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그래.
능히 지옥도(地獄道)라 일컬어도 될만한 난장판에 나와 한세정들 모두가 일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사방을 둘러봤다.
일전에 겪었던 ‘절망의 파도’와는 비교조차 불허하는 광경이었다.
어떻게든 해자를 건너려는 무리, 그 무리를 저지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무리, 제 동료의 발목을 잡으려는 무리를 공격하고자 악을 쓰는 무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혈전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탓에.
“…다들, 준비됐어?”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는 건 현재의 난관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나가서 싸워야 한다.
24시간이라고 했지.
어디 한 번 버텨보리라.
이 세계의, 이 행성의 지배권이야 별 관심도 없다만… 그와는 별개로 나도 한세정들도 이렇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자.”
“…네!”
“후우, 네!”
“지유야, 내 곁을 벗어나지 마.”
“네, 재우 오빠.”
“아자……!”
우리는 칼을 뽑아 들었고, 처음부터 매우 강한 패를 꺼내놓으며 전장 전체에 우리의 존재감을 명확하게 각인시켰다.
의도는 단순했다.
누구라도.
함부로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다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리라.
그 강렬한 의지를 모든 침략자들의 머릿속에 틀어박고자 함이었다.
[오리지널 기술 : 검은 죽음의 손길 - 베놈 포그]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오리지널 기술 : 철혈의 요새]
[오리지널 기술 : 천공의 문 - 염귀]
우우우우우우우웅!!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
중앙에 자리잡고 방패를 들어 올리는 곽재우를 기준으로 각자가 전후좌우(前後左右) 한 방향씩을 맡아 형형색색으로 번쩍이는 일격을 내리꽂았다.
그 이펙트가 어찌나 화려한지.
맹목적으로 싸움에만 몰두하던 전체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돌려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혹은.
본능적으로 직감한 걸지도 몰랐다.
“쓰읍, 후…….”
[스트랭스]
[일기당천]
[괴령화 : 오르그]
[천강]
이제 곧.
“가자.”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후우우우욱!
본인들 머리 위로 떨어질 수천, 수만 개의 유성우(流星雨)가 선보일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콰아아앙――――――!
콰과과과과과광!!
일견 아름답기까지 했던 별들의 낙하가 가져온 여파는 엄청났다.
지상을 뒤덮은 유성들로 일대가 송두리째 지워졌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소멸(消滅)이었다.
괴물과 사람, 지형지물.
이런저런 버프와 500 스탯 특전으로 받은 ‘각인’의 힘에 더하여 5단계로 올라서며 ‘신체 능력치 39% 상승’, ‘ 기술 위력 20% 상승’의 이점을 안겨준 ‘기적의 조각’까지.
각종 기예들이 오리지널 기술과 융합하며 빚어낸 합작품은 그 무엇도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장.”
나는 안심하거나 안도하기보다 욕지거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우리가 발해낸 공력이 무색하게.
후우우욱―
쿵!
쿠웅!
쿵!
저 멀리서부터 전보다 많고, 전보다 강한 군세가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각 종족의 왕들과 인간군 중에서도 최강을 논하는 집단과 연합들.
신단을 건설하고 있는,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손에 쥔 우리의 실력이 어떠한지 파악하고자 일부러 한 템포 기다렸던 자들이었다.
그 강대한 진군에 위험을 감지하는 육감이 미친 듯이 아우성을 치며 당장에라도 도망치기를 강권한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거다.
제아무리 무칼라고와 십이지신(十二支神) 등의 골렘 부대가 뒤를 받쳐준다 한들 고작 여섯 명밖에 안 되는 소수 정예로는…….
승리라는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끝인가?”
그 자각에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산해 보았다.
과연.
킹급 무칼라고를 사냥했던 당시처럼, ‘권능 : 파멸자’를 비롯해 ‘건곤일척’ 등으로 무장하고 날뛴다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 하고.
“힘들겠지.”
곰곰이 계산해보았으나.
결과는 여전히 비관적이었다.
우리가.
어떤 기발한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을 확률은 제로였다.
제로에 가까운 게 아니라 제로.
단 1퍼센트도 허락되지 않았다.
필시.
신단을 수호하는 방벽인지 뭔지가 사라진다면 5분…은커녕 1분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게 분명했다.
한세정들도 이를 인지했을까?
열과 성을 다해 창칼을 휘두르던 것도 멈추고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의 눈동자 안엔 ‘끝’이라는 글자가 서서히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차라리 날 원망해주지.
우리가 왜 너로 인해 이리 비참한 결말을 맞이해야 하느냐고 욕하지.
그랬다면.
결국 너희도 죽음 앞에선 본색이 드러나는구나 하고 자위하며 미안해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저희는 괜찮아요. 어차피 오빠 아니었으면 이미 다 죽었을 몸인데요. 안 그래?”
“그럼. 난 아직도 눈만 감으면 생생히 기억나. 너랑 오빠가 날 구해주던 감옥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게 복수할 기회를 주시던 장면이.”
“저도요. 지운이가 그만 아팠으면 했거든요.”
“저는 조금 아쉽긴 해요. 한 번쯤은 연애도 해보고 싶었는데……. 헤헤.”
도리어.
나를 위로하려 하는 한세정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칼날이 박힌 듯 아린 통증이 울컥울컥 밀려왔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띠링!
무척이나 산뜻하게 울리는 알림.
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특별한 마음은 없었다.
지난 몇 달간을 시스템의 영역 아래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긴 습관이었다. 하여 더없이 무심한 기색으로 바라본 것이었다.
단지 그게 전부였는데.
“아……!!”
허공을 올려다본 직후.
나는 형언 못할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기적의 조각」의 특수 기능 ‘유성의 궤적’이 또 다른 조각의 위치를 발견했습니다.]
《특수 기능 : 유성의 궤적》
- 설명 : ‘기적의 조각’이 4단계에 도달하며 강화된 특수 기능으로, 사방 100m 내에 존재하는 ‘기적의 조각 소유자’의 흔적과 이동 경로를 읽을 수 있다. 이때 탐지가 가능한 흔적과 궤적은 최대 3일 이내의 것으로 제한된다.
‘기적의 조각’과 관련된 이야기였으니까.
심장이 뛰었다.
제로라고 단언했던 가능성이란 벽에 극히 미비할지언정 흠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열기가 급속도로 치솟아 올랐다.
불현듯.
희망은 곧 절망을 가중할 뿐이라는 옛말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며 한세정들을 불렀다. 상식적으로 낙타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상식을 깨부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나는…….
그 점에 목숨을 걸어보기로 각오를 다졌다.
결정은 빨랐고.
“해보자.”
“네!”
행동은 더욱 빨랐다.
* * *
후우우우우우욱!
콰아아아앙!!
[‘신단’을 수호하는 방벽이 파괴되었습니다.]
고막을 강타하는 굉음이 치솟은 찰나.
기어이 거점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방벽이 위쪽에서부터 와르르 부서져 나가자 수만을 넘어 수십만이 된 괴물과 인간의 군단이 너나 할 거 없이 한데 어우러져 일제히 한 곳으로 질주했다.
유일무이한 신물(神物), ‘차원의 깃발 : 테라’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자.
그 광란의 파도를 응시하던 나는 한세정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양손으로 붉은색 깃대를 꽉 움켜쥔 채 호흡을 가다듬다 말고 내게 싱긋 웃는 그녀.
그러더니.
“꼭, 찾아와주는 거예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들어 약속하라는 제스쳐를 남긴 한세정은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단거리 공간 이동]
탁!
번쩍――――!
미소만 남기고는 모습을 감춘다.
어디로 간 것인가.
바람처럼 흩어졌던 그녀는 어느새 거점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다.
저기서 무얼 하려는 걸까?
[건곤일척]
[신속]
[앱솔루트 배리어]
가진 모든 수를 동원하면서.
왜.
“흐읍, 하아아아아아아!!”
기합을 내지르며 괴물들의 품속으로 뛰어드는가.
희생.
희생이었다.
‘유성의 궤적’으로 여섯 번째 ‘기적의 조각’을 포착했으나, 저 거대한 해일을 뚫고 타깃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은바.
그래서 한세정이 나섰다.
욕망의 근원인 ‘차원의 깃발’이 움직이면 적들의 이목도 그쪽으로 집중되리니,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틈을 노려 돌파해보라는 의미였다.
우리의 계획이 실패한다면 비루한 최후가 될지도 모를 선택이었지만.
떠나가는 한세정도, 남은 우리도 후회를 내비치지 않았다.
성공하면 될 일이었다.
당연히.
성공할 것이고.
따라서.
슬픔은 삼키고 의지를 불태우며 걸음을 떼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절대!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된다!!”
“국왕 전하를 위하여!”
“국왕 전하를 위하여!!”
“우와아아아아아!!”
100m라는 짧은 거리 끝자락에 신(新) 한국 정부의 기치가 펄럭이는 게 보였다.
하필.
많고 많은 집단 중에 신(新) 한국 정부라니.
이 기가 막힌 만남은, 아마도 운명마저 제멋대로 갖고 노는 우주적 법칙이 만들어낸 장난이 아닐까 싶었다.
혹은.
마땅한 순리일지도 몰랐다.
이 시기에, 이 형국에 ‘차원의 깃발 : 테라’를 노리고 여기까지 올 만한 실력인 인간군은 끽해야 대여섯 개가 다일 테니까.
뭐가 됐든.
나로서는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마치.
복수로 시작되었던 삶의 마지막 페이지마저 복수로 장식하라는 말처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이적 - 모두를 비추는 자 : 강화의 이적]
우우우우우우웅!!
나라는 녀석과 복수란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모양이었다.
“가자.”
“넵!”
콰앙―――!
* * *
달린다.
다섯 갈래의 섬광이 직선으로 발을 굴렀다.
“저, 적이다!”
“측면! 측면이 급습당했다!!”
“막아라!!”
우리의 돌진을 알아차린 신(新) 한국군이 다급히 일부를 반전시키며 앞을 가로막았으나.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광풍의 비행]
“하아아!”
조이령이.
[오리지널 기술 : 오러 블레이드]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흐읍!”
신지운이.
[오리지널 기술…….]
신지유와 곽재우가 몸소 길을 열어주었고.
100m였던 간격은 단숨에 50m로, 50m는 다시 40m, 30m, 20m로 매섭게 줄어들어갔다.
그제서야.
“뭣들 하는 거냐! 막아! 막으라고!!”
“충령 부대는 나를 따라라!”
우리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신(新) 한국 정부 측에서 김한수가 이끄는 충령 부대를 필두로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왕실군을 출전시켰으나.
나는 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다음이었다.
즉.
손만 뻗으면 먹잇감을…….
“찾았, 다.”
파직!
촤아아아아아악―――!!
“……!”
취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던 찰나에 무언가가 내 상체를 노리고 들어왔다.
무시하기엔 너무나도 위협적인 참격이었고.
이에 황급히 제동을 걸며 정체를 확인한 그곳에는, 칼날 위로 검붉은 불길을 세워 올린 한 남자가 세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