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깃발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 공지를 본 순간.
“…어?”
내 머릿속으로 오래전에 보았던 한 가지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
농자재 백화점에 거점을 틀고서 주변 던전을 돌며 ‘특수 퀘스트’ 할당량을 채운 끝에 상점이 업그레이드되며 공개되었던 「특수 조건 : ?」에 관한 최초의 단서.
붉은색 깃대와 새하얀 천, 중앙을 장식하는 청록색의 구체로 이루어진 〈차원의 깃발〉이.
동시에.
그 깃발과 관련된 하나의 퀘스트가 떠올랐다.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
- 본디 ‘깃발’이란 누군가의 「영역」을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완벽한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발아래에 두는 영광스러운 증명에도 깃발을 사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오니 이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주장하고 싶다면 먼저 깃발을 쟁취하십시오. 그것으로 공언하십시오. 당신 또한 이 차원의 패권을 두고 싸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0/1)
└해당 퀘스트는 누군가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쟁취하기 전까지 지속됩니다.
└해당 퀘스트의 과제를 달성할 시 ‘연계 퀘스트’가 자동 진행됩니다.
└해당 퀘스트는 각 진행 과정마다 보상이 따로 존재합니다.
└현재 단계 보상 : 기적의 조각
클리어할 수만 있다면 이제는 단 두 개밖에 남지 않은 ‘기적의 조각’을 내어주는 무지막지한 퀘스트.
더군다나.
이건 ‘연계’ 퀘스트였다.
몇 단계가 존재할지 모르고, 이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많은 조각을 얻거나 혹은 기적에 비견되는 다른 무언가를 받게 될 전대미문의 임무.
그 사실을 상기하자.
“…가야겠네.”
반드시…라는 단어가 뇌리를 강하게 자극하며 나로 하여금 어딘가를 바라보게 했다.
저 멀리.
[「깃발의 무덤」으로 향하는 문의 위치가 ‘빛의 기둥’으로 표시됩니다.]
쿵―
지이이이이이이잉!!
지면을 뚫고 솟구쳐 올라 창공으로 연결되는 초대형 섬광을.
* * *
[당신의 ‘기여도’는 25%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던전 : 수호자의 성지〉의 전 참가자들과 비교한 결과, 당신의 순위는 「상위 10%」입니다.]
[보상으로 ‘파트로누스 전용 금색 교환권’을 습득했습니다.]
“음.”
원래 이리 지급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축제의 땅〉에서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기여도 보상품은 ‘교환권’이었다.
그것도 금색.
25%면 딱히 높은 편은 아닐진대.
아마.
파트로누스의 뛰어난 방어력을 뚫지 못하는 수준 미달의 능력자들이 대다수였기에 어부지리 격으로 상위권에 들게 된 것 같았다.
촤아악!
[‘파트로누스 전용 금색 교환권’을 사용합니다.]
[‘금색 교환 창’이 개설됩니다.]
나는 굳이 아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바로 종이를 반으로 갈랐다.
「금색 교환 창」
[1. 기술]
[2. 아이템]
[3. 특성]
“특성이 낫겠지.”
딸깍―
오랜만에 보게 된 교환 창.
무얼 고를까 하다 조만간 ‘머메른의 갑주’나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가 마스터 레벨에 오르는 걸 대비해 방어 특화일 확률이 다분한 ‘특성’으로 손가락을 터치했다.
[‘금색 교환권’으로 교환 가능한 특성이 표시됩니다.]
- 충격 흡수 : 체력이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졌을 때 타격형 공격의 위력을 감소시킨다.
- 수호 : 방어 관련 기술(또는 ‘고유 능력’)이 일정 수치 이상 발동 시 다음 방어 관련 기술(또는 ‘고유 능력’)의 방어력이 증가한다.
- 단련 : 상처가 난 부위가 단단해진다.
- 수화불침 : 뜨거움과 차가움 등 주위 환경 변화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괜찮은 게 많네.”
무얼 선택하든.
추후 ‘머메른의 갑주’나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와 결합했을 때 그 시너지가 상당할 걸로 보여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탁―
긴 저울질 속에서 결정을 내렸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특성 : 단련」을 습득합니다.]
《특성 : 단련》
- 설명 : 행성 ‘프레시디움(Presidium)’의 지배종 「파트로누스」의 특성 중 하나. 선결 과제를 이행할 시 특별한 힘이 부여된다.
- 과제 : 중경상급 상처 회복
- 옵션 : 선결 과제 달성 시, 재생된 부위의 피부 및 골밀도 등 모든 방면의 신체 조직이 영구히 강화됩니다. 단, ‘체력 회복 물약’이나 여타 ‘기술’(또는 ‘고유 능력’) 등의 외력이 가미될 경우 강화 정도가 낮아집니다.
“좋아.”
내가 고른 녀석은 이것.
오리지널 기술로서의 가능성도 가능성이지만, 그전까지 활용성도 따져봤을 때 이게 제일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여 정하게 되었다.
특히.
요즘 들어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일격 태세’의 반발력으로 육체가 반쯤 망가지고 소생하기를 반복 중인지라.
이 부분에서 많은 이점을 보리라 싶었다.
“이걸로 정리는 끝났나.”
총합 4개.
각종 칭호와 기술에 보물급 아이템.
그야말로 완벽하다 표현해도 좋을 결과물에 절로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며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웃은 나는 한세정들을 불러 모았다.
슬슬.
다음 계획을 논의할 차례였다.
* * *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8일 15시간 31분 27초]
“8일하고도 15시간이 남았는데, 언제쯤 출발했으면 좋겠어?”
편안히 쉬며 오전부터 쌓였던 피로를 대강 풀어낸 이후, 피워놓은 모닥불에 둘러앉은 일행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깃발의 무덤’ 내부에 있을 것이 확실시되는 〈차원의 깃발〉을 찾으러 갈 제2차 여정 개시일에 대해.
“나는 개인적으로 하루 정도는 기다렸다가 갔으면 해.”
물음에 앞서 내 의견을 먼저 밝혔다.
내일이면 ‘프레데터의 기억 포식’ 쿨타임이 되돌아오기 때문에, 기왕이면 오른쪽 안구를 이나고르트의 것으로 바꾼 뒤에 떠났으면 한다고.
“한 가지 더.”
더불어.
“현재 근력 스탯이 397. 이것도 채웠으면 하고.”
4차 한계 돌파의 벽이 코앞이라.
떠돌이든 던전 지박령이든 퀸급 개체를 사냥해 애매하게 모자란 수치를 올리고 가자며 얘기를 마치자.
한세정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턴을 받아 입을 열었다.
“저는 상관없어요, 오빠.”
“저두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저희도 괜찮아요. 오빠.”
“옙.”
일행 전원 큰 이견은 없었다.
단지.
약간의 조언을 추가하는 한세정.
“그런데, 한국 정부에서 파트로누스 탈취범을 잡겠다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요? 너무 오래 머무르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주장은 타당했다.
잘 벗어나긴 했다만.
여전히 신(新) 한국 정부의 권역 내부에 자리 잡은 형국이라,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선다면 꼬리가 밟히는 건 금방일 터.
고로.
한세정의 얘기대로 적당한 선을 지켜야겠다…라고 결론을 낸 우린 불침번 등을 실시하며 회의를 종료했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발전된 신체에 적응하며 하루를 보낸 나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며 이식에 들어갔다.
다만.
[프레데터의 상위 진화론]
우우우우우웅―
[‘기술 : 프레데터의 상위 진화론’을 발동합니다.]
[진화에 사용될 제물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이룩할 진화 과정을 선택해 주십시오.]
“흡수 이식.”
[「흡수 이식」을 선택하셨습니다. ]
[흡수할 신체 부위를 선택해 주십시오.]
“눈.”
[대상 「이나고르트 : 2등급」의 ‘안구’를 선택하셨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삐이이익!
“…음?”
시도는 시도로 그쳐야 했다.
[진화에 실패했습니다.]
[현재 종족 「이나고르트」는 50일간의 ‘기억 포식 제한’ 패널티가 적용되어있습니다.]
동일 종 50일 리미트에 발목이 붙잡힌 탓이었다.
“아…….”
또.
기억 능력의 문제가 발동한 것.
어르신께서 주신 약을 매일같이 먹고는 있으나, 역시 비는 구멍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쯧.”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차고는 몸을 일으켰다.
형편이 이리되었으니.
새로운 안구를 구해야 한다.
어차피.
근력을 올려야 하는바.
그 김에 함께 처리하기로 하고서 한세정들에게 다녀온다는 말을 전하고 신지유와 밖으로 나온 나는 혹여나 신(新) 한국 정부 소속원들과 마주칠까 주위를 경계하며 비행형, 개중에서도 조류형 괴물을 수색해나갔다.
방식은 간단했다.
“흔들바람!”
휘우우우웅!
일전에 이나고르트의 던전 ‘천둥 벼락의 폭풍’에 입성했던 것처럼.
풍운을 헤치며 온 동네를 떠돌다.
이렇듯.
띠링―
[축하합니다!]
[〈던전 : 태풍의 눈〉에 입장하셨습니다.]
[해당 공간에서 활동하는 동안 〈던전 전용 퀘스트 : 풍파가 몰아치다.〉가 진행됩니다.]
“됐다.”
걸리는 던전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던전 : 태풍의 눈》
- 이곳은 행성 ‘튀폰(typhon)’의 지배종 「템페스타」의 영역입니다. 바람을 부리며 대기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살아있는 태풍의 화신이라 불리는 「템페스타」들은 평범한 새의 형상을 띄고 있어 방심하기 쉬우나, 하루에도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닐 수 있는 강인한 날개를 앞세워 지상을 찢어발기는 사냥꾼들입니다.
어떤 금속과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부리와 발톱, 수백 개의 칼날을 대신하는 날개깃.
그들을 발견하거든 즉시 숨으십시오.
어영부영하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사신의 낫이 당신의 몸통을 베고 지나갈 테니.
└던전 입장 시 ‘던전 전용 퀘스트’가 자동 진행됩니다.
└던전 전용 퀘스트 : 풍파가 몰아치다.
효과는 강력했다.
“―――끼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엑!”
“끼에에엑!”
대략 30여분 간 여기저기를 오가다 반쯤 무너진 빌딩 옆을 지나던 차에 ‘태풍의 눈’이라는 던전에 들어섰고, 해당 영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설명 창이 열리기 무섭게 흑갈색 대붕(大鵬)들이 우릴 반겨주듯 뛰쳐나와줬으니까.
퀸급 개체인 듯.
양익을 쫙 편 8~9m 크기의 집채만 한 새를 필두로 이륙하는 놈들은 흡사 제트기 수십 대의 단체 발진을 연상케 했다.
“어떤 금속과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부리와 발톱, 수백 개의 칼날을 대신하는 날개깃… 이라. 저런 타입이라면 근력에도 영향을 주겠지. 지유야.”
“내려갈까요?”
“그러자.”
맹렬하게 비상하는 템페스타들을 지켜보다 지면에 착륙한 우린, 사로 갈라져서 각자에게 주어진 미션을 해결했다.
퀸급 개체로 추정되는 놈을 맡아 전투를 치르는 것은 내가, 시체가 훼손되지 않게끔 포획하는 작업은 신지유가 담당이었다.
아무래도.
나 혼자 날뛰었다가는 적들의 몸뚱아리가 온전하질 못하다 보니 분담은 필수였다.
“최대한 큰 녀석으로 구해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네!”
짧은 대화 직후 전장을 분리했고, 이내 양쪽에서 치솟은 마력의 파동이 거칠게 사방을 진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