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무리하게…라고 하긴 뭐하지만.
여하튼
노야를 뵙고 오려던 스케줄의 변동이 혈귀와의 대면으로 이어졌던 만큼.
“저는 좋아요.”
“저두요.”
“음?”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되돌아온 긍정적인 답변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신씨 남매는 오히려 당연한 걸 뭘 물어보느냐는 기색으로 날 바라봤다. 재고 따윈 필요 없단 모양새였다.
이에.
내가 부연 설명해줄 수 있겠느냐는 눈빛을 하자 대표로 신지유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황철성 할아버지가 정말 잘해주셨거든요. 오빠가 누워계시는 동안 매일 조금이라도 시간 내셔서 찾아오시고,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은지, 식사는 충분히 하고 있는지.”
“…….”
“그런 분의 손자기도 하고, 오빠들이나 언니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됐던 분이라면… 저희는 몇 분을 만나든 상관없어요. 조철영 그 사람으로부터 구해주신 날 다짐했거든요. 오빠들이나 언니들이 원하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따르기로. 그치?”
“암! 형! 형이 원하면 저는 형 하자는 대로 가요!”
자연스레 말을 잇는 신지운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는 끝내 피식하고 웃었다.
이 녀석들.
의외의 구석에서 감동을 주고 있었다.
* * *
착!
착!
휴식을 마치고 상가에서 빠져나와 다시 한양으로 향하는 여정.
앞장서서 걷던 신지운이 뭔가를 포착했는지, 숨 가쁘게 손가락을 놀린다.
‘숫자는 500에서 600 언저리, 종은 괴물. 방향은 2시…….’
사인을 쭉 읽어 내려간 나는 적잖은 대규모 군세의 출현에 반대편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한결같은 속도 중시형 우회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신지운이 몇 초간 허공을 응시하더니 우리를 안전한 경로로 안내한다.
허나 나를 비롯해 한세정들은 채 열 발자국을 걷기도 전에 무기를 빼 들어야 했다.
콰앙―――!
쾅―――!
“피에에에에에엑!!”
“피에에엑!!”
바닥이 들썩거린다 싶은 순간 느닷없이 수십 마리의 지렁이가 땅을 부수며 하늘로 솟구쳐오른 탓이었다.
“어?!”
신지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광역 탐색’이 가동되고 있는 와중임에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해 당혹스러운 것이리라.
다만.
돌이켜보면 그리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위장, 변장, 추적 금지 등.
인간만큼이나 괴물들에게도 탐색을 방해하거나 차단하는 방법은 넘쳐난다. 한두 종(種)쯤 놓친다 한들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다들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지, 갑작스러운 싸움에도 일말의 주저함 없이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이령이랑 지유는 공격! 지운이는 소음 듣고 다른 곳에서 몰려오는지 체크하면서 우측 경계! 좌측은 내가 갈게!! 재우 씨는 후방 대기하되 언제든 지원 올 수 있게 서포트 준비”
“지유야! 가자!”
“네!”
“대기, 확인했습니다.”
“우측! 확인이요!”
물이 흐르듯 신속하게 이뤄지는 지휘.
가장 먼저 정면으로 뛰어나간 조이령의 창대가 비스듬하게 대각선을 그리며 창공을 찌른다.
[강격]
[가속]
[발광하는 이무기]
“하아!”
“피에에에엑!”
“피에에엑!”
“피에에에에엑-”
상공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괴물들의 궤도에 맞춘 대응이었다.
버프가 가미된 창날이 대기를 가른다.
후우우우우욱―
중무장한 기사의 손끝에서 발현된 거대한 이무기는 기류를 휘감고 치솟으며 괴물들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촤아아아아악!!
공간을 씹어 삼키는 일격에 집어삼켜진 지렁이들.
순식간에 삼십여 마리가 시체가 되어 추락한다.
물론.
“피에에에에에에엑!!”
“피에에엑!!”
“피에에에에엑!”
남은 놈들도 멀쩡한 착륙은 불가능했다.
“얼음꽃!”
우우우우우웅!!
촤좌좌좌좌좌좌좌좍!!
쇄도해오는 기마를 막기 위해 기다란 파이크를 세우던 전장을 고스란히 복사해온 듯, 대지를 물들이는 수백 개의 빙각(氷角)으로 인해.
콰직!
콰직!
콰드드득!
비명 한 번 지를 틈도 없이 걸레 짝이 되어 이승을 하직해야 했으니까.
혹은.
“청염! 흔들바람!”
화르르르륵―
서거거걱!
초고열에 불태워지거나, 칼바람에 잘려나가거나.
커맨더급도 서너 마리 끼어있었으나 승패의 양상은 단 30초 만에 갈렸다.
“끝!”
단지 문제라면.
“추출하고 가…….”
“…아! 온다! 우측에서 적 접근 중! 숫자는 최소 오백!”
“…이런.”
몹시 깔끔한 마무리였음에도 하울링이나 폭음 등 발생한 소음에 의해 앞서 탐지했던 대형 군집체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색 상.
이렇게 연쇄 작용이 일어날까 염려해 되도록 조용히 가고 싶었거늘.
“아윤 오빠, 어떻게 할까요?”
“잡고 가자. 시끄러워지지 않게.”
“네!”
나지막한 희망을 담아 결단을 내리자 한세정이 다부진 얼굴로 일행을 이끌고 2시 방향으로 자리를 옮긴다.
1m라도 마라 거리를 좁혀 개전 및 종결에 투입되는 시간을 1초라도 줄여보자는 의도였다.
그즈음.
쿠구구구구구궁―
동북부 지점에서 발발한 땅울림이 서서히 증폭되며 발바닥을 타고 전류처럼 쫘악 흘러들어왔다.
꽤나 중량이 나가는 타입인지.
지진을 연상케 하는 진동이 최고조에 달하던 찰나.
“――――என்னை மன்னிக்கவும்!!”
“―――பின்தொடர்!!”
“――ஆஹா!!”
투다다다다다다!!
폐허가 된 시가지 위로 파도가 치듯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통상적인 외계 생명체와 다르게 철제 갑주와 쭉 뻗은 창을 쥔 놈들의 정체는, 오래된 전설이나 신화 속에나 나올법한.
“…켄타우로스?”
사람의 상체와 준마의 하체가 절묘하게 결합한 ‘반인반마(半人半馬)’였다
일전에 사냥했었던, 고블린의 외형을 지닌 고블리니스를 떠올리게 하는 상대.
초록색 피부의 뾰족한 귀를 보건데, 상반신이 진짜 인간인지는 알 수 없다만… 분명한 사항은 저들의 지능이 무척 높다는 점이었다.
갑옷이나 병기를 사용하는 데다가.
“இப்படி உடைக்க!!”
“திருப்புமுனை!!”
“திருப்புமுனை!!”
유창한 언어 구사력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절망의 파도로 마주했던 머메른과 비슷한 경우.
누가 더 뛰어난지는 직접 비교해보지 않는 한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완전무장을 감안하면 맨몸으로 빨빨거리던 어인들 보다 제련술 하나만큼은 저쪽이 훨씬 훌륭해 보였다.
딱 거기까지의 데이터를 머릿속에 입력했을 때.
고오오오오오오!!
찌릿―
맹렬한 기운과 함께 육감의 경고가 경종을 울렸다.
원인은.
후우우우욱―
화르르륵!!
켄타우로스로 추정된 괴물들의 선봉에 선 놈.
던전이나 〈축제의 땅 : 심층부〉 등 특수한 셀터가 아닌 외부를 유랑 중인「퀸급 개체」 였다.
“…아무래도 조용히 지나가긴 글렀군.”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여왕이 끼어있는 이상 오리지널 기술이 반드시 동원되어야 하고, 그 말인즉슨 대폭발에 비견되는 굉음이 동반됨을 내포했기에.
“다들! 뒤로 물러나.”
“네?”
“내가 잡는다.”
“아, 넵!”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세정들과 포지션을 교체했다.
기왕 시끄러울 거라면.
퀸급이 합세한 대단위 부대를 한꺼번에 학살하는 데엔 내가 나서는 게 제일 낫다.
툭―
[오리지널 기술 :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
날개 달린 비행종 외엔 절대 피하지 못하는 수렁이 창조해낼 수 있었으니까.
우우우우우웅!
콰과과과과과과과광―――!!
“கர்மம்!”
“பெருமூச்சு!!”
“ங்க, என்று!!”
한순간에 뒤집힌 세계.
최대한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발현한 지옥에 사납게 달려오던 켄타우로스들은 함정에 빠진 기마대마냥 우수수 땅바닥을 굴렀다.
선두 열을 기점으로 중간 열, 후미 열.
마치.
반인반마로 조성한 도미노가 망가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쿠우우웅!
쿠웅!
쿠구구구궁!
그 여파로 엄청난 부피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본디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 자체가 무지막지한 이펙트를 자랑하기도 하거니와, 켄타우로스들이 고꾸라지면서 준비했던 기술을 땅 밑에 처박은 터라.
통상적인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양이 세상 전체를 희뿌옇게 채워갔다.
“으음.”
지잉―
지잉 ―
가려진 시야.
이나고르트의 시각으로도 무언가를 잡아내기가 힘들어진 현장에 나는 아예 눈을 감고 감각에 의존해 퀸급 켄타우로스의 기척을 쫓았다.
지이이이이―
탁!
‘거기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마리 뿐이기도 했고, 워낙 존재감이 커다란 대상이라.
우우우우우웅!!
[일기당천]
[‘기술 : 일기당천’의 효과로 5분간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스트랭스]
구구구구구궁!!
“후.”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표적을 감지하고 공격하는 데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후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아아앙!!
《4등급 근원석 : 비멤브리스》
- 등급 : 유일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대상 「비멤브리스」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근원석이다. 복용 시 ‘순발력’과 ‘집중’이 동반 상승하며, 기술 ‘돌파’과 ‘대형 구성’, ‘진형 붕괴’ 중 하나를 습득하고 일정 확률로 ‘특성’을 얻는다.
- 옵션 : 복용 시 ‘순발력’과 ‘집중’ 15 상승 / 무작위 기술 1종 획득 / 33% 확률로 특성 1종 획득
“비멤브리스. 완전히 다른 명칭이네.”
“그러게요. 그럼 켄타우로스는 어디서 나온 이름이지?”
“비멤브리스나 켄타우로스나 그건 됐고. 그보다 기술이 진짜 좋다.”
“다수의 적과 싸울 때 효과적일 거 같습니다.”
“전 대형 구성? 저게 좀 끌리는데요?”
“그건 왜?”
“천공의 문으로 소환수들을 불러온 다음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
연달아 가한 2번의 오리지널 기술의 합작으로 500여 마리의 반인반마를 모조리 쓸어버린 직후.
급히 근원석을 챙겨 안전한 장소로 피신한 우린 거칠어진 숨을 돌리며 전리품을 구경했다. 찬찬히 탐독해보니 특수 스탯인 ‘집중’이 올라가는 옵션이나…….
전체적으로 썩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해서.
“이건 올려두고 가는 게 좋겠다.”
“분배할까요?”
“응.”
“넵!”
우린 앉은자리에서 근원 수정 등 근원석들을 깔끔하게 분배해 복용했다.
[축하합니다!]
[‘신체 능력 : 집중’이 「100」을 돌파했습니다.]
[‘신체 능력 : 집중’이 「200」을 돌파했습니다.]
[보상으로 ‘칭호 : 1차 한계 돌파 - 집중’을 습득합니다.]
[보상으로 ‘칭호 : 1차 한계 돌파 - 집중’을 습득합니다.]
[기술 ‘고도의 집중력’을 습득합니다.]
[기술 ‘무아지경’을 습득합니다.]
[집중이 9 상승합니다.]
단숨에 도달한 200의 벽.
수량이 넉넉해 전부 2차 한계를 부수고도 ‘금색 교환권’을 포함한 근원석 이십여 개가 남았다.
이 또한 유신이에게 넘겨주면 좋을 듯싶겠다 결심하며 재차 한양으로 향하는 도보.
그렇게.
고구려를 떠난 지 대략 4시간여가 되던 무렵.
“…아! 저기!”
“왜? 뭔데?”
“한반도기이에요! 한반도기! 한양이에요!”
우린 마침내 신(新) 한국의 수도 한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9일 19시간 42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