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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223화 (222/232)

223화

찢겨나간다.

킹급 무칼라고의 육체가 중심부를 기준으로 왼쪽 상단부가 깔끔하게 지워졌다.

그 길이만 거의 7~8m.

웬만한 퀸급 개체 한 마리에 해당하는 양.

어찌나 방대한지.

후두두두둑 하고 놈의 몸통에서 떨어져나온 점액은 모르는 이가 봤다면 일순간 비가 내린단 착각이 드는 수준이었다.

딱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툭―――

파아아앙!

[「특수 상태 : 전력」이 비활성화됩니다.]

[기술 ‘건곤일척’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기술 ‘신속’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기술 ‘앱솔루트 배리어’가 공격을 방어해냅니다.]

하나둘 해제되어 어마어마한, 끔찍하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은 탈력감과 무력감을 느끼며 기술의 후폭풍에 휘말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후우우욱!

콰앙!

“…큭!”

지면에 처박힌 등판에서 시작된 저릿한 통증에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만.

그거 외에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 일격 태세’의 부작용을 막고자 펼쳐놓았던 ‘앱솔루트 배리어’가 데미지를 흡수해준 덕택이다.

“하아… 후, 후우… 젠장.”

차라리.

뼈 몇 대 부러지고 피 좀 흘리는 게 낫겠다 싶은 형편이었지만, 여하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선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고정해놓고 전방을 응시했다.

가해자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과연 피해자도 같은 실정인지, 혹은 훨씬 심각한지 체크하기 위하여.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끄에에에에에에엑!!”

쿠웅――――

쿵!

흔히들 말하는 지랄발광에 가깝게 난동 부리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부짖는 걸 보아하니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당연했다.

놈의 육신에 새겨진 멍울은 치유도, 재생도… 무칼라고 종(種)의 유별난 장기인 「분열」 또한 봉쇄해버리는 최악의 흉터일 테니까.

내.

‘권능(權能)’에 의해.

《권능 : 파멸자》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다섯 번째 ‘환골탈태’를 달성하여 정해진 종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超越)의 영역에 들어선 이에게 부여되는 숭고하고도 경이로운 능력입니다. 전 우주의 정보를 기록하고 유지하는 「아카식 레코드」에 담긴 당신의 삶을 분석하여 부여된 이 기예는, 파멸이란 명칭에 부합하듯 닿은 대상 전부를 완벽하게 없애버립니다.

다시는 복구하지 못하도록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이 절대적인 선언은 동일한 권능의 힘으로 대적하지 않는 한 항거조차 불가하리니 당신에게 도전하는 존재가 있다면 찍어누르십시오.

- 「파멸」의 기운이 각인된 상흔은 평범한 ‘특성’, ‘기술’, ‘고유 능력’으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 「파멸」의 기운이 각인된 상흔에 한해서는 이차적으로 발현되어야 하는 ‘특성’과 ‘기술’, ‘고유 능력’이 제한됩니다.

- 강대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1회 사용 후 사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주어지며, 3일간 ‘모든 신체 능력치’가 최대치의 10%로 고정됩니다.

- 재사용까지 남은 시간 : 2일 23시간 59분 59초

흡사 신지운이 가진 신력(神力)과 비슷한 이 어빌리티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위력을 선사했다.

[권능의 대가가 찾아옵니다.]

[사흘간 모든 신체 능력치가 최대치의 10%로 하락합니다.]

꽤 비싼 값을 치르긴 했다만.

킹급 개체마저도 꼼짝없이 당할 만큼 강력했던 터라 한층 강해진 무기력함에도 내 표정엔 흡족함이 가득했다.

“끄에에에엑!! 끄에에에에에에엑!!”

당황한 듯 질러대는 놈의 괴성이 어쩐지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나는.

우득―

“크흡, 후….”

이 기세가 끊기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며 자세를 바로 했다.

싸운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현재의 난 종말 초기나 다름없는 레벨까지 추락한 상태. 이런 몰골로 어떻게 싸울 거냐 싶겠지만.

“자은 이적.”

나에겐 그게 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사슬을 끊는 자]

파지!

쿵!

[체내에 자리한 모든 해로운 것들이 소멸합니다.]

[중경상 이하의 상처가 재생합니다.]

[3분간 ‘저항력’이 30% 향상됩니다.]

고오오오오오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세차게 낙하하던 날 지상, 아니 저 드높은 창공으로 날아오르게 해줄 이적(異跡)이.

이걸 기반으로 한번 잡아보겠다.

그리고 당당하게 귀환하리라.

“하아!”

타닷―

콰아아아앙!

각오를 다진 나는 불쑥 돌출된 거석을 딛고 펄쩍 뛰어올랐다.

망설임, 머뭇거림.

그딴 건 없었다.

오로지.

“끄에에에에에엑!!”

겨냥한 사냥감을 향해 쇄도했다.

정말로 다음이 없는…….

[건곤일척]

[신속]

[앱솔루트 배리어]

[권능 : 파멸자]

진정한 최대 출력이었다.

* * *

얼마나 되었던가.

반년? 넘었나?

달력을 보는 게 무의미해지고 나서는 날짜를 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절대 짧지 않은 나날을 함께하며 우리에겐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구구절절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과 몸짓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전우애였다.

그걸 증명하듯.

거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기 전부터 호시탐탐 깃발 파괴만을 노리던 한세정은 쓰러졌던 아윤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직감했다.

그가.

“…다시 간다!”

킹급 무칼라고에게 재도전하려 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이쪽에선 무얼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전원 공격!”

아윤을 돕는다.

단 0.1%라도 좋으니, 저 진격의 성공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게끔.

그 날카로운 선포에.

“하아아아!”

“암전류!!”

“으읏, 차!”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천공의 문 - 암전류 / 천벌]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조이령과 신지유, 신지운이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내며 호응했다.

다들 아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벗어나지 못할 전장.

가지고 있는 건 자그마한 티끌 하나까지도 총동원해야 할 판국이었다.

후우우우우우욱!!

콰아아앙!

콰과과광!!

셋이 발한 필사의 노력이 킹급 무칼라고를 들이받으며 굉음을 빚어낸다.

아윤에게 당한 상처 탓인지.

“끄에에에에에엑――――”

우리의 공세에도 목구멍을 열며 비명을 토해내는 놈. 그 틈바구니에 숨은 한세정은 적의 신경이 분산된 기회를 노려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본래.

그녀는 항시 후방에 머무르는 멤버였다.

다른 사람과 달리 부족한 원거리 공격 수단으로 인해 근접전을 벌여야 하는데, 근접전의 특성상 무작정 덤벼들었다가는 죽을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지라 가급적 안전을 지향하는 아윤의 의지에 따라 동료들을 서포트하거나 몰래 깃발을 노리는 등의 역할에만 치중했다.

주어진 임무가 싫지는 않았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미션이었고, 이렇게라도 아윤에게 도움이 된다면 설령 지옥불에 굴러도 좋았다.

하여.

어지간하면 지키려고 했던 당부를 어겼다.

“흐읍!”

타닷―

쿵!

내가 다치면 오빠가 더욱 심하게 자책하리란 걸 알면서도 앞으로 내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빠르게 줄어드는 거리.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온 괴물왕(怪物王)의 위압감에 잠시 두려움이 일기도 했으나, 꾹 참고 칼날을 뽑아 들었다.

모두가 치열하게 분전하는 와중에 혼자 안전을 운운하며 빠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뭣보다.

내가 여기서 날뛸수록.

[영역 선포]

쿵!

화아아아아아악!!

아윤 오빠의 비수가 적의 머리를 관통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니.

딱.

[누군가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사방 50m에 이르는 공간 내에 허락되지 않은 자가 침범할 경우 강력한 저주가 깃듭니다.]

지금처럼.

“하아아아아아!!”

[오리지널 기술 : 사신의 눈물]

슈우우우욱!

콰직!

촤아아아아아악―――

진한 보랏빛으로 물든 칼날이 피륙을 뚫고 박힌 찰나.

“끄에에에에엑!!”

킹급 무칼라고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와 동시에.

쿵!

타다다다다다다다!!

하늘에서 수천, 수만 개의 점액질 탄환이 쏟아져 제아무리 공간의 문을 연다 해도 탈출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씨익!

소망하던 장면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아……!’

보였다.

창룡(蒼龍)과 월광(月光), 한 줄기의 초대형 낙뢰가 나타났다 사라진 이후 킹급 무칼라고의 발밑에 서 있는 한세정이.

이곳이 제 방안이라도 되는 양 일대를 뒤덮은 점액질 세례에도 편안한 모습으로 웃는 그녀를 목격한 내 눈이 더없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짓인가!

어째서 저러는진 보는 즉시 깨달았다.

나를 돕고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달려들었다는 것을.

그 명확한 의도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현실이 절박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뭐든 해서 저 괴물왕의 시야를 가릴 수만 있다면 죄다 동원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공감한다.

허나.

지불해야 할 대가가 동료의 생명이라면 거절이었다. 결코 누나와의 재회보다 위에 설 순 없어도……. 한 명, 한 명이 가족과도 같이 소중해진 이들이었다.

적어도.

나 살자고 일행을 팔아남길―

‘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참혹한 상상에 절망하던 난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꺾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극한까지 몰아붙인 듯 무기도 내려놓고 숨을 헐떡이며 곽재우의 보호를 받던 셋.

개중.

맨 우측에 앉아있던 신지운이었다.

일분일초가 중요한 이 와중에 내 눈길이 녀석에게로 가게 된 까닭은 단순했다.

저 소년이.

한세정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였기 때문이었다.

마력, 에너지, 기 등등등.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통상의 기운 위에 위치하는, 무척 특별하고도 특수한 제3의 능력.

「신력(神力)」만이 그녀를 무사히 구출해낼 방법이었다.

이 간절한 바람은.

[투르바의 포효]

스으으으읍!

“신력이다아아아아아아아!!!”

화아아악!

나의 목울대를 거쳐 정확하게 소년에게 닿았다.

투르바란 종(種)에게, 투르바란 종(種)의 뿔을 이식한 과거의 나에게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아아아아아악!!

신지운의 두 번째 오리지널 기술 ‘신력 발현’이 펼쳐진 듯 녀석의 주위에서 섬광이 일었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휘광이 가라앉고 난 뒤에 한세정의 어리둥절한 얼굴도. 그제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한 나는 눈을 돌렸다.

1초.

워낙 급박하게 흘러간 탓에 2초를 낭비했으나, 아직 내겐 1초라는 여유가 남아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일 일수유(一須臾).

그러나…

후우우우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아앙―――――

[축하합니다.]

[최초로 「킹급 개체」 사냥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보상으로…]

[축하합니다.]

[「원정대원」 이 ‘차원석 : 무칼라고’를 파괴했습니다.]

[〈차원 : 테라〉와 연결된 행성 ‘에밀스(Emils)’의 통로가 특수한 경구를 거치지 않는 한 영구히 차단됩니다.]

[〈이면 던전 : 분열의 늪〉에서 퇴장합니다.]

[남은 시간 : 5초]

[남은 시간 : 4초]

[남은 시간 : 3초]

[남은 시간 : 2초]

[남은 시간 : 1초]

[남은 시간 : 0초]

[퇴장합니다.]

번쩍――――――

나에게는 평생을 따져도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엔 꼽힐 최고의 1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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