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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205화 (204/232)

205화

【 수도 한양 】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9일 23시간 59분 59초]

꼼지락거리던 시곗바늘이 다음날의 시작을 알리던 아침.

“…그들은 갔나?”

창가에 서서 아직은 어슴푸레한 바깥 풍경을 관조하던 최위관의 물음에,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던 지창수가 아쉬움이 짙게 묻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일자가 바뀌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더군요. 황 노야와 수비대원 몇몇을 제외하곤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쯧.”

비관적인 결말에 인상을 찡그린 최위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검은 도화지 위에 어제의 전쟁을 그려보았다.

벌써 십수 번도 넘게 되짚어보았지만, 회상할 때마다 충격을 안겨준다.

창 한 번에 수십 명이 사라지고, 붉은 방벽은 성채의 방호력을 상회하는 단단함을 선보이며 대군을 저지했다.

혼자서 몇 개의 속성을 다루는지.

자연재해 급의 재앙이 넘실거렸고, 호위라던 소년은 앞선 이들에 비해 화려함이 떨어질지언정 정확하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사각지대에서 날아들던 공격을 소리소문없이 잡아내는 기예를 보여주었다.

하나하나가 타격대 대장급의 실력.

게다가.

“류세령(조이령의 가명)이라고 했던가요? 창 자루에서 용(龍)을 불러냈을 때는 기겁했습니다. 딱 보는 즉시 알겠더군요. 성주님과 같은 오리지널 기술의 소유자란 걸.”

지창수의 말마따나.

전신 갑주로 무장한 여기사.

그녀의 레벨은 못해도 최소 수장급,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고구려의 최고 능력자인 최위관괴 비견될 정도였다.

장비도, 개인의 힘도.

그래서 못내 안타까웠다.

“함께했다면…….”

동료가 되어주었다면.

아니.

동료라는 거창한 관계가 아니어도, 그저 계약으로 묶인 조건부로라도 머물러주었다면 국왕 전하의 대업을 이루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조력자가 되었을 터인데.

리더로 추정되는 황수현이라는 남자에게 푹 빠진 것인지, 따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설마 주급으로 무려 4등급 근원석 다섯 개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거절할 줄이야.

“아쉽다. 아쉬워…….”

최위관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잔다르크 못지않았던 류세령의 이름을 되뇌며 창밖으로

깊은 한탄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혈귀 놈들이 어떻게 연결벽을 뚫었는지도 대충 파악했습니다. 통신에 따르면 근무조가 당했다고 하더군요. 어째서인지 굉장히 극단적으로 공세를 취해 뚫고 온 모양입니다.”

“사상자는? 많이 나왔다던가.”

“백 오십 명 전원 사망했다고 합니다. 다만 시체를 치우고 위성령 그 여자가 인두겁으로 근무조를 세우는 바람에 인지하는 게 늦어졌다고 합니다.”

“지독하군. 헌데 말이야. 마녀가 정말 죽었을까?”

“황수현이라고 했던가요, 그 남자가 주장하기로는 죽었다고 하니 믿어야겠지요. 증거품으로 위성령의 애병 ‘이혈식도’도 확인됐고 말입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은 그자 또한 대단한 실력자란 소리겠지.”

“적어도 위성령을 패퇴시켰다는 얘기니 류세령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후, 대단하군. 대단해.”

“본 정보는 정보부에 전달해두겠습니다.”

“그러게.”

* * *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시게. 치료는 끝났지만, 피로가 누적되어있을 수 있으니 몸조심들 하고.”

“예. 어르신도 무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구려 제3 외성 서문 근처.

원활한 시야 확보를 위하여 일부러 건물을 싹 밀어버린 폐허의 끝자락에서 나는 황 노야와 진짜 이별사를 나눴다.

전처럼.

긴 대화는 되도록 피했다.

서로가 안녕하길 바라는 기원, 소망 그거면 충분하다.

“컹! 컹! 아우우우우우우!!!”

본인이 개인지 늑대인지 헷갈리는 백구의 작별 인사를 들으며 자욱하게 낀 안갯속으로 발을 디뎠다.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9일 23시간 42분 30초]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9일 23시간 42분 29초]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9일 23시간 42분 28초]

어느새 십의 자리 선이 붕괴하고 일의 자리로 진입한 타이머.

가급적이면 어제 혈귀와의 혈전에서 승전을 거둔 뒤로, 약간의 재정비만 하고서 바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악의 징벌자’란 명칭답게.

개자식들을 목도하고서 눈이 돌아버린 조이령이, 평소보다 격렬하게 교전에 임하다 혈귀의 간부들을 쓸어버리는 과정에서 복부에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어 종일 요양하느라 하루를 더 소모해버렸다.

동료의 목숨이 달린 마당이었고, 여전히 기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실정이었기에 딱히 압박감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서두르는 게 좋겠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근 나흘 내내.

‘단서’를 획득하기를 했나, 근원석을 벌길 했나… 솔직하게 말해서 당당하게 내놓을 만한 성과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대규모 전투를 치르며 모자랐던 훈련량을 채운 건 다행이나.

어디까지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바.

절대적인 총량을 고려하면 부족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원래 목표인 ‘황금 마크’라도 빨리 발견하고 싶었다.

“여기서 왼쪽으로 돌면…….”

이런 내 의지를 받들어 신속하게 나아가는 길.

일전에 들렸던.

혈귀의 선발대와 김창진의 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했던 부근마저 단숨에 지나쳐 북상하길 20여 분쯤.

스윽―

선두에서 전진하던 신지운이 주먹을 세웠다.

정지 신호다.

녀석은 뭔가를 살피는 듯하더니 한차례 앞쪽을 가리키고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었다.

[1-0-0]

전방에.

적어도 100여 명 이상의 괴물 또는 인간이 있다는 뜻.

착―

마지막으로 왼손으로 검지와 중지, 약지를 한꺼번에 들며 손등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는 걸 보아하니.

신원미상 무리의 정체는 괴물과 인간이 뒤섞인 군집이다.

‘오케이.’

끄덕―

약속된 수신호에 이해했다는 의미로 살짝 까딱이자, 좌측을 지목한 신지운이 지체하지 않고 바닥을 박차며 도약했다.

우리도 군말 없이 녀석을 쫓아 높다란 빌딩 옆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혈귀와 뒤엉키게 되면서 다시금 다짐했다.

어제야 예상치 못한 사고 정도로 일축하고.

이제부터라도 어지간하면 타인의 인과에 관여하지 않기로.

“그냥 가도 되겠죠……?”

“괜찮아. 어르신께서도 혈귀를 빼면 정부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사실상 없다고 하셨으니까.”

전례가 있는 탓에 공연히 꺼림칙해 하는 한세정과 담소를 주고받으며 선회하길 얼마간.

탐지에 걸릴만한 범위에서 확실히 빠져나왔다는 보고가 넘어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2차 수신호가 목격되었다.

요번에는 순수 괴물들이었다.

슬슬 고구려에서도, 그렇다고 한양의 권역도 아닌 지점에 들어서는지.

키에에에에엑―――!

크어어어어어―――!!

외계 생명체들이 토해내는 하울링의 음량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한강 근처에서 맛봤던 지옥이 오버랩되는 상황, 일단은 계속해서 ‘회피 기동’을 제1 원칙으로 삼고 끊임없이 질주했다.

* * *

“휴대용 안전지대 설치.”

기이이이이이이잉!

[‘휴대용 안전지대’를 발동합니다.]

[1%, 2%, 3%··· 99%, 100%]

[설치 완료!]

[수식어를 선택해 주십시오.]

[1. 기본 수식어 - 화염의, 청천의, 돌풍의, 괴석의, 전류의, 혹한의, 강철의]

[2. 무작위 수식어 ]

“강철의.”

[‘기본 수식어 - 강철의’가 적용됩니다.]

[당신을 기준으로 폭 00m의 ‘강철의 안전지대(Lv. 2)’가 생성됩니다.]

[「강철의 장벽」이 구축됩니다.]

[‘아군 지정’ 주문을 사용해 격리된 아군을 들일 수 있습니다.]

“아군 지정. 한세정, 조이령, 곽재우, 신지유, 신지운.”

우우우우우웅―

기계가 작동하는 듯한 소음이 상가 내부를 울리더니, 이내 우리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장막이 주변을 빈틈없이 가로막는다.

[‘안전지대’ 내에 거주하는 동안 모든 신체 능력이 8% 상승하며, 체력 및 마력 재생 속도가 12% 상승합니다.]

[피로 감소 속도가 15% 향상됩니다.]

[자동 온도 조절 및 습기 제거 등 쾌적한 환경 조성이 실시됩니다.]

[해제 전까지 남은 시간 : 59분 59초]

뒤이어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안전지대’가 2레벨로 올라가면서 따라오는 부가 옵션이 상당히 많아졌다.

한세정들도 그 부분이 마음에 드는지.

“와… 스탯에 회복에, 뭐가 엄청나게 많네요?!”

“난 안 추워서 좋다. 아우, 뜨듯해.”

“언니 저도요.”

실내의 공기가 싹 바뀌자 짐을 내려놓으며 한마디씩 던진다.

아마.

출성 후 장장 두어 시간 만에 갖는 휴식이라 더욱 기꺼워하는 것일 터였다.

보통이었으면 2~3일을 내리 걸어도 끄떡없는 체력의 소유자들이었으나.

지금은 인간이고 괴물이고 아무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시도 경계를 풀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라 심력이 퍽 낭비되는 일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휴대용 안전지대’에 붙은 피로 감소 효과가 매우 달가웠다.

체력이 아무리 만땅이어도, 정신적인 면이 치유되지 않으면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게 되니까.

“비껴가느라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어르신께서 알려주신 대로라면 조만간 한양의 권역에 들어설 듯합니다.”

“드디어.”

한세정들이 여독을 푸는 사이 나는 곽재우와 지도를 살폈다.

조악한 종이 쪼가리에서 벗어나, 혈귀와의 승전 보상으로 가져온 서울 지도에 표시해둔 목적지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본 결과.

아무리 늦어도 30분에서 1시간이면 한양의 끄트머리에 닿을 것으로 사료됐다.

하여.

여기서 결정을 내리고 가야 할 듯했다.

“결정, 이라면.”

“유신이를 만나고 올지, 이대로 본 계획을 수행할지.”

“아.”

노야께서 내어주신 명분용 주머니.

나는 이걸 유신이에게 전달해줄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이를 빌미 삼아 유신이의 그릇을 강화해줄 선물을 주고 오는 게 맞을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심정으로야 당장에라도 들르고 싶다만.

입장에 거리낌이 없었던 고구려와 달리 한양 본성은 우리를 알아볼만 한 성십자가 클랜이 주둔중이라 함부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평상시였다면 구원 활동에 미친 그들의 특성 상 한양이고 뭐고 도심으로 나가 악인들을 처단하며 약자들을 구출해줘야할 시기였으나.

하필 이벤트까지 며칠 남지 않은 터라 정부 측에서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고 하니…….

“저는 형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흐음…….”

유신이를 봤으면 하는 감정적인 본능과 쓸데없는 분란을 피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논리가 머릿속에서 부딪치며 파문을 일으킨다.

어쩌는 게 옳을까.

홀로 고뇌하던 나는 슬그머니 한세정들을 돌아봤다.

“역시…….”

이런 안건은 모두와 상의해야 할 사안이었다.

특히.

우리와 다르게 유신이와 자그마한 인연도 없는 신지유와 신지운의 의견은 꼭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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