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15일째, prologue. =========================================================================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가 문득 고기가 바짝 타는 냄새가 나서 모닥불 쪽을 봤더니 모닥불 근처에 꽂아뒀던 펭귄 고기가 석탄처럼 바짝 타서 바삭거리며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까닭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꾸욱 참고 몸을 일으켜 세워 나무 창과 함께 타버린 고기를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다시 3개를 다시 모닥불 앞에 꽂아놓고 육지 펭귄 깔개 위에 편히 앉았다.
1시간쯤 지나 7시가 되어 주변이 어두워지니 확실히 알겠다. 내 주변으로 빛 알갱이들이 모여들며 빛이 나고 있었다. 프랑은 이 빛의 알갱이를 진작 눈치챘던 거겠지.
가슴이 설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면 빛의 알갱이가 다 커져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생존학 책의 내용을 떠올렸지만 빛의 알갱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빛의 알갱이가 커져서 집으로, 현실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을 뿐.
빌어먹을. 그 책을 쓴 사람은 틀림없이 능력자가 아니라 일반인일 거야! 현실로 돌아간다는 게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인데 무덤덤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해버리다니!
“현실로 돌아가면 하고싶은 게 많아.”
지글지글 자글 치이익
고기가 익어가면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고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모닥불에 떨어지면서 구수한 향기가 퍼진다.
한쪽 면이 다 익은 고기를 뒤집어 다시 모닥불 옆에 꽂아넣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는 프랑을 내려다봤다.
그녀도 다시 고개를 살짝 들어 날 올려다봤는데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보드라워 보이는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형 능력자로 등록하고 몸 상태도 검사하고 능력자 클래스 테스트도 받아야 하고.”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른다.
“영어도 배우고 독순 술도 배우고, 프랑이 살았던 곳도 찾아가 봐야지.”
프랑은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프랑이 이곳에 온 지 60년이나 지났지만, 틀림없이 프랑의 가족들은 다들 살아있을 거야.”
이내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내 말에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프랑은, 달빛마저 반사할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쁨에 흘리는 눈물…? 웃음에 뭔가 슬픔이 섞여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말실수 한 건가?
다시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프랑은,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한 말이 뭔가 마음의 상처를 건드린 듯하다.
으으으음.
역시, 프랑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가족 이야기 밖에 없어. 혹시 가족들이 없는 건가?
에이! 멍청하게 생각 없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난 얼마나 멍청한거지.
쪽.
엇. 내가 머릴 긁적이면서 인상을 쓰고 있으려니 어느새 프랑은 머리를 들고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춰줬다.
프랑의 얼굴을 보니 부드러운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거 같다.
정말…. 자기도 슬플텐데 날 먼저 신경써주다니.
진짜 큰일났다.
좋아하는 감정이 계속 쌓이면 어떻게 될까? 의부증, 의처증도 사랑이 왜곡되서 나타나는 증상이랬는데, 나도…. 반쯤 발을 들이민 기분이다.
아무튼, 프랑의 고향은 가봐야지. 그녀도 표현은 안하지만 자신의 고향이 궁금할거야. 근데 난 18살인데 비자 발급이 가능한가? 어린애들이 유학 가는 걸 보면 보호자 동반인 거 같던데, 여행비자는 안 되는 건가? 여행 비자라도 미성년은 보호자랑 같이 가야 할 거 같은데…. 누나를 꼬셔볼까?
나는 영국으로 가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프랑은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줬는데 이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프랑은 후후후하면서 웃는데 달빛에 비친 그 모습도 눈이 아릴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펭귄 고기가 다 익어서 하나를 먹어봤는데 한 입 먹으니 통통한 살이 입안에서 조각조각 터져나가면서 육즙이 막 흐르는데, 태워 먹은 다섯 개가 아까워질 정도로 맛있었다!!
한 입 먹자마자 온몸이 고기를 원하는 느낌에 허겁지겁 먹으면서 미리 따둔 수분 나뭇잎도 막 뜯어서 입에 넣고 씹어먹었다.
아깝다…!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다면 좀 더 살을 잘라놓는 건데….
나무 두 개 사이에 가려진 시쳇더미 아래에서 온갖 이형종의 피에 범벅되어있을 육지 펭귄의 고기를 생각하니 정말로 안타깝다!
두께 3cm에 길이 70cm가 넘는 육지 펭귄 뱃살 꼬치 6개를 배 터질 만큼 먹었더니 배가 빵빵해졌다. 그 많은 양이 내 뱃속으로 들어가는 걸 본 프랑은 놀라워하면서 한껏 빵빵해진 내 배를 쓰다듬는데 어쩐지 간지러움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탐색 능력으로 위상력이 흘러들어 사라지는 내 주변을 감지했는데 60%까지 떨어진 일반 분석 능력과 감지로는 탐색이 되지 않아 눈을 감고 정신집중을 하니 그제서야 내 새끼손톱만 한 조그만 빛 덩어리 일곱 개가 내 주변의 공기에 있는 위상력을 흡수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프랑에게 머릿속으로 보이는 모습을 설명해주며 흘러들어 가는 위상력의 양을 체크해보니 1시간에 0.12 즉 시간당 위상력 흡수량과 똑같은 양이었다.
이건 무슨 작용 원리로 움직이는 걸까? 살짝 만져보고 싶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냥 말았다.
“혹시 프랑은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돌아가는지 알고 있어?”
그러자 바닥의 숫자를 가르키더니 12h와 24h 두 개를 가르켰다.
“12시간에서 24시간 사이?”
끄덕
“음. 그럼 아까 프랑이 내게 말해줬을 때가 4시였으니까 앞으로 20시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되는 건가.”
방긋
프랑은 이제 진정하고 거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진정을 못 하고 있었다. 흐흐흐. 앞으로 20시간 정도만 지나면 집으로 간다는 거지?
눈을 감고 손톱만 한 빛덩어리에 위상력이 모이는 모습을 정신없이 보고 있으려니 뺨에서 톡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서 찌른 방향을 보니 프랑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육지 펭귄 가죽을 톡톡 건드리며 자라는 몸짓을 취하는 게 보였다.
잠시 어쩔까 고민을 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눈을 감고 빛덩어리에 위상력이 모이는 거나 구경해야겠다.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워있으면 프랑도 자는 줄 알겠지.
적당히 시간 보낸 다음 일어나서 프랑을 재우기로 하고 육지 펭귄의 가죽 위로 드러누웠다.
가슴이 설레어서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냥 전신에 힘을 빼고 위상력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적당히 강약을 조절하면서, 그러는 와중에도 빛덩어리에 흡수되는 위상력의 모습과 일렁이는 빛덩어리를 보다 보니 어느새 5시간이나 지난 걸 알 수 있었다.
…음? 방금 뭔가를 놓친듯한 기분이 드는데.
위상력 컨트롤에 관련된 건 아니고, 주변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빛덩어리! 흡수되는 위상력!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위상력 컨트롤도 관두고 빛덩어리에 정신을 집중해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빛덩어리의 모습이 확대되면서 위상력이 흘러들어 가는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보였는데, 어쩐지 이걸 잘 봐두면 영혼석에 위상력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바로 영혼석에다 실험해볼 수는 없지. 나중에 위상석을 조그만 거라도 하나 구해서 실험해봐야겠다.
눈을 떠서 프랑을 찾…으려고 했지만 놀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서 두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프랑의 얼굴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내가 자다가 발딱 일어나니 악몽이라도 꿨나 생각하나 보다.
슬쩍 눈알만 아래로 향해 시선을 내려 프랑의 가슴골을 한번 봤다가 다시 프랑의 눈을 보며 말했다.
“프랑. 영혼석에 위상력을 채울 방법을 찾은 거 같아!”
내 말을 들은 프랑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근데 이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프랑이 왜 이러는 거지?
아. 잠자는 척 하던 거 들킨 건가.
훗, 어쩔 수 없군.
“문득 빛덩어리가 위상력을 흡수하는 게 생각나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빛덩어리도 일종의 위상석과 비슷한 에너지 덩어리라는 걸 알 수 있었거든? 그래서 위상력이 흡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이걸 자세히 봐두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단말야! 그러니까 현실로 돌아가서 위상석 조그만 거라도 하나 구한 다음에 위상석에 위상력을 넣는 실험을 하면 될지도 몰라! 그러면 위상력을 걱정하지 않고 프랑도 얼마든지 벼락을 쓰거나 할 수 있게 되지 않겠어?!”
숨도 쉬지 않고 손짓을 섞어가며 말을 쏟아내고 있으니 프랑은 '그러니까 잠도 안 자고…. 아니, 그러니까. 잠깐…!' 하는 표정으로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내가 말을 멈추질 않으니 결국 얌전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이때다!
“그러니까, 아주 안 쉰 건 아냐?”
슬쩍 프랑의 눈치를 살펴보며 말을 끝내자 정말 말 안 듣는 동생을 보는 눈빛으로 한숨을 폭 하고 내쉬는 프랑. 저 눈빛을 어떻게 아느냐면, 누나가 자주 저런 눈빛을 했거든….
아무튼 딴청 피우며 눈을 돌려 섬 주변을 망원 능력으로 쓱 훑었는데 감지에 이형종 하나가 걸려들었다. 저 놈은, 도망간 두 꼬리 여우?
어라?
저 녀석은 언제 섬 위로 올라왔는지 섬의 서쪽에 쌓아둔 이형종 사체 더미 뒤에 숨어서 죽은 이형종의 살을 정신없이 뜯어 먹고 있었다.
시체 더미를 탐색 범위 안에 넣기 싫어서 서쪽 끝에 모아두고 난 동쪽 끝에 있었는데 그러다 있다 보니 두 꼬리 여우도 함께 내 탐색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나 보다. 그러다 망원 능력을 돌리는 순간 들킨 거고.
그 녀석은 어지간히 배고팠는지 육지 펭귄 한 마리를 거의 다 뜯어먹은 상태였다.
나에게 들키지 않은 이유는…. 불빛 때문에 내가 있는 위치가 저 녀석에게 들통 났을테지, 그러니까 녀석은 멀리 돌아 반대편으로 돌아서 들어온 거 같은데 그게 저 녀석의 목숨을 일시적이지만 살렸다.
만약 탐색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면 프랑도 있고 나도 탐색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었으니까, 살살 헤엄쳐서 다가오고 있었다면 당장 나무 창을 쏴서 죽여버렸을 테니까.
물에 폭삭 젖어 볼품없는 모습에 며칠을 제대로 못 먹었는지 갈비뼈가 드러나며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털이 뽀송뽀송할 땐 몰랐는데 꽤 오랜 시간을 제대로 먹지 못했나 보다.
바로 두 꼬리 여우의 몸을 투시하고 분석해봤는데 예상대로 지방은 거의 없고 근육도 상당히 줄어있었다. 위상력은 한창 싸움이 벌어질 때 조금 흡수했는지 33까지 올라가 있었다.
…26을 넘긴건가? 그럼 하위 이형종? 근데 노 헤드 맨티스 만큼이나 압박감? 위압감 같은건 안 느껴지는데.
내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쓴웃음을 짓던 프랑은 내가 미동도 않고 한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그제서야 내가 보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 뭐가 있나~? 하는 표정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도망갔던 두 꼬리 여우가 돌아왔어.”
그녀는 내 말에 놀라서 몸을 띄워 여기저기 살펴보지만, 여기서는 안 보일걸?
“쌓아둔 이형종 시쳇더미에서 지금 밥 먹는 중이야.”
잠시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환한 달빛과 별빛이 밤하늘에서 쏟아지니 사물을 판단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거기다 내 주변에 떠다니는 빛 덩어리도 있고.
하지만 반대로 이 빛덩어리때문에 저 여우가 자극받아 도망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섬 중앙의 나무까지 날아가서 두 꼬리 여우를 보고 다시 돌아오는 프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열심히 시체를 파먹고 있는 두 꼬리 여우를 봤는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어쩌긴, 죽여야지.
일단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그사이에 저놈이 도망가면 냅두기로 하고 남아있으면 싸우겠다고 프랑에게 말하니 걱정스러워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ㅁ난 좀 쉬었으니까 저 여우는 내가 지켜볼테니 프랑은 이 기회에 자두도록 해.ㄴ
도리도리!
ㅁ무슨 일 있으면 꼭 깨워줄테니까 좀 자두는게….ㄴ
도리도리!!
ㅁ하지만 프랑도 자야….ㄴ
도리도리도리!!!
…과연, 내가 안잔다고 막아설 때 프랑의 기분이 이랬을까. 저번의 복수라는듯이 그녀는 계속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거부했다.
ㅁ…알았어. 대신 조금이라도 졸리면 자야해?ㄴ
끄덕!
왠지 한숨이 나올 거 같은 기분이다.
잠시 빛덩어리의 크기를 체크해봤는데 자정보다 조금 더 커지고 밝아져 있었다. 앞으로 12시간 정도 남았나?
두 꼬리 여우는 마지막에 도망쳤을 때보다 몸이 조금 더 커져 있었는데, 5cm 정도 자란 걸로 보였다. 폭싹 젖은 털때문에 긴가민가하네.
나는 밤새도록 놈을 감지하며 위상력 컨트롤을 연습했고 프랑은 그런 날 보며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자 나는 육지 펭귄 가죽 옆에 놔둔 발톱 검과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나무 창을 보다가 발톱 검을 들었다.
최하위 이형종 한 마리.
내가 발톱 검을 드는 모습에 프랑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내가 직접 맞붙을 생각인걸 눈치챈 걸까. 그녀는 내가 나무 창을 날려 잡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생각해봤다. 기습이나 원거리에서 공격이 아니라 근접으로 최하위 이형종 하나 상대하지 못한다면 그게 정말 능력자일까? 하고.
물론 내 주 능력은 보조형이라고 할 수 있는 탐색 능력이다. 하지만 감지와 분석으로 모든 행동에 보너스를 주는 굉장한 능력이다. 거기다 위상력을 소비해서 신체 능력도 대폭 올릴 수 있다.
이정도 능력으로도 최하급 이형종 하나 정면승부로 잡아내지 못한다면…. 웬지 난 영원히 뒤에서 보조 탐색자로 살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프랑에게 생각하던 바를 말하니 그녀는 이내 진지한 모습이 되어서 양손을 꼭 잡고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이곳 위상 세계에 떨어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근접전투를 앞에 두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도 요동치고 있었다.
이럴 땐 진정제를 한번 봐줘야지!
뚫어지게 그녀의 알몸을 바라보고 있자 프랑의 진지한 표정은 점점 사라지면서 반쯤 울상이 되고 얼굴도 조금씩 밝아지며 우물쭈물 살짝살짝 몸을 비틀고 손도 움찔거리면서 유두와 보지를 가리기 위해 살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쯤!
“좋아. 진정됐다.”
한 곳만 제외하고!
내 말을 듣고 벙찐 표정을 짓는 프랑의 모습이 귀엽다.
킥킥. 처음 만났을 때는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나는 오른손에 쥔 발톱 검의 손잡이에 힘을 주고 천천히 아침 식사 중인 두 꼬리 여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도망을 갈까 봐 발톱 검은 등 뒤로 숨기고 천천히 이형종 시체 더미로 향했다.
자박차박
발치에 흙과 자갈이 뭉개지고 핏물이 고인 웅덩이를 지나가며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냈다. 거리가 멀지 않으니 금방 탐색 범위에 시체 더미가 들어오고 바로 두 꼬리 여우도 들어왔다.
계속 걸으며 시체 더미에서 50m까지 가까이 갔더니 그제서야 귀가 쫑긋하면서 식사를 중지하는 두 꼬리 여우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뜬 상태의 탐색으로 이형종을 바라봤더니 사체 더미에 가려진 두 꼬리 여우의 모습이 물빛 그림자처럼 보이며 시쳇더미를 통과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열 감지 카메라로 보면 이런 모습일까? 내 경우에는 열 감지가 아니라 위상력 감지 카메라겠군.
약간 방향을 틀어 시쳇더미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놈도 긴장되기 시작하는지 내가 있는 방향으로 귀를 쫑긋 쫑긋거리며 몸을 움찔거린다.
천천히 거리를 줄이면서 시체 더미 너머로 두 꼬리 여우가 시야에 보이게 계속 걷다 보니 그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모꼴의 귀, 붉은색과 흰색의 털이 상하로 나뉜 자그마한 여우의 얼굴과 몸통, 검은 털로 둘러싸여 있는 네 발과 그 뒤로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끝이 하얀 꼬리.
모습이 시쳇더미에서 드러난 부분은 물빛이 사라지고 제 모습과 색으로 돌아왔고 그 뒤에 완전히 시야에 넣으니 두 꼬리 여우의 몸 주변으로 은은한 물빛이 둘러싸여 있는 게 보인다.
눈을 보니 공포와 적개심이 섞여 있는 게 싸울지 도망갈지 고민하는 표정이다. 만약 무기를 보인 채로였다면 도망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 무기는 노 헤드 맨티스의 앞발을 잘라 만든 검이었으니까.
거리가 20m까지 줄어드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는 모습이 보이길래 도발할 요령으로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들어서 땅바닥에 피 묻은 흙을 저놈에게 걷어차며 살짝 뿌렸다.
흙 알갱이 몇 개가 놈의 얼굴에 튀었더니 놈은 살짝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더니 이내 날 보며 적개심을 피워올리기 시작한다.
주둥이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르거리는거 같은데 소리를 안내….
와우우웅! 우오아아앙!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울음 소리에 움찔할 뻔 했지만 겨우 참았다. 늑대의 하울링이랑 비슷한데 소리가 좀 더 얇고 날카로운 느낌이다.
전투태세로 들어가는지 두 꼬리가 좌우로 갈라져서 하늘거린다. 날 향해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한껏 이빨을 드러내고 눈빛에서는 적의가 줄줄 흘러넘치는 게 싸울 준비 만반인 거 같다.
10m까지 다가온 걸 보니 더는 도망갈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나도 준비해야지.
몸을 살짝 숙이고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을 뒤로 뻗어 어깨너비로 벌린 다음 등 뒤에 숨겨뒀던 발톱 검을 뒤로 늘어뜨리고 왼손에는 뿔 송곳을 뽑아들어 견제로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으우우우우옹.
난데없이 무기 두 개가 나타나니 놈도 좀 당황했는지 멈칫하면서 위협을 한다. 특히 내 오른손의 발톱 검을 경계하는 게, 노 헤드 맨티스의 앞발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으아아앗!!”
그 순간 전신에 위상력을 가속시키고 땅을 박차면서 두 꼬리 여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까아아아앙!
두 꼬리 여우도 쇳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순간 정신이 극도로 조여지며 놈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4m까지 달려든 놈은 뒷다리에 힘을 주며 날 향해 왼쪽으로 높이 점프하는 것과 동시에 엉덩이를 내 쪽으로 살짝 향하며 두 꼬리를 상하로 나뉘어 찔러온다!
“흡!”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이 찍어오며 내 머리를 꼬리,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리듯이 뻗어오며 내 오른팔을 노리는 꼬리 두 개!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차듯이 오른쪽으로 뛰어들며 두 꼬리를 향해 발톱 검을 사선으로 힘껏 올려 베었다!
쓰악!
놈의 속도는 약간 줄어들었는데 나는 오히려 조금 빨라진 이 상황에서 내 눈에 두 꼬리 여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지는게 보였다. 이대로면 자신의 꼬리가 반으로 잘려나갈 거라 생각했는지 빠르게 다시 꼬리를 회수하려는 게 보였는데.
내가 더 빠르다!
서걱!
두 꼬리 중 하나가 발톱 검의 날에 잘려 반 토막 났다.
키애애앵!
여우는 단번에 두 꼬리 중 하나가 잘린 것에 고통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날 바라본다.
공중에 흩날리는 여우의 털 사이로 왼발을 땅에 딛고 뒤이어 오른발로 밀듯이 땅을 박차 이제야 땅에 내려서려는 여우를 향해 뛰어들며 왼손으로 뿔 송곳을 여우의 얼굴로 내지르고 오른손의 발톱 검은 놈의 꼬리로 다시 내려 벤다!
사각! 키아아앙!!
놈은 꼬리를 포기하고 뿔 송곳에서 얼굴을 피하며 황급히 옆으로 펄쩍 뛰어오르는데 그 옆으로 꼬리가 엉덩이까지 줄어들어 짧아진 모습과 함께 두 토막 난 꼬리 두 개가 튕기듯이 날아간다.
펄쩍 뛰어오른 여우를 쫓아 나 역시 앞으로 덮치듯이 달려들며 오른발을 힘껏 내디디고 상체를 크게 움직이며 발톱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싸아악!
새까만 털로 뒤덮인 뒷다리가 잘려나가며 빨간 피가 흩뿌려지고 격통이 느껴지는지 크게 떠졌다가 이내 질끈 감기는 여우의 눈이 보인다.
께에엥!
공중에 뿌려진 피들이 몸에 묻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 털썩하고 나가떨어지는 여우의 뒤를 쫒아 세 다리로 미친 듯이 땅을 긁어내며 도망가려는 여우의 허리를 향해 다시금 종 베기로 발톱 검을 내려치자 뼈를 끊고 살을 가르는 느낌이 발톱 검을 타고 올랐다.
석둑
단번에 잘려나간 두 꼬리 여우의 허리 사이로 내장이 울컥거리며 튀어나오는데 여우는 앞발을 버둥거리고 몸을 들썩거리며 도망가려는 듯이 끊임없이 두 앞발을 버둥거렸다.
깨에에엥! 깨에에에에엥!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경련을 일으키는 두 꼬리 여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서서히 비명이 잦아들고 버둥거리는 움직임도 줄어들더니, 주둥이로 피를 왈칵 토하고는 혀를 쭉 내밀고 죽어버렸다.
옆에서 나와 여우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프랑이 그제서야 환한 표정으로 천천히 날아오는 게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내가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허억! 훅! 후욱!”
참았던 숨을 내뱉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한껏 조여진 정신이 원래대로 풀어지며 주변도 원래의 속도로 돌아온다. 뭐지?
처음에는 여우의 속도가 느려지는 걸 확실히 인지했지만, 싸움이 시작되어서 바로 생각을 지우고 여우를 죽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는데….
문득 위상력의 잔량을 확인해보니 130까지 떨어져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350 가까이 썼다고?
프랑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환하게 미소 짓는데 그녀의 눈에는 내가 싸우는 모습이 완벽해 보였나 보다.
두근두근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나도 그녀의 미소에 마주 웃어주었다.
…확실히 분석 능력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꼬리를 자르고 뒷다리를 베어내고 허리를 끊어쳤지만, 근접 전투에 이렇게나 위상력을 많이 쓰다니….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듯한 느낌에 원인이 있는 거 같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장으로 남은 위상력을 돌리면서 두 꼬리 여우의 사체를 내려보고 있으니 울컥하듯이 위상력이 천천히 파문을 일으키며 놈의 시체에서 퍼져 나온다.
내 주변에 떠 있던 빛덩어리들은 그 위상력을 빨아먹듯이 흡수하더니 곧 환하게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내 모습이 가려질 만큼 환한 빛을 뿜어내는 일곱 개의 빛덩어리들.
직감적으로 느꼈다.
돌아간다.
집으로.
내 가슴에 매달려있던 프랑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곧 눈물을 흘리며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빛덩어리들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자. 프랑.”
물방울 같은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살짝 키스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도 날 바라보고 있으니 이윽고 정신이, 육체가 한곳으로 빨려 나가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윽고 주변 풍경이 급격하게 늘어지며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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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거대 거북이, 정서하가 그런 이름을 붙인 존재는 공간이 일렁이는 느낌과 함께 그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독특한 능력.
위협적인 능력.
처음 만났을 때 두 감각을 느낀 거북이의 눈은 그 후로 줄곧 정서하를 쫒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전까지 존재하던 방향을 향해 거대한 머리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물과 그 물 위로 솟아있는 나무들뿐. 그러나 초거대 거북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지 하릴없이 그가 존재하던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쉬이이익.
수십 킬로미터 아래 자신의 앞발에서 뱀의 쇳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초거대 거북이.
-그는 저대로 두는 것이 가장 낫다.-
쉬이! 시이이익!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쉬이이이익!
-허면 어찌하여 그를 죽이지 못했는가.-
쉬이익….
-극한의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 몇 번의 벼락을 더 맞았다면 죽었을 것도 맞다.-
쉬이!
-죽음의 순간에 그의 능력이 폭발해버렸다면 어찌했을것인가.-
…쉭!
-당초 네놈이 잡스러운 것을 탐하려했던 것이 잘못이었거늘.-
쉬이이.
-네놈의 생각 없는 행동이 그의 성장을 촉진 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어지간한 고층 빌딩 크기의 앞발을 슬쩍 들어 올리자 그 아래 머리통을 제외한 전신이 깔려있던 이무기는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슬금슬금 길다란 몸을 움직였다.
쉬이이이….
-기가 찰 노릇이군.-
이무기는 기분나쁘다는 듯 구름 위로 솟아있는 초거대 거북이의 머리통을 노려다봤다.
그러길 잠시, 저 멀리 보이는 산맥에 있을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스르륵 기어가기 시작했다.
가길 잠시. 다시 고개를 돌려 구름을 넘어 하늘 끝까지 솟아올라 있는 초거대 거북이의 머리를 올려다본다.
쉬이!
-그리하라. 허나 죽게 되는 건 네놈일 것이다.-
…쉬이.
초거대 거북이의 감응에 이무기는 괜히 이상한 느낌이 들던 위상석을 호기심에 탐하려 했던가 살짝 후회를 했지만….
이내 잊기로 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이번처럼 무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저 거북이는 너무 생각이 많아.
어차피 피고 지는 세상, 놔두면 알아서 굴러갈 것을.
이무기는 그리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서하: 나도 이제 능력자다!
프랑: (짝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