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2일째, 여자 거인. =========================================================================
“우으…”
어쩐지 목이 아프다. 목도 말라. 왠지 몸이 잘 안 움직여져서 꿈틀거리며 억지로 눈을 떠보니 주변에 나뭇잎과 잔가지가 잔뜩 보인다
“…여긴 어디야?”
큭.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잘 안나온다. 그나저나 웬 나무 꼭대기에…. 아아!!
“여긴 위상 세계였지.”
뭔가 뒤숭숭한… 누군가에게 괴롭힘당하는 꿈을 꾼 거 같은데 내용이 생각이 안 나네.
아드레날린 효과의 후유증인지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민물을 그렇게나 처마셨는데도 입안이 마른 걸 보면 꽤 오래 잔 거 같은데. 문제는…
“…환하네?”
주변이 너무 환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멀리서 처음 듣는 새소리가 들린다.
아는 새라고는 짹짹거리고 까악하고 꽤액 하는 것들밖에 모르지만.
설마 하루 종일 잔 거 아냐? 조금씩 머리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생각하는 속도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위상 세계로 날려오면서 시계도 휴대폰도 사라져버려서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개새끼한테 쫓기고 절벽에서 점프하고 나무 위에 기어 올라오면서 시간을 꽤 썼는데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하루 내내 자 버린 거 같다.
“뭣보다 옷도 신발도 다 말라 있으니까 말이지.”
아아… 날씨가 따뜻한 활엽수림 지역이라 다행이다. 하마터면 추위에 얼어 죽어 게임오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어. 이세계 생존학에서는 밤을 가장 위험한 시간으로 오만가지 위협이 등장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기절하거나 태평하게 잠들어 버렸다간 그대로 영원히 잠잘 수도 있겠지.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이고 목운동을 하면서 굳어있는 몸을 풀어주었다.
처음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나도 위상 세계의 헌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엔돌핀이 팍팍 뿜어져 나왔었고 그 직후에 개새끼의 등장과 절벽 번지점프로 아드레날린이 마구마구 쏟아져나와서 괜찮았지만…
나 혼자서 15일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버텨야 해.
눈에 띄면 날 죽이려 드는 이형종들을 피해서.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우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형종들 틈 사이에서 어른들도 살아남을 확률이 절반인 위상 세계에서 할 줄 아는 거라곤 게임과 망상뿐인 내가 뭘 할 수 있는 거지?
그나마 첫날은 아드레날린 효과로 머리가 팽팽 돌아간 덕분에 이렇게 나무 꼭대기에서 하루는 안전하게 보냈지만 남은 날도 이런식으로 운이 좋으란 법은 없다.
이세계 생존학에서는 첫 위상 세계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술을 얻기 전까진 이형종과의 전투를 피하라고 되어있었다. 최소한의 능력과 기술 없이는 이형종과 싸워 이기더라도 전투의 후유증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고 되어있었거든.
위상 세계에서 이형 능력자들의 신체능력과 각종 질병 내성이 뛰어나게 변한다고 하지만 그건 이형종도 마찬가지.
개새끼에게 쫓기다 초크 슬램으로 아작내버리겠다던 생각은 말 그대로 만용이자 도박! 겔겔거리고 나만큼이나 저질 체력에 근육이라곤 하나 없어 보이는 깡마른 개새끼지만 그래도 이형종이다. 별다른 전투능력도 없는 내가 근접전투로 이길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말이지.
아마 그 상태로 맞붙었다면… 운 좋으면 양패구상. 높은 확률로 개새끼한테 졌을 테고 결과적으로는 난 죽었을 거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무식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나. 아무래도 내 뇌는 게임 뇌로 이루어져 있나 보다. 그 개새끼만 잡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내가 이런 장소에서 쉽게 죽을 리는 없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안돼. 너무 암울한 생각만 하면 다가오려던 운도 저 멀리 도망가버릴 거야.
생존학에서도 가르쳐주잖아. 외적은 이형종이지만 주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우울하고 암담한 생각만 하면서 “난 안 될 거야!!” 이따구로 행동하면 살 수 있는 환경에서도 뒈질 거라고 했어.
난 계속 몸을 풀면서 학교에서 배운 생존학을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오랫동안 생존하며 내 몸이 위상력을 쓰기에 알맞은 체질로 바뀌길 기다리는 거다. 그리고 기술과 능력을 깨닫는 거지!!
능력과 기술은 긴 시간을 위상 세계에서 보낼 때 체질이 변하면서 얻게 되는 특별한 능력이다.
대체로 무슨 행동을 했느냐와 무슨 생각을 했느냐에 따라서 첫 기술이 결정되고 그 후에는 깨달은 기술의 계통을 따라 나뭇가지를 뻗어 나가듯이 관련 계통의 능력과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설원에 떨어져서 몸을 보호할 수단이라고는 튼튼한 옷 한 벌 뿐이라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춥다! 불이 필요해! 바람을 막고 싶어! 따뜻함이 필요해! 이 정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면서 지내다 보면 추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얻게 되는 거다.
반대로 오히려 추위와 바람, 눈에 적응해버리면서 그쪽 계통을 각성해버릴 수도 있고 말이지.
그에 비해 위협 요소라고는 이형종뿐인 이런 활엽수림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일단 닥치는 위험 상황이라고는 자기 자신의 상상일 뿐이라던가? 혹독한 자연환경과 싸울 때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볼 여유 따윈 없을 테니까.
그래서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신의 내면과 싸워 살아남은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정신계통의 능력을 얻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와는 반대로 별 생각 없이 숨어지내고 열심히 도망 다니다가 육체 강화 계통을 얻을 확률도 있다.
그리고 그런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대분류만 세 가지에 중분류 소분류로 내려가면 수백 가지가 된다던가? 능력까지 합치면 어마무시하게 많다고 하던데 내가 알고 있는 건 능력 중에서 최고는 자연계 조작 능력을 얻은 자들과 정신력으로 이적을 일으키는 기술을 얻은 능력자들이었다.
자연계라고 하면 너무 폭넓은 단어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4대 속성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불과 바람, 물과 대지.
손짓 한 번으로 사람이나 이형종을 땅에 생매장시켜버린다거나 활활 태워버린다거나 하늘 높이 올렸다가 추락시켜 죽인다거나 물로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버려 질식시켜 죽인다거나.
어째 죽인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거 같지만… 살아남기 위해 익힌 능력이니 누군가를 죽인다는 거에 최적화된 거겠지?
정신력으로 이적을 일으킨다.
간단히 말해서 초능력이다. 염력으로 물체를 띄워 올린다거나 충격을 줄 수 있고 물질의 고유 진동수에 맞춰 붕괴시킨다거나 순간이동을 하고 몸을 띄워 올리거나 먼 거리에 있는 사물을 확인하거나?
아무튼, 초능력이든 속성이든 종류도 많고 활용법도 무궁무진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육체 강화 능력자가 약하,
쿵!!
지. 어? 뭐지?!
쿵!! 쿵!!
갑자기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상하로 흔들흔들 거리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소리에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뭔가 위험한 게 나타났어!!
쿠웅!! 쿠웅!! 쿵!!
고막을 울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는 애써 무시한 채 숨을 죽이고 움직임까지 멈춘 채 주위에 뭐가 나타났는지 알아보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살펴보았다.
쿵!! 쿵!! 쿵!! 쿵!!
진동소리에 맞춰 심장도 쿵덕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두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벌벌 떨면서 점점 땅을 울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을 무렵.
푸스스스
히이이이익!! 뭐야?! 뭔가 누리끼리한 게 지나갔어!!
갑자기 뭔가… 살색?이 내가 숨어있는 나무의 끄트머리를 치고 지나가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날 가리는 데는 지장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약간 생긴 틈으로 보이는 건… 사람… 뒷모습, 인 데.
커!!
이 나무의 높이가 10m가량 되는데 저거 키도 비슷한 거 같다!!
산발한 갈색 머리카락은 마구 풀어헤쳐 져 허리까지 내려오고 온몸에는 보디빌더의 근육과는 다른 실용 근육이 마치 바위처럼… 바위…처럼…
여…여자?! 아니 암컷인…가? 생긴 건 사람인데.
하… 하여튼!! 저 거인은 벌거벗고 있었다. 위아래 몸을 가리거나 걸친 건 하나 없이 차돌 같은 근육질 몸매를 뽐내듯이 드러내고 있었고 떡 벌어진 어깨를 지나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는 등과 이어지는 허리에 S자 라인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듯한 골반이 여성스러운 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탱탱한 엉덩이 밑으로 보이는 다리 사이의 틈에는 거뭇한… 털?과 함께 갈라진 여성의 비밀스러운 계곡이 보였다!! 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보니 마치 근육단련을 열심히 한 운동선수를 보는 것 같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울렁거리고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뭐 나도 18살 피 끓는 청소년이니까…
그래도 들키면 죽을 거라는 생각은 잊지 않고 있다. 최대한 숨소리도 죽이고 움직임도 멈춘 채 두 눈만 부릅뜬 채 여자 거인의 뒷태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늘씬하게 빠진 다리지만… 허벅지의 근육도 각이 져서 두툼해 보이고 무릎에서 이어져 종아리로 내려오니 허벅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 쪽으로 갈라진 근육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지금 숨어있는 나무 기둥만 한 몽둥이가 보인다. 의아해서 시선을 올려보니 오른손에 몽둥이…. 곤봉을 쥐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걸 제일 먼저 본다더니 그거 진짜인 거 같네. 어떻게 저 곤봉이 눈에 안 들어 올 수 있는 거지? 들키면 저 곤봉에 두들겨 맞아 쥐포가 될 텐데.
다시 눈을 돌려 몸을 살펴보니 그야말로 완벽한 9등신 몸매가 보인다. 너무나도 실용 근육으로 가득 찬 팔다리와 탱탱한 엉덩이, 아래쪽 다리 사이로 보이는 여성기. 그리고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지만 부릅뜨고 등 부분을 살펴보니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기 희미한 상처가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팔과 다리에도 많은 상처가 보인다. 마치…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듯한…
뭐야 이거…… 여기 초보자 지역이잖아? 들어온 사람의 위상력에 대응한다는걸 생각해보면 처음 위상 세계에 떨어진 나때문에 약한 이형종만 모여있는 곳이 아니었어?
저렇게 커다랗고 걸을 때마다 땅이 울리는 체중을 지닌 데다 자기 허벅다리만 한 나무기둥 곤봉을 가볍게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거인인데, 틀림없이 고위 이형종일텐데 저런 거인한테 상처를 입히는 존재들도 있단 말이야?
아아…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심장은 다시 공포에 잠겨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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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