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우리는 천년 묶은 구미호의 매혹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문 안쪽으로 진입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뒤에서 처절하고도 구슬픈 아라토르들의 괴성이 난무했으나,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오직 앞으로 걷고 또 걸어.
탁―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정면에 두고 섰다.
그 걸음의 끝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한세정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따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네들의 눈빛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구태여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더라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잡아라.
그리고 뽑아라.
더없이 명확한 무언의 제스쳐에 난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오른손을 쭉 뻗어 홀로 고상하게 선 깃발의 장대를 붙잡았다.
스으윽―
탁!
“아.”
차갑다.
그러면서도 뜨겁다.
상식선을 벗어난 모순된 촉감이 손바닥 전체를 타고 뇌리에 전달됐을 때.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기적의 조각’을 습득합니다.]
[현재 ‘기적의 조각 : 4단계’를 보유 중입니다.]
[‘기적의 조각 : 4단계’가 ‘기적의 조각 : 5단계’로 진화합니다.]
나는 원하던 걸 가질 수 있었다.
《기적의 조각 : 5단계》
- 등급 : 신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름 그대로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묘한 ‘마석(魔石)’의 조각이다. 본래는 하나의 차원을 온전히 발아래에 둔 지배자에게 수여되는 보물이나, 이따금씩 해당 조각처럼 주인 잃은 별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
총 ‘여섯 개’를 모아야 진정한 힘을 발휘하나, 단지 조각을 지닌 것만으로도 적잖은 능력을 손에 넣기도 한다.
현재 ‘다섯 개의 조각’이 융합되었으며 〈특수 퀘스트 : 선택〉과 〈업적 : 유일한 참수자〉,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를 훌륭히 이행함에 따라 완성(完成)을 직전에 두게 되었다.
- 옵션 : 신체 능력치 39% 상승 / 체력 및 마력의 회복 속도 33% 상승 / 모든 속성 저항력 25% 상승 / 기술 위력 20% 상승 / ‘운명의 고리’ 회피 기능 추가 / 양도 불가 / 소유주 사망 시 무작위 전이
- 추가 옵션 1 : 특수 기능 ‘휴대용 안전지대’ 생성 가능
- 추가 옵션 2 : 특수 기능 ‘유성의 궤적’ 발동 가능
- 추가 옵션 3 : 특수 기능 ‘작은 이적 - 사슬을 끊는 자’ 발동 가능
- 추가 옵션 4 : 특수 기능 ‘평범한 이적 - 모두를 비추는 자’ 발동 가능
《특수 기능 : 평범한 이적 - 모두를 비추는 자》
- 설명 : ‘기적의 조각’이 5단계에 도달하며 생성된 특수 기능으로, 사방 50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아군에게 회복 또는 강화의 이적을 선사한다. 단, 아직 불완전한 상태이기에 한 가지 이적을 선사한 후 해당 기능은 일주일간 봉인되며 이는 ‘작은 이적 - 사슬을 끊는 자’로도 해제하지 못한다.
- 회복의 이적 선택 시 : 중상 이하의 상처 완벽 재생, 체내 마력 보유량 최대치의 절반 충전
- 강화의 이적 선택 시 : 10분간 신체 능력치 22% 향상
나는 인류 최초로 ‘신화(神話)’등급의 아이템을 맞이하게 되었다.
심지어.
《차원의 깃발 : 테라》
- 등급 : 신화
- 분류 : 불명
- 설명 : 〈차원 : 테라〉의 단 하나뿐인 신물.
- 옵션 : 조건 달성 시 주문 ‘신단 건설’ 자동 발동
무려 두 개였다.
비록 앞선 ‘기적의 조각’과 달리 휘황찬란한 옵션은 없을지언정.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위대한 성과였다.
* * *
[「차원의 깃발 : 테라」의 소유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면 세계 전용 단체 퀘스트 : 최종 결전》이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에 흡수됩니다.]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의 일부 내용이 수정됩니다.]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2)》
- 1 : 본디 ‘깃발’이란 누군가의 「영역」을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완벽한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발아래에 두는 영광스러운 증명에도 깃발을 사용하기로 약속했습니다…….(달성)
- 2 : 갖은 고난과 험난한 가시밭길을 거쳐 드디어 보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허나, 가히 신물(神物)에 필적한다는 이 영험한 깃발은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가치에 가장 합당한 장소.
당신은 지금부터 깃발의 가치를 십분 끌어낼 수 있는 신단(神壇)이 세워질 때까지 버텨내야 합니다. 이제껏 겪었던 역경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버텨야 합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승리의 영광과 권좌의 권리를 거머쥘 순간을 위해 견뎌내십시오.
└해당 퀘스트는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소유한 자에게만 부여됩니다.
└현재 단계 보상 : 〈차원 : 테라〉
5단계를 이룩한 ‘기적의 조각’에 내장된 막대한 버프를 체감할 무렵 개정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내용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몇 줄의 메시지가 눈앞을 장식하더니.
[경고!]
[누군가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습득했습니다.]
[공간 〈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이 파괴됩니다.]
[〈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 내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강체 추방됩니다.]
이내.
[퇴장합니다.]
후우우욱!
번쩍――――!
강렬한 휘광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이러한 현상에 거부란 불가능했고.
난데없는 부유감에 허덕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캬아아아악!”
“캬아아악!”
“키아아아아악!!”
〈던전 : 흡혼의 협곡〉에 내동댕이쳐진 이후였다.
* * *
“뇌운!!”
후우우욱!
콰앙!
콰과과광!!
수십 줄기의 벼락이 주변을 휩쓸며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미는 수백 단위의 흡혈박쥐들을 불태운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공간을 연 나와 한세정들은 우선 거점으로 달렸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거니와 뭣보다 마력 회복이 급했다.
고로.
“하앗!”
“합!”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은 용]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독사지옥]
[태산압정]
후우우욱!
후웅!
콰아아아앙!!
길을 열기 위해서 오리지널 기술마저 연신 투하하며 던전에서 빠져나와 최대한 쾌속하게 귀환하길 5분여.
죽자사자 발을 놀리다 보니 금세 ‘초목의 안전지대’ 특유의 세계수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이라는 생각에 조금씩 풀리는 긴장감.
허나.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는 일념으로 집중에 집중을 더하며 흔들바람의 도움을 받아 중력을 거스르고 해자를 건너 흙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마침내 거주지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텁!
화아아아악―――!
그리곤 날 반겨주는 무칼라고들과 골렘들을 뒤로한 채 안으로 몸을 내던지던 순간이었다.
으레 등장하는.
[‘초목의 안전지대’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신체 능력치가…….]
[체력 및 마력 재생 속도가…….]
따위의 메시지를 고대한 우리에게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문구가 출력된 것은.
[축하합니다!]
[「차원의 깃발 : 테라」에 내장된 ‘트리거’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현재 위치에 ‘신단’이 건설됩니다.]
[‘신단’을 수호하는 방벽이 가동됩니다.]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2)》가 실시됩니다.]
[신단 완공까지 남은 시간 : 23시간 59분]
“……?”
상상에도 없었던 문장에 당황하건 말건.
주르륵 나열된 글자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 임무를 수행하며 거점 중심부에 거대한 탑을 쌓기 시작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가까스로 정신줄을 놓지 않은 덕택에 겨우겨우 해석할 수 있었다.
‘차원의 깃발 : 테라’가 ‘안전지대’ 내부에 들어가면 신단(神壇)이 설치되고, 그게 완성되어야지만 ‘차원의 깃발 : 테라’를 꽂아 지구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스토리를.
물론.
전후사정을 파악했다고 해서, 정답을 맞췄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건 결코 아니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뻐할 새도 없이…….
[〈차원 : 테라〉내에 존재하는 모든 「침략군」과 행성 테라(Terra)의 지배종 「인간」에게 《이면 세계 전용 단체 퀘스트 : 최종 결전》의 ‘최후 목표 : 탈취’가 부여됩니다.]
[지금부터 ‘빛의 기둥’을 이용할 시 신단 근처로 이동합니다.]
“…뭐?”
아주 개 같은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두들겼기 때문이었다.
전쟁.
그것도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대전쟁(大戰爭)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후우우우우욱―
번쩍
후우우우욱―
번쩍!
“오, 오빠! 저기……!”
“저쪽에도!”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수백, 수천 개의 빛줄기.
다행스럽게도 최소한의 배려는 해줬는지 꽤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옅은 광색이었으나, 실상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괴물이든 사람이든.
어느 정도의 수준만 갖추더라도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쯤은 어렵지 않게 주파할 수 있으니까.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어어어어어어!!”
“키에에엑!”
“아우우우우우우!!”
온갖 곳에서 괴물들 특유의 하울링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마.
‘신(神) 한국 정부’, ‘성십자가 클랜’.
그 밖에 따로 마주친 적은 없지만, 서울을 주름잡는 ‘킹덤’이나 황 노인께 들은 부산의 ‘해운대’와 전·현직 운동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했다는 ‘태릉’ 등…….
인간들로 구성된 집단들 역시 하나둘 등장하고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상정하고 나니 집에 도착하며 풀려가던 긴장감이 다시금 팽팽하게 조여졌다. 전 생명체의 표적이 되었다는 중압감이 우리의 어깨를 짓눌렀다.
* * *
콰아앙―――――!
“오는 건가…….”
몇 분이 지났을까.
5분? 10분?
‘왕의 수급’과 결합하며 5레벨로 향상된 ‘초목의 안전지대’가 주는 회복력에 기대어 호흡을 가다듬던 차에.
콰아앙―――――!
쿠구구구구궁!!
어디선가 시끄러운 폭발을 동반하며 건물 부서지는 소음이 솟구쳤다.
우리가 쉬는 꼴을 볼 마음이 없다는 듯.
기껏해야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휴식 시간을 찢어발기며 출현한 놈들의 정체는.
“크라라라라!!”
“크라라!!”
“크라라라라!!”
후우우우욱!
콰앙!
하늘 높이 주먹을 쳐들며 포효하는 다수(多手)의 거인.
익숙하다 못해 지겹도록 부대꼈던 포타우스들이었다.
또 있다.
“꾸이이이이이익!!”
“꾸이이이익!!”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던 스랄레오들.
“크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내 왼팔을 담당해주었던 투쟁의 종족 발록들.
육체에 철갑을 두른 대형 사슴벌레 루카누스, 물 속의 납치법 아라운다 등등등.
낯익은 형상들을 필두로 수많은 괴물이 얼굴을 들이밀었고.
“저기다!!”
“괴물들입니다!”
“좌익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뒤지지 않겠다는 양 숫자를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군중이 전진해왔다.
그야말로.
인괴의 아수라장(阿修羅場)이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