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12화 (12/517)

00012  4일째, 여자거인2.  =========================================================================

사그작사그작

….

사삭사삭꿈틀꿈틀

…….

푸스스스스휘이이잉

………아.

감지 능력의 단점을 발견해버렸다.

계~속 감지 능력이 발동하다 보니 땅속의 곤충이나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같은 이런저런 움직임이 느껴져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응?

“크어걱…!”

끄아아아앙!! 누, 눈이! 히이이익!!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면서 눈을 번쩍 뜰…려고 했지만, 뭔가가 안구에 잔뜩 달라붙고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는 게 눈에 무시무시한 격통이 밀어닥쳤다!

고통에 나뒹굴며 두 손으로 눈을 비비려다 생존학의 한 구절이 떠올라 멈칫해버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심각한 상처를 받아 눈에서 피가 섞인 눈물을 흘리거나 안구에 문제가 생겨 다량의 염증이 생겼을 때에 식염수로 눈을 씻고 뒤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구와 눈꺼풀에 피 나 염증이 말라붙어 함부로 눈을 뜨려다간 안구에 손상이 오면서 시력에 치명타를 받는다고 했지.

고통에 손이 덜덜 떨리고 눈을 막 문지르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고통에 눈물도 줄줄 흘러나오는 게 아주 그냥…….

아, 맞아. 여자 거인이랑 거대 두더지.

그제서야 전부 기억이 났다. 피를 토하고 자지러지다가 결국 정신을 잃었었지.

여자 거인의 세 번에 걸친 포효. 피어? 비명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위상력을 이용해 포효를 지르면 이런 효과도 난다는 걸 온몸으로 느껴 보니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와…….

나.

살아남았구나.

뭔가 기쁘면서도 허무한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만치 싱숭생숭하다. 고작…… 이라고 할 수 있나? 고작 이형종의 포효에 피를 토하면서 나뒹굴다니, 그것도 직접 공격 당한 것도 아닌데.

내 꼬라지가 형편없게 느껴져 실망감마저 들려고 하지만… 그래도 고위 이형종인데 갓 초보, 뉴비로써는 당연한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게임에서는 만렙이 지나가다 어깨로 툭 치면 뉴비는 억! 하고 죽어버리는 상황도 있으니까.

싱숭이든 생숭이든간에 일단 정신을 차렸으니 먼저 내 몸 상태부터 투시해봐야겠다.

뇌는 처음 투시해봤을 때랑 다른 점이 안 보이는 걸 보면 패스.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 말라붙은 피딱지가 느껴지는 걸 보면 일단 계속 눈을 감고 있는 게 좋을 거 같다. 조금 핏발이 서 있지만 크게 이상은 안 보이는 거 같다. 콧구멍 속으로도 피가 덜 굳어 말랑말랑한 게 보이지만 숨 쉬는 데는 불편한 게 없으니 패스.

그 뒤로 입고 식도를 통과해 폐와 심장을 살펴보고 위를 지나 소장과 대장…… 아, 여기 투시는 건너뛰고, 중요한 나의 똘똘이에게 문제가 없는지 살펴본 다음 양팔과 다리도 살펴봤는데 팔꿈치와 무릎의 피부가 약간 벗겨져 찰과상으로 드러난 게 보인다.

정작 옷은 멀쩡한데 옷 위로 비벼댄 피부가 벗겨지다니. 이 무슨 튼튼한 교복이란 말인가.

그 상태로 근육이 상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옷을 투시해봤는데… 교복 앞섬이 피로 무시무시하게 얼룩져 굳어있었다.

“……이거 전부 내 피?”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더듬어보니 말라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씻는데 고생하겠네. 씻다가 피 냄새에 뭔가가 몰려들지도 모르고.

어쨌든 몸 상태는 멀쩡하다는 게 기쁘다. 위에 약간의 출혈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멀쩡하고.

그렇게 피를 흘리고 곧 죽을 것처럼 바르르 떨었었는데 이렇게나 상태가 호전되다니, 내 몸속을 돌고 있는 위상력 덕분인가?

감지능력 덕분에 눈을 감고있어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어 매우 좋군. 슬쩍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감지 능력을 떠올려봤지만 아무래도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는 감지 능력도 발동이 안 되는 거 같다.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큭.”

다시 기어서 굴 밖으로 나가려니 피부가 벗겨진 자리가 쓸려서 아프다. 어쩔 수 없이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허벅지랑 손아귀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다지 배가 안 고픈걸 보면 시간은 많이 안 지난 건가?

중간쯤 지났을 때 죽어있는 뿔 돼지 개새끼…… 처참하게 죽었으니 그냥 뿔 강아지라고 해주자. 뿔 강아지를 다시 감지해보니 사후경직이 시작됐는지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게 느껴진다.

손가락을 내밀어 쿡쿡 찔러보니 잘 들어가지 않는 게… 이거 먹을 수 있을까?

사후경직은 죽은 지 몇 시간 지났을 때 일어난다더라?

일단 굴속은 약간 서늘하고 습기도 안 느껴지는 게 하루 정도는 내버려둬도 상관없으려나… 잠시 뿔 강아지 사체를 보며 고민하던 나는…… 뿔 강아지의 뒷다리를 잡고 다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음식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난다는 누나의 위협이 생각나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후욱. 후욱.”

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평소에 안 쓰는 근육을 쓰는 행위는 굉장한 피로감이 생긴다고 했는데 사람이 50m를 기어서 움직일 일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지. 그런데도 여자 거인이 포효를 내지를 땐 정신이 없어서 약 먹은 바퀴벌레마냥 미친 듯이 움직였었으니까.

그 동작이 머릿속에 떠오르니 왠지 남의 일 같아서 실실 웃음이 나려고 한다.

아, 이거 큰일이네. 정신병 생기는 거 아냐?

죽을뻔했다가 일어나서는 뿔 강아지의 사체를 잡고 바퀴벌레처럼 기면서 실실 웃는 모습이라니.

……남한테는 절대 말 못할 행동이구만. 아, 저 앞에 빛이 보인다. 아직 낮인가? 시기적으로 보면 아침인 거 같은데. 설마 또 기절해서 밤을 보낸 건가?

우와~, 또 위험한 순간을 보냈구나.

까닥 잘못했으면 굴 밖에서 피 토하면서 나뒹굴다가 야외에서 기절했을 뻔 했다.

절로 등줄기에 오한이 흐르면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감지범위에 내팽개쳤던 뾰족 나무지팡이가 들어왔다.

어휴…… 유일한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니,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뭐지? 잠시 기어가는 걸 멈추고 감지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안 보이는데.

겨우 굴 밖으로 나온 나는 일어서서 허리를 펴서 움직이니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시원함이 밀려왔다.

타원형의 굴에 삐딱한 자세로 자빠져있었더니 몸이 굳어있어서 적당히 스트레칭을 하면서 주변을 감지…어라?

감지범위가 좀 더 늘어났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원래 반경 60m였던 감지범위가 80m 정도로 1/3이나 늘어났다! 거기다 흰색과 검은색의 1~255 수치의 명도로 명암을 표시하던 감지 영상이 아주 낮은 명도의 RGB값, 빨간색R 녹색G 파란색B이 섞인 영상으로 진화했다!

굉장히 명도가 낮아서 거의 흰색이나 검은색과 다름이 없지만 그래도 약간이나마 색이 생겼다는 게 어디야.

일단 해의 위치로 보면… 절벽 너머에서 해가 떠서 숲 너머로 해가 지는데 아직 해가 절벽 너머에 있는 걸 보면 아침에서 점심 사이인 거 같다. 어째 각성할 때를 빼면 아침마다 일어나는 기분인데. 머릿속에 알람이라도 있는 건가?

일단 피에 절은 몸부터 씻어야겠는데, 조금 더 넓어진 감지 범위의 끝자락에 숲이 끝나는 걸 보면 그 앞에 강이 있겠지.

앗.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찾았다.

내 감지 범위에 있는 모든 나무가 죽었거나 아니면 금방 죽을 거처럼 보였다.

풀은 물론이고 땅속의 자그마한 벌레들은 전부 다 죽어있다.

다시 신경을 써서 주변을 감지했더니 내 주먹 크기에도 못 미치는 작은 새들도 몇 마리씩 죽어있는 게 느껴진다.

죽은 나무를 감지해보니 수액의 이동이 전혀 없다.

이상한 느낌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새삼 여자 거인의 포효가 떠오르며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공격하는 포효라니.

……그 여자 거인이랑 거대 두더지는 어떻게 됐을까. 정신을 잃기 전에 들려오던 폭음과 포효를 생각하면 둘이서 필사적으로 싸운 건 확실할 것 같은데.

분명 저쪽이었지.

내가 서 있는 곳을 꼭지점으로 절벽에서 60도가 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았다고 했지만 감지했다는 게 정확하겠지. 일단 뾰족 나무 지팡이부터 들고 강가로 향해야겠군.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도 뿔 강아지 가족은커녕 동물 하나 발견 못했다.

당연하겠지. 평범한 동물이라면 그 포효에 전부 죽어버렸을 테니까. 버틸 능력이 돼서 살아남은 이형종이라면 꽁지 빠지게 도망쳤을 테고.

한 번만 더 포효를 내질렀다면 나도 죽었을꺼라 생각하니 새삼 등골이 오싹해진다.

거기다 어째서인지 계속 여자 거인과 두더지의 상태가 궁금해지는 게 찾아봐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느낌은 마치…… 거대 두더지를 만나기 직전 뒷골이 쿡쿡 쑤실 때랑 같은데.

설마 감지 능력 덕분에 예감도 가능한 건가?

흐흐 말도 안 돼. 예감까지 가능한 감지 능력이라니, 최강이잖아.

일단 고통 때문에 흐른 눈물로 눈꺼풀 속의 피딱지가 조금 풀리는 것을 보고는 억지로 하품을 해서 눈물샘을 자극해 눈물을 뽑아내면서 피투성이인 얼굴을 씻고 교복도 강물에 씻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서 피딱지를 제거할 수 없으니 안쪽에서 공략해야지.

젠장, 투 버튼 형식이라 셔츠도 씻어야겠네.

조심조심 눈을 피해 얼굴을 씻으면서 눈꺼풀에 살짝살짝 힘을 주면서 움직였더니 응고됐던 피가 눈물과 함께 풀어지면서 배출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또 피눈물 흘리는 줄 알겠네.

겨우겨우 눈을 뜨고 손에 쥔 마이와 셔츠를 벗어들고 한참을 박박 씻으니 강가로 핏물이 줄줄 띠를 이루듯이 흘러내려 갔다. 하지만 씨뻘건게 핏자국이 안 사라지네. 진흙 때문에 군데군데 얼룩도 지고…….

엄마의 세탁 스킬이 없으면 도저히 제거가 불가능해 보인다. 군청색 마이는 그나마 표시가 덜 나지만 와이셔츠는 그냥… 뻘건 색에 황갈색이 뒤죽박죽 섞여서 엉망이다. 엉망.

핏자국을 보면 엄마가 기절하겠군.

피가 묻은 곳에 코를 대고 킁킁거려봤는데 피 냄새는 나지가 않았다.

후각이 이미 피 냄새에 적응해버린 건가? 벗고 가야 하려나……

어느샌가 여자 거인을 찾아 이동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에 움찔했지만, 이렇게까지 내 감이 말하는데 안 가는 것도 이상하겠지.

아무튼, 갑옷과도 마찬가지인 옷을 벗고 간다는 게 꽤 꺼림칙해져서 다른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옷을 입고 가면 후각이 민감한 동물이나 이형종을 끌어들일지도 모르니까.

잠시 머리카락에서 부스러져 내리는 흙손으로 털어내며……

아! 진흙! 진흙이 있었지! 진흙을 잔뜩 바르면 피 냄새가 가려지지 않을까? 채취를 지워주니 피 냄새도 지워줄 거 같다.

바로 행동으로 옮겨 물을 강기슭의 흙에 뿌려서 진흙으로 만들고 마이와 셔츠를 잔뜩 문질렀더니 피는 안보이고 진흙에 절은 교복만 보였다. 그리고 냄새도 진흙 냄새만 잔뜩 나는 게 이 정도면 되겠지 싶은데?

뒤이어 진흙 위를 뒹굴면서 내 몸에도 진흙을 바르기 시작했다.

킥킥. 이러다가 진흙 바르기 기술이 생기는 게 아닌가 몰라.

으음. 출발하기 전에 일단 저 뿔 강아지도 처리를 해야 할 텐데 칼도 없는데 어떻게 처리하지?

내장이 가닥가닥 끊어져 곤죽이 되어있는 상태라 주둥이와 항문으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피?

설마 싶어서 급히 되돌아가 보니 내가 걸어왔던 곳으로 피가 점점이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끌고 나오면서 피가 줄줄 샜는지 구멍 안으로도 피가 주욱 이어지다가 뿔 강아지가 널부러졌던곳은 아주 피가 흥건하다.

“으아.”

……이 흔적도 치워야겠지?

한참을 되돌아가면서 뾰족 나무 지팡이의 끝 부분으로 피가 떨어진 곳의 땅을 뒤엎기를 1시간. 겨우 피의 흔적을 다 지운 나는 지쳐서 강가의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바로 다시 일어나 똥구멍과 주둥이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뿔 강아지의 뿔을 만져보았다.

길이는 20cm에 원뿔형 모양이고 딱딱하고 단단한 게 이 부분만 뜯어내면 꽤 쓸만해 보였다.

이걸 부러트려서 나무 끄트머리에 고정하면 창으로도 쓸 수 있겠어. 아니면 갈아서 칼로 만들거나!

문득 든 생각에 흡족해하며 한 손은 뿔의 밑둥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뿔 강아지의 입에서 흐르는 피가 몸에 묻지 않게 조심스레 힘을 줘서 부러뜨…… 부러…… 뜨려……!!!

끄으으으으으!!

“씨발! 더럽게 단단하잖아!!”

전력으로 힘을 줬는데 부러지긴커녕 흔들리지도 않는 모습에 치가 떨린다!!

“후…… 난 인간이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

계속 머릿속이 야생화되어가는 거 같기도 하지만, 일단 쿨하게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린 나는 적당히 평평하게 생긴 돌 여러 개를 주어와 그 위에 뿔을 올려 뿔 강아지의 머리통보다 높은 위치에 고정해두었다.

이른바 지렛대 원리!!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 올려서 뿔 강아지의 뿔과 이어져 있는 머리통을 향해 조준하고 있는 힘껏 내려밟았다!

빠직!!

오예! 부러졌…… 우웩!!

뿔이 부러진 게 아니라 뿔의 이음매 부분에 붙어있는 뿔 강아지의 두개골이 뜯어져 나왔는데 동시에 곤죽이 된 뇌수와 눈깔이 튀어 오르며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

구역질은 잠시였지만 참혹한 모습이 된 뿔 강아지를 보니 조금 안쓰러워졌다.

아냐!! 위상 세계에서 죽은 게 잘못이지!! 이런 세계에서는 약한 것도 죄잖아. 이런 감정도 사치야!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뿔을 쥐고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뇌수를 털어내고 머릿가죽을 벗겨낸 다음 뿔의 기둥에 붙어있는 두개골 일부분에 짱돌을 들어 올려 내려찍었다. 뼈도 단단한지 어중간한 힘으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고 오히려 돌멩이가 부서져서 바꾸고 갈고 바꾸고 찍고 한참을 내려치고 땅에 박박 갈고 나서야 겨우 만족할 만큼 줄일 수 있었다.

모양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막아주는 폼멜처럼 변해버렸다. 어차피 타원형에 우둘투둘해서 손에 쥐면 홈이 손아귀에 걸려 잘 빠질 거 같지도 않지만.

뿔과 뾰족 나무 지팡이로 파둔 구멍에 뿔 강아지의 시체를 가져와서는 뿔로 목 부위를 수십 번 내려찍어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긁어냈다.

뇌수와 눈알이 튀어나오는 쇼킹한 광경을 먼저 봤더니 그새 적응이 되었는지 진흙처럼 흘러내리는 피와 내장을 봐도 눈만 찌푸려질 뿐 구역질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능력자가 되면 육체가 강화되면서 정신적인 면에서도 강해진다더니 진짜였네.

살아있는 동물은 조그만 생명이라도 죽여본 적이 없는 나로써는 좀 놀랄 정도였다.

땅에다 80cm 깊이의 구멍을 파낸 덕분에 머리를 버리고 내장을 긁어서 부어도 구멍의 1/5도 안 찼다. 흠, 좀 깊이 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이 정도 깊이면 피 냄새가 흘러나올 일은 없겠지.

주변의 흙을 그러모아 덮으니 자그마한 봉분이 생겼다.

“……”

그 위에 서서 발을 굴러 땅을 다지고 다시 남은 흙을 그러모아 쌓아올린 다음 짱돌을 하나 가져와 그 위에 살짝 올려놨다.

개구멍이랑 뿔은 잘 쓸게.

만약 내가 어떤 이형종에게 잡아먹혔다면 이런 식으로 무덤조차 생길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잠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건 나니까 인간의 우수성을 입증한 셈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며 기분을 전환하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하다 보니 3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배도 고프고 왠지 정신적으로도 지쳐서 일단 점심부터 해치워야겠다.

배가 갈라지고 머리가 사라진 뿔 강아지를 강에서 씻으면서 뿔을 이용해 가죽을 벗겨낸 다음 뿔 송곳으로 나뭇가지를 찍어내려 수분 나뭇잎이 여러 장 달린 나뭇가지를 꺾고 나뭇잎을 씹으면서 불을 피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근데 나무가 죽어버렸으니 나뭇잎도 먹기 힘들겠네. 죽어버린 나무에 어떤 안 좋은 영향을 받을지 모르니까.

아아, 개구멍을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개구멍은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찾아봐야 하나? 일단 식수 확보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 부분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뾰족 나무 지팡이를 나무에 기대어놓고 그 위에 물에 씻은 고기를 올려놔 물기가 흐르게 해놓고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가죽도 혹시나 쓸데가 있지 않을까 해서 까칠까칠한 나뭇조각으로 가죽에 붙어있는 지방질을 싹 긁어내고 나뭇가지에 걸어서 마르게 해놨다.

무두질도 해야 부드러워질 텐데……. 일단은 필요해지면 나무 막대기를 구해다가 두드려서 연하게 만들든가 하고, 고기부터 구워 먹어야지.

불 피우는데 30분 정도 걸리니 물에 푹 젖은 고기는 그사이에 적당히 마르겠지.

다르게 생각을 하면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데 냄새가 퍼져서 동물을 끌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해봤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동물이 근처에 있었다면 여자 거인의 포효에 다 죽어 널브러졌겠지.

위상력이 있는 이형종도 못 버티고 피 거품을 물고 죽었는데 일반 동물이 버틸 수 있을 성 싶냐.

일단 모닥불을 피우는 방법은 몇 가지 필수 도구만 있으면 매우 간단하다.

나 같은 망상 벽이 심한 고딩도 생존학 실습 때 쉬이 만들 정도니까.

도구라고 해봤자 어느 정도 길이가 되는 천이나 밧줄 같은 거면 되고 천이라면 교복의 안감을 좀 뜯는 걸로 해결!

일단 적당히 기다랗고 탄력이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구한다. 두께는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되지만 쉽게 부러질 정도인 것도 안되니까 적당한 걸 구하고 두 번째로 대충 20~30cm 정도 되는 딱딱한 나무 막대기도 구한다.

탄력 있는 나뭇가지 양 끝에 천 같은걸 묶어서 조금 구부려 활 모양을 만들고 양 끝에 천을 묶어서 적당히 당겨지게 한다. 너무 팽팽하게 만들었다간 천이 끊어질 수도 있으니 약간 헐렁해도 괜찮다.

그리고 조금 두껍고 긴 나뭇가지를 천의 중심에 대고 활대를 한 바퀴 돌리면 나뭇가지가 천에 묶인 모양이 된다. 이때 긴 나뭇가지는 잘 마르고 직선 모양일수록 효율이 높아진다. 라기보다 잘 마른 나무막대기가 아니면 불이 습기 때문에 불이 안 붙지.

미국에서는 이걸 보우 드릴이라고 불렀다. 생긴 게 활처럼 생겨서 그런가?

그냥 무식하게 양손으로 앞뒤로 비벼서 그 회전력으로 일어나는 마찰력을 이용해 불을 피우는 방법도 있는데 그 방법은 어지간히 손바닥이 두껍지 않은 이상 쓰지 않는 게 좋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손바닥 물집이 심하게 잡히거나 손바닥 피부가 다 벗겨지는데 불은 안 지펴지고 그러거든.

아무튼, 그 아래 적당히 평평하고 각지고 잘 마른, 혹은 바짝 마른 나뭇조각을 대고 중심에 홈을 판다. 잘게 찢은 나뭇잎이나 풀등을 좌우에 적당히 쌓아놓은 다음 아래쪽에 바람이 통하게끔 바닥을 살짝 파내면 준비 끝.

바닥에 댄 나뭇가지에도 홈을 내고 그 위에 활시위에 연결해놓은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는다.

그다음 약간 홈이 있는 돌 같은걸 구하거나 돌에 홈을 만들어서 홈 부분에 나뭇가지 끝을 대고 직립 되게 세워 고정한 뒤 다른 손으로 활대를 잡고 앞뒤로 움직이면 고정된 나뭇가지가 천에 말려 빙글빙글돌며 마찰열을 발생시키게 된다.

자세는 한쪽 발로 바닥에 눕혀놓은 나무 조각이 안 움직이도록 고정해놓고 왼손으로는 돌을 적당히 힘을 줘서 내리누르는 상태에 오른손으로 활대를 잡고 앞뒤로 막막 움직인다.

나무에 칼집을 내서 회전력을 쉽게 받게 만든다든가 나무껍질을 홀랑 벗겨서 새하얀 속살을 드러나게 해서 열이 쉽게 전달되게 하는 응용이 있다.

그렇게 계속 회전시키면 마찰 때문에 열이 발생하면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데 마찰하는 부분에 생기는 까만 재 같은 게 불을 피우기 위한 재료지.

30분가량 끊임없이 나뭇가지를 회전시켜 재를 모으고 열기가 조금 모였다 싶으면 아까 쌓아놓은 잘게 찢은 풀과 나무껍질을 살살 그러모으면서 입으로 바람을 조심스레 불어준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계속 회전시켜 열을 계속 발생시키는 게 포인트다.

바짝 마른 풀들로 열기를 한곳에 모으고 연기가 계속 나기 시작할 때 끊임없이 입김을 살살 불어주니 결국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후훗. 매년 있는 생존학 실습에서 유일하게 내가 잘하는 부분이었지.

잠시 손으로 바람을 부쳐주며 타기 쉬운 풀과 마른 나무껍질 같은 얇은 걸 넣어주다가 불이 확실히 피어올랐을 때 뿔로 얇게 쪼갠 마른 나뭇가지들을 올려놔 불을 키웠다.

적당한 꼬챙이를 구해 고깃덩어리를 꼬치 꿰듯이 꿰어서 불에 굽기 시작하자 뜻밖에 노린내도 나지 않고 평범한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보통 후추 같은 향신료를 안 뿌리면 야생동물은 먹기 힘들다고 하던데… 이형종이라 그런가?

생존학이든 생물학이든 그냥 불 피우고 먹으면 되고 정 불을 못 피울 상황이면 생으로 뜯어먹어도 된다고 했지 무슨 맛인지는 알려주지 않았거든.

감았다 뜨길 반복하면서 머리 한쪽으로는 계속 감지를 돌리고 불길에 고기가 제대로 익도록 감지 능력까지 써가며 열심히 구웠다.

“우물우물, 쩝쩝.”

오오.

뿔 강아지 맛있어! 난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 개고기는 이런 맛이려나? 쫀득쫀득하고 씹는 맛이 일품인 데다 적당히 기름기도 흘러 퍽퍽한 느낌이 없다.

근데 이형종이라 일반 동물과 비교하긴 좀 그런 거 같다. 생긴 건 코카스파니엘이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두상이 조금 다르고……

친구가 애견애호가라서 족보 있는 강아지를 몇 마리 키우는데 그중에 코카스파니엘이 있었거든.

개랑 비슷하게 생긴 괴물을 잡아먹었다는 걸 동물보호협회에서 알면 난리 나려나?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나뭇잎을 씹고 고기도 깔끔하게 뜯어 먹으면서 열심히 배를 채웠다.

언제 또 이런 고기를 먹게 될지 모르니 한입 한입 음미하며 먹……기는 개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최대한 빠르게 먹고 흔적을 치워야지.

여기서 살아나가면 제대로 된 맛있는 음식이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궁상맞을 짓 따위 할까 보냐!!

10분도 안 돼서 다 먹어치우고는 남은 뼈다귀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쓸 만 게 생긴 뼈는 없을까 싶었는데 뭐, 관련 지식이 없으니 활용할 방도도 모르겠고. 일단 위치만 기억해두고 땅을 파낸 나는 보우 드릴을 만드는 데 쓴 천을 풀어서 회수하고 뼈다귀와 모닥불의 잔해를 싸그리 모아다 파묻어버렸다.

남은 재 같은 건 발로 툭툭 차서 흩어버리고 숯불로 쓸 나무 장작은 챙겨서 숲에 숨겨놨다. 다음에 불을 또 피우게 되면 저게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그럼, 잠시 쉬었다가 포효가 들린 쪽으로 가봐야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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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8시 33분 띄어 쓰기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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