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2화 (32/517)

00032  11일째, 위상 세계.  =========================================================================

초거대 거북이가 사라지고 드러난 밤하늘을 보자 조금 불안해졌다.

분명 거북이를 만나기 전에는 6시였는데 20분이 지나고 물안개와 구름이 지나가자 나타난 건 해 질 녘의 노을이 아니라 보름달이 뜬 밤하늘이었으니까!

중간에 비어버린 시간이 있다는 게 조금 불안해졌지만…. 설마 수십 수백 년이 지난 건 아니겠지?

끄응….

깊게 생각하면 어쩐지 손해인 거 같아서 그냥 간단하게 11일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방금 만난 거북이를 떠올려보니 새삼 위상 세계는 아직 인류에게 전부 알려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자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입에 게거품 물고 반박하겠지만.

현실에 돌아가서 이곳에서 겪은 일을 말할 때 거북이에 관해서는 숨겨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냐, 아마 거짓말도 탐지할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안 물어보면 나도 대답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일단 생각은 해둬야지.

현실로 돌아가지도 못했는데 뒷일부터 걱정하다니, 진짜 사서 걱정하는 팔자다.

그나저나 내 부탁을 들어주다니…….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그들이라니, 누굴 말하는 건지 확실히 말해줘야 알지. 하지만 상황을 보면 이형종 들을 말하는 거 같긴 한데.

다시 칠흑같이 검지만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던 검은 눈이 생각난다.

흠. 나는 갓 각성한 별 볼 일 없는 능력자인데, 누굴 미워하고 자시고 간에 일단 여기서 살아남기도 벅차구만! 초거대 거북이를 봤더니 이제 뭘 봐도 놀라지는 않을 거 같아!

놀라진 않겠지만 중 상위 이형종을 만나면 겁은 먹을 거 같다.

아무튼, 현실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이형 생물학부터 알아봐야겠다. 크기가 수십km 단위의 이형종이라니. 저런 거북이 몇 마리만 현실에 나타나도 인류가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겠군.

이계 생물학에도 수많은 이형종들이 수록되어있지만 그건 대부분이 최하위급이고 가끔의 하위급과 어쩌다가 한 두 번씩 나오는 중급뿐이었다. 고위급이나 최고위급 같은 건 등록도 안 되어있다고.

뭣보다 그 거북이는… 최고위급을 넘어서 초급? 초절급? 같은 이름을 붙여야 할 거 같은데!

그러니까 초거대 거북이는 내가 이해할 범주를 넘어선 존재라고.

근데 양아치 이무기 그놈은 최상위 이형종이면서 물속에 들어오기 싫어서 번개 질을 해댄 건가?

넌 그냥 고위 이형종으로 내려가라!

초거대 거북이를 만나고 났더니 왠지 가슴에 답답하고 먹먹한 기분이 많이 사라져서 어느 정도 기운도 나는 게 신기하다. 생각해봤을 때 보통은 그 거대한 모습에 겁에 질려 벌벌 떨어야 했을 텐데, 그 눈 때문인가?

아무튼, 이제 프랑만 나오면 완벽할 텐데…. 심장을 울리는 아름다운 몸과 이쁜 미소를 떠올리니 가슴에 콕콕 찌르는 느낌이 나면서 조금 아프다.

후우.

이제 양아치 이무기에 관해서는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기왕 시작한 수영이니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봐야겠다.

나는 다시금 힘차게 발을 휘저으며 통나무 조각에 몸을 싣고 서쪽으로 멀리멀리 나아가기 시작했다.

4시간 동안 머릿속에 기록된 프랑의 모습을 찬찬히 돌려보며 헤엄쳐왔다.

중간에 배가 고파져서 벨트도 한 입 뜯어먹으면서 헤엄쳤더니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보통 5시 반쯤부터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하니까. 시간도 그쯤 됐겠지.

그럼 물안개 속에서 20분을 보냈지만, 현실은 최소 8시간이 지났다는 건데 문제가 하나 있다.

별거 없는, 아니 생각에 따라 크게 별거 있는 문제지만….

내가 직접 체감한 시간으로 15일인지 아니면 거북이를 만났을 때처럼 알지 못한 이유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도 15일에 포함되는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만약 거북이를 만나는 사이에 15일째가 넘어가 버려서 귀환하지 못하게 됐다면?

…….

아…. 진짜, 생각하는걸 관 둘 수도 없고.

15일째가 되면 보통은 능력자로 각성하고 생존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하면 몸 주위에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 빛의 알갱이들은 위상력을 흡수해 점점 커지다가 일정 수준이 되면 원래 현실에 있었던 장소에 나타난 물방울과 반응해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었지.

그 뒤에는 다시 위상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나 들어가서 다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생존학에 나와 있진 않았지만, 레이더나 헌터들이 자기가 운영하는 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위상 세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위상력이 필요한데 두 번째부터는 자신의 체내에 있는 모든 위상력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했었지. 세 번째 네 번째가 되면서 위상력이 늘어나면 점점 이동하는데 드는 위상력의 양도 줄어들고.

돌아오는 방법은 위상 세계 이곳저곳에 있는 빛의 알갱이를 이용해 돌아온다고 했다.

차이점은 현실에 물방울은 안 생기고 위상 세계에 들어가서 빛의 알갱이만 발견하면 바로 되돌아 나올 수 있다는 점이군. 물론 되돌아 나올 땐 주변의 빛의 알갱이에 자신의 위상력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양은 일정하지 않다던가.

I등급이나 H등급들처럼 위상력 컨트롤을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위상력을 쏟아붓느냐고 할 텐데 빛의 알갱이만 발견하고 거기에 손을 갖다 대면 빛 알갱이들이 알아서 위상력을 흡수해서 귀환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위상 세계에 한번 들어가면 육체에 브레이크가 걸리는지 나왔다가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 얼마나 오랫동안 못 들어가는지도 말 안 해주고.

어쨌든 두 번째부터는 소지품을 챙겨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부피에 제한은 없지만, 무게에 제한은 있어서 최대한 필요한 것들로만 가볍고 많이 챙겨서 목표로 한 위상 세계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걸 보면 아무래도 갈 수 있는 지역도 선택이 가능한 거 같다.

그게 아니라면 필요한 것들로만 챙긴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지.

“하…….”

하지만 난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싫어질 거 같은데. 거기다 일단은 고등학생이라 미성년자로 분류되서 임의로 위상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걸 들키면 능력자 협회의 제재도 받을 테고.

아, 미성년자는 위상 세계에 일체의 접근이 허락 안 된다. 19살이 되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하던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고.

프랑은 괜찮은 걸까.

잠시 프랑 생각에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믿기로 했으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내 감지 범위 안에 들어오는 생명체가 보였다. 이어서 여러 마리가 우루루 들어오는 게 그냥 민물고기 같은데 마치 바다 생선들처럼 여럿이 모여 몸집을 불리는 습성 같아 보여 신기하게 보였다.

위상력도 없는 평범한 물고기. 이리저리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난다.

그러고 보면 밑바닥 여기저기서 곤충이나 벌레들이 움직이는데 저것들 수중 생물이었어?

땅속에만 있고 한참을 안 나온다 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그중에는 가재나 게같이 생긴 것도 보이고 쪼그만 돌멩인 줄 알았더니 돌멩이인척 하는 소라게였다는걸 알 수 있었다.

“와. 갑자기 생물이 막 감지되네.”

앗 제길, 또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런 평범한 생물들이 많아지면 저것들을 먹고살 이형종도 나올 거 같은데.

해는 점점 많이 떠올라서 주변으로 아침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지난밤 동안 열기가 식고 조금은 차가운, 맑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나는 좋아한다. 그런 아침 공기를 가슴 깊이 마시면 건강해지는 느낌도 있고 나는 밤낮이 바뀐 올빼미형 인간이 아니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사실은 게임하느라 날밤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게 다지만.

열심히 피부로 위상력을 돌리며 피부가 물에 불어터지는걸 막고 있으려니 냉기도 어느 정도 함께 막아주는지 체온이 떨어져서 몸이 떨리거나 하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으니 바로 열량, 칼로리다.

2일에 가까운 시간을 수영만 하니까 살이 미친 듯이 빠진다. 게다가 수영의 영향인지 팔과 다리도 좀 길어져서 키도 170cm에 가까워졌다!

롱다리라니…. 조금 기쁘다.

몸무게는 50kg까지 줄었는데 지방이 거의다 사라지고 인터넷에서 본 체지방 5%의 몸매처럼 변했다. 하지만 지방이 너무 적어 뼈와 관절이 두드러지는 모습에 근육이 살짝 붙은 모양이라 폼이 안 산다……. 교복도 너무 헐렁해져서 몸을 휘감는 게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피부에 여드름도 완전히 사라진 데다 머리카락 뿌리 쪽은 직모지만 나머지 부분은 반곱슬처럼 변해버려서 인상도 완전히 변해 날 알던 사람도 다시 보면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볼 거 같다.

한마디로 잘생겨졌다!

문제는 단시간에 살이 너무 빠져서 볼살도 홀쭉해지는 바람에 너무 해골 같아 보인다는 거다.

“생체 스켈레톤인가. 킥킥.”

잘생겨졌다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프랑의 외모에 비교하면 난 그냥 지나가는 일반인 A 지…….

뿔 송곳을 한 손에 쥐고 벨트를 풀어서 한 입 뜯어먹었다. 배고플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뜯어먹은 게, 위상 세계에 들어와서 뜯어먹은 양보다 더 많다.

남은 건 120cm로 한입에 4cm씩 뜯어먹었으니 30회분. 10일 치 남은 건가?

…….

슬쩍 발밑을 헤엄쳐서 지나가는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지만 저걸 잡을 방법 따윈 모르니 그림의 떡이군. 물 밖이라면 낚시라도 시도해볼텐데.

아무튼 좀 더 주변 감시에 집중해야겠다. 혹시나 이형종이 나타나면 그래도 위상력으로 신체 능력 강화 방법을 깨달았으니 어느 정도 저항은 할 수 있겠지. 뿔 송곳도 있고.

다시 3시간이 지나 8시가 됐더니 위상력이 1이 오른 게 느껴졌다. 이동한 거리를 보니 9일째 오후 5시부터 지금까지 39시간 동안 196.7km를 이동했다.

이야. 9일간 이동한 거리보다 2일 다 돼가는 시간 동안 헤엄친 거리가 더 기네.

나는 왼손으로 주머니를 잡고 주머니 너머로 느껴지는 영혼 석의 감촉을 잠시간 느끼다 다시 손을 놓고 통나무 조각을 잡았다.

이제… 통나무 조각 없이 헤엄쳐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거 같다.

통나무 조각 속에 수분이 점점 침투해가는 걸 탐색 능력으로 보고 있었거든. 처음 붙잡은 뒤로 계속 물속에 대부분 잠겨서 나랑 함께 200km를 이동해왔으니 내 몸통만 한 통나무 조각도 이제 지칠 때가 됐지.

몇 시간 전에는 위상력을 움직여서 통나무 속으로 밀어 넣어서 수분을 움직여볼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끄트머리를 살짝 뜯어내서 위상력을 움직였더니 팎! 하고 쬐끄만게 터져나가 버리는 모습에 기겁해버렸다.

이야~ 그땐 진짜 식겁했지. 사전 테스트의 의미를 절대 잊지 못할 수준으로 깨달아버렸다고 할까.

주변에 떠다니는 나뭇가지 같은 것들은 많은데 전부 작아서 내 몸을 어느 정도 지탱도 못 해줄 정도였고 그 외에는 죄다 생나무거나 물속에 가라앉아있는 것들뿐이었다.

만약 통나무 조각이 사라지면 전신으로 수영을 시작해야 할 거다. 그렇게 되면 온몸에 위상력을 두르며 현 상태를 유지하는데 위상력 회복량을 대부분 써버릴 테니 빠른 이동도 못할 거 같다.

응?

그러다 문득 생나무에 위상력을 넣어서 수분을 움직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다시 살짝 배가 고파졌다.

이런 식이라면 하루 6끼를 먹는 셈인데 남은 벨트의 양으로는 5일밖에 못 버틸 거야. 한숨을 쉬며 일단 진행방향에서 가장 가까운 수분 나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 밖으로 1m 정도 솟아 나와 있는 나무였는데 임시로 저 나무에 매달려서 나뭇잎이라도 뜯어 먹어야지.

파지지지지직!

“으그그그그아악!!”

순간 터져 나오는 전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심장 부근에 갑작스레 터져 나온 전기에 심장마비 걸릴 뻔했다!!

급작스러운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마치 전기 쥐덫에 걸린 쥐새끼처럼 파르르 떨다가 위상력을 겨우겨우 돌려 숨을 고르려니 심장이 쿵 기덕 쿵덕거리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으아, 헉. 뭐, 뭐야?”

하지만 아픈 건 둘째치고 전기가 영혼 석에서 터져 나온걸 감지했는데,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 겁이 덜컥 났다!

한 손을 내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서 심장을 달래고 주머니를 열어서 직접 육안으로 확인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의 수면에서 사르르 떠오르는 자그마한 얼굴.

양 손바닥을 붙이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머리.

가지런하게 정리된 깔끔한 머리카락.

살짝 짙고 가늘면서 기다란 예쁜 눈썹.

오똑한 코와 앵두 같은 입술에 찹쌀떡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뺨과 사슴의 눈 같은 초롱초롱한 예쁜 눈동자.

미안함과 걱정이 뒤섞인 저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흘러내린다.

헤엄치는 것도 멈췄다.

정말 간절히 보고 싶었던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내 눈물에 그녀도 덩달아 크고 예쁜 눈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가느다랗고 예쁜 두 손을 뻗어 살며시 내 뺨을 쓰다듬는다.

비록 감촉은 느껴지지 않지만 마음은 확실히 닿았다.

“프랑……!”

한동안 끅끅거리면서 울고 있었더니 프랑도 눈물을 흘리며 내 뺨을 쓰다듬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날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수십 시간 동안 내 심장을 잠식하던 공포와 두려움이 해소되면서 밀려오는 기쁨과 서러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프랑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억지로 울음을 참고 말했다.

“무사해서, 흐끅,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 말에 활짝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리는 프랑의 얼굴은 양 볼에 흐른 눈물 자국과 어우러져 복잡한 감정에 울렁거리는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몸은, 몸 상태는 괜찮아? 이상은 없는 거야? 벼락이 그렇게나 많이 치고 나갔는데……!”

벼락에 두드려 맞던 순간과 고통이 생각나고 뒤이어 프랑 없이 사방이 칠흑처럼 어둡고 잘 보이지 않는 밤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홀로 헤엄치던 순간이 떠올라 또다시 가슴이 북받친다.

하지만 그보다 프랑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녀는 공중으로 몸을 떠올려 알몸을 드러내더니 잘 보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가르켰다.

그래서 눈물을 훔치고 뭔가 달라진 게 있나 싶어서 천천히 그녀의 알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풍만한 유방과 끝에 달린 앙증맞은 유실, 이어서 탄력이 넘쳐 보이는 배와 세로로 약간 갈라진 귀여운 배꼽을 지나 매끈한 아랫배를 거쳐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녀의 보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가늘고 긴 다리를 보는데 시선을 다시 그녀의 보지로 올렸더니 치골을 살짝 덮고 있는 자그마한 게 손가락을 놀려 간지럽혀주고 싶은 털이 보인다. 그런데 털의 숫자가 조금 더 줄어들고 짧아진 듯한 거 같은데….

그녀의 아름다운 알몸을 감상하다 보니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눈앞에 그녀가 계속 보이는 것도 안정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겠지. 덩달아 아름다운 육체도.

“…제모?”

그러자 두 손으로 보지를 가리며 볼을 부풀리면서 화난 척 표정을 짓는 프랑.

두 뺨에 살짝 보이는 눈물 자국 덕분에 일부러 화난 척하는걸 알 수 있었다. 날 신경 써주고 있는거겠지?

아무튼 화난 척, 이지만 화난 건 화난 거니까.

제모가 아닌가? 뭐가 달라졌나 다시 이쁜 얼굴과 몸의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있는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보고 다시 얼굴을 바라봤는데. 어라?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프랑의 어깨의 윤곽선을 타고 흐르는 연기를 주시해서 보고 있으니 조금씩 반짝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그래서 프랑의 몸 전체를 샅샅히 살펴보며 좀 더 뚫어지게 바라봤더니 영체의 윤곽선을 타고 흐르는 연기가 여기저기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이 반짝거리면서 빛나고 있어!”

그러면서 프랑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뺨 주변이 묘하게 밝은 게 보였다.

뭐지? 날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돌린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허벅지를 조금씩 비비는 모습이 꼭 부끄러워…하는 건가? 왠지 흥분한 거 같기도 하고…….

너무 뚫어지게 바라봐서 저러나 싶었지만 어쨌든 내 말이 맞냐고 물어보니 움찔하면서 고개를 황급히 끄덕거리는 프랑.

허둥거리는 느낌이 꼭 나쁜 손장난 하다가 엄마한테 걸린 아이처럼 보인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어흠! 아니, 나 말고. 내 이야기 아니거든!? 진짜로!

…아무튼, 그녀는 내게 다가오면서 이내 몸을 물속으로 담그그그그극!!!

부들부들!

끄으으으으.

으, 으어어. 오늘, 전기 마사지 좀, 화끈하게 하는데?

그녀의 발이 물에 살짝 닿는 순간 온몸으로 수백 볼트의 전류가 몸속을 관통하는 느낌에 또다시 바들바들 떨면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프랑은 황급히 발을 빼고 위로 솟아올랐지만 이미 내 몸은 지져질 만큼 지져져서 몸이 잘 안 움직여졌다.

물속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 수면에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잘 안 보이지만 프랑이 어쩔줄 모르며 물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또 전기가 퍼질까 봐 나한테 다가오지도 못하고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데 일단 잘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비틀며 위상력을 체내 전체로 돌려서 받은 전기충격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뻣뻣해졌던 몸이 좀 풀리면서 겨우겨우 수면 밖으로 올라와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공중에서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울먹거리면서 날 바라보는 프랑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프, 프라아아아앙……”

후우. 후우.

“부, 불만이 있으면. 우리, 마, 말로 하자. 응?”

굳은 얼굴을 움직여서 억지로 웃으며 말했더니 그녀는 결국 으아아앙 하고 울어버렸다.

아, 울려버렸네. 근데 우는 모습도 귀엽군.

화는 안 났다.

사실 내가 그녀한테 추행을 하고 그녀의 알몸을 더듬듯이 살펴보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 전기자극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지!

사실 방심하고 있어서 그렇지 적어도 물에 피부가 불어나는 걸 막기 위해 위상력만 계속 돌리고 있었다면 방금전의 전기 자극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 거다.

거기다 프랑도 새로 생긴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전기 능력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한 것도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난 반곱슬이 더욱 곱슬거려진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는데 그 모습에 죄인처럼 내 눈치를 살피던 프랑은 다시 움찔해버렸다.

……음. 이걸 약점으로 삼아서 프랑에게 이런저런 못된 짓을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라면 틀림없이 죄책감에 몸을 맡겨오겠지.

“괜찮아. 새로 생긴 능력인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시무룩해져서는 좀처럼 표정이 펴지지 않는다. 거기다 기분이 다운돼서 그런지 몰라도 영체의 색도 약간 어두워지는 거 같고.

본의는 아니지만 날 공격했다는 충격이 저렇게 컸나?

언제나 환하고 밝던 그녀의 모습이 약간 어두워지니 눈으로 보는 질감이 더욱 살아나는 거 같아서 눈을 부릅떴었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리고 다시 그녀에게 말을 했다.

“으흠. 그렇게 미안하면, 나중에 내가 하는 부탁 하나 들어주기. 어때?”

나는 시무룩해져 있는 프랑이 걱정스러워서 순수한 흑심으로! 천연덕스럽게 나중에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고 강요했다!

사실 저렇게 죄책감 때문에 시무룩해져 있을 때 피해자가 밝은 모습으로 특정 제안을 해 주면, 대가성? 아무튼, 그런 쪽으로 죄책감을 분산시켜서 기분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심리학책에서 본 거 같거든.

난 부탁이라는 걸 강조했지만, 그녀의 성격이라면 꼭 들어줄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약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부탁이라면 다 들어줄 거 같긴 하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프랑은 표정을 굳히더니(이때 살짝 겁먹었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비장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각오를 다질 필요는 없는데.

나중에 눈치 보고 야한 짓 하게 해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진지해지면 말 못하잖아…….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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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12:48 소제목 수정 10일째, 위상 세계 -> 11일째, 위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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