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12일째, 섬. =========================================================================
나무 창을 수십 발 날린 오른쪽 어깨와 팔이 욱신거린다. 남은 위상력의 잔량을 확인해보니 200까지 떨어진 게 보인다.
이마로 땀이 흐른다. 심장이 쿵덕거리면서 전신으로 뜨거운 피를 보내서 그런지 온몸에 땀이 흐르고 후끈거린다.
“후우.”
나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탐색 능력을 뇌에 투사하면 놈들이 고통에 겨워서 바르르 떨고 그랬을까? 효율이 100% 이상 늘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면 위상력 컨트롤을 할 때, 위상력이 뇌는 관통하지 않았었지. 그거랑 상관이 있는 걸까? 만약 평범한 사람들에게 탐색 능력으로 스캔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잠시 위험한 생각을 했지만, 머릿속에서 내용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노 헤드 맨티스 두 마리를 보았다.
큰놈은 배가 터져서 실 같은 내장이 뿜어져 나와 있었고 몸통 여기저기에도 부리에 찍힌 자국과 앞발톱의 관절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작은놈은 더 한 모습이었는데 한쪽 앞발은 뿌리째 잘려나갔고 몸통과 배는 꼬리에 여러 번 꿰뚤리면서 겨우 몸통과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여섯 다리 중 성한 다리는 하나도 없고 몸통에 한발, 배에 두 발의 나무 창이 박혀서 땅속에 틀어박힌 게 마치 곤충 표본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운이 좋게도 두 마리의 노 헤드 맨티스가 스스로 패싸움에 난입하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최하위 이형종들이 노 헤드 맨티스한테 달라붙어서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면 28발의 나무창으로는 턱도 없었겠지.
나는 남은 1발의 나무창을 손에 쥐고 프랑을 돌아보았다. 창을 날릴 때마다 힐끔 보인 그녀는 양손으로 주먹을 꼭 쥐고 내가 창을 던질 때마다 제발 맞으라는 듯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었지.
“가서 정리하자.”
가서 죽어가는 육지 펭귄 한 마리도 처리해야 하니까. 내 말에 흥분한 표정으로 날 돌아본 그녀의 눈이 갑작스레 동그래지는 게 보인다.
뭘 봤길래 놀래?
일단 위상력을 마구 흡수하면 다음 단계로 진화하면서 상처가 어찌 될지 모르니 살아있는 육지 펭귄과 두개골이 드러나서 다 죽어가는 긴 주둥이 마른 늑대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야.
날 향해 손짓하려는 프랑에게서 눈을 떼고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내려 물속으로 입수했다.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이형종의 잔해들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최대한 물이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숨을 쉬며 헤엄쳐서 섬으로 향했는데 하늘에서 날 내려다보며 따라오는 프랑의 표정이 어째, 감격? 행복? 아무튼,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내가 20마리나 되는 이형종을 잡은 게 그렇게 기쁜가?
위상력을 사용하고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버린 수영 덕분에 금방 섬에 다다를 수 있었다.
3일 만에 뭍으로 올라오며 땅을 밟으니 대지에 굳건히 서 있는 이 안정적인 느낌이 정말 가슴이 설레도록 감동스럽다!
…그런데 이형종들이 죽으면서 몸에서 뿜어낸 위상력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내 주변으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일단 저놈부터 먼저 죽이고. 뭐, 위상력은 나한테 흡수되지 않을 거라 짐작은 했으니까.
그사이에 체내의 위상력이 25까지 오른 육지 펭귄은 기면서 내장을 막 쏟아낸 주제에 상처에서 거품이 나며 내장이 점점 몸 안으로 딸려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징그러운 재생 속도다.
…혹시 이거, 진화하려고 하는 순간인 거 아냐?
3m까지 다가간 나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새액새액 숨을 쉬면서 날 노려보며 증오의 불길을 태우는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흠, 프랑의 눈에 비교하면 썩은 동태눈깔 같은걸.
미안. 잘 가라.
퀘에에에에!
나무 창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육지 펭귄은 괴성을 지르며 한쪽 날개를 내 쪽으로 휘둘렀는데 날개에 묻은 피와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던 핏물들이 내 몸으로 날아와 묻어버렸다.
이런….
몸을 돌려 피한다고 했는데 얼마 못 피하고 온몸에 핏물이 묻으면서 줄줄 흐른다. 고작 두 팔로 얼굴을 가리는 게 고작이었다니. 다 죽어가는 놈 한 마리 뿐이라고 너무 긴장을 풀었나 보다.
근데 나한테 피를 뿌리다니, 무슨 뜻이지?
내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범벅이 돼버리자 옆에 있던 프랑은 깜짝 놀랐다가 바로 분노에 찬 눈길로 주먹을 부르르 떨며 육지 펭귄을 노려보는데, 그 모습을 나도 모르게 봤다가 움찔해버렸다.
프랑이 진짜로 화난 모습은 처음 보는데? 나한테 오물을 뿌려서 화가 난 건가? 만약 전기를 막 쓰지 말라고 막지 않았었다면 이놈은 홀라당 구워졌을 거 같다. 벼락에!
그만큼 화난 모습에 억지로 시선을 돌리며 육지 펭귄의 절반쯤 붙어버리고 지금도 재생을 하는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푸욱.
창끝이 생살을 가르면서 들어가는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져온다.
방심한 걸 심각하게 반성하며 탐색 능력으로 확인한 놈의 심장에 두말없이 창을 들어 올려 찔러넣자 바르르 떨다가 여전히 날 증오하는 눈빛을 보내며 숨을 거두는 육지 펭귄.
감촉이 끔찍했지만, 안 죽이면 내가 죽을 테니까.
살아남은 놈들은 없는지 탐색 능력으로 주변을 살펴보다 운이 좋게 심장을 빗겨나갔는지 옆구리에 사선으로 나무 창을 꽂은 채 아직 숨이 붙어있는 다른 육지 펭귄도 있었다.
나무 창이 대각선으로 몸을 관통하고 땅에 박히는 바람에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다른 육지 펭귄도 날 증오스러운 눈으로 노려보고 주둥이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
푹!
한 마리도 심장을 부숴 숨통을 끊어놓고 머릿가죽도 다 벗겨지고 한쪽 눈알도 흘러내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긴 주둥이 마른 늑대도 찾아가 목뼈를 찔러 부수며 숨통을 끊었다.
둘 다 위상력이 25 가까이 올라있었는데 몸 상태가 울끈불끈하고 재생도 하려고 하던 걸 보면 체내에 쌓인 위상력이 26이 되는 순간 하위 이형종이 되는 건가?
아아, 역시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세계 생존학이랑 이형 생물학은 어떻게 생존할지는 대강 가르쳐 주는 데 정작 중요한 부분은 죄다 빠트리고 가르쳐준 느낌이야.
3일 뒤에 현실로 돌아가서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좆고딩이 어디서 겨우 생존한 다음 구라친다고 할지 모르지. 내가 생각해봐도 정말 평생 써야 할 운을 다 써서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아직도 고위 이형종에 포함해야 할지 고민 중인 거인 프랑에 최고위 이무기에 크기가 50km가 넘어가는 초대형 거북이라니. 마지막에 거북이는 이형종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킥킥. 그래, 남이 믿어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생존학에서 빠진 부분은 내가 보충해주면 되는 거지. 위상 세계에 처음 빨려 들어간 곳에서도 고위 이형종을 만날 수 있다거나, 위상 세계 한 곳을 한 사람만 쓰는 게 아니라거나.
하지만 역시나 드는 생각은 과연 사람들이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다.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얼마든지 많다고 생각한다. 지식이 많거나 지혜가 뛰어나거나, 못해도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은 삶에서도 경험이 나보다 월등하게 많겠지.
그런데도 좀 부실한 생존학 정보라거나 생물학 내용이라거나…. 일반 서민들이 이형 능력자로 각성하는 걸 막기 위해 책의 내용을 손봤다는 음모론이 자꾸 떠오르지만, 지금의 내가 알 방법은 전혀 없다.
딴생각을 하며 한참 죽은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눈앞으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의 프랑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뒷짐 지고 상체를 약간 옆으로 숙이며 내 눈을 바라보는데 내가 이 늑대 놈들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 조금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내 표정이 그녀의 눈에는 멀쩡해 보였는지 얼굴이 밝아지며 내 주위를 살살 떠다니기 시작한다.
전기를 다룰 수 있게 된 이후로 자주 떠다니네. 뭐 덕분에 프랑의 작고 귀여운 꽃잎이나 커다란 가슴이 중력을 거스르는 모습이 잘 보여서 좋지만!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누드 패션쇼에서 걸음을 옮기는 여자 모델의 사타구니를 보면 허벅지가 튼실해서 사타구니가 살로 가득 차 빈틈이 안보이던데, 프랑의 사슴 같은 다리는 허벅지를 딱 붙여도 음부 주위에 삼각형으로 공간이 생기는 게 정말 비교가 된다. 그 덕분에 그녀가 암만 허벅지를 오므리고 가리려고 애를 써도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쉽게 노출이 되어서 감상하기 좋았지!
아무튼, 이겼다. 20마리의 이형종과 싸워서 이긴 거야!
“원거리에서 치사하게 창만 날렸지만, 어쨌든 20마리 이형종과 싸워서 이긴 건 이긴 거지?”
웃으며 말하는 나에게 절대 치사한 게 아니라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부정하는 프랑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음모론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이 아름다운 유령 아가씨랑 앞으로 오래오래 함께 지내고 싶으니까. 쓸데없이 벌집을 들쑤시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아.
“그나저나 역시 이 녀석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위상력도 내 몸으로 흡수가 안 되네.”
아까부터 주변에 떠돌던 이형종 들의 위상력이 내 몸으로 들어오지 않고 조금씩 내 주변으로 흐르다가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내 말에 프랑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방긋거리며 내 주변을 날아다니는데, 왜 저러지? 그냥 일반적인 감정은 쉽게 알 수 있지만, 단어로 이루어진 내용은 난 못 알아 듣는 단 말이야.
“무슨 일 있어? 아까 나무에서도 그렇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러자 프랑도 열심히 손가락으로 내 주변을 가르키는데 내가 못 알아듣자 답답해하는 거 같다. 거기다 입을 방긋 방긋거리는 게 단어도 길고 두 가지 단어로 한가지 문장을 말하는 거 같다.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두 다리를 바동거리는데 어지간히 답답한가 보다.
“아~ 미안해 미안. 일단 이것들부터 정리하고 바닥에 알파벳 쓸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미안.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몸을 좀 움직이면서 흥분을 식혀야겠어.
프랑은 내 말에 이내 미안한 표정이 되더니 두 팔을 뻗어 내 등에 업혀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프랑도 육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나 애정이 철철 넘치는 스킨쉽을 해오는데 감촉을 느낄 수 없다니! 마음이 아프다!
소매로 뺨에 튄 피를 닦아내며 초등학교 운동장 넓이만 한 섬을 돌아보았다. 사방 온통 피바다에 스무 마리의 이형종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더해서 섬 주위의 수면에는 이형종 시체 조각들도 둥둥 떠다니고.
제정신이라면 이곳에서 머물 생각을 안 하고 떠나는 게 정답이지만.
일단 시간도 오후 4시가 지나고 있었으니까 섬을 정리해두고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든가 해야지. 며칠 만에 겨우 밟은 땅이라 다시 헤엄치고 싶지가 않다.
난 돌아다니며 이형종의 시체를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저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마음이 꺼림칙해서…. 시야에 안 보이게 멀찍이 한곳에 모아둬야지.
아무래도 위상 세계에서는 시체의 부패 현상이 현실이랑은 다른 거 같아 그냥 놔둬도 썩는 냄새나 뭐 그런 게 금방은 나지 않지만 피와 내장을 흘리면서 나자빠져 있는 모습을 계속 보면 정신 건강에 좋지 못할거같아.
아무튼 널려있는 시체를 모으면서 불로 태우든가 땅을 파서 묻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안될 거 같다.
귀찮거든!
태우려면 잘 마른 나무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 주변에는 전부 피에 절어있거나 수분 나무라서 불을 피우기 힘들어. 묻으려면 땅을 파야 하는데 뿔 송곳으로 이형종 시체 20개가 들어갈 구멍을 팔까? 그러니 무리.
그러는 와중에 몸통에 두 발, 배에 세 발을 맞아 나무 창에 표본이 된 듯 꿰뚫려 죽어있는 노 헤드 맨티스와 어부바하듯이 함께 꿰뚫려 있는 두 꼬리 여우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서보니 사체는 더 엉망이었다.
양 앞발은 몸통에 붙어있는 관절 부분이 두 꼬리 여우에게 물어뜯혀 덜렁덜렁거리고 몸통과 배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끊어지기 직전에 뒷다리도 이곳저곳을 씹혔는지 죄다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탐색 능력으로 본 거랑 똑같은 모습이지만 색깔이 입혀지니 리얼리티가 확 바뀌네. 물론 탐색 능력도 약간의 색상이 있지만 풀컬러랑은 아무래도 비교가 되지?
그나저나 앞발이 정말 진짜 외날 칼같다. 여러 번 이형종의 몸통을 가르고 뼈를 끊어냈을 팔인데 날이 멀쩡해 보인다.
저 단단한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머리통을 수차례 내려친 거 같은 오른쪽 앞발도 날만 무뎌진 게 칼날의 강도는 내가 들고 있는 뿔 송곳과 비슷할 거 같다. 그나저나 이거 칼날이 약한 거야 저 늑대 대가리가 단단한 거야?
“이거 무기로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앞발톱에서 날의 길이는 60m. 몸통에서 시작되서 관절에 한번 꺽이고 거기서 몸통의 절반쯤 되는 길이에서 관절이 생기면서 한 번 더 꺾이는데 그냥 칼날 달린 팔만 잘라내고 쓸까?
주저앉아 칼날 등을 만져봤는데 서늘하고 까슬까슬하면서 미끈한 느낌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일단 뿔 송곳니를 꺼내 칼날이 멀쩡한 앞발톱의 관절 부위를 내려찍어 팔에서 뜯어내려 했는데 은근히 힘이 드는 게 칼날뿐만 아니라 각질도 굉장히 단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면승부 따위 처음부터 생각도 안 하길 천만다행이다.
관절 부위에서부터 칼날이 시작되기 전까지 쭉 뻗은 부분을 손으로 쥐어봤다.
대충 손잡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13cm고 칼날 부분은 62cm라서 마치 외날 한 손 검 같은 느낌이다.
한 손에 완벽하게는 안 잡히지만, 힘을 주고 휘두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 발톱 창처럼 손잡이를 갖다 붙인 것도 아니라 막 휘두른다고 문제가 생길 리도 없고.
그나저나 역시 감촉이 안 좋아. 그래도 마치 일본의 카타나 같이 휘어진 게 날은 카타나와 반대로 나 있었지만 날카로운 게 무기로 쓸만해 보였다. 이 감촉만 빼고.
무게는 발톱 창보다 약간 가벼운 수준이었는데 이리저리 휘둘러보자 쉬이익 쉬이익 하는 소리가 맘에 든다. 이 감촉만 빼고.
…아 진짜!
문득 교복 주머니에 보우 드릴을 만들어 쓰고 챙겨놓은 끈이 생각나서 꺼내서 둘둘 감는데 13cm 전부를 칭칭 감을 만큼은 안돼서 손으로 잡는 부분만 적당히 감아서 묶었더니 꽤 마음에 드는 녹색 검이 됐다.
즉석에서 검 한 자루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본 프랑은 역시 대단해~ 하는 표정을 하면서 박수를 쳐줬었는데 검 모양인 발톱 검을 보고 뭔가 감회에 젖은 표정이 되었다.
사실 관절부를 찍어서 분리하고 끈으로 손잡이 부분에 감은 게 전부인데….
“그럼 마저 정리할까.”
시체를 전부 섬의 서쪽에 모아놓고 피도 별로 안 묻고 멀쩡한 육지 펭귄 모피를 발톱 검으로 벗겨서 양지 바른 곳에 말끔히 펴놨다. 밤에는 저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지.
육지 펭귄의 두툼해 보이는 뱃살도 발톱 검으로 두께 3cm로 포를 뜨듯이 살을 발라내고 나무 창의 껍질을 벗겨 하얀 속살이 드러나게 다듬은 다음 어묵 꼬지 꿰듯이 꿰었더니 두 마리에서 11개 분량이 나왔다.
이 정도면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겠지?
“육지 펭귄은 무슨 맛이 나려나?”
육지 펭귄 고기를 구워 먹을 준비를 해놓고 마저 정리하러 주변을 돌아다녔다.
프랑은 정리가 다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굉장히 기쁜 듯 이리저리 날아다녔는데 아까부터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과도하게 좋아하는 듯한 느낌이거든?
아무튼, 고기를 씻어서 피를 빼면 좋겠지만, 섬 주변은 죄다 마시기에 불안한 환경들뿐이라서 씻기도 꺼림칙하다.
예를 들면 바닥에는 물에 불어터지고 있는 사체 조각들이 잔뜩 가라앉아있고 수면 위에도 사체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바람에 따라 핏물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었는데, 그냥 이대로 구워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뭐냐, 스테이크도 익히는 방식에 따라 웰던, 미디엄, 레어가 있는데 레어는 그냥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더라고! 그러니 저대로 구워 먹어도 별문제는 없을…거야.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들은 피에 젖지 않은 것들만 모아서 쌓아놨다. 혹시나 부족할까 봐 섬 중앙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를 토막 쳐서 가지고 내려왔다. 수분이 좀 흐르고 있지만 뭐 피워올린 모닥불에 집어넣으면 장작으로 쓸 수 있겠지.
도망가버린 두 꼬리 여우가 생각났지만 멀쩡한 나무 창 11개도 회수했고(꼬치 막대가 되어버렸지만) 투창기에 발톱 검에 뿔 송곳까지 있으니 거의 다 자연 위상력과 거의 동화해버려서 거의 남지 않은 이형종의 위상력을 보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하위 이형종이 될 확률은 없다. 그러니 오는 순간 그놈의 제삿날이 될 거다.
마지막으로 시뻘건 피로 뒤덮인 땅과 피 냄새가 조금 거슬리는데…. 그냥 땅을 다 뒤집어버릴까.
그러다가 눈을 반짝 반짝거리며 날 보고 있는 프랑이 있어서 그냥 관두기로 했다. 솔직히 전투의 흥분이 조금씩 사라지니까 피곤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까 프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흥분해서 일부러 대화를 거절한 것도 미안했으니까.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6시가 되었다. 물론 태양이 위치한 곳에 따라 대강 예상한 시간이지만.
아무튼, 오늘은 섬에서 쉬기로 했으니 모닥불을 만들 생각으로 다시 보우 드릴을 만들어(끈은 녹색 검의 손잡이에 묶었던 걸 다시 풀었다.) 위상력을 움직여 무진장 빠른 속도로 회전시켰더니 마른 풀 같은 것도 안 넣었는데 불이 확! 하고 피어올라서 깜짝 놀랬었다.
우와. 빠르기도 무진장 빠르게 하면 그냥 불이 붙는구나.
아무튼, 바로 작은 풀이랑 땅에 떨어져 바짝 마른 수분 나뭇잎 등을 모아서 제대로 불을 피워올린 다음 만들어둔 육지 펭귄 고기 꼬치 5개를 모닥불 옆에 꽂아 굽기 시작하고 프랑을 돌아보았다.
타닥거리면서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프랑은 여전히 옆에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불을 좋아하나 보다. 불을 피울 때마다 옆에서 구경하네.
나는 프랑과 눈을 마주치고는 바닥에 뿔 송곳으로 알파벳을 A부터 Z까지와 숫자 0에서 9까지 적어놓고 말했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한 건지 알려줘. 혹시 아는 단어일지도 모르니까.”
그러자 똑바로 알파벳을 하나씩 선택해나가는데 받아적었더니 두 단어가 완성되었다.
transition phenomenon
그리고 두 단어를 더 붙였다.
of reality
… 오브 리얼리티는 알겠는데 트란지션 페노메논?
슬쩍 프랑의 눈을 바라봤는데 얼굴이 조금 밝아진 게 흥분한 거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해를 못 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슬쩍 웃으면서 걸어와 내 옆에 앉으려 하길래 펭귄 깔개 옆의 자리를 내줬다.
그랬더니 또 즐거워하면서 내 옆에 엉덩이를 붙여서 앉는 게, 몰라도 상관없으려나? 나한테 문제가 있었다면 프랑이 저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리 없으니까.
근데 리얼이 진짜니까 리얼리티면 현실감? 현실성? 트란지션은 뭐더라… 이동이랑 관련된 단어든가.
아무튼, 고기가 타려고 해서 방향을 바꿔서 다시 꽂아넣고 프랑을 바라보니 알파벳을 다시 손가락질한다.
15 days
…? 15일?
today
오늘? 오늘이 …15일째라고?
“오늘이 15일째라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프랑을 보며 외쳤더니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내 주변을 가리켰다!
맞아! 내 주변으로 위상력이 흡수된 이유! 주변의 위상력을 흡수하면서 빛무리들이 생긴다고 했었어! 귀환의 전조현상!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탐색 능력을 집중해서 내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말대로 희미하게 위상력이 응집되고 있는 게 보였다!
“어, 어떻게 된거야? 오늘은 12일째인 줄 알았는데?!”
놀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프랑을 보았는데 그녀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 하, 스- 하.
심호흡을 하면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위상력을 돌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 오늘이 15일째라니! 그러고 보면 의심 가는 부분이 몇 군데가 있다!
첫 번째로 거인 프랑을 만나기 직전, 피곤에 정신을 잃었을 때! 두 번째로 거인 프랑의 포효소리에 정신을 잃었을 때! 마지막으로 초거대 거북이랑 만났을 때!
특히 초거대 거북이와 만났을 때는 하늘에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는데 고작 20분 만에 물안개가 걷히고 나서 먹구름 한 조각 없는 밤하늘이 됐었지! 으아~!
어쩌면 초거대 거북이와 만난 그 순간에 3일이 지났을 수도 있었잖아?!
가슴이 뛴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이제 곧 가족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날 거 같다…!
“흐끅…….”
정신없이 모닥불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북받치는 눈물에 제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목이 메는걸 억지로 참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등에서부터 전신으로 따뜻함이 퍼져나가서 살짝 눈을 뜨고 등 뒤를 돌아보니 은은하게 빛나는 프랑이 내 등을 껴안고 있었다.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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