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2일째, 여자 거인. =========================================================================
나무의 중간쯤에는 잎사귀가 무성해서 몸을 가리기 쉬웠었는데 위로 오르기 시작하니 잎사귀가 점점 사라져서 나무 꼭대기에 도달했을 땐 시야를 가리는 잎사귀는 없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었다.
완전히 몸을 드러내는 건…. 왠지 무서워서 못하겠고 시야가 가려지지 않은 곳에 머리만 살짝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내가 오른 나무가 주변에서도 조금 더 컸었는지 그것만으로도 꽤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쪽은 절벽으로 막혀있고 그 맞은편은 보이는 거라곤 나무들뿐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같은 것도 안보이고 그냥 햇빛만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현실은 초봄인데 여긴 늦여름 날씨네.
혹시나 그 여자 거인이 보일까 봐 흠칫 거리며 한동안 주변을 살펴봤지만, 눈에 띄는 건 없고 귀를 기울여봐도 짐승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는다.
혹시 분지 형태는 아닐까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잠깐 둘러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이었고 공중에서 추락한다는 공포감에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시 머리를 돌려 절벽을 살펴봤다.
높이는 대충 25층 아파트인 거 같고 지반은 꽤 단단해 보여서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 거 같다.
절벽에는 튀어나온 나무뿌리라던가 바윗덩어리도 많고 굉장히 굴곡져서 전문 클라이머라면 맨손으로도 쉽게 타고 오를 거 같지만, 난 학생이거든. 무리입니다.
시선을 절벽을 따라 움직여 봐도 보이는 거라곤 저어기 멀리 시야 끝까지 이어진 절벽뿐이고 왼쪽은 바로 옆에 있는 폭포에 가로막혀 잘 안 보인다.
강을 건너서 폭포의 왼쪽을 살펴본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저 너머에는 여자 거인이 있어서 왠지 넘어가기가 싫다. 게다가 빠졌을 때도 느낀 거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니 강도 수심이 꽤 깊어 보인다. 강의 중심은 검푸른 색을 띄고 있었는데 꽤 공포심을 자극하는 색이 아닌가.
결국, 선택지는 절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쭉 가는 것 하나밖에 없는데…
문득 여자 거인이 몸에 바르던 진흙이 생각났다. 그걸 나도 바르면 몸에서 채취가 사라지지 않을까? 그럼 적어도 내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멀리서 짐승을 끌어들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 같은데.
여자 거인이 반신욕을 하는데도 별문제가 없었던 걸 보면 이무기라던가 용이 살고 있지 않은 거 같고 말이지!
그럼 진흙팩은 출발할 때 하는 걸로 하고 이동할 방향은 강을 따라 내려가던가 절벽을 따라 이동하던가 둘 중에 하나인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목마른 이형종이랑 마주치면 그 순간 사망일 테니 패스.
결국은 절벽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나? 식수는 어떻게든 되겠지. 잠시 강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본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에이 씨발… 그 개새끼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 같은 상황에는 처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진다.
마음을 굳힌 나는 만들어둔 뾰족 나무 지팡이를 챙기고 천천히 나무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뾰족 나무 지팡이를 움켜쥐고 강에서 떨어져서 나무들 사이로 살금살금 움직이며 용소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숨어있던 나무랑 거리가 꽤 되는구나. 도중에 땅이 움푹 파인 곳이 보였는데 저기서 여자 거인이 강 건너편으로 뛰어넘었었지? 그 여자 거인은 제발 남은 시간 동안 안 만났으면 좋겠다.
보고 있으면 눈이야 즐겁지만 눈 구경의 댓가로 목숨을 내주긴 싫단 말야.
여자 거인의 알몸을 떠올렸더니 특정 부위가 팽창을 시작했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나무들 사이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폭포에 다다르니 귀가 따가울 만큼 물이 물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뿌려지는 물에 온몸이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주변에 뭔가가 나타나진 않을까 긴장하며 여자 거인이 앉았던 자리로 다가갔다.
……여자 거인이 진흙을 퍼 올 린 자리는 너무 깊어서 바를 수도 없고 바른다고 해도 바로 물에 씻겨나갈 거 같네.
뭐 같은 흙이니 용소의 가장자리에 있는 흙이랑 별 차이 없겠지? 난 열심히 물과 흙을 개어서 몸옷 위에 바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마이와 셔츠, 바지도 벗은 다음 잔뜩 진흙을 개어놓고 그 위를 팬티 바람으로 뒹굴기 시작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잠시 접어두고 멧돼지처럼 뒹군 덕분에 몸에 고루고루 진흙이 발린 걸 확인했고 옷가지와 신발에도 진흙을 잔뜩 바른 다음 다시 입었다.
뜻밖에 진흙이 몸을 흐르는 기분이 꽤 삼삼한데? 머드 축제가 인기 있는 게 다 이유가 있었어. 두 손으로 남은 진흙을 퍼 올려 얼굴과 머리에도 마구 바른 다음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절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폭포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는 건너편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강을 사이에 두고 뭔가가 날 거부하는 거 같아서 굳이 건너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생각난 거지만 위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은 그냥 먹어도 별 탈이 없다고 한다. 식물인 척 하는 이형종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만 조심하면 독같은것도 없고 그냥 먹기가 걱정된다면 불을 피워서 살짝 구워 먹어도 된다고 했지.
불을 피우는 건 좀 생각해봐야겠다. 피울 때 나는 연기도 문제고 밤중에 불을 피웠다간 멀리서 불빛을 보고 찾아드는 불청객이 있을 수 있으니까.
뭐…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지만 그렇다고 지천으로 널린 풀이나 나뭇잎들이 맛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한다. 풀답게 쓴맛만 나겠지.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 단기간 버티기라지 생각하면 오만 걸 입에 집어넣어도 될 거 같다.
차라리 나무 위에서 15일간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걷고 있는 게 불안해졌지만 생존학에서도 몇 가지 안전한 장소를 제외하면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다고 하니 지금 이동하는 게 정답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나무의 그림자가 실제 나무의 높이와 비슷하게 길어진걸 보면 걷기 시작한 지 4시간은 지난 거 같다. 조금씩 노을이 지는 거 같기도 하고.
온몸에서 흘러내릴 만큼 진흙을 뒤집어쓴 효과인지 이형종은커녕 평범한 동물조차 만나지 못했다.
꽤나 시간이 지난 덕분에 흘러내리던 진흙은 완전히 말라붙어버렸고 온종일 주위를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인 덕분인지 그런지 머리도 욱신거리고 간질거렸다.
다행인 건 산책하며 잡생각과 망상이 취미라서 걷는 데는 이골이 났다는 점일까. 평소에도 끊임없는 망상에 서너 시간은 우습게 산책을 다니고 언덕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를 이용하다 보니 다리가 단련이 되어서 4시간 동안 길 없는 숲 속을 걸었지만, 다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실용성을 중시한 신발 덕분이기도 하고.
이제 조금 지나면 해가 완전히 지면서 밤이 찾아올 텐데 쉴 장소를 찾아봐야겠다.
무난한 게 지금 내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쉬는 거겠지? 어림잡아도 5층 아파트 높이인데. 15m 정도인가?
절벽이랑 붙어있는 게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지만, 절벽을 타고 달려서 덮칠만한 놈이라면 이 숲에서는 안전한 장소는 없다고 생각해야지. 나무들이 널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다닥다닥 붙어있으니까 절벽을 달려서 점프할 정도의 각력이라면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뛰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거다.
생각은 길고 행동은 짧게! 내 유일한 무기인 뾰족 나무 지팡이를 허리에 고정하고 다시 나무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목표는 6m 정도 되는 높이에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 어제 쉬었던 나무처럼 나뭇가지가 서로 대칭으로 자라있는 곳이 있다면 쉬기 편하겠지만 그런 건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가장 큰 나뭇가지를 타겟으로 삼아야지.
왼손을 뻗고 오른발을 들어 올려 나무 옹이나 홈 같은데 끼워서 지지하고 다시 오른손을 뻗고 왼발로 지지하고… 한번 나무를 탔다고 어제보다는 능숙하게 기어오른 나는 무리 없이 목표로 삼았던 나뭇가지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막상 보기보다 나뭇가지도 크고 넓어서 어제처럼 몸을 나무에 묶으면 그럭저럭 안전하게 잘 수 있을 거 같다.
“후우. 왠지 어제보다 체력이 더 붙은 거 같은데?”
조심스레 나뭇가지에 걸터앉으면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살짝 뛰기 시작한 심장과 약간의 땀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올라온 거 같아 그사이에 꽤 신체가 변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는 달리기를 조금만 해도 헥헥거리고 철봉에서 턱걸이도 10개를 간당간당 채울 정도의 체력이었던걸 생각해보면 굉장한 발전인 셈이다.
“흐흐흐. 위상력으로 몸이 계속 변하나 본데, 이렇게 계속 체력이 붙고 근력도 늘어나면 살아남을 확률이 더 오르겠지?”
한 손으로 뾰족 나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내리고 이리저리 휘저어보니 어제보다 더 가볍게 느껴졌다. 고작 2일째 밤인데 이런 식으로 신체 능력이 향상한다면 신체 강화 능력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신체능력이 좋다는 건 뭘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이지! 신체 강화 능력자는 힘을 쓸 수 있는 모든 장소에 가산점이 붙어서 위험하게 이형종을 사냥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먹고 살 방법이 있거든.
신체 강화 능력자는 전 세계의 이형 능력자 중 절반을 차지하는 흔하디흔한 존재지만 흔하다고 해서 나쁜 능력은 아니다. 무엇보다 위상력으로 강화된 신체 강화 능력자들은 전부 다 미남 미녀들뿐이니까 나도 미남이 될 수 있을 거고!
솔직히 내 얼굴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잘났다고는 못하거든… 아는 놈들은 다들 중학생 때부터 피부 관리를 해왔다는데 나는 그 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위상 세계와 이형종에 대한 오만 상상(아직 그때는 망상까진 아니었다!)을 하는 게 더 즐거웠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안 썼지…
어쨌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도 내가 얼굴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누나가 날 억지로 붙잡고는 여드름 연고라던가 씻고 난 뒤에는 스킨이나 로션에 여름에는 선크림을 바르고 겨울에는 보습제도 발라준 덕분에 최악으로까지는 안 갔지만 그래도 여드름 자국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점도 몇 군데 있어서 그냥 또래 평균 정도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누나한테 무진장 고마워하고 있다. 누나가 아니었으면 그냥… 얼굴이 달처럼 크레이터 여기저기 막막 생겼을 테니까.
얼마나 좋은 누나인가! 어렸을 때는 날 챙겨주는 누나가 괜시리 부끄러워서 대들고 덤비고 그랬지만(그 후에 엉망진창으로 맞았다.) 누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이를 먹을수록 누나를 잘 따르게 됐지.
몇 없는 친구들의 경우를 보자면 누나든 여동생이든 간에 여자 형제가 있는 것은 마치 지옥과도 같다는걸 알 수 있었다!!
툭하면 부려 먹거나 대들고 맛있는 게 생기면 챙겨주지도 않고 자기만 처먹는 이기적인 성격에 내껀 내꺼 니놈것도 내꺼라는 방식이 머리에 가득 차있는지 하여튼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내 누나는 천사지. 험한 말을 쓰거나 말 안 들으면 주먹이 날라오지만 생각해보면 누나 말을 들어서 나빴던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배고프다고 엉겨 붙으면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지만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먹을 걸 만들어줬었고 내 물건을 억지로 뺏어 간 적도 없는데다(물론 협박당한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아빠랑 엄마랑 내 생일도 챙겨주고 기분 좋을 때 아부를 떨면 용돈까지 곧잘 준 것도 생각해 보면 착한게 아닐까?
거기다 길 가면 전화번호를 물어오는 남자들이 매번 나타나는 거나 밸런타인데이와(왜?!) 화이트데이 때 수많은 과자를 가져오거나 내 누나를 본 친구놈들이 부럽다고 날뛰는 걸 보면 외모도 뛰어난 거 같고 집으로 날라오는 성적표를 몰래 열어보면 나보다 떨어지는 성적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신체 강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누나 자랑이 된 거지? 하여튼 태어날 때부터 엄청나게 못생긴 얼굴이라거나 큰 상처를 입어서 얼굴이 바꼈다거나해도 상관없다. 신체가 재구성되는 와중에 모든 상처나 나쁜 체질, 병 같은 건 사라지니까!
신체 강화 능력자가 된 그 순간부터 몸은 저절로 위상력을 빨아들이고 흡수해서 골격부터 시작해 근육과 내부 장기까지 강화하고 변화시킨다. 태어날 때부터 체내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노폐물은 저절로 배출되고 피부는 허물을 벗듯이 여러 번 벗겨지면서 우윳빛 피부가 되는 건 물론 아기처럼 뽀송뽀송하게 변한다.
몸을 이루는 약 200개의 뼈도 위상력을 받아들이면서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버드나무처럼 탄력이 넘치게 된다. 피와 살과 근육 또한 위상력을 받아들이고 이용해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도록 바뀌게 되니 신체적인 면만 보자면 인류를 초월한 신인류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거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걸 기준으로 삼는지는 모르겠지만(논문이나 연구서에는 나와 있겠지만 내가 볼 방법이 없다.) 누가 봐도 미남 미녀라고 할 만큼 아름다워지는 얼굴과 8등신을 넘어 9등신이 되는 몸이다.
설령 짧고 굵은 팔다리에 드럼통 몸매였다 하더라도 신체 강화 능력자가 되는 순간 완벽한 S자 몸매에 쭉 뻗은 팔과 다리는 보는 순간 탄성을 흘리게 바뀌게 되니까. 무협 소설에서나 나오는 환골탈태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아쉬운 점은 키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150cm였던 사람이 신체 강화 능력자가 되면 160 정도가 된다는데… 성장기가 끝난 사람이 10cm가 그냥 커지는데 크게 바뀌지 않는 수준인가…? 과학자들의 머리는 이해가 안 가네.
아무튼 강화 능력자는 다른 능력들과는 다르게 능력이 신체에 적용되는 시간도 짧고 적응하는 기간도 짧다는 거지. 그러니 특수 능력을 늦게 가지는 것보단 지금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빠르게 신체 강화 능력자가 돼서 여기에서 살아남아 돌아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나저나 계속 머리가 욱신거리네.”
난 검지를 들어 좌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아프다기보단 여기저기 눌러대고 간지럽히는 느낌이라 참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히 신경이 거슬린다.
능력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에게는 능력이라고 할 만한 남들과는 다른 점 하나가 있다.
바로 두뇌 회전과 두뇌 가속인데… 사실 중학교 때 질풍노도의 시기에 지은 이름이라 창피하지만!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죽여서라도 입을 막고 싶은 수준이지만! 누구 앞에서 이런 점을 자랑하거나 한 적이 없고 드러낸 적도 없어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았다.
라고는 해도 남들 앞에서는 절대 말 못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연히 알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생각의 속도가 빠르다는걸 중학생 때 알게 되었다.
남들이 머릿속에서 1부터 10까지 셀 동안 나는 30, 40까지 셀 정도니까 의외로 두뇌 단련에 망상과 잡생각이 효과적일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망상을 이어가고 수업시간에도 수업을 들으면서 필기를 하고 잡생각까지 하는 생활을 초등학생 때부터 수년간 이어왔더니 어느새 기술이라고 부를만한 경지에까지 오른 거지.
때문에 어떤 심각한 상황이라도 내 머릿속에는 늘상 천사와 악마가 싸우듯이 시답잖은 망상에서부터 상황 정리와 파악하는 재주까지 생기게 된 거다.
이런 재주라도 없었으면 그냥 생각 없이 헐떡거리면서 개새끼한테 쫓기다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져서 잡아먹히지 않았을까? 그런데 평소라면 이 정도 되는 잡생각이라면 순식간에 해치웠을 텐데 오늘은 생각하다가 해가 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부터 할 일이라고는 주위를 경계하며 선잠을 자거나 잡생각을 계속 이어가는 거 밖에 없으니까 상관은 없지.
꼬르륵
아… 배고프다.
아까 점심때 가죽 벨트를 조금 뜯어먹은 한 끼 분량의 칼로리는 벌써 다 소모했겠지. 그다지 소식하는 체질도 아니고 대식하는 체질도 아니지만 아까 가죽 벨트만 손가락 한 마디만큼 뜯어먹어서 한 끼를 때우기는 많이 모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칼로리는 충분할 지 모르겠지만 포만감이 느껴지지않거든.
그러니 비상식량 벨트도 아낄 겸 손가락 반마디 정도만 뜯어먹고 나머진 나뭇잎을 뜯어먹는 게 이 비상식량벨트를 아끼는 데 도움이 되겠지?
포만감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나뭇잎으로 나머지 배를 채우는 것도 나쁠 거 같진 않다.
“어디…”
마침 지척에 널린 게 나뭇잎이다 보니 손을 조금만 뻗으면 잡힌다.
내가 아는 활엽수는 단풍나무랑 은행나무 잎사귀뿐이지만 이건 척 봐도 우리 세계에서는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생긴 건 사람 손처럼 생겨서 손바닥처럼 보이는 네모난 부분과 손가락으로 보이는 얇고 기다란 부분이 다섯 개가 나 있다. 게다가 은행잎처럼 종이만큼 얇은 게 아니라 은근히 두툼해서 막상 먹으려니 꺼림칙해졌다. 크기도 실제 내 손바닥만 하고 말이지…….
“무슨 나뭇잎 두께가 내 손가락 반만 하냐.”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이걸 진짜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역시나 행동은 짧았다.
“얼래. 아무 맛도 안 나네.”
살짝 끄트머리만 베어 물어서 조금씩 씹기 시작하니 쓴맛이 날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수업 중에 지겨움에 미쳐 프린트 인쇄물을 살짝 뜯어서 입에 넣고 씹었을 때의 그 느낌인데?
별맛이 나지 않는다는데 안도하며 조금 더 많이 뜯어먹었는데 의외로 혓바닥에 수분이 생기는 게 아닌가! 아직까지 강이 근처를 흐르고 있어서 식수 보급은 걱정 안 했지만 며칠 더 걸어간다면 강도 절벽 근처에서 점점 멀어져갈 거라 무진장 걱정이었는데 나뭇잎만 열심히 씹어도 수분을 보충 할 수 있게 됐으니 진짜 다행이다.
어쨌든 위상 세계에서는 능력이나 기술 없이 오랫동안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니까. 식수 보급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도 최대한 동선을 줄여야한다.
……그럼 오늘 계속 이동했던 나는 자살하고 했던 건가? 흠흠.
“물을 보관하려고 이런 모양이 된 건가? 이렇게 수분을 간직하고 있다가 비가 안 오거나 하면 땅으로 떨어져서 나무뿌리에 흡수되고?”
어쨌든 한번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더니 의외로 씹는 맛이 괜찮아서 다시 나뭇잎 하나를 더 따 먹으려다 참았다.
“혹시라도 배탈이 날 수 있으니까. 하나만 먹어보고 상태를 지켜보는 게 낫겠지?”
그리고 소가죽 벨트를 조금만 뜯어먹은 후 마이도 벗어서 벨트에 연결하고 내 몸과 나무기둥을 한데 두고 묶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더럽게 긴 벨트 때문에 속으로 디자인하고 만든 사람 욕을 무진장 했는데 이 벨트가 없었으면… 어휴, 벨트 만드는데 관계되신 모든 아저씨 아줌마 정말 감사합니다!
“콜록, 콜록.”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더니 머리카락이나 몸에 말라붙은 진흙이 흙먼지가 돼서 날리는 걸 손을 휘휘 저었다. 근데 진흙을 바른 게 의외로 정답이었던 거 같다. 땀도 얼마 안 났고 마른 흙은 체온도 보존해주고 통풍도 잘 되는지 서늘하면서도 의외로 따뜻한 게 쾌적했다. 덕지덕지 말라붙은 흙과 움직이거나 만지면 부스러지는 게 조금 신경 쓰이지만… 내일도 진흙에서 좀 굴러야겠다.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며 해가 지는 광경을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늘 하루가 끝나는구나. 내일도 부디 별일이 없기를.
============================ 작품 후기 ============================
제 손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반 정도 즉흥적으로 써내려가는 방식이라 진행 속도가 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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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두 편 정도 써내려가며 열심히 비축분을 쌓고 있으니 힘내라는 응원의 의미로 추천 한번 눌러주시면 열심히 주인공을 굴릴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ps 오늘은 외전격인 이야기 한편과 이어서 7화를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