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왕의 그림자가 선명해집니다.]
전력 질주에 가깝게 연달아 세 개의 깃발을 분쇄하며 전공을 세워나가던 우리는 그대로 전진을 멈춘 채 한동안 저 한 문장에만 눈을 고정했다.
“왕의 그림자라…….”
킹급 개체와의 조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
잠들어있던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공표에 선뜻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혹여라도.
차원석을 부수고 통로를 막는 과정에서 괴물들의 왕과 마주치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발목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지금 피한다고 한들.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운명일 터이니 시간을 늦추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만날 건데 뭐’라고 대책 없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자칫.
나와 우리의 행보에 종점이 찍힐지도 몰랐으니까.
“쯧…….”
머리가 아프다.
느닷없이, 그러나 순리였을 예고에 두통이 밀려왔다.
스윽―
주위를 돌아보니.
한세정들의 낯빛도 심상치 않았다.
미지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수준은 아닐지언정 경직된 눈매와 굳은 입꼬리를 통해 저들이 꽤 근심하고 있음이 보였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계산 중인 것 같았다.
현재의 전투력으로 킹급 개체와 맞붙어서 승전을 거머쥘 수 있을는지.
만일.
누군가 내게 가능하겠냐고 질문한다면.
‘…아직은 힘들겠지.’
그 물음에 나는 회의적으로 대답하리라.
나나 한세정들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나, 퀸급 개체보다 몇 배는 강할 것으로 추정되는 킹을 상대로는 뒤처지는 게 현실이었다.
필시.
여왕을 갖고 노는 레벨에 이르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탓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가자.”
“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사냥 가야지.”
솔직히 무섭다.
만약에라도 내가 예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 영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다만, 걱정에 짓눌려봐야 좋을 게 없다. 말했듯이 킹급은 언젠가 반드시 맞서게 될 일종의 숙명이었다.
따라서.
숨는다고 달라지지 않으니.
오히려 이리 낭비되는 시간을 1초라도 줄이고 진화의 단초를 마련하는 게 백 배, 천 배 나은 선택이었다.
설령 괴물의 왕과 부딪치게 되더라도 살아남게끔.
아니.
수호종 파트로누스의 참수자가 됐던 것처럼 왕의 목을 베는 자가 될 수 있도록.
* * *
[〈이면 던전 : 쌍수검의 기사 양성소〉로 진입합니다.]
[‘차원석 : 트윈엔시스’를 파괴하십시오.]
[0/1]
《기술 : 신속》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신체 능력치 중 ‘순발력’이 「400」을 돌파했을 시 부여되는 기술입니다. 발동 시 ‘전력(全力)’ 상태가 활성화되며, 순간적으로 당신의 이동 속도가 300% 증가합니다. 증가한 속력은 3초간 유지되었다가 소멸합니다. 이후 무리하게 힘을 쓴 대가로 사흘간 ‘순발력’이 최대치의 10%로 하락합니다. 재사용하기 위해서는 하락한 ‘순발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와야 하며, 기술 ‘가속’과의 동시 사용이 제한됩니다.
또 다른 이면 던전으로 발을 들이며, 순발력 4차 한계 돌파 보상으로 받은 기술의 설명을 탐독했다.
기술 ‘신속’.
“건곤일척의 순발력 버전이군.”
구동 시 주어지는 버프의 특징이나 대가가 ‘건곤일척’과 똑 닮아 있어 이해하기에 그다지 막히는 요소는 없었다.
하여.
금방 주억거리던 나는 자연스레 ‘개인 정보’ 화면 중단의 신체란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체
- 근력 : 433
- 체력 : 390
- 내구 : 415
- 순발력 : 410
체력 10.
“이번에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목전에 다다른 새로운 변화가 내 이목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네 번째 격변에선 무얼 얻게 될 것인가.
궁금증과 기대감이 섞여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즈음.
“쉬에에엑!”
“쒸에엑!”
척!
척!
척!
잘 훈련된 군대의 병사들인 양 절도 있는 군세를 자랑하며 차원석이 자리한 곳으로 걸어가는 괴물들의 행진 행렬이 시야에 잡혔다.
쌍수검(雙手劍)이라는 명칭답게.
양팔이 예리한 칼날의 외형을 취하고 있는 놈들이었다.
손가락 등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먹잇감을 적절한 크기로 잘라 먹는 듯한데, 자세히 살펴보니 갑옷의 형태로 단계를 구분 짓는 듯했다.
피부가 변형된 것인지.
손기술이 뛰어나 손수 제작한 갑주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녀석은 상당히 화려하네요.”
“그러게, 쟤들은 상의만 겨우 입었는데.”
한세정과 조이령의 대담처럼.
솔져급에서 퀸급으로 올라갈수록 상의, 하의, 군화, 투구 순으로 무장이 하나둘 추가되는 중이었다.
물론.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진정 중요한 항목은 장비의 증량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쉬이익?!”
“쉬익!”
“쉬에에에에엑!!”
“들켰…다?”
“전원 뒤로 물러나.”
알람용 마법진 같은 탐지 수단을 따로 가진 걸까?
정확한 원인이 뭔지는 파악 불가지만.
여하튼 놈들은 우리가 난입하고 대략 30여 초 만에 침입자의 유무를 인지하고서 곧장 눈동자를 돌리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 살기등등한 태세에 나는 일행을 후방으로 물리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이제껏 해왔던 유인 작전을 펼치지 못할 형편이니.
도망칠 게 아니라면 붙어야 했고, 육군을 상대로는 내가 나서는 게 효율적이었다.
쿠우웅!
[오리지널 기술 :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
콰과과과과광――――――!!
전후좌우(前後左右) 중, 뒤쪽을 뺀 세 방향이 일시에 박살 난다.
이 갑작스러운 재해에 트윈엔시스들은 전진 대신 회피를 선택하며 차원석을 중심으로 방진을 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알고 있다?’
저놈들이.
우리의 방문 목적에 관해 명확하게 숙지하고 있음을.
단순한 직감이었으나.
난 내 생각이 100% 맞을 거라 확신했다.
웬만하면.
직감이 틀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쒸에에에에엑!!”
후우우우욱!
서걱!
촤아아아아아악!!
상념을 정리하는 찰나.
완전 무장을 한 퀸급 트윈엔시스가 전위로 나서며 땅바닥을 길게 그었다. 마력이 가미된 검격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가로로 선을 긋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침없이 확산하던 지반의 뒤틀림이.
쿠구구구궁!
쿠구궁!
“…막혔다?!”
사정거리가 충분히 닿음에도 불구하고 흡사 신성불가침 영역에 당도하기라도 한 듯 뚝 하고 끊겨버린 것이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콰과광!
콰광!
안쪽에서는 여전히 활발하거늘.
어찌하여 저 선을 넘지 못하는 거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던 당황스러운 광경에 찡그려지는 미간.
“…괴상한 기술을 갖고 있네.”
아무래도.
특수(特殊) 등급의 기술인 ‘마력 전개’와 비슷한 능력의 일종인 듯싶었다.
“하늘에서 공략해볼게요.”
“그래.”
이에.
구름을 밟고 떠오른 신지유가 창공에서 불벼락을 투하했다.
확인이었다.
저 무형의 막이 지상과 상공을 한꺼번에 커버하는 전방위적인 방패인가 아닌가.
화르르르륵!
파지지직!
다행히.
슈수수수수수숙!
콰앙!
콰아아앙!
“쒸에에에에엑!”
“쉬에에엑!”
“통한다! 통해요!”
하늘길은 열려있었다.
이것에 기반해 신지유는 본격적으로 폭격을 기하기 시작했다.
청염의 화마, 얼음꽃의 빙각, 암전륭의 낙뢰에 드라이어드와 산지기가 합심해 쏘아 보내는 암석 투척.
비행 유지와 최소한의 방비를 구축해줘야 하는 흔들바람을 배제한 나머지를 총동원해 떨구는 집중포화에 트윈엔시스들의 칼날로 죄다 위로 기울여졌다.
전면이야 퀸급 개체들이 막아주고 있으니.
신지유가 퍼부어대는 화력만 차단한다면 전세는 후에 오게 될 지원군과 합세해 우리를 밀어낼 수 있으리란 판단 같았다.
그 똑똑한 전술에 나는 마력을 최대로 응집시키며 일보를 내디뎠다.
“시간 끌면 안 되겠어. 지운아, 이령아.”
“네!”
“네!”
“한 번에 몰아친다. 세정이도 준비해.”
“알겠어요, 오빠.”
우우우우웅!!
기다리면 불리해지는 쪽은 우리였으니, 뚫려있는 공중으로 일거에 쑤셔 넣어 전장을 뒤덮을 작정이었다.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오리지널 기술 :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두 명의 남녀와 한 명의 소년이 펼쳐내는 합격술의 주문이 허공에 새겨진다.
신언(神言)을 연상케 하듯 읊조린 한 마디 한 마디에 폭발하는 기운.
후욱!
쿠구구구구구구궁!!
극도로 집약된 에너지에 찌그러지는 공간.
그 비틀림 속에서 탄생한 월광과 창룡은 수천 단위로 쪼개져 비산하는 마광포와 나란히 괴물들을 단박에 집어삼켰다.
트윈엔시스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쉬에에엑!”
“쉬에엑!”
밀집 대형.
한데 뭉쳐있던 놈들은 위기를 감지했는지,
직선, 곡선, 사선 등등등.
일제히 예기(銳氣)로 번들거리는 칼날을 온갖 방위로 휘두르며 신지운의 월광을 소형화시킨 듯한 참격 수백 발을 띄워 올렸다.
간섭력의 해소로 상향된 괴력과 씨앗을 흡수하며 증폭된 인력의 충돌.
툭―
후화화화화화확!!
실로 힘과 힘의 맞대결.
그 격돌의 중심에서 미친듯이 뭉친 반발력이 거대한 태풍을 빚어내며 양측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크읍! 모두 제 뒤로!”
쿠웅!
[오리지널 기술 : 철혈의 요새]
그대로 직격당했더라면 살갗이고 뼈마디고 싹 다 갈려나갈 만큼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풍압에 재빨리 철벽을 세워 올리는 곽재우.
우리는 서둘러 그의 요새 안으로 들어가 몸을 피했고, 장장 1분 여를 오로지 버티는데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한세정만이 검집에 손을 가져가며 무릎을 굽혔다.
주변이 정리되는 즉시 뛰쳐나가 차원석을 분쇄하리라는 의도가 눈빛에 담겨 안광이 번뜩거렸다.
나는.
그녀를 돕기 위해 왼팔에 마력을 주입하며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최대한 관심을 가져가고자.
[순간 회귀 : 오르그의 오른팔]
우득―
우드드득!
[괴령화 : 오르그]
[‘오그르의 영혼’이 당신의 전신을 휘감습니다.]
[지금부터 3분간 기본 공격 및 마력 활용의 위력이 15% 증가하며, 5% 확률로 기술 ‘오르그의 파괴 본능’이 자동 발현됩니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흐읍!”
슈우우우욱!
콰아아앙!!
일부러 이목을 끌어모을 만한 권격으로 전방을 헤집었다.
이 일격으로 인해 피어오른 흙먼지가.
“세정아!”
[단거리 공간 이동]
번쩍!
은밀하게 침투하는 한세정의 인형을 조금이라도 더 숨겨주도록.
그 기원이 닿았는지.
후우우우우욱!
서걱!
한세정의 애병.
진(眞) 모르드(Moord)의 칼끝이 영롱하게 빛나던 차원석의 중앙을 반으로 갈랐고, 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축하합니다.]
[「원정대원」 이 ‘차원석 : 트윈엔시스’를 파괴했습니다.]
[〈차원 : 테라〉와 연결된 행성 ‘마누스(manus)’의 통로가 특수한 경구를 거치지 않는 한 영구히 차단됩니다.]
[〈이면 던전 : 쌍수검의 기사 양성소〉에서 퇴장합니다.]
꽤나 힘들게 쟁취한 승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