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3화 (43/517)

00043  집으로.  =========================================================================

“누나가 부적을 막 만지려고 해서 손을 쳐냈던 거에요. 함부로 말한 건 죄송해요.”

내가 먼저 사과할 줄 몰랐는지 김은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이윽고 어린 내가 먼저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는 게 여러 가지로 껄끄러운지 인상을 쓰면서 머릴 긁적이다가 그녀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냐. 함부로 부적을 만지려 해서 미안해.”

그러고 뒤돌아섰는데 그녀는 부끄러운지 귓불이 조금 빨개진 게 보인다. 우 박사님은 그런 나와 김은하를 보고 있다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얼른 측정하고 끝내자. 네 녀석에 관해서 지부장한테 측정서류도 올려야 하니까.”

그러면서 키보드의 엔터 키를 눌렀는데 검지 손가락을 올려놓은 구슬에서 은은한 물빛이 흘러나오더니 감별기처럼 내 위상력을 자극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어, 이거 설마 위상력이야? 위상 석에서 에너지를 뽑으면 이런 형태가 되는 건가?

“뭐냐. 그냥 위상력도 느껴지는 게냐?”

아 진짜! 표정도 함부로 못 짓겠네!

“뭔가 몸 안이 간질거리는데요?”

내 말 돌리기에 우 박사님은 별로 신경은 안 썼는지 그러냐? 하는 얼굴로 날 한번 보고 말했다.

“위상력의 측정이나 감별은 위상 석에서 뽑아내 가공한 위상력을 네 몸속의 위상력과 반발시켜서 그 형태나 수치를 알아보는 기구니까. 에너지에 반응한 위상력이 움직이면서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은게다.”

아, 역시 위상력이었구나. 그나저나 활발하게 움직이는 게 반발 때문이었다니. 내 몸에 별다른 저항감 없이 슬쩍 들어오길래 뭔가 했었는데…. 눈을 감고 1차 가공한 위상력이 내 몸 안에서 내 순수한 위상력과 슬쩍슬쩍 몸을 부비는 모습이 마치….

순간 귀환할 때 본 빛덩어리의 에너지 흡수 방식과 측정기의 에너지 발산 방식이 비교되면서 프랑의 영혼석에 위상력을 충전할 방법이 생각났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위상석이 필요해!

희열을 드러내지 않으며 감았던 눈을 떴는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눈동자가 한껏 치켜떠진 게 보인다. 그러면서 눈을 뜬 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보고 있는데… 뭐야? 왜들 저래?

“F 클래스…라니.”

내가 F 클래스라고?

어처구니없다는 우 박사님의 표정도 그렇고 새삼 날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두 명의 여인들을 보니 내 자질은 아무래도 능력자 중에서도 최고인가 보다. 흐흐흐흐.

우 박사님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날향해 눈길도 주지 않고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말했다.

“검사는 끝났다. 이야기해둘 테니 이제 돌아가 버려.”

엥? 이걸로 끝이야? 뭔가 이거저거 막 물어보더니 측정이 끝나자마자 볼일 없다고 쫓아 보내는 건가?

뭐 가라면 가야지. 계속 여기 있으니 주머니 속에 프랑의 영혼석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엄마랑 누나랑 아빠도 보고 싶기도 하고.

“네. 고생하셨어요.”

나는 눈도 떼지 않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우 박사님과 옆에서 뭔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한 민나영에게 인사를 하고 측정실을 나오는데 내 뒤로 김은하가 따라 나왔다.

“박사님이 틱틱거리고 재수 없게 말을 하긴 하지만 나쁘신 분은 아냐. 마음에 큰 상처도 있으신 분이시고….”

뭔가 했더니 내가 우 박사님한테 나쁜 인상을 받을까 봐 그러나 보다. 문을 열고 나온 나는 김은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박사님이 나쁜 사람 같진 않아 보였어요.”

“그러니? 그럼 다행이고.”

김은하는 내 말에 안심했는지 싱긋 웃어주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몸조심해. 죽지 말고.”

켁. 무슨 무시무시한 소릴! 전 오래오래 살 거라고요!

검사실의 자동문까지 따라 나온 김은하는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엘리베이터는 문만 달랑 있고 층수나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도 없는데 어떻게 하는 거지? 강우혁이랑 최수한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까 알아서,

띵!

…하고 이렇게 열리더니, 뭔가 카메라나 센서가 달려있나 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니 저절로 문이 닫히면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벽에 걸린 검은색 라폴리스 화분을 한번 바라보고 엘리베이터 내부를 봤는데 천장에 감시카메라 같아 보이는 까만색 돔 형태의 기기가 보인다. 살짝 탐색으로 훑어봤더니 역시 내부에 360도 자유자재로 기동 되는 렌즈가 보인다. 감시카메라 맞나 보네.

근데 엘리베이터 내부에도 다른 조작패널 같은 게 없는 걸 보면 어디 컨트롤 룸이 따로 있는 건가? 미국 영화 같은데 보면 보안이 엄중한 건물은 특정 룸에서 엘리베이터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컴퓨터와 사람의 육안으로 확인하고 조절하던데, 이것도 같은 건가 보다.

올라타서 잠시 기다리니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리면서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시 카메라에 마이크도 달렸나 보네.

[정서하 님, 복도를 따라 문을 열고 나가시면 능력자 연합 병원과 연결됩니다. 그곳의 데스크에서 안내를 받아주세요]

그리고 소리가 안 나오길래 걸어 나왔더니 엘리베이터는 다시 문이 닫히고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복도도 그렇고 검사실의 복도에도 창도 없고 전등도 없었는데 새하얗고 밝은 게 특별한 물질로 만든 건가? 혹시나 벽 속에 침입자 대비용 자동화기라도 숨겨져 있는 건가 감지를 돌려봤는데 그냥 통짜로 굳은 돌덩어리였다. 뭐야 이거, 시멘트도 콘크리트도 아니네?

좌우에 문도 없는 복도를 잠시 걸어 평범한 여닫이문을 당겨서 열고 들어가니 구름다리가 있었다.

구름다리는 전부 특수유리로 만들어져있어서 하늘부터 땅까지 모두 다 보였는데 반대편에도 평범한 여닫이문만 있고 지키는 사람이라거나 뭐 아무도 없네.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위상 세계의 절벽이 생각날 만큼 높이가 아찔하다.

반대편 문 너머를 감지해보니 능력자 협회 빌딩 1층에 있던 호화스러운 데스크의 축소 버전이 있었고 2평 남짓한 공간에 2명의 능력자와 1명의 일반인이 서 있었다.

일반인은 안내원인가? 능력자들은 몸 안의 위상력이 부정형으로 흐르는 여자 능력자 두 명이었는데 부정형은 처음 본다. 아마도 속성 타입의 능력자겠지.

신체 강화 자는 소용돌이 모양이었고 특수능력자는 나처럼 뫼비우스의 띠 형태일 테고, 저 두 명은 경비로 있는 걸 테니 회복 능력자가 둘이나 서 있을 리는 없잖아.

흠. 머리 쪽을 제외하고 둘 다 탐색능력으로 살펴봐야겠다. 이때가 아니면 탐색하다 들켰을 때 앗! 실수였어요! 하는 핑계가 안 먹힐 테니까.

주변 풍경을 구경하면서 간다는 듯이 30m 남짓한 구름다리를 천천히 걸어서 문으로 다가가며 두 명의 능력자를 샅샅이 탐색해봤다.

그런데 꽤 볼만한 육체라는 점과 부정형의 체내 위상력의 움직임을 빼면 나머지는 뭐 볼 게 없네.

둘 다 처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능력자라 회복력과 재생력이 일반인들보다 뛰어난지 피부도 하얗고 깔끔한 데다 보지도 분홍색으로 깨끗하고 항문도 하얀색이었는데, 보지의 모양이 말 그대로 전복 같았다.

프랑은 자그마한 꽃 같아서 되게 귀여웠는데.

신체 스캔을 끝내고 감상까지 끝냈는데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지 성대와 허파가 계속 떨리는 게 웃으면서 잡담을 나누는 걸로 보인다. 귀에 위상력을 집중하면 엿들을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의 대화를 엿들어서 뭐에 쓸까 싶어서 그냥 말았다.

“깔깔깔! 하튼 그랬더니 그 샌님이 제발 자길 버리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날 잡고 늘어지는데 무진장 꼴불견이었다니까

“남자가 불쌍해~.”

“뭐가 불쌍해?”

“너한테 걸린 게!”

“뭐어~?!”

문에 가까워져 가니 기가 셀 거 같은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와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끼이익.

이윽고 문을 당겨서 열고 들어갔더니 여자 능력자 두 명은 날 바라봤는데 별로 놀라지 않는 게 미리 연락을 받은 건가?

여자 두 명 중 한 명은 턱선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였고 다른 한 명은 머리카락을 꽈리처럼 꼬아서 머리에 고정한 스타일이었다.

역시 얼굴도 희고 갸름하고 균형이 잡힌 게 상당히 예뻤는데 단발머리는 눈이 갸름한 게 조금 사나워 보이고 꽈리 머리는 눈이 크고 동그란 게 얼굴이랑 어우러져서 꽤 순해 보인다.

몸매는 둘 다 허리가 조금 잘록하고 골반이 조금 나오고 가슴도 그럭저럭 있는, 보기 좋은 몸이다.

…근데 자꾸 프랑이랑 비교하게 되니까 별로인 거처럼 보여! 저 정도면 평균을 훨씬 넘어서는 외모인데!

“어서 와~ 생환한 거 축하해.”

꽈리 머리 여자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환영인사를 해줬는데 문 앞에서 들리던 부드러운 목소리는 꽈리 머리였나 보다. 단발머리는 그냥 눈을 감고 팔짱을 껴버렸다. 나랑 대화하긴 싫다는 건가?

나도 남자를 얕보고 깔아뭉개는 여자는 싫다.

문득 깡 마른 내 외모가 떠올라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구나 이해해버렸다. 그에 비하면 꽈리머리녀는 외모에 구애받지 않는 스타일인지 얼굴이랑 목소리 답게 부드러운거 같다.

“네. 감사합니다.”

난 얼굴을 안 보는 척 감지 능력으로 꽈리머리녀의 얼굴을 기억해두고 단발머리는… 흥! 아무튼, 꽈리머리녀는 위상력이 1,200 정도에 단발머리녀는 위상력이 900인 걸 보면 그리 세진 않나 보다.

두 명 다 똑같은 전투복? 같은 검은색 상·하의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워커를 신고 있었다. 상의에는 방탄조끼 비슷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질의 조끼를 입고 있었고 팔과 허벅지에도 같은 재질의 보호구를 끼고 있는 게 경비 목적이지만 전투도 상정해둔 복장인 거 같다.

안내데스크에 다가갔더니 평범하고 순하게 생긴 여성이 빌딩의 중앙 홀에 있던 여자와 똑같은 제복을 입고 서 있었는데 날 보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서하 님. 생환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왼쪽으로 가면 된다고 하길래 그쪽을 감지해보니 멀지 않은 접수대 같은 곳에 엄마와 아빠와 누나가 있는 게 보인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나는 서둘러 왼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꺾어진 복도를 지나 접수대를 향해 달려가니 먼저 엄마가 날 발견하고 뛰어오기 시작했고 그 뒤로 누나와 아빠가 차례대로 뛰어온다!

엄마와 누나는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눈 주위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는데 날 보자마자 또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날 품에 안고 손으로 등을 토닥이고 볼살이 움푹 들어간 뺨을 쓸어내리고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내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엄마와 누나의 온기에 목이 메기 시작했다.

프랑을 만난 뒤로는 덜했지만 십수 일을 위상 세계에서 보내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일부러 집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프랑마저 모습을 감춰 나 홀로 통나무 하나에 기대어 헤엄칠 때에는 정말 미칠 것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가족들의 온기만을 생각하며 버텼었다.

이제, 이제 그런 지옥 같은 경험은….

엄마와 누나 이외의 사람에게는 극도로 절제된 모습을 보이는 아빠마저도 눈이 충혈된 채 뒤에서 우리 셋을 보고 있었다. 나도 그런 아빠를 보고 있으니 천천히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수고했다. 잘…. 돌아왔구나.”

그리고 나와 엄마 누나를 함께 힘껏 껴안았는데 온몸에서 느껴지는 가족들의 향기와 온기에서 그제서야 살아남았다는 실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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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환한 뒤 9일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갔다.

수십 분을 가족들과의 재회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집에 가자고 했지만, 엄마와 누나의 결사적인 반대에 무산되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살이 좀 빠진 거 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엄마와 누나 눈에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나 보다. 계속 괜찮다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하니까 다시 울어버려서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은 듯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지.

그 후 2일 동안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전부 받으며 보냈었고 결국 과도한 영양 결핍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더니 그 뒤로 엄마와 누나가 교대로 내 옆을 지키며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전부 해와서 나에게 먹였었다.

엄마랑 누나가 해오는 음식을 7일 동안 그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면서 베짱이가 부러워할 시간을 보냈었지.

그러는 와중에 아빠는 가장으로써 일을 해야 한다며 의사이자 병원장으로 있는 개인 병원으로 복귀하셨고 틈틈히 날 보러 찾아오셨었다.

병원의 총무부장으로 있던 엄마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낮에는 누나가 날 지키고 밤에는 엄마가 와서 날 지켰었다. 엄마는 내가 처음 입원하고 2일은 24시간 옆에서 날 지키고 계시다가 3일째부터 병원으로 출근하셨는데 그 뒤로 6일까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날 간호하면서 쉬지를 않으셨다.

아빠가 말리는것도 듣지않고 밤낮을 쉬지않아 점점 눈 밑이 까맣게 변하고 지쳐가는 모습이 보여서 난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여기 있을 거라고 안 쉬면 병원 뛰쳐나갈 거라면서 협박하고 달래고 아양까지 부려서야 간호보조인 침대에 겨우 눈을 붙이게 할 수 있었다.

침대 위로 올라와서 같이 자자고 했지만 엄마는 내가 불편할거라며 딱딱하고 불편한 간호인 침대에 얇은 모포 한장만 덮으시고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리셨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에 아들인 날 걱정해주는 마음이 가득 느껴져서 가슴이 꽉 막히면서 눈물이 나올뻔했다.

나는 엄마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들어서 내 침대 옆에 눕혀 드렸다. 그리고 나도 엄마의 옆에 누워 이불을 끌어 올렸는데, 비몽사몽중에도 엄마는 손을 뻗어 날 꼭 껴안아주었다.

엄마 품에 안긴건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날 밤은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서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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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올해 36살에 1월 1일이 생일이다.

아빠는 작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새해를 1분 남겨둔 그때. 그야말로 긴장,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표정으로 집 밖에도 안 나가고 시계의 분침이 0을 향할 때까지 노려보고 계시다가 1월 1일이 되고 엄마가 서른여섯이 되는 순간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고 크게 웃으면서 옆에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엄마를 껴안아 올리고 거실을 빙글빙글 도셨었지. 그런 모습을 누나랑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보고 있었고.

그렇게 엄마는 올해 서른여섯이 되면서 위상 세계의 마수에 벗어났었다.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은 21년 전이었다. 아빠가 서른 살에 갓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대형 병원에 취업한 그 날, 우연히 병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열다섯이던 엄마한테 한눈에 반해버리면서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 꿇고 고백을 해버렸다고 했다.

엄마는 물론 옆에 같이 왔던 엄마 친구들이랑 그 옆에 있던 간호사들과 검진실 밖에 앉아있던 환자들도 그 광경을 보고 얼어버렸다고 그때 같이 있었던 엄마의 친구들 중 한 분이 말씀하셨었지.

그 뒤 아빠는 쉬는 날,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엄마를 쫒아다니다가 결국 허락을 받아내고 사귀기 시작했는데 바로 다음 해 여름. 엄마가 16살이 되면서 결혼이 가능한 약식 성인이 되자마자 사고를 치고 누나를 임신시켰다고 했다….

…….

평범한 집안의 외동딸이었던 엄마는 외할아버지한테 무진장이라는 단어도 부족할 만큼 귀염을 받으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는데, 엄마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덜컥 누나를 임신해버렸다고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한테 폭탄선언을 해버었렸다.

그리고 아빠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말했었는데 그날 그야말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나고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간 채 방에 갇혀버렸다고 외할머니가 말씀해주셨었지….

엄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었다던 아빠는 엄마가 방에 갇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외할아버지한테 결혼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 병원에는 휴가 신청서를 내고 5일 동안 물만 마시면서 외할아버지 집 대문 앞에서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무릎 꿇고 버텼었다고 했다.

물론 첫날에 외할아버지의 빗자루 찜질을 꼼짝않고 받아내고(외할머니가 미리 각목이나 야구 방망이같이 흉기가 될만한 물건을 미리 치워놓으셨다.) 그 뒤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그 자세로 끊임없이 시간을 보내던 아빠는 2일, 3일, 4일이 지나 5일째에 결국 쓰러졌었는데 그 모습을 3일 전부터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이 급하게 119를 불러서 아빠를 병원으로 보내려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왈 “남은 인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얻는 일인데 포기할 수 없다.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면 이대로 죽어버리겠다.”…라고 하면서 달려온 구급대원의 팔을 밀어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엄마는 자기 방 창가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직후 엄마도 창문에서 뛰어내려 아빠한테 달려갔고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의 설득과 엄마의 모습에 울화병을 얻어 쓰러질뻔했다나 뭐라나. 그 직후에 아빠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고작 16살의 나이에 임신 했다는것도 하늘이 무너질 만큼 충격이셨을텐데, 개 xxx 같은 자식의 애를 뱄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니 정말 참기 힘드셨을 거다.

엄마의 폭탄 발언이 있었던 그 날 외할아버지는 몽둥이를 들고 아빠를 찾아가 때려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외할머니한테서 직접 들었다.

뭐 허락 안 해주고 아빠가 죽으면 엄마도 아빠를 뒤따라가겠다고 했다는데 외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허락하셨을 거다. 외할아버지는 지금도 술만 마시면 아빠를 죽일 듯이 노려보신다.

참고로 아빠와 외할아버지의 나이 차이는 4살이다. 외할아버지가 4살 더 많으시다.

그렇게 다음 달 약혼식 먼저 올리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은 무시한 채 번개같이 결혼식을 올리고 8개월 후에 태어난 게 누나였다.

외할아버지는 결혼을 허락하는 대신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이 출산할 때까지 집에서 지내는 거였는데, 그 말을 들은 아빠는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모아뒀던 돈 일부를 써서 척 봐도 외제에 최고급 세단을 한대 뽑았다.

그리고 엄마를 매일 아침 학교에 바래다주고 저녁에 엄마를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었다고 했다.

물론 비싼 차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상담도 없이 사버린 거에 검소하게 사셨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물론 엄마까지 화를 냈다고 했는데 아빠는 단 5마디의 단어로 침묵시켰었다.

“소연이를 흉볼 놈들을 막기 위해섭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아기까지 가진 엄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을거다.

그나마 정도가 심하지 않았던것은 아빠가 31살에 잘생긴 의사였고 정식으로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결혼한 사이였다는거겠지.

엄마의 학교에도 찾아갔었다고 했는데,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했겠지.

외할아버지는 아빠가 짜증 났지만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에 그냥 돌아서 버렸고 외할머니는 한숨을 쉬었고 엄마는 그냥 더 아빠한테 빠졌지 뭐.

그렇게 엄마는 임신한 채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아빠의 관리 덕분에 찝쩍거리는 놈들과 수군거리는 이야기 없이 편하고 건강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뒷이야기가 조금 있지만, 우리가 들을 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말 안 해주던데, 대충 짐작 간다.

엄마한테 폭언을 한다든가 집적거리던 양아치들을 죄다 박살 내버렸겠지. 돈과 권력과 무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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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평범한 집안의 차남이었다. 다만,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고아셨다는 것만 조금 달랐다.

불같이 화끈한 성격의 할아버지와 표현은 안 하지만 자상하신 할머니 사이에 태어난 2남 1녀 중 둘째였다.

시작은 할아버지셨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고모가 막 태어나던 날, 서른다섯의 할아버지는 위상 세계에 끌려들어 가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셨다.

번역가로 일하셨던 할머니는 아빠를 낳으신 후 몸이 편찮아 지셔서 번역일을 관두고 몸조리를 하셨는데 고모를 낳으시면서 더 몸이 안 좋아지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일가친척 한 명 없으셔서 누구한테 도움 요청도 못 하고 국가의 보조도 받지 못한 채 고모를 낳자마자 위상 세계로 끌려들어 가시고 돌아오지 못하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홀몸으로 삼 남매를 키우기 시작하셨다.

아픈 몸을 일으켜서 먹고 살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맡으면서 번역을 시작하셨었는데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가 남겼었지?

힘들게 삼 남매를 키우시는 할머니 아래에 삼촌과 아빠, 고모는 일찍 철이 들면서 마을에서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착하고 성실한 삼 남매로 칭찬이 자자했었고 할머니는 그에 만족하고 세 자식을 보며 행복해하셨었다.

그렇게 삼촌 19살, 아빠 18살, 고모가 17살이 되었을 때 그런 할머니에게 또다시 재앙이 떨어져 내렸다.

장남 정광호, 위상 세계에서 생존 실패.

…국내 최고라는 의한 대학교 의학부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한 다음 날이었다.

할아버지의 꿈이었다는 의사를 자신이 이루겠다며 열심히 공부한 삼촌이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던 할머니와 자랑스러운 형을 앞에 두고 환하게 웃음 짓던 아빠와 고모 앞에서 위상 세계로 빨려 들어간 삼촌은 15일 후 물방울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며 할머니에게 절망을, 아빠와 고모에게는 크나큰 고통과 상실감을 줬었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할머니처럼 강하게 버틸 수는 없었을 거다.

할머니는 믿을 수 없는 정신력으로 버티며 아빠와 고모의 뒷바라지를 했고 아빠는 묵묵히 공부에 공부를 계속해 형의 뒤를 이어 국립 대학으로써는 최고인 대한 대학교 의학부에 전액 국비 지원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삼촌의 전례가 있어서인지 할머니는 기쁨보다 오열을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형도, 고모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또다시 재앙이 할머니와 아빠를 덮쳤다.

삼녀 정 수린, 고모도 아빠의 뒤를 이어 전액 국비 지원으로 대한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지만, 할머니와 형 앞에서 위상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할아버지, 삼촌, 거기에 고모까지….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으셨다. 아빠는 넋을 놓고 무릎을 꿇은 채 물방울만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신문에 한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 기사가 나갔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위로는 할머니와 아빠에게 닿지 않았고 할머니는 고모가 사라진 곳에 나타난 물방울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빠는 미친 듯이 공부하고 매일매일 대학교 운동장을 들락거리며 고모의 생환을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15일 후 기적같이 고모가 귀환했지만….

Topological Space Mental Disorder

위상 공간 정신 장애. 1급 판정.

왼팔과 왼쪽 다리가 뿌리째 잘려나가고 나체로 전신에 심각한 상처와 윤간의 흔적만을 몸에 새긴 채 생환한 고모는…….

1년 후, 능력자 정신 병원에서 목을 맨 채 자살하고 말았다.

내가 위상 세계에서 건강하게 귀환한 이튿날, 내가 제정신이라는 검사결과가 나왔을 때 아버지는 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누나가 있는 장소에서 모든 걸 말해주었다.

내가 학교에서 위상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그리고 날 보며 말해주었다.

내가 위상 세계에서 무사히 돌아와 주었을 때 가슴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가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슬픔이 담겨있는지 알게 된 날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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