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6일째, 복수. =========================================================================
2시간 정도 돌아다니며 쉴만한 나무를 찾아서 체크하고 머릿속으로 부근의 지도를 만들었다.
대충 지름으로 3km 정도를 살펴봤는데 이형종은 하나도 없고 가끔가다 토끼랑 사슴이 눈에 보였고 다람쥐나 참새랑 비슷하게 생긴 새들도 감지에 들어왔다.
동물들이 전부 여자 거인의 포효 범위 밖으로 도망나온건가?
아무튼 오후 7시쯤 되니 해가 저물어서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서는 7시라도 어느 정도 해가 떠 있고 노을이 지는 채였는데 여긴 절벽 위라 그런지 금방 해가 진다.
체크해둔 휴식 장소 중에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는 저쪽으로 300m인가.
완전히 정확하진 않겠지만 해가 뜨는 쪽은 동쪽이고 해가 지는 방향을 서쪽이라고 보면 대강은 동서남북을 알 수 있는데 왜 방향을 뇌 내 지도에 기록을 안 해뒀을까.
뭐 퍼펙트한 지도가 머릿속에 있으니 딱히 방향 따윈 필요 없긴 하지! 하하하!
“음, 억지로 하하거리면서 웃으니까 어쩐지 등이 가렵다.”
나는 나무창으로 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서 그런지 어느새 지도에 동서남북이 표시되면서 방향마저 알 수 있게 되었다. 생존학 책에는 별자리를 이용한 위치와 방향을 확인하는 방법은 안 나와 있었단 말이야.
뭐 다른 세계니까 별자리도 상관없으려나? 옷핀 같은 게 있으면 임시 나침반을 만들어서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옷의 단추 같은 건 되면서 옷핀이나 머리핀 같은 건 안된다니.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
순수한 자연이니까 철사 같은걸 구할 수도 없고 말이지.
아무튼, 생각해둔 나무에 도착한 나는 이빨로 나무창의 손잡이를 물고 한 손으로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탐색 능력으로 이런 나무를 타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돼버렸다. 그냥 손과 발을 감지, 분석 능력이 표시해주는 데에 대고 힘만 주면 되니까. 힘까지 주는 방향도 알 수 있어서 그냥 날로 먹는 기분이 살짝 들지만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누가 뭐라고 하면 너도 이런 능력 얻으라고 해주고 싶다. 그럼 엄청 얄밉게 보이겠지? 킥킥.
이번 나무는 기둥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가지가 뻗어 나가는 형식이었는데 그 뻗어 나가면서 벌어진 틈이 앉아서 쉬기 굉장히 좋은 모양이었다. 나무를 자르고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서 손보면 훌륭한 자연 나무 의자가 될 정도로! 하지만 등받이가 조금 불편한데 이 부분은 발톱 창으로 적당히 감지랑 분석 능력이 시키는 대로 나뭇가지를 자르고 가져와서 이리저리 끼웠더니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가 만들어졌다.
누울 수 있는 게 좋겠지만, 그쪽은 남서쪽으로 3km. 즉 끝까지 이동해야 하거든. 여기서 거기까 걸어가려면 거의 1시간 걸릴거란말야.
내가 아무리 어둠에 시각적인 영향을 안 받는 탐색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생존학에서도 밤에는 가능한 한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다고 했고 나도 이제 좀 쉬었으면 하는 기분이라서 움직이기 싫어.
그러니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야지.
난 자리를 잡자마자 주머니에서 위상석을 꺼내쥔 다음 저녁으로 소가죽 벨트 한입과 나뭇잎을 왕창 뜯어먹었다. 벨트도 이제 8번을 뜯어먹었는데 한번에 2cm씩 뜯어먹었더니 16cm가 줄어들었다. 하루에 2번도 못 먹다니, 뭐 한번은 뿔 강아지,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새끼를 잡아먹었었으니까.
그래도 균형 잡힌 식단 같은 건 무리니까 매 끼니때마다 잘라먹고 나뭇잎을 최대한 따먹어야겠다.
불을 피워서 곤충을 잡아서 구워 먹는 것도 생각해봐야지.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손에 쥔 위상석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다시 탐색 능력의 스위치 전환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매일 밤 지겹지도 않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생존학에서는 이렇게 자기 능력과 기술에 대해 고찰하고 고심하는 게 능력과 기술의 강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랬어.
그러니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능력이 좀 더 다듬어지고 강해진다는 거지. 나처럼 새로운 능력을 깨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 밤에도 능력이 변화하거나 진화할지도 모르지. 흐흐흐흐.
…….
그렇게 생각했던 게 4시간 전이었습니다.
아~, 잠이 안 와!
탐색 능력에 대한 고찰 따윈 내다 버리고 억지로라도 자보려고 몸을 뒤척였더니 오히려 짜증과 피로만 쌓이는 느낌이다.
혹시나 자다가 떨어트릴까 봐 위상 석은 셔츠 안으로 집어넣어서 심장이랑 맞닿게 넣어놨는데 이 감촉도 자꾸 신경 쓰이고.
그러다 눈을 뜨면 눈앞에 홀로그램이 뜨고 눈을 감으면 사방에서 꼼질거리는게 보이니까 정신을 안정시키고 위상력에 몸을 맡기는 편법도 못 쓰겠어!
더욱 압권은 여기서 북쪽으로 43m 거리에 동그랗고 꺼글꺼끌해보이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거기에 다람쥐 부부가 살고 있거든? 근데 이놈들이 밤에 잠은 안 자고 교미하고 발발거리다가 교미하고 나무 열매 갉아먹고 자다가 일어나서 교미하고 또 자다가 또 일어나서 교미하고 이걸 4시간째 반복하고 있다!
저 연놈들이 교미를 할 때마다 뭔가 키워드가 내 머릿속을 자극하는건지 머릿속에 저장해뒀던 여자 거인 인간 버전과 교미하는 영상이 자꾸 떠오르려고 해서 난감하다고!!
앗 교미라니, 왠지 울림이 야해. 뭔가 있어 보이게 성교라고 하자.
덕분에 자꾸 쓸데없는 상상력만 자극되잖아.
“어휴.”
아직은 잠을 못 잔 지 2일째니까 괜찮은데 이대로 가면 점점 정신이 지쳐서 위험해질 게 뻔한데.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 투덜투덜 거리고 있지만, 사실은 이형종이 어디서 다가올지 몰라 긴장을 풀지 못하는 탓이지.
아까 만난 긴 주둥이 마른 늑대 놈의 습성을 생각했을 때 강기슭에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있던 걸 보면 이 주변에는 그놈과 비슷하거나 약한 것들 뿐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약한 주제에 무슨 똥베짱인지 모여서 집단생활을 하지 않거든.
위상력을 생각하면 혼자 사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냐. 가족단위로 생활한다거나 동족들이 모여서 집단생활을 이루는 이형종 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예로 들자면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상위종이라고 할 수 있는 실버 화이트 울프. 이놈은 진짜 보는 순간 늑대 이형종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처럼 생겼다. 이계 생물학에 그놈과 싸우는 이형 능력자들의 사진도 첨부되어있어서 알 수 있었지.
생김새는 평범한 늑대인데 체모가 일반 늑대보다 2배 가까이 길고 색도 하얀색과 은색이 섞여서 햇빛에 반사되면서 반짝반짝한다고 했다. 겨울철의 늑대의 털도 굉장히 긴 편인데 이때를 기준으로 삼은건지 실제로 보면 긴 털 덩어리가 몰려다닌다고 하더라.
평균적인 실버화이트 울프의 어깨높이는 1.6m에 길이는 3.6m 꼬리 길이까지 합치면 거의 5m 가까이 된다.
즉 일반 늑대라고 볼 수 있는 회색늑대보다 덩치가 2배나 크다. 습성도 늑대와 비슷해서 핵가족단위로 모여 살면서 자신들보다 강한 이형종 들을 사냥하기 때문에 원래 하위 이형종 중 최상위권에 랭크되지만 오래 산 실버화이트 울프는 자신보다 강한 이형종을 사냥하며 쌓인 위상력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중위를 지나 상위까지 진화한다고 했다. 그때는 자이언트 실버 팽이라고 부르는데 덩치가 실버화이트 울프보다 2배나 크다고 했다.
이때의 자이언트 실버 팽은 왕과 같은 존재라 언제나 주변에 수백이 넘는 실버화이트 울프가 자이언트 실버 팽을 따른다고했지. 상위 이형종 한마리와 중위 이형종 수백마리라니. 상상도 안간다.
그런데 지놈보다 강한 실버화이트 울프도 집단생활을 하는데 지가 뭐라고 혼자 사느냐는거지.
아무튼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습성은 무리에서 쫓겨나거나 떨어져나온 늑대와 같다고 한다. 즉 왕따당해서 솔로 인생을 보낸다는 건데 아직 둘 이상 모여서 행동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지. 어쩌면 뿔 강아지도 내가 처음 발견한,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첫 생식의 증거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뿔 강아지, 즉 긴 주둥이 마른 늑대의 새끼를 발견했다고 하고 뿔을 증거로 내밀면 이게 내 명성에 도움되냐고 한다면, 아니지. 레이더, 수십 명의 팀을 짜서 고위 이형종을 사냥하는 헌터들을 말하는데 레이더는 물론이고 헌터들도 긴 주둥이 마른 늑대는 상대 안 해. 아니 정확하게는 중위 이형종 이하는 상대를 안하지. 돈이 안 되니까.
…어쩌면 위상력을 흡수 못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이형종을 잡으면 위상력을 흡수 못한다던가.... 생각하다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낮에 잡아 죽인 개새끼의 위상력이 그냥 공중으로 퍼져버린 걸 생각하면 왠지 납득이 간다. 내 위상력은 놈의 10배가 넘으니까.
아, 저것들 또 박아대네! 확 그냥! ……어라? 갑자기 굳어버린 거처럼 딱 멈춰버리네.
!!
이형종이다!
나도 다람쥐들처럼 온몸을 경직시키고 숨소리도 최대한 작게 죽인 채 내 감지 범위 안에 들어선 존재를 천천히 투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 내 감지 범위를 들락날락하는 게……. 감지를 눈치채고 간을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우연인 거 같은데?
감지 능력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눈을 뜨고 망원 능력으로 살펴보니 엎어놓은 달걀 같은 몸뚱이. 몸뚱이와 비슷한 길이의 털 없는 긴 바늘 같은 꼬리. 작고 얇은 앞발과 뒷발.
생긴 건 들쥐다. 털빛도 황토색이고. 근데 크기가 뿔 강아지만큼 크다!
저것도 역시 위상 세계 시험 중에 자주 보이는 것들 중 하나다. 이름도 그냥 큰 들쥐 Big Rat 이형종으로 긴 주둥이 마른 늑대와 맞먹을 최하위 이형종이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이름은 진정한 이형종이라고 할 수 있는 하위 이형 종들부터지.
속도마저도 긴 주둥이 마른 늑대와 비슷하다고 했고 습성도 쥐랑 똑같다고 했는데 장소에 따라 몰려다니지 않고 한 두 마리씩 돌아다니는 게 전부라고 했다. 다만 잘못 건들면 너댓마리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고 하니까 좀 더 살펴봐야겠다.
분석으로 들쥐의 내부를 투사해보니 긴 주둥이 마른 늑대와는 정말 비교되는 게 잘 짜여진 근육과 튼튼한 내장이 눈에 들어온다. 암컷인가? 주변에 수컷이나 새끼가 있을 수 있겠는걸.
하지만 망원 능력으로 주변을 살펴봐도 저것만 보일 뿐 다른 것들은 안 보이는데.
큰 들쥐의 위상력은 19로 긴 주둥이 마른 늑대보다 3이 낮았다. 난 그사이에 위상력이 365에서 397까지 올랐지. 단순 계산으로는 21배지만 신체 능력은 비슷비슷할 거 같다.
잡몹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들을 연달아 만나니 오히려 원래 있어야할 정상적인 장소로 돌아온 거 같아 안심되는 기분이다.
그나저나 다람쥐들은 이형종의 존재를 금방 눈치채네. 나보다 더 나은 거 같아.
거리상으로는 나나 저 다람쥐 부부나 들쥐랑 비슷한 거리에 있는데 나보다 더 빨리 발견했다는데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
그런데 저 큰 들쥐의 이동 경로가, 내가 밟고 돌아다녔던 곳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착각인가?
잠시 뇌 내 지도를 열어보고 내비게이션을 켜서 비교해봤더니 소름이 쫙 올라온다! 저거, 내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건가?! 그때부터 4시간 넘게 지났는데! 어느새 큰 들쥐는 일직선으로 내가 있는 나무로 다가오고 있었다. 똑같다! 내가 움직였던 동선이랑!
나도 눈을 감고 싸움에 대비해 큰 들쥐의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을 기억해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숨어있는 나무 아래 도착한 들쥐는 뒷발로 서서 내가 있는 방향으로 코를 움찔움찔거린다.
저놈은 위상력을 감지해서 날 찾은 게 아니라 냄새로 찾아낸 거 같다. 그냥 들쥐처럼 나무는 타고 오르지 못하는지 나무둥치를 따라 빙글빙글 돌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 그러고보니 뭔가 이상한게, 내 존재를 감지했다면 적개심이나 살의같은걸 보이면서 날 위협하던가 뭐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혹시? 코로 내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내 주머니에 있는 위상력에서 흘러나온 위상력을 쫒아 온거라면?
나는 큰 들쥐의 코에 감지를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찌이익!!
아차! 코의 구멍을 따라 살피다가 뇌를 건드려버렸다!
역시 저놈, 내 채취가 아니라 위상석에서 흐르는 위상력에 이끌린 거 같다!
나무 위에 있는 뭔가가 자신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지 찍찍거리면서 주둥이를 벌리더니 날카로운 앞니를 드러내고 그대로 나무 밑둥을 갉작거리면서 갈아내기 시작했다!
아 진짜! 뇌를 좀 더 투사해서 더 화나게 한 다음 덮칠까? 그러다가 주변에 가족들을 불러오면 어떡하지?
나무가 갈려 나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대로 가만 놔두면 금방 나무가 쓰러지겠어!
나는 허리춤에서 뿔 송곳을 꺼내 감지와 분석 능력으로 들쥐의 심장을 노리고 분석 능력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고 있는 힘껏…!
안돼. 빗나가서 몸에 틀어박혔는데 도망가버리거나 하면 그대로 무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야. 이런 데 무기를 소비할 수 없어.
난 등받이로 쓰고 있는 곧게 뻗은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발톱 창에 대고 대충 빠르게 다듬어 60cm 길이와 가장 두꺼운 곳의 지름이 10cm가 되는 나무 말뚝을 만들었다.
끝 부분은 최대한 날카롭게 못처럼 만들었다가, 좀 더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서 반대쪽으로 갈수록 점점 두꺼워지는 모양으로 다시 손 본 다음 이걸로는 부족할 거 같아 끝을 다시 작살 모양으로 몸에 박혔을 때 빠지지 않게끔 손을 봤다.
몸에 박혔다가 뽑히는 일은 없겠지. 무게도, 두께도, 크기도 큰 들쥐의 몸에 박히면 움직임을 무진장 저해할 만큼 커다란 나무 작살이다.
감지와 분석 덕분에 작살 하나 다듬어내는데 5분도 안 걸렸다. 분석을 돌려 다시 최적의 자세와 힘의 강약을 파악한 다음 자세를 잡고 들쥐의 심장을 조준했다.
한참 나무 둥치를 갉는데 정신이 팔린 큰 들쥐. 제발 그대로 있어, 라!!
쐐애액 푸욱!
찌아아아악!!
정확하게 명중했다! 팔이 욱신거릴 만큼 있는 힘껏 집어 던진 덕분에 60cm 길이의 나무 작살은 들쥐의 등을 뚫고 땅에 깊숙이 박히면서 몸을 고정시켜버렸다.
급작스럽게 등에서부터 몸뚱이를 관통한 나무 작살에 큰 들쥐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앞발과 뒷다리로 땅을 박박 기고 있었다.
팔다리가 짧아 체고가 낮아서 바닥에서부터 등까지 가장 높은 부분이 40cm인걸 감안하면 맨눈으로 잘 안 보일 만큼 몸을 뚫고 들어간 나무작살이 말뚝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찌이이이이익! 찌아아아아악!
크, 죽어라고 악을 쓰네.
분명 심장이 산산이 부서졌는데도 금방 안 죽고 피를 토하면서 악을 써대는 큰 들쥐를 보며 빨리 처리 안 하면 저놈의 비명을 듣고 가족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통을 박살 낼 생각으로 나무 창만 들고 잽싸게 나무를 타고 내려오며 망원으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다가오는 생명체는 없었다.
미끄러지듯이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날 발견했는지 이빨로 물어 뜯으려고 버둥버둥 거리는 모습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중간에 나무 기둥을 걷어차면서 큰 들쥐에게 떨어진 다음 뒤에서부터 다가가니 몸이 들썩 들썩거리는 게 악을 쓰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몸에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게 감지로 느껴진다.
나무 창을 찔러 머리를 부수지는 못할거 같아서 힘껏 큰 들쥐의 목으로 나무창을 찔러넣었다.
찌이기기기…….
목뼈를 끊으면서 뚫고 들어간 나무창이 기도까지 막았는지 기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무 창을 목에 꽂아 넣은 자세로 잠시 기다리니 머리를 꺼덕이며 바르르 떨다가 이내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후우.”
큰 들쥐의 처절한 비명에 자그마한 동물들은 겁에 질려 온몸을 굳힌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고 곤충들은 황급히 사방으로 도망가는 게 감지에 걸린다.
이윽고 큰 들쥐의 심장 부근에서 천천히 퍼져나오는 물결모양의 파동.
역시나 이 자그마한 파동도 내 몸에 흡수되지 않고 천천히 공중으로 퍼져나가다가 흔적도 없이 자연 위상력에 흡수되어버렸다.
쩝. 역시 내 위상력보다 한참 낮은 이형종의 위상력은 흡수하질 못하는 건가?
두 번째 살아있는 생물을 죽였지만, 이형종이라는 생각을 하니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는다. 심장도 약간 긴장한 수준으로 콩닥 콩닥거리고 있었고.
전투라고 하기도 민망하게 수월한 싸움이었다. 잠시 죽어버린 큰 들쥐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민둥산에 털이 숭숭 나있는 징그러운 모습이라 눈이 찌푸려졌다. 손가락 두 개 정도로 작은 모습이었으면 귀여웠을 텐데 소형견 크기의 쥐새끼라 그런지 좀 징그럽다.
거기다 잘먹고 지냈는지 체중도 15kg 가까이되는게 먹을 부위가 많아 보이긴한데… 쥐라 그런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비상식량을 생각하면…. 으으으!
뿔 강아지 고기를 생각하면 이형종이니 맛은 쥐 고기랑은 전혀 다를 거 같은데, 실제 쥐 고기의 맛은 닭과 비슷하다고 하던가?
…….
아무튼, 큰 들쥐를 뒤집어서 피에 절은 작살을 뽑아내고 작살로 땅을 파냈다. 이대로 두면 피 냄새 때문에 뭐가 몰려올지 모르니까.
혹시나 다른 큰 들쥐가 다가오진 않을까 틈틈이 망원 능력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뿔 송곳으로 머리와 다리와 꼬리를 자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서 땅에 파묻은 다음 끝이 뭉툭해진 나무 창은 땅에 내려놓고 발톱 창과 뿔 송곳만 챙기고 큰 들쥐를 집어 들고 주변을 경계하며 강을 향해 걸어갔다.
자정이 다되어가지만 탐색 능력이 시간에 영향을 받는 능력도 아니고, 눈을 감고 있지만, 탐색 능력 덕분에 움직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밤중의 숲의 영상은 마치 흑백의 적외선 카메라로 보는 느낌이다.
휘이이이이잉.
사아아아아.
거기다 왠지 불어오는 바람도 서늘하고 바람에 따라 나뭇잎이 흔들리며 나는 소리가 마치 유령이라도 나올 거 같은 분위기다….
말이 씨가 되진 않겠지?
큰 들쥐가 죽어가면서 지른 비명에 곤충들이 찌륵찌륵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스산하게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만 들리는 게, 솔직히 말하면 무섭다! 절벽 아래에 있는 개구멍이 그리워질 만큼!
목덜미에 난 소름을 쓰다듬고 싶지만, 왼손에는 발톱 창이고 오른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큰 들쥐의 몸통을 들고 있어서 그냥 어깨로 으쓱하고는 멈춘 발걸음을 다시 놀렸다.
숨어있던 나무에서 강까지 2km가 떨어져 있어서 30분 정도 걸으니 강이 탐색 범위에 들어왔다.
한밤중의 강이라는 것도 무섭구나.
뭔가 시커먼 게 강의 표면을 고요하게 흐르는데 물속에서는 무시무시한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큰 들쥐 고기가 뭐라고 이런 한밤중에 움직여야 하냐.
부스럭
흐힉?! 감지에 아무것도 안 걸렸는데?!
화들짝 놀라면서 큰 들쥐 몸통을 뒤로 내팽개치고 발톱 창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벌떡 일어나서는 탐지 능력에 최대한 집중하며 소리가 들린 곳을 감지해봤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
갑자기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면서 속이 탄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흐른다.
휘이이이이잉.
사아아아아아.
또다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뭇잎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울릴 만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바짝 긴장하면서 감고 있던 눈을 조금씩 뜨기 시작했더니 눈앞에는……!!
“후우우.”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을씨년스러운 어둠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있는 숲만 있을 뿐. 달빛도 없는지 사방이 캄캄하고 보이는 거라곤 바로 앞에 있는 자그마한 수풀과 어둠에 가려져 일부만 보이는 나무 한 그루 뿐이었다.
물론 감지 능력 덕분에 보정이 되어서 새카만 어둠 부분은 적외선 카메라로 보고 있는 것처럼 80m까지 보였지만.
씨발, 깜짝 놀랐잖아!!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쫄았네!! 아오!
별게 다 사람 놀래키고있어!
난 한숨을 쉬고 벌떡벌떡 거리며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진정시키려 애쓰지만, 공포에 절은 심장은 계속 쿵쾅리며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난 속으로 투덜거리며 괜시리 발톱 창을 털어내듯이 한번 휘두르고는 몸을 돌려 뒤로 던진 큰 들쥐의 몸통을 바라…
“…….”
…보았다.
-…….-
밝은 회색의 반투명한 모습.
아, 반응할 타이밍 놓쳤다.
원래대로라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왔다아아아아!!” 하고 미친 듯이 도망가야 했을 텐데.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눈물이 다 날거 같……지는 않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덜덜 떨던 몸도 어느새 차츰 떨림이 멈추고 폭주해버리겠다는 듯이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점점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눈앞에 둥둥 떠 있지는 않고 두 발로 서있는 여자 유령을 천천히 살펴봤다.
그녀는 단정하게 어깨 위로 자른 보브컷에 붓으로 그려낸 듯한 반듯한 이목구비가 굉장히 예쁜 유령이었다.
알몸의.
============================ 작품 후기 ============================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