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흔히 ‘쌀의 민족’이라 불렸던 대한민국.
어딜 가든 논이 보였고, 벼가 자라 황금빛을 그려냈다.
허나.
막상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던 10월.
차원의 벽을 찢고 강림한 수십억 마리의 괴물들로 인해 전 세계가 초토화되며 목숨이 수확 당하지 않게 도망다녀야 했다.
그러는 동안 토지는 박살 났고.
심지어 〈 던전 〉, 즉 외계 생태계의 지구 감염화 작업이 확산한데다가 대설의 반복되는 혹한기가 겹치며…모두가 아는 대로 농경 사회는 철저하게 말살당했다.
그랬는데.
“저거 벼 아냐……?”
“오른쪽! 오른쪽은 과수원인데? 사과에, 배에, 이야…….”
“멀긴 하지만 밭도 보입니다.”
적어도 수천 평.
초목의 정령을 다루게 되면서 「재배」라는 농업 전용 특성을 얻게 된 신지유와 같은 능력자를 몇십 단위로 보유하고 있는지.
제3 외성은 어딜 둘러봐도 논밭이었다.
아마 주거 단지나 여타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전부 경작지인 듯했다.
“왜 도적 떼들이 한국 정부를 노리는지 알겠네요…….”
광활한 농지에 소나 돼지를 필두로 한 목축업까지.
욕망에 미친 놈들에게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이리라.
이래저래 감상평을 내놓던 차에.
“―――커헝!”
느닷없이 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흔한 농담이나 욕지거리가 아닌.
“컹! 커헝!”
진정 개가 짖어 대는 하울링이었다.
백구였다.
“커허어엉!”
타다다닷―
녀석이, 목청이 터져라 포효하며 근육으로 뒤덮인 다리를 앞세워 성벽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유?
뻔했다.
“저희…쪽으로 오는 거 맞죠?”
우리였다.
며칠 내내 한 집에서 뒹굴며 각인된 냄새가 백구의 코를 자극해 벌어진 사단이었다. 무려 유일 등급의 위장용 아이템 ‘눈을 속이는 자’도 이런 상황에서는 무용했다.
《눈을 속이는 자》
- 등급 : 유일
- 분류 : 장신구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순위 발표식에서 누구보다 높은 성적을 기록한 당신에게 지급된 귀중한 팔찌입니다.
‘눈을 속이는 자’라는 명칭에 걸맞게 타인에게 비춰지는 형상을 착용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 보여 주며, 여러 ‘추적’류 기술을 방해하는 는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 옵션 : 착용 시 원본(原本) 등급 지속형 기술 ‘위장’ 발동 / 착용 시 원본(原本) 등급 지속형 기술 ‘추적 금지’ 발동 / 모든 능력치 5% 상승 / 체력 및 마력 회복 속도 5% 상승 / 피로 누적 속도 9% 감소
*지속형 기술―위장 : 1회에 한하여 외형 설정이 가능하다. 동일 등급 이상의 ‘간파’류 기술 및 아이템으로 강제 해제될 수 있으며, 또한 ‘행위 : 전투’ 시에도 효력이 일시 정지된다.
*지속형 기술―추적 금지 : 착용자를 대상으로 한 ‘추적’류 기술 및 아이템 등이 사본(寫本) 등급일 경우 원천 차단하며, 동일 등급일 시에는 추적 효과를 절반으로 감소시킨다.
뭔가 기술이나 아이템을 써서 파악했다면 모를까.
단순한 후각.
인간의 100만 배 이상, 키메라로 진화하며 더더욱 강화된 후각으로 알아낸 사실이었기에 ‘눈을 속이는 자’로도 막아내지 못한 듯싶었다.
또는 백구의 탐지 능력이 원본(原本) 급에 도달했거나 그보다 뛰어나.
‘추적 금지’로 감각이 흐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날 캐치해낸 걸 수도 있다. 더군다나 곁에는 한세정과 조이령, 곽재우도 함께였으니 긴가민가하다가도 확신했을 터.
단지.
“뭐, 뭐야……?”
“괴물이야?!”
“일단 피해!”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지 못하는 수비대원들이나 성문 근처를 거닐던 사람들은 느닷없는 소동에 습격이라도 발생한 건가 놀라 일대에 난리가 났다.
도망치는 이, 무기를 빼 드는 이, 방진을 짜라고 소리치는 이 등등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을 빚어내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커헝! 컹!”
금세 지상을 딛은 백구는 계속해서 질주하더니.
타다다닷―
콰앙!
땅을 박차며 훌쩍 도약해 하늘을 날았다.
5m, 10m, 15m.
대기를 가르며 비상한 녀석은 상당한 체공 시간을 선보이며.
후우우우우욱―
쿠웅!
“커헝!”
모두가 보는 앞에서 딱 내 발치에 멈춰 섰다.
* * *
똑똑―
“대장님, 저 형철입니다.”
“어, 뭐래.”
커달 나무 탁자 하나에 목각의자 너덧 개가 놓여있는 조용한 방 안.
누군가 노크하며 문을 열었다.
외성 수비대의 일원임을 표시하는 검은색 제복을 입은 이는, 동일한 복장이지만 반짝거리는 금색 휘장을 단 남자에게 눈썹 옆에 손가락을 붙이며 절도있게 거수례를 취하곤 방문 목적을 알렸다.
“환령 부대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곧 황 노야께서 이쪽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그래. 가봐.”
“충성.”
군인들처럼 딱딱하고 간결하게 대화를 마친 금색 휘장의 주인은 문이 닫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몸을 돌려 책상에 놓여있던 서류를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스륵―
스륵―
간략한 인적 사항과 사진이 붙어있는.
“이름, 황수현, 나이는 됐고. 그래서, 백구가 달려들었다?”
내 신분증명서였다.
처음부터 2장으로 제작되었는지, 직인 부분을 맞춰보며 진위 여부를 확인하던 그는 이내 귀찮다는 양 종이를 옆으로 치워버리더니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사건이 무척 재밌게 보였는지.
팔짱을 끼며 흥미로운 눈초리로 묻는다.
“예.”
조사는 그렇게 개시됐다.
“목격자들의 진술로는 당신과 백구가 잘 아는 사이 같았다고 하던데, 맞나?”
“예.”
“어떻게?”
“예전에 황 노인께 도움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백구도 그때 봤습니다.”
“정확히 무슨 도움을?”
“죽을 뻔했던 걸 살려주셨습니다. 유신이의 치료 능력이 절 살렸죠.”
“왜 죽을 뻔했나.”
“조폭들한테 붙잡혔었습니다. 식량을 빼앗기고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고.”
일문일답(一問一答).
눈앞의 남자는 최대한 많은 걸 캐내 보려는 의지를 숨김없이 드러냈으나, 나는 진실과 거짓을 요령껏 섞어가며 물음표에 마침표를 찍었다.
여차하면 답변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구태여 ‘고구려’에 입성한 까닭은 오로지 어르신을 뵙기 위함이지,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늘어놓고파서가 아니니까.
그때였다.
“이곳에…….”
똑똑―
“석 대장, 나 황철성일세.”
“……!”
“들어가도 되겠는가.”
제삼자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온 건.
어르신이었다.
어르신께서 오신 것이었다.
“…예, 들어오십시요.”
통칭 황 노야라 불리는 어르신의 등장에 한창 열을 올리던 남자는 퍽 떨떠름한 기색으로 제 팔뚝을 툭툭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열리는 문.
환경 조성 때문인지 어두컴컴하던 조사실의 그림자를 밀어내는 빛줄기 너머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그분이 서 계셨다.
* * *
“자, 마시게. 온기를 북돋아 주고 마음을 다스려주는 차라네. 던전에서 구한 찻잎인데, 먹을 만할 걸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오… 향이 좋은데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넘겨준 노야는 호호 불어가며 차를 들이켜는 한세정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이윽고 눈길을 돌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이제 설명 좀 해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통신기.
‘고주파 신호기’와 유사한 아이템으로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송수신기를 통해, 난데없이 전선을 이탈한 백구가 웬 방문자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들었다…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당시 심정을 토로하는 노야에게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더하며 그간의 사정을 가능한 상세하게 기술했다.
농자재 백화점에 거점을 튼 것을 시작으로, 지유와 지운이가 합류하게 된 경위, ‘이벤트 : 절망의 파도’를 겪었던 일, 체질 개선 및 ‘특수 조건 : ?’의 단서를 구했고, 그 결과로 한양 부근의 던전을 수색해보고자 북상했음을.
성십자가 클랜과의 전쟁, 신(新) 한국 정부에서 파견한 원앙 부대로 인한 위기 등.
어르신의 입장이 곤란해질 만한 쓸데없는 과정은 쏙 뺀 상세한 이야기에 대한 호응은 대단했다.
특히.
“체질? 체질 개선도 했단 말인가?”
“예. 저 말고도 다들 완료했습니다.”
“허허… 놀랍구먼, 놀라워.”
「체질」이 무엇인지 아는 듯 그 대목에서 유난히 신기해했다.
하기야.
일군의 부대장쯤 되는 위치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전원이 3차 환골탈태를 했단 말이지…….”
“어르신께서도 하셨습니까?”
“이거 부끄럽군. 난 아직 못했네.”
“환령 부대의 부대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네. 어쩌다 보니 부대장직을 제의받아 일하고 있지. 그 덕에 2차 환골탈태도 했고. 허나 국왕의 직속 부대만 스물에 각 성마다 자체적인 병력을 양성하는 중이기에 근원석 배정받기가 쉽지 않아 현재는 대장과 주요 인사들 위주로 개선해가고 있는 실정이라네”
흐음.
노야의 대답에 나는 절로 주억거렸다.
돌이켜보면.
일전에 원앙 부대도 금전적으로 매우 쪼들려 했었다.
자살특공대.
애당초 버릴 패로 창설되었던 탓에 그러한 점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차치하고서라도 사금 형편이 원활하지 않음은 명백했다.
‘뭘 드려야 할지 알겠군.’
뭐.
덕분에 나는 어르신께 어떠한 선물을 드려야 할지 감을 잡았다.
근원 수정.
‘던전 : 천둥과 벼락의 폭풍’을 오가며 사냥한 퀸급 이나고르트의 전리품을 내드리면 될 성싶었다.
늘상 해오셨던 듯이 거부하시겠지만.
나 역시 항상 해왔던 것처럼 강제로라도 안겨 드릴 예정이다.
어차피 우리가 가지고 있어봐야 상점용 외엔 부피만 차지하는 쓸데없는 짐 덩어리. 포션 몇 병 구매한 셈 치고 싹 다 내어 드리리라.
참.
유신이 몫도 필요하니 3등급 근원석도 포함시켜야겠다.
전면에 나와계신 어르신께서도 겨우 2차 환골탈태에 머무르시는 걸로 보아 유신이는 훨씬 열악할 게 뻔하다.
‘어쩌면 1차도 달성 못 했을 수도 있겠어.’
호로록―
[‘템페라 잎’를 복용했습니다.]
[30분간 체온이 최상의 상태로 유지됩니다.]
치료 계열은 단연 주요 전력이었으나, 어린 아이기도 하니 의도적으로 배제당했을 확률도 있기 때문.
작금의 시대에 나이 구분이 있겠느냐마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설령.
아니더라도 어르신보다는 스탯이 낮을 테니 무조건적으로 효력을 보리라.
주는 김에 교환권도 몇 장 얹혀서 ‘특성’도 확보케 하고 그리 다짐한 김에 유신이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기억하기로는…….
착호 부대서 친구들을 사귀게 해주겠다고 데려갔었는데.
“유신이도 잘 지내고 있네. 정성훈 하사의 공언대로 본성에 지어진 종합 학교에 다니며 공부도 하고 있고.”
“종합 학교···요?”
“아, 자네들에겐 생경하겠군. 교육에 큰 비중을 두기 어려운 시국이나 보니 의무 교육을 받아야 할 8세에서 16세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 가르치기로 했네. 그게 종합 학교고.”
“그렇군요. 허면 유신이는 본성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아쉽게도 그렇게 됐네. 자네들이 온 걸 알면 좋아할 텐데···”
으음.
듣던 중 안타까운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