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무척 어렵게 승리를 손에 쥐며 돌아오자마자 씨앗의 옵션부터 체크했던 나는 금세 혀를 차며 아쉬운 소리를 내뱉어야 했다.
《트윈엔시스의 씨앗》
- 등급 : 유일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대상 「트윈엔시스」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씨앗입니다. 차원 간의 통로를 잇는 균열을 여는데 필수적인 재료로 ‘근원석’처럼 복용할 수도, ‘교환권’처럼 무기 혹은 방어구 등으로 변환할 수도 있는 특별한 아이템입니다. 단, 결정은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랍니다.
- 옵션 : 복용 시 ‘순발력’과 ‘마력’, ‘재주’ 20 상승 / 주문 ‘아이템 교환’ 발동 시 본인이 원하는 장비로 변형 / 다른 씨앗과 합성 가능
- 특이사항 1 : 복용 시 옵션은 「5차 내성」 이상에는 효과가 반영되지 않습니다.
- 특이사항 2 : 장비의 등급은 ‘특별’로 고정됩니다.
- 특이사항 3 : 총 여섯 개의 ‘씨앗’으로 아이템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생긴 게 체력과는 관련이 없겠다 예상은 했지만…….”
“마력하고 재주가 올라가네요.”
“아까 그 기막? 검막?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게 재주에 영향을 주나 봐요.”
체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아이템인 탓이었다.
순발력이나 재주.
특히 마력의 향상은 반길만한 이야기지만, 입맛을 다시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단 5 차이로 미뤄지게 되었으니.
으적―
[‘트윈엔시스의 씨앗’을 복용했습니다.]
[순발력, 마력, 재주가 20 상승합니다.]
우우우우우웅!
여하간.
씨앗을 온전히 흡수하고서 쉬는 시간.
출출해진 배도 채울 겸 식사를 병행하며 적당한 휴식을 취한 후, 우린 다시금 근처 깃발로 손을 내밀었다.
펄럭!
“음… 코끼리?”
“그러게. 코끼리처럼 생겼네?”
천 중앙엔 우리가 잘 아는 코끼리, 혹은 과거의 매머드가 오버랩되는 이미지로 채워져 있는 적기(赤旗)였다.
[〈이면 던전 : 대초원의 지배자〉로 진입합니다.]
[‘차원석 : 루카보’를 파괴하십시오.]
[0/1]
급격하게 뒤바뀌는 세계.
이번 필드는 ‘대초원의 지배자’란 네이밍을 온전히 담아낸 듯, 마치 아프리카의 사바나와 같은 들판 위로.
쿵―
쿵―
쿵―
진한 땅울림을 선사하는 수백 마리의 코끼리 떼가 차원석에 다가가 기다란 코를 쭉 뻗어 지구로 전송되고 있었다.
그 광경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르르륵!
화르륵!
루카보들의 등판을 휘감고 있는 붉은 화염이었다.
기본적으로 최소 5~6m에 이르는 덩치에 평범한 생명체에게는 쥐약과도 같은 불을 다루는 개체라니.
실로 ‘대초원의 지배자’라 칭할만했다.
‘저 상태로 돌진해온다면 어지간한 놈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모조리 짓밟히겠어.’
처음 대면하는 루카보에 대한 감상평을 짧고 굵게 남긴 나는 오른팔을 들어 한세정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정해진 약속대로 활동을 개시하자고.
허나.
트윈엔시스와 마찬가지로 우린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해야 했다.
“꾸이이익?!”
“꾸이이이이이이익!!”
“꾸이이이이익!”
“…또?”
작전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우리 위치가 발각됐기 때문.
의아한 일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연달아?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트윈엔시스와 루카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의문 어린 얼굴로 서 있던 나는, 불현듯 이 연속적인 사건의 원인이 혹시 ‘시스템’으로 인한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예컨대.
[〈차원 : 테라〉내에 존재하는 ‘간섭력’의 제한이 일부 해제됩니다.]
[전 「침략군」은 이제부터 차원석이 존재하는 영역에 난입한 침입자의 위치를 감지 및 특정할 수 있게 됩니다.]
따위의 설정 같은.
공지로는 항상 그러했듯이 능력치 성장 등의 일반적인 사항이 전부였으나….
우리가 「침략군」에 속해 있지 않은 한 그들에게 어떤 설정이 적용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으니까.
따라서.
앞으로는 일단 이면 던전에 입성했다면, 어떤 계책을 펼치기보단 먼저 가드를 올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꾸이이이익!!”
“꾸이이이익!”
투우우웅!
투웅!
투두두둥!
슈수수수수수숙―――
비처럼 쏟아지는 파상공세에서 생존할 수 있을 테니까.
[웨이브]
우우우우웅!
촤아아악!
촤좌좌좌좌좍!!
상념을 마친 나는 즉시 루카보들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발사한 화염 구의 소나기를 상대로 격류를 소환해냈다.
어인 머메른의 피부를 이식하며 갖게 된 병증 ‘바다의 기사’를 억제하고자 익혀두었던 기술.
하여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일전에 원본(原本) 등급으로 업그레이드해둔 덕택인지.
퍼엉!
펑!
퓌쉬쉬쉬쉬쉭!
검푸른 물줄기는 힘겹게나마 화우(火雨)의 불길을 잠재웠다.
간혹가다.
상극의 속성으로도 가라앉히지 못할 매서운 열기가 역으로 물길을 증발시키며 우리의 목숨을 노리기도 했으나.
“얼음꽃!”
“후아!”
쿵!
쩌저저저저저적!
쿠구구구궁!
늦지 않게 더해진 신지유의 얼음 장벽과 곽재우의 적벽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숨 쉴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 잠깐의 여유에 마력을 끌어올린 우린 곧장 반격에 나섰다.
“천공의 문.”
스타트는 신지유가 끊었다.
[오리지널 기술 : 천공의 문]
[「대상 : 얼음꽃」이 선택되었습니다.]
[기술 등급 및 단계 : 원본(原本)―4/5]
[‘등급’과 ‘단계’에 비례하여 〈대차원 : 환계〉에서 「대상 : 얼음꽃」이 추가 소환됩니다.]
끼이이이익―
화악!
전개된 마력에 반응하며 개방된 문.
대차원이라 명명된 환계에서 불러들인, ‘체질 : 단련신’의 효능에 힘입어 그새 단계가 올라 40개체로 늘어난 얼음꽃 무리가 대기를 차갑게 얼려버리며 소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신지유는 자신에게 다가온 친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백색 세계.”
그 직후.
후우욱!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나무와 풀, 흙과 바위를 넘어 불꽃에 휩싸여있던 루카보들 마저.
냉기의 여신이 강림한 듯.
하얀 숨결이 닿은 모든 걸 송두리째 동결시켰다.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존재라고는 아군인 우리와.
“꾸이이이익!!”
“꾸이이익!”
화르르르륵!
화르륵!
콰아아아앙!
화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퀸급 루카보들 정도였다.
그 대가로.
“하아, 하… 하아…….”
신지유도 엄청난 양의 마력을 소모해 굉장히 지친 기색을 보였지만, 덕분에 승기는 완전히 넘어온 바.
우린 멈추지 않고 후속타를 날렸다.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후우우욱!
콰아아아아아앙!!
나와 조이령, 신지운이 동시에 발한 일격이 차갑게 굳어버린 일대를 강타하며 족히 수 킬로미터에 이를 굉음을 토해냈다.
얼마나 멀리 울려 퍼졌는지.
“꾸이이이익――――”
“꾸이이이익―――――”
“꾸이익이익――――――”
저 먼 곳에서부터 루카보들의 하울링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아마.
동족의 습격 소식을 듣고 급파된 놈들인 듯했다.
“갔다 올게요!”
번쩍!
이에 한세정이 가속에 가속을 더하며 방비가 허술해진 차원석을 파괴하려 몸을 날렸다.
늦장 부리다간 합류한 괴물들과 2페이즈를 치러야 할 판이니.
[가속!]
[그림자 걸음]
[분영일보]
‘흐읍!’
휘우우욱!
콰앙!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녀의 몸놀림은 눈으로 좇기 어려운 경지였다.
그 신속한 쇄도에 환영을 섞으며 적들의 시야를 어지럽힌 한세정의 검이 차원석의 중심부를 찌른다.
놀란 루카보들이 다급하게 화염 구를 발사했으나.
[베놈 소드]
슈우우우욱
콰직―――
퍼어어어엉!!
독기를 덧씌워 길이까지 늘인 검날은 이미 문고리를 잡아당긴 뒤였다.
[축하합니다.]
[「원정대원」 이 ‘차원석 : 루카보’를 파괴했습니다.]
[〈차원 : 테라〉와 연결된 행성 ‘엘레파(Elepha)’의 통로가 특수한 경구를 거치지 않는 한 영구히 차단됩니다.]
[〈이면 던전 : 대초원의 지배자〉에서 퇴장합니다.]
[「원정단 : 아윤(변경 가능)」의 ‘차원석 : 루카보’ 격파가 확인되었습니다.]
[「원정대장」 및 「원정대원(30인 추첨 한정)」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보상으로 무작위 선택된 사본(寫本)급 이하 기술 중 한 가지의 단계가 1 상승합니다.]
[선택된 기술 : 무기 활용 / 1 ▶ 2]
[보상으로 ‘루카보의 씨앗’을 습득합니다.]
“됐다.”
복귀 직후.
서서히 회복되어가는 풍경을 반기며 나는 기분 좋게 외쳤다.
방금 전 승리로 하여금.
[기본 신체 능력 ‘근력’, ‘체력’, ‘내구’, ‘순발력’이 모두 「4차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드디어 기원하던 결과를 거머쥘 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무려.
네 번째 환골탈태였다.
1차에서는 육체, 2차에서는 정신, 3차에서는 체질.
허면….
4차에서는 무얼 내줄 것인가.
긴장된 표정으로 메시지를 응시하길 잠시.
이윽고.
나의 호기심을 해결해줄 다음 문장이 주르륵 출력됐다.
[보상으로 ‘환골탈태 : 4차’가 주어집니다.]
[육체와 정신, 체질마저 완성된 당신에게 부여할 변화는 ‘복원’입니다.]
[여태껏 활동하며 쌓이고 쌓인 상흔과 장애가 재구성되는 육신에 맞춰 완벽하게 재생됩니다.]
[신체 재구성을 시작합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콰직―
콰즈드득―
네 번째 관문을 돌파한 나에게 기념으로 하사된 선물은 재미있게도 회귀(回歸)였다.
흉터, 결함, 병 등등등.
종말 이전 현대의 과학력으로도, 종말 이후 마력이 가미된 신비한 치유술로도 어쩌지 못할 아픔을 고쳐주는.
지난 날.
키메라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외칠만한 보상이었다.
결과적으로.
[‘환골탈태 : 4차’가 완료되었습니다.]
“…흉터가 사라진 게 전부인가.”
기대했던 것치고 현시점의 내겐 딱히 쓸모가 없었지만 말이다.
뭐.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일이었거니와.
[축하합니다!]
[‘신체 능력 : 체력’이 「400」을 돌파했습니다.]
[보상으로 ‘칭호 : 4차 한계 돌파―체력’을 습득합니다.]
[기술 ‘불사’를 습득합니다.]
[능력치 ‘체력’에 한하여 「내성 : 4단계」가 적용됩니다.]
《기술 : 불사》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신체 능력치 중 ‘체력’이 「400」을 돌파했을 시 부여되는 기술입니다. 발동 시 1분간 재생력이 300%로 상승하며 중상 이하의 모든 상처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다만, 무리하게 힘을 쓴 대가로 사흘간 자연 회복력이 30%로 하락하고, '상태 이상 :출혈' 등 병마에 노출될 확률이 증가합니다. 재사용하기 위해서는 50일의 대기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때마침.
환골탈태에 비견하는 특전도 얻게 된 터라, 나는 다소 흉물스럽기까지 하던 투쟁의 흔적들이 지워졌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