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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221화 (220/232)

221화

【 대면 】

짐작은 했었다.

44개째의 깃발이 부러지고 나서, 그로 인해 왕의 그림자가 선명해졌다는 문구를 목도하던 날.

내심.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라고 99%, 거의 100%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바라건대.

되도록 그런 시스템이 없기를 희망했지만…….

쯧―

“거부하지 못할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타이머를 응시하던 나는 이내 깊게 내쉰 한숨에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들을 실어 보내며 다부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홀로 상념에 빠진 사이.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1시간 58분 59초]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1시간 58분 58초]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1시간 58분 57초]

벌써 1분이 사라졌다.

책상머리에 앉아 허우적거릴 겨를이 없었다.

“각자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서 열매 복용한 뒤에 훈련장에서 모이자. 너희도 봤듯이 앞으로 몇 시간 지나면 킹급이 등장할 거야… 시간이 없으니 적응 훈련은 간단하게 끝내고 이동하는 게 좋겠어.”

한세정들과 짧은 이야기를 마친 뒤.

완성된 ‘근원의 열매’를 챙겨 방으로 가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문득.

씨앗과 같이 열매 또한 여섯 개를 모아 합성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 왕의 강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뒤엉켜, 때마침 우리가 보유한 열매가 여섯 개이니 이걸 합성해서 한 명에게 몰아주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도 들었으나.

「근원의 열매」가 가진 제한 사항.

- ‘환골탈태 : 4차’ 이하의 존재가 복용할 시 폭사(爆死)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본인 분수에 맞지 않는 영약을 함부로 취했다가는 되려 자멸을 면치 못한다는 단호한 충고에 머리를 저었다.

현재도 이럴진대.

다음이라고 안전할 리가 없을 테니.

기틀을 다지는 게 먼저였다.

“먹자.”

으적!

겉은 딱딱한, 그러나 막상 씹으면 젤리처럼 으깨지는 ‘근원의 열매’를 입안 가득히 밀어 넣는다.

후우우욱―

우우우우우웅!!

식도, 위장을 타고 넘어가는 기(氣)의 결합체에 반응하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육체.

[‘근원의 열매’를 섭취하셨습니다.]

[각 차원의 응축된 기운이 당신의 육체를 휘감습니다.]

[강화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향상되길 원하는 신체 능력치를 선택해주십시오.]

그에 맞춰 출력된 문장의 파도가 허공을 잠식하며 출렁거렸다.

“근력, 체력, 내구, 순발력, 마력.”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리 결정해두었던 항목들을 차례대로 내뱉었다.

450에 도달한 이후.

오직 ‘깃발 파괴 업적’으로만 상향이 가능해진 기본 스탯과 기본 스탯의 단짝이라 불러도 좋을 마력.

이보다 적합한 사용처는 없었다.

[지정된 능력치 ‘근력’, ‘체력’, ‘내구’, ‘순발력’, ‘마력’이 25씩 상승합니다.]

[급격한 변화에 따른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우득!

우드드득―

선정한 직후.

흡사 이종의 육체를 이식하듯 찌르르한 통증이 뇌리를 울린다.

성장통.

날 한층 더 높은 세상으로 인도해주는 달가운 아픔이었다.

[축하합니다.]

[기본 신체 능력 ‘근력’, ‘체력’, ‘내구’, ‘순발력’이 모두 「5차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보상으로 ‘환골탈태 : 5차’가 주어집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마침내 「초월자」의 영역에 다다른 당신에게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정보’를 근거로 합당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권능 : 파멸자’를 습득합니다.]

[신체 재구성을 시작합니다.]

* * *

[〈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으로 향하는 통로에 닿았습니다.]

[자격 ‘원정대원’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원정단 구성원 : 원정대장 1인 - 원정대원 5인]

[‘원정대장’의 허가 하에〈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으로 입장합니다.]

번쩍!

세 번째 입성.

나, 한세정, 조이령 순으로 대장위를 승계하며 다시금 전장에 뛰어든 우린 지체하지 않고 전투를 벌였다.

[〈이면 던전 : 분열의 늪〉으로 진입합니다.]

[‘차원석 : 무칼라고’를 파괴하십시오.]

[0/1]

새로이 돌입한 무대는 ‘늪’이라는 명칭과 어울리지 않게 쾌적한 들판이었다.

싱그러움이 물씬 풍기는 장소랄까.

다소 기이한 광경에 의아해하던 찰나.

추륵―

추륵―

멀지 않은 부근 바닥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포착됐다.

푸르른 녹음(綠陰)을 베낀 것마냥 전체적으로 초록빛을 띠고 있는 점액질 괴물.

“…슬라임?”

판타지 풍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고블린과 비슷하게 흔히 접할 수 있는 최하급 몬스터 중의 한 부류인 ‘슬라임’을 쏙 빼닮은 생명체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곳이 어째서 ‘분열의 늪’이라 명명되었는지를.

베고, 부수고, 찢어발겨도 죽음을 맞이하기는커녕 쪼개진 형체대로 생장하며 무한히 증식하는 괴랄한 개체와 마주쳤다는 것을.

직감은.

“끄르르르르륵!”

“끄르르륵!”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우욱―

콰아앙!

푸화하하하학!

틀리지 않았다.

확인차 가한 폭격에 휘말렸던 놈들이…….

추륵―

추르륵――

“정말로 증식하는군.”

땅바닥에 처박히고 채 10여 초가 지나기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꿀렁이며 재차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몸집이 작아졌기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총량도 줄어든 듯 약해진 감이 있었지만, 무지막지하게 불어나는 수적 폭증에 다른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머릿수.

그것을 차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딱 어울리는 기술이 있었다.

“여기서 써봐야겠네.”

“그거요?”

“응.”

최근에 익힌 자연 스탯의 400 돌파 특전.

[재앙]

[속성 : 얼음]

《기술 : 재앙》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신체 능력치 중 ‘속성’이 「400」을 돌파했을 시 부여되는 기술입니다.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는 대신 9대 속성(불, 물, 바람, 대지, 번개, 얼음, 강철, 초목, 중력) 중 한 가지를 골라 해당 속성에 걸맞은 재앙을 선사합니다. 단, 1회 사용 시 일주일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갖습니다.

그 기술을 바탕으로 이 땅에 빙하기를 구현시켰다.

후우욱!

쩌저저저적!!

쩌저적!!

흡사.

‘천공의 문’을 연 신지유를 연상케 하듯, 손바닥으로 빠져나가 전방을 얼려버리는 마력.

일주일이라는 쿨타임 탓에 언제 써먹어 볼지, 또 위력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막상 전개하고 보니.

‘재앙’의 데미지는 상당했다.

만약.

여섯 명이서 한꺼번에 발휘한다면 설령 킹급이라 해도 타격을 입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라날 지경.

“우와…….”

“이렇게나 강하다고?”

“대단하군요.”

한세정들도 적잖게 놀랐는지.

옆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주위를 구경했다.

이에 자연스레 ‘건곤일척’을 비롯한 여타 400 특전들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특히.

“이러면 영역 선포도 기대해 볼만 하겠는데.”

거점에 설치된 ‘안전지대’의 강화판으로 보이는 필드 변형기인 ‘영역 선포’도.

《기술 : 영역 선포》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신체 능력치 중 ‘마력’이 「400」을 돌파했을 시 부여되는 기술입니다. 최대 10분간 사방 50m에 이르는 공간을 당신의 권역으로 삼고, 허락되지 않은 존재에게 강력한 저주를 부여합니다. 1회 사용 시 일주일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갖습니다.

“조만간 경험해 볼 수 있겠지.”

머릿속으로 각 기예의 설명을 떠올리던 나는 금세 고개를 저으며 눈앞의 전투에 집중했다.

반투명한 뒤덮인 대지.

서서히 약해지는 냉기에 신지유를 불렀다.

이번 칼날은.

“제가요?”

한세정이 아닌 신지유에게 맡기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바닥이 빙결된 상태라 제아무리 공간을 넘나드는 한세정이라 해도 이동에 불편함이 따를 걸로 예측된 까닭이었다.

뭣보다 ‘재앙’은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못했다.

“넵! 걱정하지 마세요! 청염! 날 좀 감싸줘.”

화르르륵!

부탁받은 신지유가 곧장 청염의 불길로 체온을 보호하며 차원석이 비치된 공터로 빠르게 쇄도하자.

여기저기서 암녹색 물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빙백의 물결에 파묻히고도 살아남은 퀸급 무칼라고들이 발포한 ‘그물’ 형태의 포탄이었다.

저놈들.

비행 타입의 적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아는 듯했다.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악!!

10m? 20m?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큼지막한 네트가 순식간에 대기를 가르며 신지유를 휘감는다.

어지간해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이른바 천라지망(天羅地網)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포획 공격이었다.

신지유도 그걸 아는지.

“청염!”

멀리까지 선명하게 전달되는 고함을 내지르며 제 몸에 두르고 있던 화염의 열기를 한층 높였다.

[천공의 문 : 청염]

화르르르륵!

화르륵!

‘천공의 문’의 개방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퀸급 개체들의 공세였기에, 원본(原本)급인 청염 하나만으로는 방어가 불가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여.

“이령아, 지운아.”

“넵!”

“네!”

우리도 지원 사격에 나섰다.

적게 잡아도 열다섯 이상이 합심해서 신지유를 노리는 형편이라.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우우우우웅!!

돕지 않았다가는 끔찍하게 여기는 일행의 사망을 목격하게 될지도 몰랐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서거걱!

살기(殺氣)를 짙게 머금은 세 개의 에너지가 지상을 집어삼키며 섬광을 빚어낸다. 이 강대한 일격 앞에서는 무칼라고 종(種)이 자랑하는 ‘특성 : 증식’도 발현되지 않았다.

오로지 소멸.

깊숙하게 패인 지면만이 공허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됐다.”

깔끔…하다고 표현하긴 뭐하지만.

여하튼.

승리가 확실시되는 광경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점액 그물을 태운 여파로 뿌연 연기를 내며 차원석을 향해 전진해가는 신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감각 망을 펼쳐본 결과.

그나마 꾸역꾸역 생존해있던 퀸급 무칼라고들마저 완벽하게 정리됐고, 2차 검증자인 신지운의 ‘광역 탐색’ 레이더에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지라.

나도 한세정들도 신지유가 무난하게 승전을 가져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오판이었다.

파직!

“……?”

이질적인 뭔가가 내 육감을 건드리기 무섭게.

―――――스으윽!

“어?”

“하늘이, 깜깜해졌다?”

“뭐지……?”

먹구름이 낀 듯.

온 천지가 한순간에 검게 물들어버렸으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굳이 토론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왕(王).

족히 20m는 될법한, 출렁거리는 외형만 아니었다면 작은 동산이라 착각했을.

“끄에에에에에에에엑!!!”

후우우우우욱―

콰아아앙!!!!

「킹급 무칼라고」의 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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