 500에서 1,999사이라고 되어있었다. 높으면 1,999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고 낮아도 500은 넘는다는 말이지.
내가 각성한 시기를 기준으로 지금까지 체크했던 위상력은 지금 정확히 480인데 역시랄까, 당연히 능력자 연합에서 측정하고 분류하는 위상력 수치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의외인 건 A 클래스가 고작 6명뿐이라는 거다. 하긴, 이무기 잡는답시고 수백 명이 달라붙었다가 A 클래스 능력자 세 명이 산화해버렸으니까. 원래대로였으면 9명인가?
새삼 그 양아치 같은 이무기의 전기세례를 맞고 살아난 내가 장하다!
보통 동일 등급의 이형종을 잡는 데는 동일 등급 능력자 다섯이 필요하다고 되어있는데 A 클래스 3명으로 최고위 이형종한테 떡 박살 나버린 걸 보면 최고위 이상은 뭔가가 다른 게 있는 거 같다. 위상력 최대치도 물음표고.
그나저나 클래스를 구분하는 위상력의 수치가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돼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도움말을 보니 착용한 인증기에서 본인만 확인할 수 있게끔 자신의 위상력 수치를 측정할 수 있게 되어있다고 했다.
…뭐냐 이게. 생존학 교과서에서는 자기 위상력을 수치로 측정하지 못하게끔 시위까지 벌어지고 그랬댔는데? 외부 유출을 막으려고 전파통신방해 물질로 만든 방 안에서 측정까지 했다며? 인증기에서 직접 체크가 되면 측정기에서 할 필요가 없잖아?
검색을 좀 더 해보니 클래스 분류는 능력자 협회에서 관리하기 위한 기준을 잡기 위해 하는 거고, 자신의 실 수치를 궁금해하는 능력자가 있어서 추가 도입한 기능이라는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거기다 인증기의 불법 개조는 특급 범죄로 지정되어 있어서 인증기에 뭔가 수작질을 부린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에 존재하는 능력자 연합 특수 집행부의 능력자들이 즉시 달려든다고 했다.
한마디로 측정한 위상력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다는 말이군.
하지만 의심병이, 아니 신중한 나는 그 말을 안 믿는다.
어휴…. 아무튼 거지 같은 이세계 생존학책은 진짜…. 중요한 건 다 빼먹고 그냥 말 그대로 최소한 위상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정보만 넣은 거구만!!
하지만 내 위상력 수치를 수집해서 어따 쓰겠나 싶어서 도움말대로 인증기를 조작해서 알아보니 내 위상력은 1,857이나 됐다!
1,857!!
내가 탐색 능력으로 측정한 480을 인증기는 1,857이라고 본다는 거지? 거의 3.86배 차이네? 그래서 측정기에서는 날 F 클래스로 봤나 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자. 병원 옆 구름다리 입구를 지키고 있던 꽈리 머리 여자랑 단발머리 여자가 1200에 900 정도였으니 계산해보면 꽈리 머리 여자는 4632고 단발머리는 3474.
둘 다 E 클래스 초입이구나.
아. 위상 세계에서 섬에 모여있던 것들도 이제 이해가 간다.
제일 처음 만난 위상력 22의 긴 주둥이 마른 늑대와 큰 들쥐 암컷, 수컷 세 마리는…. 하위 이형종이었던 거다.
긴 주둥이 마른 늑대가 84고 큰 들쥐 암컷은 73 수컷은 65로 세 마리가 전부 하위 이형종이었다.
…뿔 강아지도 38.6이나 되는 게,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기습이 실패했거나 까딱 잘못했으면 진짜 황천 갈 뻔했네….
거기다, 섬에 있던 노 헤드 맨티스 두 마리는 하위가 아니라 중하위급이었다!
미친! 키가 컸던 놈이 262고 작은놈이 216이었어! 이 정도면 중하위급 중에서도 중간은 가는 거잖아! 게다가, 마지막에 근접전투를 벌인 두 꼬리 여우도 127! 중하위급이었다!
씨발. 크기에 따라서 이형종 급수가 달라진다더니, 맞는 게 뭐야!! 빌어먹을 교과서!
…새삼 가슴이 떨려왔다.
내가 알아낸걸 프랑에게 설명해주더니 프랑도 경악했는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나저나 마지막에 싸운 두 꼬리 여우가 위상력이 127이면, 갓 중하위급이 된 셈인가?
근데 난 그놈이랑 1:1로 싸워서 이겼잖아. 그걸 보면 어쩌면, 아주 조금은 나에게도 근접 전투에 소질이 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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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와 문맥의 지적도 환영합니다!
2월 4일 21:51
띄어 쓰기 수정.
2월 5일 12:00
오타 수정
2월 14일 02:05
오류 수정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