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때늦은 점심.
“…소생.”
우우우우우웅!
나지막하게 외우는 주문에 작은 손바닥을 타고 빠져나간 마력이 따듯한 온기를 발산하며 어딘가로 흘러 들어간다.
새하얀 병상 위.
복부가 길게 갈라지는 상처를 입어 내부 장기 손상과 함께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남자의 뱃속이었다.
“으윽, 으으…….”
실려 온 직후부터 지금까지 쭉 혼절한 와중이었음에도 끊임없이 신음을 흘리던 그는.
화아아아악!
분홍빛을 띠며 내려앉는 기운의 따듯함이 전신에 퍼지자 조금씩 진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그러나 분명하게 안정화되어가는 증상.
파열되었던 장기가 서서히 재생되고, 까맣게 죽은 핏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선홍색의 생기 넘치는 선혈이 채워나간다.
남자는 점차 활기를 되찾아갔고, 약 5분여가 흐르자 핏물이 튀는 식의 흔적이 없었더라면 중환자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
그야말로 ‘소생(蘇生)’이란 문자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광경이었다.
“으하……. 됐다”
이 기적이나 다름없는 현장을 빚어낸 이.
앳된 티가 역력하나, 제법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는 종합 학교 학생 ‘황유신’이었다.
“끝났어요! 정 조장님!”
“그러냐? 오늘도 수고 많았다, 유신아. 근래에 뭘 발견했다고 하더니 환자가 급증해서 바빠 죽겠는데, 너라도 없었으면 아마 나도 쓰러졌을 거다.”
“헤헤.”
왕실군 환령 부대의 부대장을 할아버지로 두고 있는 유신은 ‘금일’도 「백의 부대」의 관사를 돌며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상한 일이다.
환령 부대쯤 되면 여러 국가 기관 중에서도 꽤나 빵빵하게 푸시가 이뤄지는 조직.
그러한 단체의 부대장을 배경으로 둔 아이라면 금전적으로 모자람 없이 살아갈 터였다.
헌데도.
유신은 여유가 생길 때면 틈틈이 백의 부대에 들러 매일 환자를 돌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굳이.
무슨 까닭일까.
답은 간단했다.
“보자… 유신이 네가 봐준 환자가 네 명? 중상자 하나에 경상자 셋이라. 1시간도 채 안 돼서 많이도 치료했구나.”
“마력을 탈탈 썼어요. 헤헤.”
“매번 부족한 일손 채워줘서 고맙다, 자! 여기 알바비다!”
“감사합니다!”
아르바이트.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할아버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끔.
능력이 있는데도 마냥 기대고 싶지 않다는… 조숙한 아이의 각오였다.
“2등급 3개에 1등급 15개.”
“안 떼어먹는다, 인석아.”
“헤헤, 그럼요. 믿죠. 믿어요.”
“녀석 넉살하고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숙제해야 해서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네에에엡!”
황유신은 피식하고 웃는 조장 정호창의 말에 꾸벅 안녕을 고하곤 병실 한쪽에 던져 놓았던 책가방을 챙겨 기숙사로 떠났다.
종합 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 따로 살집이 없거나 부모 등의 케어가 불가능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숙박 시설.
엄연히 ‘무료’였기에 일반적인 주거 환경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역사의 미래를 담당할 아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니만큼 나름 공을 들여준 터라 사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기숙사생에게는 기본적으로 생활용품이나 식비도 무상으로 지원됐고.
아무튼.
“흐음, 흠, 흐으음.”
황유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1 생활관으로 향했다.
두둑해진 주머니의 무게감에 절로 지어지는 미소.
이따금씩 마주치는 친구들과 정답게 인사를 건네며 정문에 다다라 보안카드를 겸하는 학생증을 정문 도어락에 찍으려는데.
“아, 황유신 학생!”
“…네?”
누가 유신을 불렀다.
경비실에서 근무하시는 손씨 아저씨셨다.
“너를 만나고 싶다는 손님이 오셨다.”
“손님, 이요?”
“그래. 황수현 씨라고, 부대장님께서 보내셨다는구나.”
“할아버지가요?!”
급작스러운 부름에 적잖게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할아버지’라는 단어에 유신의 눈빛이 강하게 반짝거렸다.
이별한 지도 벌써 2주 가까이 된 시점.
혈귀라던가.
최근 들어 고구려를 노린다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지원을 요청받아 불가피하게 잠시 이별해야 했던 할아버지.
다치시진 않으셨을까, 전쟁은 무사히 마쳤을까.
물음표만 난무했던 유일한 혈육의 소식을 알아볼 수 있겠다는 상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인지.
100m, 50m, 10m…….
방문객들이 머무는 로비로 뛰어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벌컥!
문고리를 열어젖히는 손아귀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활짝 개방된 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공간의 풍경이 보였다. 황유신은 얼른 안내데스크로 달려가 할아버지가 보내셨다는 분이 어디 계신지 물어보고자 했다.
다만.
워낙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주위를 살피지 못했고.
툭―――
쿵!
“아, 죄송…….”
결국, 허둥지둥하다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기에 얼른 일어나 사과했으나.
터업!
‘……!’
화가 나셨는지 어깨를 꾹 누르는 상대방.
순간 마음이 들떠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퍼뜩 놀라 똑바로 용서를 구하고자 쿵쾅거리던 심장을 가라앉히며 자세를 단정이 하는데.
“괜찮니? 조심해야, 아! 너였구나.”
주의를 주던 상대방이 문득 아는 체를 한다.
심지어.
“오랜만이다. 유신아.”
“네?”
오랜만이라며.
이에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겨 황유신은 허리를 숙이다 말고 머리를 들어 올렸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누구… 혀엉?!”
자신의 앞에 무척이나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 * *
바글바글―
종말 시대치고는 비교적 번화가스러운 거리.
오가는 이들로 북적이는 시장 중앙에 설립된 ‘버프&비프’라는 레스토랑 3층.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바깥과 다르게 한적한 식당 테이블에 일곱 명이 모여 앉았다.
나와 한세정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황유신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시켜라. 너희도.”
“감사합니다!”
“정말요?! 아싸!”
“와아! 스테이크 먹자! 스테이크! 이게 얼마 만에 스테이크냐……!”
“저는 제일 싼 걸로 먹겠…….”
“에이, 재우 오빠. 그러지 말고 오늘은 맛있는 거 드세요.”
“그래요!! 형! 여기 돈가스도 파는데, 나는 그거 먹을까?”
종업원이 두고 간 메뉴판을 살피며 각양각색의 주문을 마친 우린 음식이 나오는 동안 묵은 회포를 풀었다.
“음… 우선 인사부터 하는 게 좋겠지. 세정이나 이령이, 재우는 전에 봤으니 알 테고.”
“넵.”
“여기는 어르신과 너와 헤어진 후에 합류한 지유와 지운이다.”
“신지유라고 해.”
“나는 신지운!”
“안녕하세요. 황유신입니다.”
그간 잘 지냈느냐.
종합 학교에 입학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학교생활은 할 만하냐.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느냐.
간단하게 통성명하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묻고 싶었던 궁금증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노야에 관한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 혈귀라는 무리와 전쟁을 치르게 됐는데,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같이 파견 근무 중이던 환령 부대를 잘 이끄시며 남문에 쳐들어왔던 세력을 큰 피해 없이 몰아내시며 공을 세우셨다. 백구도 활약했고.”
“와…….”
“식사 나왔습니다. 보아레스 스테이크는 어디로 드릴까요?”
“여기다 주세요.”
“네엡.”
5분, 10분 담소 나누다 보니 어느새 주문한 요리들이 맛있는 향기를 퍼트리며 식탁에 올려졌다.
가게 이름에 걸맞게.
[「특수 요리 : 보아레스 스테이크」를 섭취하셨습니다.]
[30분간 체력이 3% 향상됩니다.]
[「특수 요리 : 바탈타 샐러드」를 섭취하셨습니다.]
[60분간 피로 누적 속도가 5% 감소합니다.]
“호.”
섭취와 동시에 버프가 발동되는 신기한 먹거리였다.
그 덕에 한결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낸 우린 유신이의 기숙사로 장소를 옮겼다.
“2인 1실이니?”
“저는 1인실이에요. 할아버지가 잠은 편하게 자는 게 좋다고 하시면서…….”
“잘됐다.”
원룸 구조를 띠고 있는 제1 생활관 1029호.
혼자 쓰기에 더없이 충분한 넓이의 방을 둘러본 황유신의 말에 가볍게 주억거린 나는 적당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며 준비했던 물건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이건…….”
“선물이다.”
1등급, 2등급, 3등급, 4등급.
등급별로 구비된 근원석과 퀸급 개체의 주요 전리품인 ‘금색 교환권(각각 이나고르트와 비멤브로스)’ 두 장.
여기에 근원 수정도 세 개 얹었다.
능력자라면, 아니 생존자라면 너나 할 거 없이 눈이 휘둥그레질 보물들을.
“이, 이게 다 선물이라고요?”
“이 자리에서 전부 먹어라.”
“제, 제가요……?”
“어르신에겐 오면서 드렸으니 남기거나 아까워할 필요 없다. 오히려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보기라도 되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어서 흡수해.”
“어… 어…….”
어마어마한 파상공세에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더듬거리는 유신이.
스윽―
그 입에 손수 근원석을 넣어주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내성」의 발아를 감안해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강제 먹방.
어버버 거리는 새에 무더기로 쌓여있던 근원석과 근원 수정을 모두 복용시켰고, 마지막으로 녀석의 양손에 ‘금색 교환권’을 들게 한 뒤 위아래로 교차해 종이를 반으로 갈랐다.
파지지지직!
교환 창이 생성되는지.
유신이의 눈길이 허공으로 향했고, 그 덕택에 비로소 이 일련의 과정이 현실이었음을 자각한 듯.
“…아아악!”
우렁찬 괴성이 튀어나왔다.
“살짝 모자랐네.”
아쉽게도 유신이는 체질 개선의 벽을 뚫지 못했다.
마력과 내구가 다소 미흡했던 게 원인이었다. 어르신께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키워달라는 편지를 전해야 할성싶었다.
“아… 아직도 안 믿겨요. 2차 환골탈태라니…….”
유신이는 두 번째 벽을 부쉈다는 것만으로도 무지 기꺼워하는 모양이었지만.
“체질을 개선하고 나면 못해도 2배 이상 강해질 거야. 그러니 기회가 되면 꼭 해둬.”
“네네…….”
“녀석.”
넋이 나간 듯 대꾸하는 유신이를 보며 피식 웃은 나는 슬슬 헤어질 심산으로 몸을 일으켰다.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으니.
구상했던 대로 가서 숙소를 잡아놓고 우리끼리 조용히 대기할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저…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며 울먹거리기까지 하다 간신히 감정을 다스린 유신이가 떠나가려는 우리를 붙잡았다.
“……?”
“제가 아까 백의 부대, 그러니까 의무대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얘기?”
“네. 제가 요즘 아르바이트로, 아! 이건 할아버지께 비밀이에요! 걱정하실까봐 말씀 안드렸거든요. 전할 방법도 없었지만… 헤헤.”
“그래. 알겠다.”
“고마워요, 형. 어쨌든 치유 능력으로 백의 부대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몹시.
“정찰 나갔던 수색대가 마크? 무슨 마크를 찾아냈다고 하더라구요.”
재미있는 소재를 내뱉으며 우리의 온 신경을 단박에 사로잡아버렸다.
“마…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