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따로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다.
조손지간이었고.
고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였기에 으레 같이 있으리라 여겼거늘.
“음…….”
어르신만큼이나 보고 싶었던 유신이와의 만남이 틀어졌다는 즉답에 침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한세정들도 비슷한 기분인지.
관계상 무덤덤한 신씨 남매를 제외하고는 다들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허허, 이거 미안하군.”
어르신은 못내 아쉬워하는 우리를 보며 제 잘못이 아님에도 겸연쩍게 웃으셨다.
하여.
유신이에 관한 담소는 훗날로 미뤄두고 금방 주제를 바꿨다.
안 되는 걸 굳이 언급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나저나,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노야께서도 그편이 낫다고 여긴 듯.
기꺼운 말투로 내 질문에 답했는데,
“나 말인가? 자네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나, 나도 손주도 제법 고생을 좀 했네. 허허…….”
운을 떼는 입꼬리에 험난했던 시절의 감정이 뚝뚝 묻어나왔다.
우리도 우리였지만.
노손의 행보도 딱히 편치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 * *
앞서 나왔던 차가 완전히 식고, 다시금 데운 찻잔도 바닥을 드러낼 즈음.
“…해서 이리된 게지.”
“험난했군요.”
길었던 노야의 구연이 막을 내렸다.
대략 30여 분에 걸쳤던 전문에서 제일 중요했던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인원’이었다.
정성훈 하사와 착호 부대 내의 시설에 합류하던 날을 기점으로 대장인 김유걸 중사의 의견 아래 모여있던 민간인들과 신(新) 한국 정부의 수도 한양으로 여정을 나섰던 길이나.
여러 난관을 뚫고 힘겹게 목적지에 다다른 이후 수천 명의 군집체가 성벽을 쌓고 합심해서 ‘절망의 파도’를 헤쳐 나가던 칠 주야의 승전 등.
대체로 높아진 인구 밀집도에 반응한 괴물들에 의해 맞이한 위기를 극복하는 반복의 연속이기 때문이었다.
소수정예로 활동하는 우리로서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기에 꽤나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단 한 가지.
“그땐 진심으로 죽는 줄 알았네. 천 단위, 만 단위를 넘어 기어코 한 번에 백만 마리 가까이 떠밀려왔으니.”
“끔찍했겠습니다.”
“끔찍하다마다, 먼저 간 마누라와 아들 내외가 눈앞에 아른거렸네. 필시… 성십자가 클랜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자네와 이리 대화하는 미래도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허허허.”
“성십자가… 클랜이요?”
이 이름만 뺀다면.
“아, 자네들에겐 생소하겠군. 실력이 아주 대단한 이들이었지. 고작 백여 명에 불과한 숫자로 능히 수십 배에 달하는 괴물들을 베어버렸으니 말일세.”
“…그렇습니까?”
“한 명, 한 명이 초인이었네. 특히 마스터라고 불리는 자는 가히 압권이었지. 성문이 부서지려던 찰나에 홀로 커맨더급 개체들 틈바구니로 파고들어 검을 휘두르던 장면은 영영 잊히지 않을 걸세. 자네들도 봤다면 감명 깊었을 거야.”
무지한 척 경청해 보는 성십자가 클랜에 대한 어르신의 호감도는 최상.
어찌나 긍정적인지.
감탄해 마지않는 평가에는 언뜻 애정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 열렬한 찬사에.
‘…말하지 않길 잘했군.’
분쟁이 있었단 점을.
그것도 누구 한쪽이 죽을 뻔한 사생결단이었다는 것을 숨겨서 다행이라는 상념이 강하게 들었다.
괜히 주절거렸으면.
난처하다 못해 심각해졌을 테니.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친분을 쌓아보게. 무너져버린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나마 빛을 쫓는 이들이니, 자네들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게야.”
“알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눈치채지 못하게.
되도록 밝은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된 대담.
그 뒤로는 간단하게 식사 시간을 가졌다.
신(新) 한국 국왕의 직속 부대이자, 부대장 직급에 올라선 어르신이 받는 배급은 비교적 훌륭했다.
“김치? 이거 김치 맞지?!”
“맞, 맞네……. 와, 김치를 보게 되다니. 지운아, 너 나이 때는 김치 안 좋아하지? 누나 줘, 누나가 먹을게. 음식 남기면 벌 받잖아.”
“씁! 누나, 저 홍어도 먹는 남자에요.”
“언니, 제거 드세요. 전 매운 음식을 잘못 먹어서요.”
한세정들을 호들갑 떨게 한 김치를 비롯해 고기 한 종에 채소 세 종, 갓 지어진 쌀밥과 된장찌개까지.
“이렇게 해서 1등급 근원석 서른 개란 말씀이시죠?”
“그렇네. 양도 넉넉하고, 찬도 다양해서 많이들 찾는 편일세.”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만 하는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절대 나쁘지 않은 밥상이었다.
영양소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인의 니즈를 정확하게 꿰뚫는 식단이었으니까.
그 덕택에.
나도, 한세정들도 오랜만에 지겨운 스랄레오 고기와 렌티아 열매를 내려놓고 한식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었다.
가식 한 점 없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도시락으로 대량 매입하고 싶은 수준.
탁―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아!”
“정말, 정말로 잘 먹었습니다. 어르신!”
“허허, 맛있게 먹어줬다니 내가 다 고맙네.”
중간에 새 식판을 가져와 욱여넣다시피 하며 배를 채운 점심.
느긋하게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나와 곽재우는 어르신과 유신이에게 줄 ‘선물 상자’를 제작했다.
“형님, 여깄습니다.”
“개수는?”
“근원 수정 다섯 개에 4등급 근원석 열 개, 3등급 근원석과 2등급 근원석 각기 오십 개씩에 금색 교환권 세 장입니다.”
“좋아. 수고했어.”
“끈을 리본으로 묶어 표시해뒀으니, 가져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조차 단숨에 체질 개선에 이르게 할 정도로 푸짐하게 준비해 불룩해진 가방을 어르신의 침상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이불을 덮으니 영락없이 베개처럼 보이는 형상.
[어르신과 유신이에게 보내는 저희의 작은 보답입니다. - 황수현 일동]
짤막하게 작성한 쪽지를 끼워 넣고서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한풍이 불어오는 바깥에선.
“손!”
“컹!”
“코!”
“컹!”
“빵야!”
털썩―
“와… 백구 너 엄청 똑똑하구나?”
한세정들이 백구의 재롱을 구경하는 와중이었다.
키메라가 되면서 지능이 극도로 향상된 녀석은 어떤 요청이든 척척 해내며 아량을 떨었는데.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래서, 언제쯤 떠날 예정인가.”
슬그머니 걸어와 묻는 노야.
아까.
한양 인근까지 갈 계획임을 밝혔던지라, 이르면 오늘 중에도 떠날 수 있음을 알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늦어도 내일 안에는 북상할 생각입니다.”
“내일이라…….”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어르신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끄트머리에 제3 외성 수비대장 석오동의 직인이 새겨져 있는.
“받게, 정식 신분증일세.”
「정식 신분증」 다발이었다.
《신(新) 한국 신분증 : 정식》
- 이름 / 나이 / 성별 : 황수현 / 28 / 남자
- 고유 능력 : 괴물화
- 무장 : 박투
- 본 신분증의 소지자는 한양을 포함한 각 성의 ‘외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 보증인 : 환령부대 부대장 황철성 인
- 제 3 외성수비대장 석오동 인
임시 꼬리표가 사라진 새로운 신분증은 ‘보증인’이라는 단락이 늘어남과 더불어 ‘신고 하에’라는 글귀가 삭제된 상태였다.
“외성에 한해서지만, 어느 검문소도 무리 없이 통과시켜줄걸세.”
우리가 편히 이동하게끔.
밥 먹고 난 잠깐 사이에 미리 발행해 온 모양이었다.
“아…….”
어르신은 감탄사를 토해내는 내게 씩 웃어주시며 또 한 가지를 건네주셨다.
달그락―
달그락―
흔들릴 때마다 돌덩어리 부딪치는 소음이 울려 퍼지는 주머니.
슬쩍 내부를 살펴보자.
안쪽엔 1~2등급으로 추정되는 근원석 몇 개 아래로 진짜 돌멩이가 수북하게 쌓인 주머니였다.
“누가 묻거든, 그걸 보여주며 내게 부탁받아 한양에 있는 손주 녀석에서 용돈을 전해주러 간다 말하게. 정식 신분증이 있으니 과도한 검사는 없을 게야.”
‘아아…….’
이 주머니의 정체는 일종의 ‘명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외성을 빠져나간다면 누구라도 의심할 터이니, 적절한 구실을 손에 쥐여 준 것이다.
“…….”
나는 연달아 받아든 두 개의 은혜에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보답하러 왔건만.
어찌 아셨는지 더 깊은 신세를 지게 만드신다.
참.
인생에 다시 없을 은인이셨다.
* * *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4일 19시간 59분 59초]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새벽 훈련을 하고 깔끔하게 샤워까지 끝낸 나는 신체 보관함에서 ‘이나고르트의 눈알’을 꺼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프레데터의 상위 진화론]
우우우우우웅―
주문에 맞춰 꿈틀거리는 마력.
‘정신 신분증’을 갖게 되면서 금제를 가하던 팔찌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 터라 기술 사용에 문제는 없었다.
[‘기술 : 프레데터의 상위 진화론’을 발동합니다.]
[진화에 사용될 제물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이룩할 진화 과정을 선택해 주십시오.]
“흡수 이식.”
[「흡수 이식」을 선택하셨습니다. ]
[흡수할 신체 부위를 선택해 주십시오.]
“눈.”
[대상 「이나고르트 : 2등급」의 ‘안구’를 선택하셨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신체 최적화’가 자동 진행됩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마침 쿨타임도 다 되었겠다.
노야께서 꾸며주신 명분에 힘을 더할 겸해서 일부러 하루를 추가로 머물렀던 덕에 바로 이식할 수 있게 된 안구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마력과 뒤엉킨다.
곧 통증이 뒤따랐고.
“크읍……!”
우득―
우드드득―
[축하합니다!]
[「이나고르트 : 2등급」의 ‘안구’ 이식에 성공했습니다.]
[대상 「이나고르트 : 2등급」이 보유 중이던 신체 능력 일부가 전이되었습니다.]
[「인간성」 15%를 소모합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박살 났다가 회복되며 어두워졌던 세상에 빛이 반짝였다.
“으음, 흡, 후…….”
나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소멸되는 통증을 떨쳐내며 눈을 깜빡였다.
인간의 우안과 괴물의 좌안.
과연 두 종(種)의 차이는 얼마나 날 것인가.
호기심을 가득 품고 위쪽을 노려봤다.
석재와 목재가 멋들어지게 결합된 객실 천장에는 크기가 다른 숫자와 단어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격차를 완벽하게 체크해보고자 직접 써놓은 내 나름의 시력 검사표였다.
[3-ㄴ-8-c-5-d…]
“일단 우안으로는 삼, 니은, 팔, 씨, 오, 디…까지만 보이네.”
원래도 감각이 좋은 편임을 고려해 깨알같이 적어놓은 탓인지.
절반쯤에서 멈추는 중얼거림.
이에.
슬며시 오른쪽을 감고 왼쪽으로만 허공을 노려보자.
[…1-t-n-ㄷ-ㅎ-z]
“일, 티, 앤, 디귿, 히읗, 제트. 호…….”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읽혀나가는 뒷자리.
역시였다.
“족히 3배.”
조류의 시야로 마주한 세계는 인간으로선 넘볼 수 없는 간극의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