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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98화 (197/232)

198화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0일 20시간 00분 59초]

“짐은.”

“다 챙겼습니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셔서 식량도 넉넉하게 확보했으니, 한동안 그쪽은 무리 없을 듯합니다.”

“잘됐네. 그럼 가자.”

“예.”

다시 낮과 밤이 지난 아침.

굳어있던 육체를 풀어줄 겸 기력 회복을 위해 하루를 더 머무른 우린 소화에 방해되지 않게끔 적당히 허기를 달래곤, 장비와 보급을 챙겨 ‘정식 신분증’이 발행된 사람들만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 입구에 모였다.

“이제 가려는가.”

“컹!”

숙박비를 지불하며 로비로 나오니 어딜 잠깐 다녀오신다던 황 노야께서 백구와 나란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예, 예상치 못하게 나흘이나 보냈으니 늦었습니다.”

“의사에게 검진이라도 받아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나?”

“물약도 마셨고, 재우에게 회복도 받아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어르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일반인이 아니라는 거.”

“흐음. 그런가.”

“아마 통상적인 의학으로는 진단이 불가능할 겁니다. 제 특이한 몸뚱어리는.”

나는 우려를 표하는 노야께 옅은 미소로 안심시키고는 백구에게도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스윽―

스윽―

“헥헥헥헥.”

“어르신 잘 지켜드려라.”

“컹!”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녕을 고하는 내게 활기차게 화답하는 녀석.

혀를 내밀고 웃어주는 백구를 바라보다 뒤로 쏟을 뻗자, 곽재우가 미리 빼두었던 ‘스랄레오 냉동육’ 묶음을 넘겨줬다.

족히 3kg은 될법한 양.

키메라화되며 식성이 잡식성으로 바뀌어버린 하얀 수호자에게 바치는 우리의 선물이었다.

덩치를 보아 한 끼 식사거리로 그치겠지만.

이 근방에서 보지 못하는 종(種)이라고 하니 특식 내지는 별미로 취급되리라.

“컹! 컹!”

녀석도 만족스러운지.

당장에라도 먹고 싶은 듯 고기 묶은 끈을 물고 침을 뚝뚝 흘려댄다.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던 차에.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지.”

흐뭇한 표정으로 서 계시던 노야께선 한마디를 하시고는 근처 의자에 올려두셨던 보자기를 푸셨다.

파란 천 안쪽에는 두툼한 책자와 고풍스러운 느낌의 상자가 놓여있었다.

“받게.”

“……?”

이게 뭘까.

의아한 기색으로 갸웃거리는 내게 친절히 설명해주시는 노야.

“자네 손에 든 책은 신한국 정부의 주요 시설이나 부대에 관한 정보를 적어둔 일종의 자료 서적이네. 일부는 일찍이 완성한 것들이다만, 나머지는 원체 급히 집필하느라 필체도 엉망이고 군데군데 부족한 곳도 있을 게야. 그래도 나름 정성을 다했으니 유용할걸세.”

“나름이라뇨.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허허, 크게 신뢰하지는 말게. 그리고 그 상자는 보약일세.”

“보약, 이요……?”

“열어보게.”

철컥―

노야의 손짓에 이끌려 살포시 개봉한 박스.

톱니바퀴 형태의 뚜껑을 회전시키자.

500원짜리 크기의 검은색 알약 아홉 개가 시야에 잡혔다.

《기억의 조각 : 제작자_성희원》

- 등급 : 특별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뇌 활동, 특히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에 효과가 뛰어난 약재들을 모아 제조한 단약입니다. 1일 1알씩 적어도 5일 이상 장기복용할 경우 기억 능력이 호전 및 향상되어 ‘더 많은 것을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단, 효능이 좋은 만큼 내성도 빠르게 생기는 약품이기에 9회 이후부터는 별다른 효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 옵션 : 복용 시 영구적으로 기억 능력 향상(최소 다섯 개에서 최대 아홉 개)

한약처럼 보이던 이것의 정체는 소모성 아이템.

그것도.

예전에 한세정이 만들었던 ‘손수 제작한 대단한 마비 치료제’와 동일한, 내게 최적화된 개인 제약형 약품이었다.

“이건…….”

“인원이 적으면 기동력과 단합력에 장점이 있지. 반면 규모가 커지면 이런 장점이 있네. 성의원이라고 내 잘 아는 약제사일세. 한양으로 가던 중에 만난 이인데, 드센 성격 탓에 조금 무서워 보여도 실은 여린 친구지. 평소에는 일이 워낙 바빠 얼굴 보기도 힘든 편이라 연이 닿으면 소개해주겠네.”

별것 아니었다는 투로 얘기하는 노야의 말.

참…….

항상 주는 것 몇 배 이상으로 받아가는 듯해 코끝이 시큰거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약제사님에게도 꼭 인사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르신.”

나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은(感恩)을 표하곤 훌쩍 발을 돌렸다.

만남은 길게, 이빨은 짧게.

노야와의 이별은 언제나와 같이 간략하게 이루어졌다.

* * *

“정지. 바깥출입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저쪽 줄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훗날 꼭 보자는 작별사를 뒤로 하고.

북쪽보다는 서쪽으로 나가 대각선 경로를 잡는 게 좋을 거라는 노야의 조언에 따라 도착한 제3 외성의 서문.

우리 말고도 오가는 이가 꽤 많은지, 커다란 성문 옆에 나 있는 3m 높이의 보행자용 쪽문 주위로 길게 늘어선 라인이 보인다.

개중.

유난히 도드라지는 건.

“와, 저건 말 대용인가 봐요.”

“외형은 말인데… 뿔도 달려 있고, 발톱도 날카로운 걸로 봐선 괴물인가 보네.”

“그러게. 신기하다.”

한세정과 조이령의 대화에서 알려주듯이 2m가량 되는 몸집의 ‘괴마(怪馬)’였다.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이래저래 갖다 붙인 키메라라기보다는 인간에게 길들여진 외계 생명체로 추정됐다. 괴물을 교요하는 방법이야 다양했다.

보통 손쉽게 접하는 방식은… 상점에서 판매하는 ‘기술서 : 테이밍’.

2등급 근원석 스무 개면 구입할 수 있는 물건으로, 원본(原本)급만 돼도 나이트급 개체까지 교련 가능했다.

“지배 스탯이 없거나 낮으면 길들여도 제어가 잘 안되거나 대량 통제가 불가하다길래 포기했는데… 저렇게 보니까 또 끌리네.”

“역시, 기사에겐 말이 필수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도 한 마리 뽑아볼까? 영화 보면 다 말 타고 다니더라.”

두 여인의 재잘대는 담소를 배경음악인 양 들으며 대기하길 20분여.

마침내.

“다음!”

우리 차례가 되었다.

“신분증 꺼내주시고… 대표자신가요?”

“예.”

“그럼 이쪽으로 오셔서 서명하시고, 명부와 출성 사유 적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출성 심사대…라고 해야 하나?

여하간.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종이 속 빈칸을 쭉 채워나간다.

수비대원은 내가 작성한 용지를 대강 훑어보더니.

“황 노야의 손자에게 배달이라. 배달 물품을 봐도 되겠습니까?”

꾸우우욱―

여권에 도장을 찍듯.

제3 외성 수비대장 석오동의 직인을 남기며 내게서 명분용으로 챙겨온 주머니를 받아갔다.

그 안에는.

원래 들어있던 돌멩이를 뺀.

“근원석에 하급 체력 물약 2병… 편지?”

좀더 현실성 있는 품목들로 대체한 내용물이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조손간의 안부일 테니 그건 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쩝, 알겠습니다. 가져가시죠.”

목적이 그럴싸해서인지.

노야의 직급이 국왕 직속 20개 부대 ‘환령’의 부대장이라서 그런 것인지 검문은 무탈하게 마무리됐다. 나는 가봐도 좋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수비대원에게 까딱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한세정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섰다.

누워있는 동안 퍽 따듯해진 세상.

제 색을 찾은 도심의 풍경이 우릴 반긴다.

펄럭―

“저 방향입니다.”

그 위에 발을 올린 우리는 첫 여정을 떠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지도를 손에 쥔 곽재우와 ‘광역 탐색’을 발동한 신지운이 선두로 북상을 시작했다.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재우 형. 치안 담당 부대가 활동한다고 하더니, 확실히 이 부근은 괴물들이 적네요. 한강을 넘을 때만 하더라도 지옥이었는데 딴 판이네요.”

신지운의 말대로 바깥은 조용했다.

책에 나온 정보에 따르면.

대략 1km는 거주 구역으로 써도 좋을 만큼 안전했고, 맥시멈 3km로도 대체로 저위험 지대라고 한다. 사흘을 주기로 치안 전문 사냥대를 파견하고 있거니와, 결정적으로 이 주변 던전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다만.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나 발해 등 사성(四城)을 건축하던 때에 최우선적으로 요구됐던 항목이 ‘던전과의 접근성’이었다고 하니 그리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그 덕에.

북진은 무난하게 이어졌다…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쿠웅!

“…음?”

잠잠하던 찰나에 느닷없이 폭음이 고막을 두들겼다.

간격이 제법 되는지.

음량이 진동 수준이라 상대적으로 감각 능력이 특출난 나 외에는 듣지 못한 듯 무덤덤하게 전진하는 한세정들.

하여.

“정지.”

“……?”

“……?”

“……?”

“……?”

“……?”

직접 일행을 멈춰 세우는 사이.

――――쿠웅!

―――쿵!

연달아 두어번의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헌데 분명 거리감이 있었던 소음이 금세 가까워져 있었다.

아니.

가까워‘지고’있었다.

300m에서 200m.

―――쾅!

200m에서 100m.

――콰광!!!

100m에서 50m.

콰과과과광!!

“방진!”

점차 접근해오는 미지의 사건에 반사적으로 무기를 꼬나쥐며 방어 태세를 갖춘 순간.

“…이럇!”

“키히히히히힝!!”

투두두두두두!

아까 보았던 괴마의 고삐를 움켜쥔 남자와.

“잡아!”

“놓치면 끝장이다!”

“죽여어어어!!”

그를 뒤쫓은 추격자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난데없는 등장에 한세정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어찌하겠느냐는.

명령을 내려달라는 눈빛이었다.

“음…….”

나는 어느새 팔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근접해온 남자를 응시하며 짤막한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돕는 게 옳은가, 돕지 않는 게 옳은가.

차라 괴물 대 인간이었다면 선택은 단순했을 거다.

퀸급 개체가 떼거리로 몰려와 한세정들에게도 위협이 되는 특이한 환경을 제외하고는, 우리 실력으론 어지간하면 감당이 될 터이니 그냥 때려죽이면 되니까.

하지만.

인간 대 인간은 다르다.

개인 간의 욕구나 감정, 집단 간의 자존심과 정의 등 갖가지 요인으로 인해 선과 악을 구분 짓기가 상당히 모호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이곳은 신(新) 한국의 권역.

의협심이든 동정이든 괜히 개입했다가 일이 커져 황 노야와 유신이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심적으로나 관계상으로나 깔끔하게 무시하는 편이 좋다만…….

‘문제는… 저 남자가 어르신과 친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겠지.’

쯧.

이러기도, 저러기도 마땅치 않은 형편이라 골머리가 아파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찬 나는 심사숙고 끝에 지시를 내렸다.

“…곽재우.”

“예.”

“가서 구해와.”

“알겠습니다.”

내 판단은 개입이었다.

물론.

한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아무도 죽거나 다쳐선 안 된다.”

무혈 구원(無血 救援).

내가 염려하는 가능성은 추격자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같이 다녀올게요. 이령이랑 지운이는 좌우 경계하고, 지유는 서포트. 여차하면 지원 나와줘.”

“오케이.”

“넵!”

“네, 언니. 조심하세요.”

“가요, 재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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