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나는 허공을 가득 메운 황금빛 문장의 파도를 보며 당혹감 가득한 탄성을 내뱉었다.
“허…….”
굉장히 얼떨떨했다.
여기서 ‘기적의 조각’이 빚어낸 설계된 운명에 휘말리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탓이었다.
도시 국가란 표현이 심심치 않게 나왔던 서울이니만큼.
종말 이후에도 여전한 인구 밀집도를 감안했을 때, 신(新) 한국 정부든 여타 집단이든 뒤엉키다 보면 한두 번쯤은 부대끼게 되리라 예측은 했다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꽤나 당혹스런…….
파직―
“……?”
상념에 매몰되던 와중에 무언가가 내 전신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무척이나 익숙한 전류였다.
내게 날아든 살기를 감지한 육감이 보내는 경고장. 그 저릿한 기운의 근원지를 쫓아 반사적으로 시선을 옮기자.
“…….”
폭음이 빗발치는 지상 한쪽에서 고개를 들어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여자’가 시야에 잡혔다.
대략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쯤 됐을까?
160cm도 안 될듯한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로 인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인이었는데.
뭣보다 특이한 점은 무기였다.
중세 시대 냉병기가 판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손에는 두 자루의 ‘식칼’이 쥐어져 있었으니까.
많고 많은 병기 다 놔두고 하필 식칼이라니.
겨우 음식 재료나 써는 부엌칼로 싸움이 되나 싶었지만, 애당초 맨손으로도 전투하는 판국. ‘고유 능력’이나 ‘기술’ 등으로 상식의 한계를 깨부수는 시대였기에 뭘 쥐든 상관없으리라 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그때였다.
“…음?”
날 향해 뜨거운 살의를 가감 없이 표해내는 여자를 주시하던 나는, 불현듯 그녀의 얼굴이 매우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초면이 명백하거늘.
마치 수십 번도 넘게 만났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 익숙함의 정체는 뭘까. 황당할 정도로 의아한 상황에 점차 혼란스러워지던 가운데.
“위, 위성령이다! ”
옆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두려움’과 ‘공포’라는 감정에 휩싸인 괴성이.
“아……!”
그 발악에 가까운 고함을 전해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위성령」
결코 평범하지 않은 단어가 고막을 지나치자마자 팍하고 한 범죄자의 인형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 * *
위성령.
내가 그 이름에 관해 알게 된 건 현시점으로부터 대강 1년 전.
음주 운전 차량과의 사고로 오른팔을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살다 누나의 도움으로 조금씩 재기해가던 초가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악의 연쇄 살인마, 드디어 잡히다!]
여느 때와 같이 뉴스를 검색하다 보게 된 기삿거리를 통해서였다.
썸네일이라고 하던가.
웹 서퍼들의 어그로를 끌고자 자극적으로 박아 넣은 문구에 홀려 누른 영상 안에서 그녀는 ‘건국 이래 최악의 여성 사이코패스’라는 이명으로 소개되었다.
[그녀는 전국 게스트하우스를 범행 장소로 삼고, 자신의 아담한 체구와 호감 가는 인상을 토대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했습니다.]
[대체로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친밀감이 형성되는 게스트하우스의 특성상 피해자들은 위 씨에게 큰 경계심을 갖지 않았고, 이를 확인한 위 씨는 비성수기를 노려 홀로 여행하는 2인 이하의 여행객만을 찾아 친해진 뒤 술을 먹여 피해자가 잠을 자는 사이에…….]
[무려 열일곱 명의 사망자를 낸 이번 사건은…….]
게스트하우스에 비치된 조리 도구를 이용해 거의 스물에 달하는 인명을 앗아간 사형수.
그런 위성령의 범죄 경력 중에서도 시민들을 특히 경악하게 만든 부분은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는 마지막 살인이었다.
[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의 말에 따르면…….]
[위 씨는 열일곱 번째 희생자 김 모씨를 살해한 직후 대담하게도 함께 술을 마셨던 제삼자인 이 모씨의 지문을 묻히곤 직접 신고한 뒤. 김 모씨와 이 모씨가 술김에 다투다 사고가 벌어졌다는 식으로 거짓 진술을 남겨 자신의 범행을 덮어씌우려는…….]
[이에 대해 위 씨는 ‘그냥 죽이는 게 지루해졌다’라는 답변을…….]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고도 단지 재미를 위해 목격자인 양 사건을 조작했다는.
진정 악마가 따로 없는 모습에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나 또한 충격을 받았었던지라 위성령의 낯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그러한 괴물이 여지껏 살아있는 걸로도 모자라.
“마, 마녀가 저기 있다!!”
“마녀다!”
“주, 죽여어어어!”
「마녀」라는 거창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기적의 조각도, 저 여자가 갖고 있군.”
〈특수 퀘스트 : 선택〉을 발동시킨 장본인도 위성령이었다.
운명으로 묶인 덕분에, 굳이 속을 파헤치지 않아도 상대가 조각의 소유자인지 아닌지 쯤은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래서 위성령도 몰아치는 공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노려보는 거겠지. 거기까지 정리가 된 나는 잠깐의 상념 끝에.
“…내려가야겠어.”
이대로 성벽에 머물 게 아니라 지상으로, 성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근거는 단 한 가지.
《기적의 조각 : 2단계》
- 등급 : 유일+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름 그대로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묘한 ‘마석(魔石)’의 조각이다. 본래는 하나의 차원을 온전히 발아래에 둔 지배자에게 수여되는 보물이나, 이따금씩 해당 조각처럼 주인 잃은 별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
총 ‘여섯 개’를 모아야 진정한 힘을 발휘하나, 단지 조각을 지닌 것만으로도 적잖은 능력을 손에 넣기도 한다.
현재 ‘두 개의 조각’이 융합된 상태이며 〈특수 퀘스트 : 선택〉을 훌륭히 완수함에 따라 「추가 옵션」이 부여되었다.
- 옵션 : 신체 능력치 19% 상승 / 체력 및 마력의 회복 속도 17% 상승 / 모든 속성 저항력 8% 상승 / 양도 불가 / 소유주 사망 시 무작위 전이
- 추가 옵션 : 특수 기능 ‘임시 안전지대’ 생성 가능
옵션 말미에 적혀있는 ‘소유주 사망 시 무작위 전이’라는 패널티.
그러므로.
‘기적의 조각’을 내건 결전엔 〈특수 퀘스트 : 선택〉을 부여받은 이 외에 누구도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조항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 근방에서 싸웠다가 혹여라도 공명심을 탐한 눈먼 공격에 의해 위성령이 죽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참사일지니.
“세정아.”
“네?”
“잠시 다녀올 테니 여길 부탁해.”
나는 한세정에게 곽재우 등의 지휘와 안전을 당부하고서.
타다다닷―
쿠웅!
10m도 넘는 성벽 아래로 훌쩍 육신을 내던졌다.
“오, 오빠?!”
이에 당혹스러워하는 한세정의 외마디 비명이 뒤따랐으나.
고구려 측으로 ‘기적의 조각’에 관한 정보가 흘러 들어갈 것이 염려돼 아무런 얘기도 해줄 수 없었다.
후우우우우욱―
콰아앙!
요란한 소음을 동반하며 착지한 지면.
그와 동시에.
파직!
뿌옇게 치솟은 먼지구름 너머로 전류가 튀었다.
기습이었다.
――――파아아앙!
습격자는 당연히 위성령.
그녀의 식칼 한 자루가 우측하단에서 대각선을 그리며 내 심장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칼리야스의 마력 방패]
우우우웅!
카아앙―
빠르게 장벽을 세워 막자 쨍하게 울려 퍼지는 충돌음.
[풀루스의 돌진]
[가속]
콰직―
콰아아앙!
나는 그 날카로운 검세를 뒤로 하며 좌측으로 내달렸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최대한 조용한 지역으로 끌고 가 온전히 일대일 대결로 ‘기적의 조각’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걸 막아?”
타닷―
콰아앙!
위성령은 별반 의심 없이 쫓아왔다.
내 행동의 의도를 파악했다기보단 그저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눈치였으나, 명목이야 뭐가 됐든 전장에서 분리시켰다는 게 포인트였다.
‘이쯤이면.’
한참을 달려 적당한 공터를 확보한 나는 감각망을 펼쳐 인근이 안전지대임을 체크하고서 걸음을 멈추며 회전했다.
우우우우우웅!
―――――촤아아아악!
발끝을 세워 반전하는 타이밍에 한 쌍의 검격이 전면을 휩쓸며 나를 덮쳤다.
[칼리야스의 마력 방패]
[웨루카의 베어 가르기]
타닷―
후우우욱!
콰앙!
쾅!
검푸른 장막을 생성하며 하나를 소멸시키고, 다른 하나는 참격으로 맞받아치길 무섭게 왼쪽에서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또?! 또 막아?!”
마녀.
확실히 천 단위의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라는건가.
시뻘건 마력을 줄줄 흘려대는 위성령의 실력은 절대 낮지 않았다.
도리어.
몹시 대단했다.
비교하자면 적어도 한세정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한 수 위? 나를 제외하고는 일행 내에서 최선두를 달리는 한세정보다 높은 무력이라니.
“으하!”
후우우우욱―
콰아아앙!
만만히 볼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일기당천]
우득―
우드득―
[‘기술 : 일기당천’의 효과로 5분간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스트랭스]
[가속]
쿠우웅!
―――고오오오오오오!
처음부터 쉬엄쉬엄 대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하더라도 온 힘을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기적의 조각’이 걸린 스테이지였다.
설사 위성령이 도망이라도 쳤다가는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몰랐다.
그러니.
[스트랭스]
[가속]
쿠우웅―
―――고오오오오오오!
“어?”
[괴령화]
우우우웅!
사아아아아아아아아――
[기술 ‘괴령화’가 발동되었습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영혼은 총 「11」 종(種)입니다.]
[끌어내고자 하는 영혼의 파편을 선택해주십시오.]
“오르그.”
딸깍―
[‘오르그의 영혼’이 당신의 전신을 휘감습니다.]
[지금부터 3분 간 기본 공격 및 마력 활용의 위력이 15% 증가하며, 5% 확률로 기술 ‘오르그의 파괴 본능’이 자동 발현됩니다.]
나는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
* * *
고구려의 제3 외성 서문.
“아군이다!”
“성주님께서 오셨다!”
“지원군이다아아아!!!”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던 그곳에 드디어 성주 최위관을 위시한 군대가 집결했다.
혈귀 측에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이라도 쓰려는지.
동문과 남문에도 병력을 보낸 탓에 어느 쪽이 전력인지 알 수 없어 중간에 부대를 나누느라 퍽 줄어든 군세였으나, 외성 수비대는 성주가 왔음에 안심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가 익히 아는 최위관의 능력이라면.
설사 마녀 위성령이 눈앞에 있더라도 베어버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이곳은 제3 외성이다! 석오동 대장의 통솔 하에 움직인다!”
이런 무한한 지지를 받으며 성벽에 올라선 최위관이 제3 외성수비대장인 석오동에게 전권을 일임하던 차였다.
“오, 오빠!!”
어디선가 들린 뾰족한 일성과 더불어.
타닷―
후우우욱!
웬 남성이 장포를 펄럭이며 도약한 것은.
난데없는 장면에 최위관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