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왕(王).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자,
가장 높은 권좌에 앉은 일국의 주인이며, 어떠한 종(種)을 이야기할 때 일족을 대표하여 가장 앞에 서는 이.
“이래저래 수식어가 많네요.”
많지, 많아.
문자 그대로 왕이니까.
하나의 행성을, 하나의 차원을 통치하는 군주.
대충 부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뭐… 그렇긴 하네요.”
그치?
근데, 골 아프게 다 기억할 필요는 없어.
기사 양반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부분은 단 하나뿐이거든.
“그게 뭔가요?”
뭐긴 뭐겠어.
아주 존ㄴ……. 아아, 그래도 신문에 실린다는 인터뷰인데 욕설은 안 되겠지.
크흠.
그러니까.
아주 미친 듯이 쎼다는 거야.
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4차 환골탈태는 해야 할 만큼.
아이템이고, 버프고 소용없어. 일단 기본적으로 합당한 기틀이 마련해야 해. 나머지는 그다음이지.
“엄청나네요……. 4차 환골탈태가 기본이라니.”
앞에서 말했잖아.
이렇기 때문에 원정대는 ‘인류의 마지막 불꽃’이라 불렸다고.
꺼지기 전에 타올라야 하는.
죽지 않으려면.
먼저 부숴야 했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그게.
우리 같은 잡종들이 쥘 수 있는 최선의 동아줄이었어.
- ‘원정대에 참여했던 누군가의 자서전 : 인류의 마지막 불꽃’ 中 일부 발췌.
* * *
뭉게뭉게 피어있던 구름의 중심을 관통하며 일직선으로 낙하하는 킹급 무칼라고를 보았을 때.
최초로 든 생각은.
‘어째서…….’
였다.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1시간 20분 30초]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1시간 20분 29초]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1시간 20분 28초]
분명.
킹급의 출현이 예고된 이벤트 개시까진 11시간이나, 여전히 반나절이란 간극이 존재했다.
그런데.
대관절 무슨 방법으로 이따금씩 등장하는 ‘우주가 정해놓은 법칙’을 뭉개고 여기에 나타난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음표를 만들어 냈다.
당황.
그래, 한마디로 정리해서 심히 당황스러웠다. 근래 들어 오늘보다 당혹스러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지유야! 피해라!”
전위에 나가 있던 신지유에게 퇴각하라는 후퇴 명령을 늦게 전달한 것 역시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소위.
얼이 빠졌다는 말.
지금의 내가 꼭 그러했고.
우우우우우웅!!
[가속]
[풀루스의 돌진]
탓―――
콰앙!
이를 인지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무릎을 굽혔다 펴며 킹급 무칼라고에게 도약했다.
홀로.
단독 돌격이라니.
스스로도 미친 짓이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이걸로 저 괴물왕의 시선을 끌어당기지 못한다면 신지유가 위험했으니까.
“끄에에에에엑!!”
후우웅!
쿵!
쿠구구구궁――――
신지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내린 지시를 완수하고자 출전했던 장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흐읍!’
우우우우우웅!!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형태 변화]
[일격 태세]
“하아!”
온전하게 데려와야 했다.
후우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아앙!!
손끝을 떠나간 마광포가 초고밀도로 응축된 모습을 유지하며 킹급 무칼라고와 격돌한다.
격이 다른 개체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기라도 하듯.
퀸급까지만 해도 온통 초록빛이던 몸뚱어리에 빨간색 물감을 풀어놓은 양 불그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놈의 피부가 발산된 폭발에 밀려 푹하고 쪼그라드는 게 눈에 보였다.
타격이 먹힌 건가?
“끄에에에에엑!!”
쩍 벌어진 주둥이에서 비명인지 분노인지 모를 포효가 터져 나왔다.
반발력에 의해 튕겨 나가면서도 그것을 똑똑히 쳐다본 나는 이를 악물고 치솟는 고통을 억누르며 왼팔로 허공을 그었다.
[웨루카의 베어 가르기]
후우우욱!
촤아아아악!!
사선으로.
역 대각선을 그리며 뻗어 나가는 참격.
더불어.
[이나고르트의 뇌광격]
[대자연의 격노 : 번개]
파직!
파지지지직!
콰아앙!
그 위에 덧입혀지는 뇌전(雷電).
황금빛 이빨을 번뜩이며 어우러진 전류가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 일격 태세’에 맞아 부서진 신체 속으로 파고든다.
레벨이 레벨이라.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애사당초.
내가 바랐던 건.
“끄에에에에에에엑!!”
스으으으윽!
쿠웅!
‘됐다!’
놈이 날 쳐다보게 어그로를 가져오는 것이었으니까.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형님!”
슈우욱!
쿵!
[오리지널 기술 : 철혈의 요새]
쿠구구구구구궁!!
뒤늦게 합류한 곽재우가 황폐해진 대지에 찬란하게 빛나는 본인의 방벽을 구축했다.
정확히.
“끄에에엑!!”
투우웅!
파바바바바바박!!
킹급 무칼라고의 입에서 수백 발의 점액질 소나기가 쏟아진 직후였다.
아슬아슬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영락없이 두들겨 맞았을 포화.
필시.
무방비하게 추락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아무런 방비도 없이 허용했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졌을 반격이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활화산이 화산재를 토해내듯 솟구치는 모래바람이 곽재우와 내 주위를 먹어 치움과 동시에.
파직!
각기 양 사이드에서 섬광이 반짝였다.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창룡(蒼龍)과 월광(月光)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
후화하하하학!!
타깃 킹급 무칼라고의 좌우를 노리며 비상하는 두 개의 한 기운.
“끄에에에엑! 끄에에엑!”
놈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후욱!
쿵―――
푸화하하학!!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 일격 태세’를 직격당하고서도 제 몸을 들었다 놓는 반동을 이용해 점액질과 섞여 끈적거리는 늪지대로 변한 지반을 들썩였다.
그 형세가 마치.
광대한 갯벌에서 해일이 인 것처럼 비춰졌다.
높이는 최소 15m.
가로 길이 또한 넉넉잡아 20m는 가뿐히 넘는 초대형 토사 격류였다. 그야말로 공방 일체의 완전한 호수비.
면전에서 발생한 재해에.
“하아!”
이쪽으로 달려오며 마력을 한껏 뽑아내던 한세정이 양팔을 전면으로 쫙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저 포악스러운 물결을.
[재앙]
[속성 : 얼음]
얼려달라고.
휘우우우우우욱!
쏴아아앆!
쩌저저저저적!!
한세정의 소망이 담긴 한기(寒氣)가 맹렬하게 나아가며 파죽지세로 접근해오던 급류를 지상에서부터 결빙시킨다.
무려 4차 한계 돌파로 획득한 특전.
아무리 괴물왕의 기술이라도 쉽사리 뿌리치지는 못하는 건가, 약간이지만 격렬하던 흐름이 주춤하는 게.
콰아아아아앙―――――
콰과과과과광!!
“아, 안 돼!”
발목을 붙잡았나 환호하려던 직전.
굉음을 동반하며 허무하게 박살 나는 빙하들.
한세정이 서둘러 마력을 더욱 주입해보지만, 이미 꺾여버린 기세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바스러진다.
아마도.
[천공의 문 : 얼음꽃]
“소빙하기(小氷河期).”
신지유의 서포트가 없었더라면 말이다.
휘우우우우욱!
사아아아아아악!!
한 손에는 수수하되 우아한 나무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을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두꺼운 책자를 나눠 쥔 소녀는 내 덕에 무사히 후방으로 피신한 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총력을 기울여 한세정을 도와 백색의 조형물을 조각해냈다.
후우우욱!
두 여인의 합심으로.
쩌저저적―――――
자연재해를 저지하는 순간이었다.
“…이령아!”
그 과정을 두 눈동자로 지켜보며 퍽 하고 맨땅에 처박힌 나는 정신을 헤집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꾹 참으며 곧바로 일어나 조이령을 찾았다.
당장.
“퇴장 주문을!!”
도망치자고.
우리의 목표는 깃발이지 괴물왕(怪物王)의 수급이 아니었다.
고로.
처음 대면해본 「킹급 개체」의 어마무시한 능력을 확인한 이때, 굳이 더 맞붙을 거 없이 이대로 물러나도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조이령이 ‘원정대장’ 직위를 잃겠지만.
목숨과 비교하면 몇십, 몇백 배는 남는 장사였다. 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을 소리쳤으나, 돌아온 것은 비보(悲報).
“퇴, 퇴장이 안 돼요!”
“……?!”
[현재 「왕의 권능 : 지배자」가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주문 ‘퇴장’의 발동이 제한됩니다.]
“…아.”
퇴장이 불가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외침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후의 도주 루트로 상정했던 시스템의 불발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이령의 답신대로라면.
꼼짝없이 킹급 개체와 담판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젠장!’
목구멍을 비집고 절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가.
충돌의 충격으로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근육이 아우성쳤으나, 이를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두통이 밀려온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가야, 한다……!’
결국,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전투.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부딪쳐야 했다.
그게 나와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비책이었다.
[회귀]
[부분 복원]
[급속 회복]
우우우우웅!
[‘회귀’가 발동됩니다.]
[지정된 상처 부위가 없습니다.]
[가장 심각하게 소실된 신체를 기준으로 회귀가 진행됩니다.]
[‘부분 복원’이 발동됩니다.]
[3분간 재생력이 극대화되며, 수지 절단 이하의 상처가 완벽하게 복원됩니다.]
[‘급속 회복’이 발동됩니다.]
[소모된 체력의 10%를 회복합니다.]
삽시간에 각오를 다진 나는 갖은 회복술로 상흔을 짓누르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튀어나온 바위를 발판 삼아 몸을 날렸다.
화살.
팽팽하게 당겼다 놓은 시위에서 발사된 화살처럼.
전력(全力)을 다한 질주였다.
킹급 무칼라고가 발한 회심의 한 수가 막혀있는 이 타이밍, 그 덕분에 내 움직임이 감춰진 이 타이밍, 다시 거머쥘 수 있을는지 모를 이 타이밍.
그 한 번의 기회를 쟁취하고자.
모든 패를 꺼내놓았다.
하나.
[신속]
타닥!
파아아앙!
[「특수 상태 : 전력」이 활성됩니다.]
[3초간 ‘이동 속도’가 300% 향상됩니다.]
[남은 시간 : 3초]
극한의 빠름.
둘.
[앱솔루트 배리어]
[머메른의 갑주]
[순간 회귀 : 스랄레오의 골갑]
우우우우웅!
촤르르르르르륵!!
철혈에 필적하는 방패.
셋.
[건곤일척]
―――――우득!
[「특수 상태 : 전력」이 활성됩니다.]
[능력치 ‘근력’이 300% 증가합니다.]
가진 바 최강의 괴력.
끝으로.
[순간 회귀 : 오르그의 오른팔]
[괴령화 : 오르그]
[‘오그르의 영혼’이 당신의 전신을 휘감습니다.]
[지금부터 3분간 기본 공격 및 마력 활용의 위력이 15% 증가하며, 5% 확률로 기술 ‘오르그의 파괴 본능’이 자동 발현됩니다.]
심연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있던 이종(異種)의 영혼을 본래의 형상을 되찾은 오른팔에 덧씌우며.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형태 변화]
[일격 태세]
휘욱!
내질렀다.
내가 선보일 수 있는…….
[권능 발현 : 파멸자]
“흐아아아아아아아!!!!”
슈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앙!!!!!
최강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