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3일째, 거대 두더지와 각성 =========================================================================
쯔릉 쯔릉 째재잭
주변의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조금씩 밝아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고 쪼롱쪼롱거리는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끄응……”
첫날 밤처럼 정신 놓고 잠들지 못하고 이형종이 나타날까 봐 계속 졸다가 깨면서 하룻밤을 보냈더니 머리가 멍하다… 거기다 계속 뭔가가 꼼지락거리는 게 신경을 자극하기도 했고 말이지.
사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이유가 꼼지락거리는 무언가였다.
눈을 뜨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어두우니까.)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눈을 감고 조금만 지나면 주위에서 뭔가 꼼질꼼질 거리는 게 느껴져서 원체 잘 수가 있어야지!!
다섯 번 정도 자다 깼더니 신경질이 나서 두 눈을 부릅뜨고 조금이라도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찾았지만 보일 리가 있나.
나중에 가서는 깊이 잠들지 못하게 막아주는 게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됐다. 깊이 잠들어버려서 이형종이 나타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거든.
“……여기도 새가 있긴 있구나.”
꼼지락거리던 무언가도 어쩌면 곤충이 아니었을까? 곤충이 있으면 그걸 잡아먹는 새도 있을 거고 새가 있으면 그 새도 잡아먹는 포식자가 있을 테니까.
“근데 강에는 물고기가 안 보였단 말이지.”
내 양 눈의 시력은 1.8 정도로 매우 좋은 수준이다. 반에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안경을 쓰고 있거나 안 쓴 놈들은 날라리나 양아치였으니까. 나처럼 적당히 공부도 하는 주제에 시력이 1.5를 넘는 애는 한 학년에 몇 명 없었지.
그런데도 어제 나무 위에서 강을 살펴봤을 땐 물고기가 하나도 안보였거든. 무진장 물이 맑아서 강바닥까지 비쳐 보이는 것도 아닌데 움직이는 게 없었지.
어쨌든 새가 있다면 먹이가 되는 곤충도 있을 테니 생태계가 성립된다는 이야긴데 동물이나 생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 좀 이상하잖아.
“식물이랑 이형종은 제외.”
이형종도 고위 이형종일수록 구강으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위상력을 몸으로 흡수해서 존재를 유지한다고 했는데, 그럼 오히려 동식물이 많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형종은 이형종끼리도 싸워서 잡아먹지만 먹는 행위는 배를 채우기 위한 게 아니라 승리자의 의식의 일환이라고 했지. 죽이는건 죽여서 위상력을 흡수하기 위한 거고.
그러니까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발견했을 때 일부러 밟아 죽이고 가는거랑 비슷하다고 생존학에 써져있었거든.
여자 거인처럼 커다란 놈이고 도구를 사용할 줄 알면 틀림없이 고위 이형종일꺼고… 위상력을 몸으로 흡수한다고 하면 동물은 잡아먹진 않겠지만 다른 이형종이 존재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거야. 그게 최하위 이형종이라 해도 말이지.
이형 생물학에서는 고위 이형종일수록 주위에 존재하는 다른 이형종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온몸으로 흡수하는 위상력때문이라고 밝혀졌는데 다른 이형종이 존재하면 자신의 영역 및 생존 수단을 침범당했다고 여겨 극도의 분노 상태가 되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이려 든다고 했지. 더불어 위상력을 뺏기 위해 서기도 하고.
집단 행동을 하는 이형종이 없다는건 아니지만…….
이형 능력자들도 위상력을 몸으로 받아들여서 능력을 키우는 존재라 이형종 들도 적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런 반면에 위상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동식물은 거뜰더보지도 않는다고 했으니 여자 거인이 동물들을 잡아다 학살했을 리는 없잖아. 그 녀석 입장에서는 위상력이 없는 동물들은 나한테는 나무나 풀 같은 식물과 마찬가지니까. 존재하는 건 알지만, 신경도 안 쓰는 거지.
그러면 동물을 잡아먹을 존재도 없으니 적어도 경계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동물이 한둘은 있을 법도 한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이후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
그런데도 새소리는 들린단말야.
…순간 저 새도 이형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형종이었다면 저렇게 내가 들을 정도로 짹짹거리지 않고 바로 달려들어서 날 공격했을 거야. 나 역시 일단은 위상력을 흡수하는 존재니까.
아… 역시 신경 쓰인다. 여자 거인의 몸에 상처를 낸 존재가.
어쩌면 여자 거인도 싸우러 가기 직전에 몸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진흙을 바르고 간 건 아닐까?
슬슬 멍해졌던 머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는지 생각하는데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어제부터 머릿속에서 느껴지던 욱신거리고 간질거리는 느낌도 많이 사라졌고.
난 몸을 고정하고 있던 교복 마이 & 벨트 로프를 풀어서 다시 입으면서 생각했다.
만약 그 여자 거인이 진짜로 싸우기 위해 진흙을 몸에 바르고 간 거라면 지금쯤 결판이 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직 싸우고 있을 수도 있고. 근데 진짜 왜 진흙을 바르고 간 거지? 고위 이형종과 싸울 수 있는 존재는 고위 이형종 뿐인데 위상력 감지 능력을 봤을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흙을 바르고 간 이유가 짐작이 안간다.
아무튼 지금은 진흙이 완전히 말라서 그냥 흙이 된 시간이고 진흙이 말라버리면 동물 특유의 채취를 지우는 효과가 떨어질 테니 마르기 전에 기습하든 그냥 돌진하든 했겠지?
다르게 생각해보면 미용에 신경 쓰는 여자…. 흠흠 거인이라서 그냥 진흙팩을 한걸지도 모르겠다.
다시 여자 거인의 매끈하고 투명한 살결과 분홍색들 띠던 특정 부위가 떠올라 피가 몸의 한곳에 집중되기 시작했지만 이런 곳에서 해결하고 싶진 않아 애써 생각을 지웠다.
한숨을 쉬며 눈앞에 매달려있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젯밤에 하나 따먹었던 게 생각이 났다.
“어제 하나 먹었었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거 같으니 좀 더 먹어도 되겠지?”
일단 식사를 해야하니니 벨트를 풀어 반의 반입 정도 뜯어먹고 열심히 씹으면서 나뭇잎으로 수분과 섬유질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치킨 먹고 싶다… 짜장면이랑 짬뽕이랑 탕수육도. 피자도 먹고 싶고… 엄마랑 누나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
나뭇가지에 볼품없이 걸터앉아 풀과 벨트 쪼가리를 아침 대신으로 씹고 있으니 목이 메여왔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우는데도 체력이 필요하다는데 함부로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어!
살아나가는 거야! 여기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는 거야!!
여기서 죽어버리면, 내가 있던 장소에 대신 나타난 물방울을 보며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고 있을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게 될 거다. 누나라면 평소에 나한테 더 잘 대해주지 못하고 때린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도중 위상 세계로 끌려왔다.
그리고 미성년자다.
생존확률이 위상 세계 생존 교육과정으로 신기력 초기 때보다 두세 배는 올랐다지만 그래도 미성년자의 생환율은 30%를 못 넘기니까. 내 생존 확율은 30%라는 말이겠지만 지금의 이상 상황을 보면 대폭 내려가서 3%쯤 되지 않을까?
아아, 또 우울해지려고한다! 할 일이나 하자!
나뭇잎 여러 장으로 배를 채우고 오늘도 진흙팩을 할 생각으로 주위를 살펴보면서 살금살금 나무에서 내려왔다.
강은 여기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니 조금만 걸어가면 되겠지.
어제와 똑같은 속도로 이동한다고 치면 내일 이 시간쯤에는 강이 절벽에서 점점 멀어져서 식수를 보급하려면 1km 넘게 이동해야 할 상황에 처했을 텐데 나뭇잎으로 수분을 보충할 수 있다는걸 알게 돼서 진짜 다행이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또 생각해봐도 다행인 거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걸어간 나는 금방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에 무언가가 나타나진 않을까. 혹시나 그 거인이 또 진흙팩… 머드팩이라고 하던가? 전신 머드팩을 하기 위해 나타나진 않을까 무섭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면서 빠르게 물을 뿌려서 진흙으로 만들고 그 위를 멧돼지가 형님!! 이라고 외칠 정도로 완벽하게 뒹굴면서 전신에 진흙을 처발랐다.
진흙을 바르는 도중에 계속 무언가 뒷골을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안 보였다. 너무 과민반응하는 건가? …아냐! 여기서 나는 최약자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어쨌든 웬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얼굴을 진흙에 처박고 머리카락에도 바른다기보단 뒤집어쓰는 것처럼 퍼 올려 바른 다음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 때문에 한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고 내 목숨을 지켜줄 뾰족 나무 지팡이는 다른 손에 쥔 채 빠르게 절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수풀과 나무에 몸이 가려진 직후였다.
푸스스스스. 부스럭 풀썩.
“?!”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고 나무 뒤편으로 기어서 숨었다.
운동신경이 없는 나였지만 방금의 행동은 진짜 나이스였다!
킁킁 쿨쩍. 크으응 킁
마치 집돼지가 킁킁거리는 거 같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해서 살짝 왼눈만 내밀어서 그 소리가 난 강 건너편을 보았더니 눈에 보이는 건…….
두더지?
근데 존나 크다!! 뭉툭한 통나무 같은 몸에 적갈색의 북슬북슬한 털이 나 있고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짜리몽땅한 앞발, 눈은 있는 건지 없는건지 잘 안 보인다. 근데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 삐져나온 앞니도 날카로운 게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수염이 엄청 길어!
저건 이형 생물 도감에서도 본 적이 없는 놈인데?!
킁킁? 킁 킁킁킁 킁킁킁킁킁!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주둥이 끝에 달린 구멍 두 개… 콧구멍이겠지? 콧구멍을 들썩거리며 냄새를 격하게 맡기 시작한다. 설마 저거… 내 냄새를 맡은 건가? 생긴 건 고위 이형종인데 왜 냄새를 맡는 거지?
당연하지만 이형종은 고위로 올라갈수록 위상력 감지가 뛰어나서 저렇게 신체 기관을 이용해서 무언가=나 를 찾을 리는 없을 텐데?
두더지 이형종은 머리를 들어 올려 콧구멍을 위로 향한 채 열심히 옴찔거리면서 냄새를 맡고 있는데 왠지 긴가민가한 거처럼 보인다.
냄새와 수염으로 움직이는걸 감지하는 건가? 내가 격하게 움직이면 공기가 떨리면서 저놈의 수염에 신호가 닿겠지?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있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고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두더지 이형종이 하는 짓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체고는 뒤에 서 있는 나무의 절반가량인걸 보면 4~5m 정도 되어 보이고 주둥이 끝에서 짤막한 꼬리 끝까지의 길이는 대략 10~12m 정도인 거 같다.
그런데 몸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있는 거 같은데… 저놈이 있는 곳에서 내가 숨어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60m가 넘는 데다 털빛이 적갈색이라 잘 분간이 안 간다. 만약 저게 피라면 설마 그 여자 거인의 피인가?
제길! 저 빌어먹을 축생은 그 예쁜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자 거인의 몸에 난 상처의 흔적도 틀림없이 저 두더지 새끼가 한 걸 거야!!
그러다 순간 여자 거인의 안위에 대해 걱정한 내가 정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겉이 예쁜 여자라고 해도 외눈의 이형종인데…….
나는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숨을 참으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두더지는 아무래도 날 못 찾겠는지 잠시 후 냄새를 맡는 건 그만두고 물가에 다가와 주둥이를 처박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흙팩 만세다!
푸그륵 푸그르륵 푸륵 푸르륵
제발 부탁이니 물만 마시고 가라. 부탁이니까, 응?
하지만 내 부탁은 못 들은 척 두더지 새끼는 강가에서 방금 내가 했던 짓과 똑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다.
뒹굴면서 온몸에 진흙을 바르기 시작한 거다.
그와 동시에 극심한 긴장감에 심장이 점점 더 심하게 뛰기 시작한다. 머리도 두통이 생기기 시작하는 게 심상치 않다. 살살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쉬지만, 두통이 멈추질 않는다.
심장이 두근 세근 거리면서 열심히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지만, 위상 세계에 들어온 뒤로 그 존재감을 뚜렷할 정도로 느꼈었지만, 지금은 그런 움직임조차 견디기가 힘들다.
두더지를 살펴보는 것도 포기하고 몸을 웅크리며 눈을 꼭 감고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했지만… 힘들다, 으으… 숨을 오래 참고 있었더니 피가 머리로 쏠리더니 두통은 줄어들었지만,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욱신거림은 금방 사라졌지만 바로 이어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이내 간질거림은 개미가 기어 다니는 느낌으로 변하면서 무시무시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손을 머릿속에 담그고 뇌를 쥐어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잠시 후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어. 뭐지?
다시 정신을 차렸지만,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몸의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지금은 어느 책에서 읽었던 사방이 새하얀 무한의 공간에 뇌만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혹시, 나 죽은 건가?
왜? 뭐 때문에??
설마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서 발작으로 죽어버린 거야?
정말?
하…….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나올 거 같다. 하지만 표현 할 육체가 없어서 점점 감정이 봇물 터지듯 거세게 밀려 나오며 소용돌이를 이룬다.
아아아아아아악!! 이게 뭐냐고오오오오!!
분노와 슬픔과 안타까움과 괴로움에 몸이 있었다면 눈이 충혈되고 성대가 터져버릴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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