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어이! 오늘은 또 뭐가 궁금해서 오셨대?”
“그간 무탈하셨죠?”
“소일거리나 하는 아저씨한테 별일이야 있겠나.”
“자, 이건 선물입니다.”
“어이? 이거 막걸리 아냐?!”
“어렵게 공수한 물건이니까 대답 좀 잘해주세요.”
“흐흐흐… 내 속옷 색깔도 알려줄 수 있는데. 뭘 말해줄까.”
“제가 요즘에 ‘사람 조사’를 하고 다니거든요.”
“사람 조사?”
“예. 가령… 그 최초로 오리지널 기술을 개화했다던 남자같이, 종말 시대를 주름잡던 사람들에 관해 찾아보는 중인데, 재밌는 거 있으면 이야기보따리 좀 풀어주세요.”
“흐으음… 사람이라, 사람… 아! 마침 어그로 끌기 딱 좋은 소재거리가 있구먼.”
“누구요?!”
“자네 혹시 ‘위성령’이라고 아나?”
“음, 낯익기는 한데… 아! 혹시 그 연쇄 살인마?”
“아는구만 그래. ‘위성령’, 어지간한 생존자들보다도 그 여자가 수십 배는 유명했거든.”
“정말요?”
“암. 주일이면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 기도나 드리며 착하게 살 것만 같은 이름을 하고서는 애꿎은 이들을 열일곱이나 죽이고도 부족했는지, 감옥 동기들을 모아 ‘혈귀’라는 단체를 만들더니, 대놓고 학살을 자행했었지. 인터넷도 TV도 없는데도 ‘마녀’라는 악명이 퍼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각했겠어.”
“…아니, 정부도 있고 4대 성주들도 있었는데 그냥 놔뒀대요?”
“높으신 양반들은 엉덩이 무거운 거 몰라? 그리고! 아마 몸소 나섰더라도 못 잡았을 거야.”
“왜요?”
“강했거든. 그것도 엄청나게. 정확한 명칭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혈전쟁’으로…….”
“고혈전쟁?”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 일단 들어. 아무튼, 고혈전쟁으로 혈귀가 패망하고 나서 투항한 잔당들의 말에 의하면, 위성령은 본인이 죽인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서 종처럼 부렸다고 해. 상대가 생전에 자주 쓰던 무기를 고스란히 복사해 조종하는데, 평범한 이들은 힘도 못 쓰고 쓰러졌다고 하니 어마어마했겠지. 더구나 굉장히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었어.”
“특이한 능력이라면…”
“「인두겁」이라 칭해지는 ‘환술’이었지.”
- 인터뷰 ‘놈놈놈 : 종말 시대를 이끌던 인물들에 대하여’ 中 일부 발췌
* * *
“…….”
너무나도 뜬금없는 인물의 출현에 다소 황당한 얼굴로 최위관을 응시했다.
본래.
전쟁터에서 지휘관은 여포류의 맹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두에 서지 않는다.
본인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뭐 그러한 경우가 없다고는 못하지만… 여하튼 사령관을 잃은 군대는 머리를 잃은 몸처럼 판단력의 부재 등의 연유로 무너져버리는 탓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도 일법한 기초 상식을 깨고 왜 여길 온 걸까.
하물며 혈귀와의 전쟁 대응 방안마저도 기본적으로 안전을 중시하는 수성전을 택했던 사람이.
더구나.
‘멈추라니.’
이게 가장 기이한 대목이었다.
내 앞에 있는 적은 신(新) 한국 정부의 소속도, 정부와 협력 중인 단체도 아닌. 되레 저쪽 입장에서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도적떼들의 수장이자 약탈자의 여왕이었다.
따라서.
조용히 접근해 기습을 꾀하거나 합공해도 모자랄 판국에 저리 긴박한 제동이라니.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더더욱 의아해지던 그때.
파직―――!
“……!”
등 뒤.
좌측 하단의 사각지대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번뜩였다.
불현듯 감지된 살의에 반사적으로 전방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쭉 뻗은 왼발을 축으로 반 바퀴를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허벅지를 긋고 지나갔다.
서걱―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이룩한 곽재우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내구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갈라지는 피륙.
다행히 반응이 빨랐던 덕분에 상처는 얕았지만.
간담을 서늘케 한 급습에 나는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과 통증을 젖혀두고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내가 물러난 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이걸 피하네?”
어느새 위치를 옮겨 붉은 선혈이 묻은 식칼을 쥐고서 매우 아쉬운 기색으로 이미 멀리 달아난 나를 쳐다보는 위성령과.
그래.
위성령‘과’.
“이것 참… 내가 별로 도움이 안 됐나 보네.”
괴상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위성령의 곁으로 걸어가는 최위관이었다.
“뭐…지?”
일견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
납득 가능한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그림에 사고 회로가 정지된 듯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아봐도 떠오르는 단어라고는 오직 ‘설마’가 전부.
설마 최위관의 정체가 혈귀에서 심어둔 스파이였던 건가? 설마 정의로운 척 가면을 쓴 빌런이었던 건가?
설마, 설마, 설마…….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되는 추론을 이어가던 차에.
“그러게. 이 근방에선 이거면 꼼짝 못 하고 뒈지던데.”
나지막하게 대꾸한 위성령이 옆에 선 최위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턱―
심장을 누르는 일장.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다음이었다.
스스스스슷―――――!
“……?!”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최위관의 육체가 청소기를 마주한 먼지처럼 와르르 흩어지며 위성령의 손바닥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아.”
거기까지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최위관의 급작스러운 출현에서부터 딴 데 시선이 팔려 생겨난 빈틈을 파고드는 일격과 작금의 장면 모두 위성령이 빚어낸 예술이었다는 점을.
즉.
뭐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로 놀아났다는 소리였다.
“허…….”
이 어이없는 진실에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실로 기가 막혔다.
내 저항 스탯이 몇이던가.
175.
슬슬 2차 한계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당한 수치였거니와.
‘칭호 : 회피의 귀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보안 프로그램이 24시간 내내 정신벽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홀렸다.”
이는 2가지 중 하나였다.
위성령의 농락질이 내 저항력을 까마득하게 뛰어넘었거나.
혼령 자체에 위장이나 변장 같은 연계기를 결합해 상대방의 능력과 상관없이 혼동을 줄 수 있는 기법이거나.
개인적으로는 후자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이에게 내가 밀릴 리 없다는 식의 한심한 자존심 세우기가 아니었다.
단지.
정말로 환술이나 매혹에 걸렸던 거라면 지금쯤.
[강력한 환술에 빠졌습니다.]
[매혹에 의해…….]
이러한 문장이 허공에 개시됐을 것이기에 내린 합리적인 추측이었고.
해서.
“젠장…….”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차라리 직접적인 위해를 입히는 형식이었다면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확보하고 대처법을 강구할 터인데.
저런 종류의 능력은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버텨내야만 했기에.
그야말로 최악의 난이도.
“선공밖에 답이 없겠어.”
들릴 듯 말 듯 하게 욕지거리를 읊조린 나는 선수 필승(先手必勝)이란 만고의 진리를 되뇌며 마력을 풀어냈다.
후우우욱―
쿠웅!
[오리지널 기술 :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
전력으로.
콰과과과과과과광―――――――!!
묵직하게 일보를 내리찍자.
풍랑에 휘청거리는 대해의 풍경을 베낀 듯 나를 중심으로 일거에 쪼개지는 세계.
반경 100m에 달하는 광범위한 급류는.
콰직!
쿠구구궁!
“어, 어?!”
식칼을 고쳐잡던 위성령을 심연의 나락으로 인도했다.
빠져나가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뚜렷한 전조현상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펼쳐진 아수라장에서 탈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사이.
[분영일보]
탁!
나는 연거푸 땅을 밟아 뭉갰다.
[잠들어 있던 그림자가 깨어납니다.]
[당신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는 지정한 대상을 속박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허나.
마력의 지속적인 공급이라는 커다란 단점이 존재해 후속타를 덧붙이려면, 애써 투입한 막대한 에너지가 아깝게도 작동을 중지해야 한다.
인생사 일득일실(一得一失)이리니.
하나를 놓아야 하나를 얻는 법.
그래서 고안해냈다.
포기하더라도, 최대한 늦게 포기하는 방법을.
기껏해야 3초일지언정.
[마력 공급]
[그림자가 ‘마력 공급’을 따라 합니다.]
우우우우우웅!!
유지하고 못하고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하아아아!”
――콰앙!
꾸물거리며 일어난 영체에게 배턴을 넘기며 도약했다.
1초.
굽혔던 무릎의 근력으로 비상해 목표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다.
사아아아아아!!
사아아아아!!
그새 예의 고치화에 성공한 위성령.
거석의 침범은 물론 맞물리고 뒤엉키는 지진의 압력조차 손쉽게 무력화시키는 고치 위로 낙하하는 동안 또 2초가 지나간다.
[그림자가 소멸됩니다.]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가 중지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해제되는 2개의 기술.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종료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천강]
우드드득!
콰득!
등껍질 밖으로 나온 거북이의 살점을 쥐어뜯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끝났…….”
쩌저적―
쩌적―
[1분간 근력이 150%로 상승합니다.]
“…나?”
“그래, 끝이다.”
슈우우우우우욱―――――!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형태 변화]
[일격 태세]
툭―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끄으읍, 흡.”
꿀꺽―
어렵사리 털어 넣는 연분홍빛 물 한 모금.
[‘상급 체력 회복 물약’을 복용합니다.]
[지금부터 5분간 체력 및 자연 재생 효과가…….]
시원한 청량감과 함께 한없이 무거웠던 중력이 서서히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체감됐다.
“후…….”
하루에 두 번.
극히 짧은 텀을 두고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 : 일격 태세’의 반동을 뒤집어쓴 부작용인지 뻐근한 두통이 밀려온다.
그나마.
일타는 ‘회귀’를 포함한 재생기로.
이타는 ‘상급 체력 회복 물약’과 ‘기적의 조각’의 옵션인 ‘안전지대 설치’로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한 덕에 큰 부상 없이 이겨낼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차츰 기력을 되찾은 나는 족쇄를 찬 듯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으로 인해 탄생한 초대형 크레이터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케헥, 흐에엑…….”
참 끈질기게도.
여전히 명줄이 붙어있는 위성령.
다만.
구름 덩어리인가 싶었던 수많은 망령들은 모조리 사라진 채 홀로-.
――슈우우우욱!
[칼리야스의 마력 방패]
카앙!
카가가가각…
“또, 또 막았네… 하윽.”
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방심하면 안 된다는 걸 분명하게 경고하는 여자다.
우우우웅―
퍼어억!
나는 명치 앞쪽에서 막힌 비수를 부숴 없애고는 몸을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위성령.
살려달라는 흔한 절규 대신.
“더 죽여야… 더 죽여야 하는데…….”
제 의지와 관계없이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살인극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신선하다고 해야 할지.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불곰파의 이덕구보다도 한층 강렬한 역함이 도드라지는 악마의 유언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불어.
우주에 감사를 표했다.
‘기적의 조각’을 강탈하는데 아무 거리낌없는 대상을 데려와 줘서.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우우웅!
콰아앙!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 선택〉을 완료했습니다.]
[당신에겐 세 개의 갈림길이 주어졌고, 당신은 그중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 성공하셨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낸 당신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이 10씩 상승합니다.]
[‘기적의 조각 : 2단계’에 「추가 옵션」이 강화됩니다.]
[‘기적의 조각 : 3단계’에 「추가 옵션」이 부여됩니다.]
[〈특수 퀘스트 : 선택〉의 완료로 향후 50일간 동일 퀘스트가 진행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