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207화 (206/232)

207화

신(新) 한국의 수도 ‘한양’.

전 대통령이자 현 국왕인 이회건이 중심이 되어 통칭 왕실군이라 불리는 20개 부대를 주춧돌 삼아 서울 전역에 흩어져있던 시민들을 규합해 탄생한 쉘터로, 오늘날에는 무려 1만 명 이상의 생존자가 안정적인 거주지를 기반으로 ‘학업’, ‘상업’, ‘농업’, ‘목축업’ 등 여러 분야로 삶의 질을 높여가고 있으며……(중략).

고구려 등 각 지부와 달리 이중 성벽 체제를 취하고 있다. 다만 그 두께가 상당해 방어력으로 따지자면 여타 성의 서너 배는……(중략).

한양의 군사력은 굉장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능력자이기에 언제든 징집할 수 있는 현역 병사였거니와 특히 국왕 직속 무력 부대인 왕실군은 하나하나가 웬만한 집단에 버금간다고 알려졌으며…(중략)

- 추신 1. 실제로 내가 속한 ‘환령 부대’ 또한 자네들이 경험한 고구려의 독립 타격대 두셋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네.

- 추신 2. 다만 왕실군끼리의 전력 차는 꽤 극심하다. 일례로 나와 유신이를 데려갔던 ‘착호 부대’는 외부 업무 중이기에 지원을 보내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거의 자급자족하고 있다지. ‘원앙 부대’라는 곳은 어느 날 갑자기 폐지되기도 했고.

이처럼 신(新) 한국의 총력이 밀집된 수도는 24시간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성십자가 클랜」의 임시 합류로……(중략).

-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쓴 자료 책자’ 中 일부 발췌

* * *

펄럭―

펄럭―

바람에 나부끼는 거대한 천.

백두에서 한라, 격렬비열도에서 독도까지.

한반도의 모든 지형을 최대한 자세하고 상세하게 그려놓은 초대형 깃발이 수십 미터 높이의 첨탑에 걸려 구름과 어울려 춤춘다.

또 있다.

제3 외성의 성벽에도 1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일렬로 주르륵 세워져 이곳이 누구의 영토인지를 명확하게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 형세를 관망하고 있자니.

“…대단하네요.”

“그러게.”

정부 소속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듯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장인의 작품 「대한의 신기」를 목격하셨습니다.]

[30분간 모든 신체 능력이 5% 상승합니다.]

[30분간 체력 및 마력 재생력이 5% 상승합니다.]

[단, 이 효과는 ‘살인’, ‘방화’ 등 「대한의 신기」의 영향권 내에서 정해진 수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시 마이너스로 전환됩니다.]

“아.”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장인의 작품이라…….

“사람이 많으니 별것이 다 있네.”

예상 못 했던 기물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유지만 가능하다면 인구수를 높이는 게 좋겠다 싶었다.

끈끈한 신뢰 관계로 뭉치긴 어려울지언정 다양성 면에서는 그 차이가 극명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소수 정예 체제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재화는 한정적인 데 반해 배분받고자 하는 인원은 넘쳐나기 때문.

이른바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다.

“…됐고. 이제 저길 들어갈 거야. 목표는 제2 외성에 있는 종합 학교나 근처에 있는 기숙사. 유신이를 보고 난 후에 하루를 머물렀다가 노야께 되돌아간다는 명분으로 성을 빠져나온다.”

한동안 멍하니 감상하다 본론으로 돌아와 한세정들에게 내가 구상하던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실상.

고구려에서 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것이다.

노손 간의 물질적 교감.

이를 능가하는 효율적인 탈출 책은 없으니 말이다.

“이것만 명심해. 성십자가 클랜 또는 그쪽과 관련된 인물이 파다할 거다. 그러니 조심해. 우리가 문제를 일으키면 노야와 유신이에게도 피해가 간다는 걸”

“넵!”

“네!”

“알겠습니다.”

“네.”

“네엡!!”

“좋아. 그럼 가자.”

[성내에 출입을 원하시는 분들은 이곳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성내에 출입을 원하시는 분들은 이곳으로…….]

주기적으로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

한세정들을 데리고 인도에 따라 길게 늘어선 대열 끝자락에 섰다.

대략 오십여 명이 두 줄로 나뉘어 심사받는 중이었는데, 대부분 외형이 멀끔한 편이었다.

아마.

‘도로’를 통해 여길 오게 된 자들인 듯했다.

치안대가 활동하며 알아낸 가장 안전한 길목의 토지를 정비하고 각종 아이템으로 은신 및 보호 장치를 설치해 사망률을 극도로 줄였다는 생명길.

노야께서도 가급적이면 우리가 그 활로로 가길 바라셨으나.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열중해도 너무 열중한 나머지 경로가 매우 매우 복잡해진 탓에 하는 수없이 최단 루트를 밟았다.

그 결과로 켄타우로스, 정확하게는 비멤브로스 무리와 접촉하게 되었음에도 4시간 만에 주파하지 않았던가.

필시 ‘도로’를 이용했다면 소요 시간이 2배로 불어났으리라.

거리도 거리지만.

끝으로 거긴 검문소가 많았다.

우리의 실체가 탄로 날 공산이 크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다음!”

“예.”

대충 30여 분가량 걷고 서기를 반복하자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신(新) 한국 신분증 : 정식》

- 본 신분증의 소지자는 한양을 포함한 각 성의 ‘외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척!

나는 외성 수비대원에게 노야의 직인이 찍힌 정식 신분증을 제시했다.

노야께 변고가 생기지 않거든.

어지간해서는 간단한 조사 외엔 별다른 심사 없이 통과되는 일반인 기준 최고의 통행증명서.

“오, 정식 신분증이로군요.”

수비대원도 이를 확인했기에, 돋보기와 유사한 아이템으로 도장의 진위 여부만 체크한 뒤에 가타부타 묻지 않고 바로 방문 목적으로 넘어갔다.

“황철성 부대장님의 손자인 황유신 군을 만나, 황철성 부대장님이 말씀하신 물건을 전달해 주려 왔습니다.”

“이것입니까?”

“예. 근원석과 편지 등입니다.”

“음… 예. 확인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쪽은 일행분들이시라고요?”

“예.”

“황수현님을 포함해 총 여섯 분……. 예, 가셔도 좋습니다.”

“수고하세요.”

“네엡. 다음!”

정식 신분증’의 위력은 강력했다.

철저함이 요구되는 본성을, 제아무리 외성이라고 해도 의례적인 질의응답을 해야 하는데 딱 3분여 만에 패스 딱지를 받았으니까.

덕분에 우린 당당하게 검문소를 거쳐 제3 외성 권역으로 들어섰다.

“우와… 거기서도 놀라긴 했는데, 여긴 더 하네요.”

“눈에 보이는 곳이 전부 농지네.”

한양은 고구려의 확장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논, 밭, 과수원… 구성이야 비슷할지라도.

토종 농작품부터 외래종, 외계종 가릴 거 없이 각 지역마다 따스하고 추운 기후를 조절해가며 조정된 크기가 이전에 비해 한층 광대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제3 외성에서 제2 외성으로 향하는 영역 내내.

이런 게 지하에도 몇 층으로 꾸려져 있다고 하니.

“여기에 반대편에 있다는 목축장까지 고려하면 십만 명도 너끈하게 먹여 살리겠네.”

“돌아가면 저희도 저렇게 꾸려볼까요?”

“집에?”

“네. 일전에 어르신께 부탁해서 종자도 좀 챙겼으니, 기후 조절 시설만 어떻게 하면 작게라도 따라 할 수 있을 듯해서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제2 외성 검문소]

한참을 걸어 도착한 제2 외성.

수성에 용이하게 건축한 듯 성벽 전체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있는 성벽 아래.

“제2 외성 출입 희망자이십니까?”

“예.”

“이쪽으로 오시죠.”

방금 전 몇 사람이 들어갔는지 활짝 열려있는 성문 좌측에 위치한 곳으로 간 우리는 제3 외성에서 했던 행동을 똑같이 재현했다.

신분증을 제출하고, 입성 이유를 밝히고…….

“예. 완료됐습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담당자의 반응마저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하여.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진입하려는데.

“…잠깐! 잠깐!”

“…?”

뒤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잡아 세웠다.

심히 다급한 목소리로.

이 난데없는 상황에 삽시간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혹시나.

우려했던 대로 성십자가 클랜과의 무언가가 터진 건가 싶어, 반사적으로 도주냐 전투냐를 고민하며 의아하다는 감정으로 구현된 가면을 쓰고 시선을 돌리자.

“허억, 헉…”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다가온 남자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저 죄송한데, 옆으로 옮겨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길가 가장자리로 비켜설 것을 ‘부탁’했다.

그래.

의심이나 확신의 무언가가 아니라 부탁이었다.

‘…뭐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상상했던 것과는 판이한 어조에 나나 한세정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수비대원의 말에 맞춰주었다.

경계의 끈은 놓지 않았다.

소리장도(笑裏藏刀).

내가 연기를 하고 있듯이, 상대도 배우일 확률이…….

척―――!

척―――!

척―――!

“……?!”

팔짱을 낀 채 잠자코 물러나던 그때.

심상치 않은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적어도.

일백 단위 이상, 족히 수백에 이르는 군대가 일시에 발하는 통일된 보폭이었다.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는 건가?’

그로 인해 뇌리에 의문이 떠오르는 사이.

척!

척!

척!

저 멀리서부터 기나긴 행렬이 시야에 잡혔다.

깔끔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서슬 퍼런 창칼을 꼬나쥔 기사의 물결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없는 걸로 보아 성십자가 클랜 등 외부 인력이 더해지지 않은 신(新) 한국의 순수 전력으로 추정됐는데.

기강이 제대로 잡혀있는지.

아주 근엄하고 진지한 기세를 풍기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우리를 지나쳐 제2 외성을 빠져나갔다

“물어보니 충령 부대라고 하네요.”

“충령 부대?”

“네. 어르신께서 왕실군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타격대라고 하셨던 그 부대요.”

“흐음…….”

나는 한세정의 속삭임에 흥미로운 눈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저들이.

최강 무력 집단으로 평가받는 성십자가 클랜과 견주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던 「충령 부대」라.

확실히.

살갗을 찌르며 전달되는 군세가 여태껏 겪어본 그 어떤 조직보다 강렬했다.

특히 최선두에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

“저분이 김민수 대장님이시지?”

“맞아. 처음 보지?”

“실제로 보니까 더 카리스마 있으시네.”

“사람들이 그러는데 성십자가 클랜 마스터도 인정하는 실력자라고 하더라.”

“이야…….”

수비대원들의 존경심이 가득 담긴 대화처럼.

흡사 한 자루의 칼을 보는 듯한 예리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몸소 붙어보기 전까지는 단정 짓긴 힘들겠지만.

일전에 쓰러뜨렸던 혈귀의 수장 마녀 위성령과 엇비슷하거나 반 수에서 한 수 정도 앞설 것으로 추정됐다.

즉.

‘김민수라…….’

나로서도 쉽지 않은 대상이란 의미였다.

고로.

‘김민수, 김민수… 충령 부대의 대장.’

잊지 말아야 할 복수의 대상에 들어가 있는 신(新) 한국 정부의 국왕 이회건.

그의 심장을 찌르려면 저자와도 겨뤄야 할 테니, 뇌리에 단단히 각인시키고자 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