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215화 (214/232)

215화

【 깃발의 무덤 】

그곳이 「깃발의 무덤」이라 불리는 연유는 간단하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면을 장식하고 서 있는 수천, 수만 개의 깃발을.

허면.

눈앞에 가득한 저 깃발들의 역할은 또 무엇인가.

“송신기.”

“송, 신기요……?”

“그래.”

“지구를 침략하겠다고 이빨을 들이민 종족들의 송신기다. 도대체 몇 종(種)인지도 모를 외계 놈들이 지구에 박아 넣은 장치. 놈들은 그걸 통해 제 행성에서 지구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럼…….”

“맞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그 깃발들을 부수게 된다면, 해당 종(種)은 더 이상 지구에 오지 못하게 되는 거지. 즉!”

“…….”

“이 지구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거다. 영원토록!”

“아아……!!”

이래서 「깃발의 무덤」이다.

괴물들이 무너지건.

“당연히 쉽지 않다. ‘원정’이란 명칭에 어울리듯 목숨을 걸어야 했고, 명운을 걸어야 했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인류 또한 어떤 식으로는 종지부를 찍게 되리니 각오해야 했지.”

인류 희망의 불씨가 꺼지건.

어느 한쪽은 완전한 결별을 이룩하게 될 그 무덤으로, 우리는 최초이자 최후의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 ‘원정대에 참여했던 누군가의 자서전 : 인류의 마지막 불꽃’ 中 일부 발췌.

* * *

―번쩍!

섬광이 번뜩인다.

그리고는 마구잡이로 엉켜 있던 배경이 서서히 안정화되어 간다.

푸른 하늘, 붉은 태양, 하얀 구름.

끝을 모르고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풍경.

그러나.

자연 경관보다도 먼저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깃발?”

“깃발, 이네요……?”

“저게 다 깃발이야?”

몇 개인지 수를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은 ‘깃발’이었다.

각양각색이라고 하던가.

오르그, 프라구스, 발록 등 익숙한 이미지부터 순록의 뿔을 단 지네나 눈알이 한쪽만 있는 거인 등 낯선 이미지까지.

적어도 수천 개는 될법한 다양한 종(種)의 그림이 박힌 천들이 풍향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그 방대한 절경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축하합니다.]

[〈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에 입장하셨습니다.]

[해당 공간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면 세계 전용 단체 퀘스트 : 최종 결전〉이 진행됩니다.]

[퇴장을 원하신다면 주문 ‘복귀’를 외워 주십시오.]

[단, 퇴장 시 「원정대장」의 자격이 소멸됩니다.]

반짝거리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여러 문구 아래로 처리해야 할 과제가 하달되었다.

이곳에서의 미션은 무척이나 명확했다.

《이면 세계 전용 단체 퀘스트 : 최종 결전》

- 이 퀘스트는 오로지 ‘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에서만 진행 가능합니다. 이면 세계란 물질세계의 저편에 숨겨진 장소를 의미합니다. 평소에는 찾아올 수도, 존재감을 인지할 수도 없는 이 세계가 구축된 까닭은 한 가지뿐입니다.

차원 간 이동 장치 설치대.

통칭 ‘균열’로 불리는 통로를 열기 위한 송신기가 개설되는 공간으로, 당신이 이 땅에서 수행할 임무는 오로지 「파괴」입니다. 〈차원 : 테라〉의 지배권을 거머쥐기 위해 야욕을 드러낸 수천, 수만 종(種)의 송신기를 불태워 버리십시오.

다시는 찾아올 수 없도록.

그러다 보면!

당신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권좌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현재까지 파괴한 깃발 수 : (0/44)

└달성 시 다음 목표 제공

파괴.

면전에 자리한 침략자들의 진격로를 붕괴시키는 것.

그 분명한 지향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쭉 내디뎠다.

문제를 파악했으니.

구태여 망설이거나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탁―

담담하고 당당하게 걸어갔고, 한달음에 영역을 나타내듯 깃대를 기준으로 5m가량 둘러쳐진 붉은 원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면 던전 : 생명이 꿈틀대는 수림〉으로 진입합니다.]

단조로운 문장이 뜨고 대략 5초가 지날 무렵, 주변 환경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가 재건됐다.

무난하다면 무난한 필드에서.

“그으으으어어어어어.”

“그으으어어어.”

“그어어어어.”

저벅―

저벅―

―터억!

수십 미터 높이의 거목들이.

아니.

수십 미터 신장의 ‘목인(木人)’들이 숲 한복판에 비치된 무언가에 다가가 차례대로 손을 올려 놓는 장면으로.

무얼 하는 걸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흡사 보석처럼 영롱한 휘광을 뿜어내는 물체와 맞닿은 직후.

스스스스스스슷―

―번쩍!

“……!”

목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물론 놈이 어디로 갔는지는 따로 말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방금 전 전이의 종착지가 지구 어딘가에 뚫려 있는 전초기지.

즉.

던전으로 이송됐다는 걸.

“얘들아……!”

그것을 깨달은 나는 곧장 명령을 내렸다.

막으라고.

나아가.

저 보석 같은 물건을 망가뜨리라고.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차원석 : 라무스’를 파괴하십시오.]

[0/1]

* * *

“그어어어어어!!”

쿵!

쿵!

쿠웅!

―후화하하하학!!

15m? 20m?

거목의 특징인 듯.

체구가 어찌나 큰지 10m를 가볍게 넘기는 엄청난 크기의 몸뚱어리를 앞세우며 달려오는 목인 라무스.

나뭇가지에 식물 줄기가 뭉쳐진 초대형 곤봉이 묵직한 풍압을 선사하며 떨어진다.

하지만.

거치적거리는 모든 장애물을 단박에 으깨 버릴 것만 같던 몽둥이는 누구도 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야만 했다.

―화르르르륵!!

―화르르륵!

갑작스레 치솟은 파란 화마(火魔)가 일대를 불사르며 목인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탓이었다.

게다가.

천적은 또 있다.

“얼음꽃!”

냉기의 결정체가 발해 내는 혹한의 추위.

땅속에 깊게 박힌 뿌리마저 얼려 버리는 백색의 격류에 상극을 제대로 찔린 적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어린 소녀가 창조한 이 연옥 안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인간밖에 없었다.

“저 갑니다!”

스르르릉!

[오리지널 기술 : 일도양단]

“후아!!”

불과 얼음.

상반되는 재앙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중간을 뚫고 도약한 신지운의 칼날이 거친 기합과 함께 곡선을 그리며 초승달을 빚어낸다.

촤아아악!

촤좌좌좌좌좌좍!!

절대적인 상성 격차로 인해 이도 저도 못 하던 라무스들의 중단을 거침없이 베어 내는 월광.

“그어어어어어!!”

촤르르르르륵!!

촤르르륵!

퀸급 개체로 추정되는 놈 하나가 급히 초목을 끌어당겨 방패를 만들어 보지만, 날카로움이 극에 달한 참격에 무참히 바스러졌다.

아마.

휘몰아치는 열기와 한기로 정상적인 방어가 불가한 듯했다.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우우우우우웅!!

콰아앙!

콰과과광!!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의 영향도 있었겠지.

여하간.

쿵!

쿠구궁!

“넷, 셋, 둘… 하나 남았나.”

순식간에 수백 단위의 군집을 몰살시킨 전장.

겨우 숨을 붙이고 있던 개체마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태산압정]

후우우우웅!

쾅!

곽재우가 철퇴로 때려죽여 전투에 쉼표를 찍었다.

그래.

마침표가 아닌 ‘쉼표’였다.

“―그워어어어어어!!”

“―그워어어어!”

쿠웅!

쿵!

쿠웅!

남김없이 처치했다 판단하기 무섭게 사방에서 수백 마리의 목인들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이에.

“제가 막겠습니다!”

“저도 도울게요!”

“우리는 가자.”

“네!”

타다닷!

곽재우가 신지유와 조이령을 데리고 저지선을 구축하는 사이, 나와 한세정은 신지운과 한 조가 되어 차원석을 향해 달렸다.

그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스위퍼.

보다 정확하게는 키퍼라도 되는 양.

들썩―

들썩―

―콰아앙!

“그워어어어어어!!”

“…피해!”

차원석과의 거리를 고작 100m 남짓 남겨 둔 시점에서 퀸급 개체로 짐작되는 초거대 목인들이 무려 다섯 마리나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퀸급으로 다섯이라니.

나를 포함해 일행 전체의 생사를 걱정해야 될 레벨의 난이도였다.

그렇다고 후방이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흐읍!”

[오리지널 기술 : 철혈의 요새]

쿵!

쿠구구구구구궁!

저쪽 역시.

초장부터 ‘철혈의 요새’를 가동해야 하는 수준.

최소 수백 단위의 라무스들의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고로.

“세정아.”

“네?”

나는 결단을 내렸다.

“내가 휘저을 테니 기회 봐서 파고들어.”

“아, 네!”

우리에게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기로.

괴물들을 말살시키는 건 바깥에서나 필요한 업무.

그러니.

“지운아, 화려하게 시선만 끌어.”

“네! 형!”

우우우우우웅!

[마력 변형술 : 거인의 주먹]

[분영일보]

[그림자 걸음]

타닷―

사사사삿!

행동 양식을 180도 바꿔 위력보단 화려함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주력했다.

등 뒤에 감춰 놓은 한세정이란 칼날이 적장의 이목을 피해 차원석이라 불리는 보물 곁에 접근할 수 있도록.

“그워어어어어어!!”

“하아!!”

후우우우우욱―

콰아아앙!!

조금 위험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맞붙었다.

그 격렬한 충돌에서 비롯된 강한 폭발력이 대지를 뒤집으며 먼지구름을 토해 내자.

‘지금!’

[단거리 공간 이동]

번쩍!

‘하앗!’

진격 시기를 고민하던 한세정은 일말의 주저 없이 재빠르게 문을 열고 넘어갔다.

아무리 은밀하다 한들.

퀸급 개체쯤 되면 눈치챌 만한 움직임이었으나.

“흐아아아아앗!!”

시의적절하게 배턴을 이어받은 신지운이 재차 요란하게 난동을 피운 덕분에 단 몇 초지만 사각의 공백이 생겼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한세정은 목표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전력을 다해 칼을 찔러 넣었다.

[베놈 소드]

[독살]

[강격]

갖가지 버프를 덧입히며 대각선으로 내리긋는 일격.

비록 ‘오리지널 기술 : 사신의 눈물’까진 아닐지언정 나름 최상의 기예들을 모아 발해낸 검격이 차원석과 직격한 순간.

카각―

――――――――콰아아앙!!

“…?!”

꼭 폭탄이 터진 것처럼 거대한 광염(光炎)이 굉음을 동반하며 솟구쳤다.

족히 10m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격발이었다.

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우려를 표했으나.

“…오빠! 깼어요!”

다행스럽게도 한세정은 무사했다.

‘단거리 공간 이동’이라는 긴급 탈출 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도주였다.

“후…….”

그 덕에.

한결 가라앉은 감정으로 목도할 수 있게 됐다.

[축하합니다.]

[「원정대원」이 ‘차원석 : 라무스’를 파괴했습니다.]

[〈차원 : 테라〉와 연결된 행성 ‘아르보르(arbor)’의 통로가 특수한 경구를 거치지 않는 한 영구히 차단됩니다.]

[〈이면 던전 : 생명이 꿈틀대는 수림〉에서 퇴장합니다.]

[남은 시간 : 5초]

[남은 시간 : 4초]

[남은 시간 : 3초]

[남은 시간 : 2초]

[남은 시간 : 1초]

[남은 시간 : 0초]

[퇴장합니다.]

―――――――――번쩍!

첫 전투를 승전으로 마무리 짓게 되었다는 공지와 더하여.

[〈이면 세계 : 깃발의 무덤〉으로 귀환하셨습니다.]

콰직!

“어? 오빠, 저 깃발…….”

“부러졌네.”

돌아옴과 동시에 반으로 절단나는 깃대와 불에 탄듯 잿더미로 화하는 라무스 종(種)의 깃발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