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한 명, 두 명.
끊임없이 입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금세 꽉 채워지는 회의실.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는.
끼이이이이익―
쿵!
“오셨습니까. 성주님.”
“다 모였나?”
“외부 근무 중인 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착석했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고구려의 성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안건의 핵심 주제가 바로 「혈귀의 습격」이었으니까.
“제7 타격대 대원이 정보와 더불어 일부 무리를 붙잡아 왔다던가?”
“예. 김창진 대원입니다.”
2m를 가볍게 넘기는 거인의 신장을 가진 최위관의 묵직한 음성에 대답한 부성주 지창수가 어딘가를 가리키자.
척―
기합이 잔뜩 든 자세로 경례를 올린 김창진이 말을 이어받았다.
“약 2시간 전, 금일 치안 점검을 위해 북서부 지역을 수색하던 차에 탐색 담당이던 주영진 대원…이 뭔가를 감지하고 알려왔습니다.”
당시의 아픔이 오버랩되는 듯.
안타깝게 죽어간 동료의 희생에 순간 목이 메었는지 파르르 입술을 떤 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감정을 다스리며 이야기를 지속했다.
“북서부 10시 방향에서 신원 미상의 집단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북서부? 2시간 점이면 남서부 지역을 순찰하고 있어야 할 시간일 텐데?”
“예. 원래대로라면 남서부를 기점으로 순회했어야 하나, 특이사항이 발생했습니다.”
“몬스터로군.”
“맞습니다. 출근 직후 커맨더급을 비롯한 백여 단위의 몬스터 부대를 발견했고, 이를 격퇴하던 과정에서 놓친 몇 마리가 북부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추격을 시도했고, 예외 사항 발발 시의 규정대로 수색 경로를 북부에서 남부로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그 개……! 후, 죄송합니다.”
“괜찮네. 계속하게.”
“예, 혈귀 놈들은 기존의 일정을 예상하여 진입했고, 결국 주영진 대원의 탐지에 발각된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길었던 진술이 끝났다.
대강의 사정을 전달받으며 검지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들기던 성주 최위관은… 이해했다는 뜻으로 주억거리더니.
좌측 상석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파견근무자이자 국왕 직속, 소위 ‘왕실군’이라 불리는 20개 부대 소속 환령의 부대장 황철성이 앉아 있었다.
우리와 함께.
단순한 방문객이라지만, 체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터라 나와 한세정들은 노야의 곁에서 화의를 참관하는 중이었다.
“김창진 대원을 구해준 것도, 혈귀 놈들을 잡아온 것도 황 노야의 지인분들이라고 하던데… 정황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를 응시하며 운을 떼는 최위관.
아무래도 노야의 지인이라는 점 때문인지 어색하게나마 존대하며 묻는 물음에.
스윽―
대표로 나선 한세정이 김장친과의 만남에서부터 단체 포획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간략하게 서술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우연히 마주쳤다… 라던가, 고작 여섯 명이 상처 하나 없이 적군 수십을 붙잡았다는 대목에서 의심 어린 시선이 꽂히기도 했지만.
“―――그렇게 된 거에요.”
무시하고 담담하게 얘기를 마친 그녀.
“침공이 있을 거란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심문했어요. 범죄자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니 좋은 의도로 돌아다니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거든요. 김창진 씨의 의견도 있었으니 후에 여쭤보시면 상세하게 말씀해주실 거에요.”
며칠 전에 내가 백구와의 소동으로 제3 외성 수비대장이었던 석오동과 대담을 나눴던 것처럼 일문일답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최위관은 한 치의 막힘없이 술술 답변해나가는 한세정의 응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하면 됐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사람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 들었으니 다들 본 성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는 확실하게 알아들었을 거다. 빠르면 30분, 선발대가 당했으니 늦어도 1시간 안에 습격이 개시되겠지. 그러니 딱 5분만 논의하겠다. 누구든 직위에 개의치 말고 대응 방안을 제시하도록.”
코앞으로 다가온 결전.
당황할 겨를도, 뭉그적거릴 여유도 없으니.
그럴듯한 대안이 나온다면 그대로 실시하겠다는 최위관의 공언에 곳곳에서 손이 올라왔다.
“김창진 대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적들의 규모는 최소 1천 명입니다. 그 많은 숫자가 무슨 방법으로 24시간, 상공과 지하 50미터까지 감시하는 연결벽을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저희로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외성에 기대 수성하는 식으로 끌고 가서 적병의 수나 핵심 간부들의 포함 여부 등을 확인하고 난 뒤에 반격을 꾀하는 게 옳다고 사료됩니다. 또, 한양과 발해, 신라에 연락을 취하면 4~5시간 내에 아군이 지원을 올 테니 시간은 저희 편입니다. 성주님.”
정론을 논하는 보수파.
“천 명? 고작 그딴 수준에 쫄 거 없습니다! 다섯 개 타격대가 대기 중이고, 성주님과 부성주님은 물론 환령 부대의 노야와 부대원들도 있습니다. 혈귀고 나발이고 죄다 쓸어버리면 될 뿐입니다!”
투쟁을 외치는 급진파.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이 강하게 부딪쳤다.
“…….”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슬쩍 한세정들을 불렀다.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지 의논하고자.
솔직히 말해서.
위험도 알렸고, 대비책도 강구하고 있으니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없었다.
전체가 ‘오리지널 기술’의 보유자임을 감안할 때, 돕는다면 분명 엄청난 신위를 보일 것이다.
애써 흘리지 않아도 될 수백 명의 피를 지켜내겠지.
그러나.
“설령 우리들만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한들,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생긴다면 피하고 싶다. 반드시 참여해야 할 싸움도 아니고, 승리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없으니까.”
황 노야와 백구가 걱정되는 만큼 한세정들도 소중하다.
고로.
누가 뭐라든… 그 인물이 노야라고 해도 참전을 강요할 생각은 없음을 명확하게 밝히던 찰나였다.
“그놈들, 나쁜 놈들이겠죠?”
한동안 조용히 창대를 꼼지락거리던 조이령이 툭 하고 중얼거린 것은.
어째서인지 심경이 복잡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윽고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하, 다른 사람한테 피해 갈까 봐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고 싶었는데… 안 되겠어요…….”
“그럼.”
“네. 저, 가고 싶어요.”
이 전쟁에 뛰어들길 원한다고.
무척이나 갑작스러운 선언이었으나.
“불곰파 같은 악마들이 또 있다고 하니까, 도저히 이대로는 못 가겠어요. 아시잖아요. 제 고유 능력.”
“음.”
이유를 듣고 나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불곰파에 의해 육체와 정신이 모조리 망가졌던 그녀.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다시 일어섰으나.
극복과는 별개로 한번 각인된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 절망 속에서 발아한 악인 혐오감은 기어이 「악의 징벌자」라는 ‘고유 능력’의 탄생으로 연결되기까지 했던 바.
이 강렬한 증오심이.
“두고 먼저 떠나셔도 좋아요. 표식만 남겨주세요. 정리하고 뒤따라갈게요.”
지금의 조이령으로 하여금 창을 들게 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조이령! 그게 무슨 말이야!”
“세정아, 나는-”
“혼자 남는 게 어딨어! 하려면 같이해. 불곰파 같은 놈들이라면 나도 못 참으니까”
“한세정!”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조이령이 겪은 과거는 그녀 혼자만의 과거가 아니었다.
한세정은 똑같은 지옥을 빠져나왔고.
“조철영… 그 자식보다 나쁘다는 거죠? 저도 할게요.”
신지유는 지옥의 입구를 들여다보았다.
이곳이 모인 전원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멍울을 안고 사는 사람들.
기회만, 계기만 주어진다면.
“혼자 남을 일 없다. 나도, 가능하다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 새끼들은 살려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리낌 없이 칼을 빼어들 수 있었다.
“―――해서 제1 외성수비대장의 의견에 따라 수성으로 결정한다.”
우리가 우리 나름의 결단을 내리는 사이.
공표했던 대로 5분 만에 회의는 종결이 났다. 안정 지향적인 태세를 갖추자는 보수파의 목소리가 마음을 흔들였는지, 최위관의 결론은 수정전이었다.
급진파 쪽에서 불만을 표하기도 했으나.
성주의 권위가 상당한 듯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하여.
정해진 전술대로 각 부대의 역할을 나누려던 참이었다.
―――뎅뎅뎅뎅뎅!!!
느닷없이 종소리가 울리고.
타다다다다다닷―
복도를 거칠게 뛰어온 누군가가 회의실 문이 벌컥 열며 소리를 지른 건.
“성주님! 성주님!! 적습입니다!! 서문으로 족히 일천 이상의 적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직 30분은커녕 10분도 흐르지 않았건만 벌써 공격이라니.
허나.
놀랄 틈은 없었다.
“전원! 전원 제3 외성 서문으로 이동한다!”
어물쩍 거리 다간 외성이 박살 난다.
각종 버프와 상점산 아이템으로 강화해두었으나, 천 단위로 밀고 들어오면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마냥 무너져버릴 터.
일단은 가야 했다.
그로 인해 다급하게 움직이는 군중 속.
“우리도 가자.”
“네!”
“네!”
“네!”
“네!”
“네!”
우리도 무장을 점검하며 성벽으로 발을 뻗었다.
기왕이면 보호도 해드릴 겸 어르신과 같이 행동하고 싶었으나, 그분꼐서는 따로 지휘할 부대가 있는지라.
서로 안녕을 고하며 헤어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막고자 ‘흔들바람’을 붙여뒀으니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제3 외성의 서문은.
후우우우우욱―
콰아아앙!!
콰앙!
“끄아아아아악!!”
“뭣들아! 방패들어!”
“대체 우리쪽은 언제 오는 건데!!!”
그새 시작된 공성으로 아비규환을 방불케했다.
속전속결.
고구려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전에 승패를 보려함인지 파상공세로 성채를 공략하는 혈귀.
늑장부렸다간 와장창 뚫려버릴 전세에 우린 지체않고 성벽으로 뛰어올라 창칼을 뽑았다.
다만.
“...아.”
한세정들과 다르게 나는 주먹을 내지르지 못했다.
눈앞에.
[축하합니다!]
[「기적의 조각」이 설계한 ‘운명의 고리’가 실현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수 퀘스트 : 선택’이 부여됩니다.]
《특수 퀘스트 : 선택》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기적」을 실현케 하는 마석(魔石)의 그 신묘하고 기괴한 힘은 결코 조각이라고 하여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섯 개의 조각으로 나뉘었기에 때때로 더욱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의 고리’라고 명명했습니다.
본래 하나였으나 여섯 개의 조각으로 분리된 마석(魔石)이 다시 하나가 되고자 각 조각을 소유한 자들의 운명을 직접 비틀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현재 ‘또 다른 소유자’와 대면하게 된 것처럼.
따라서 이제 당신이 결정할 것은 세 가지뿐입니다. 상대의 조각을 빼앗거나, 상대에게 빼앗기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치거나. 다만 명심하십시오. 한번 맺어진 고리가 풀리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는 걸.
└본 퀘스트 진행 시 ‘양도 불가’ 금제가 일시 해제됩니다.
└퀘스트 결과에 따라 ‘보상’의 지급 및 수준이 달라집니다.
└‘도주’ 선택 시 상대로부터 ‘10km’ 이상 떨어져야 하며, ‘24시간’ 이상 발각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상대와 거리 : 0km 67m
└현재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난 시간 : 0시간 0분 0초
└도망 성공 시 동일 대상과는 100일간 ‘선택’ 퀘스트가 발동되지 않는다.
└어떤 선택지든 결과 발표 후 ‘선택’ 퀘스트는 50일간 발동되지 않는다.
오래전에 보았던 메시지가 출력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