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눈을 의심했다.
“백구…요? 그 백구 말씀하시는 거에요?”
혼잣말을 듣고 되묻는 한세정의 질문을 들었을 때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지경.
원인은…….
‘저게 진짜 백구라고?’
고작 몇 달 사이에 내가 알던 과거와 너무 많이 달라진 외형이었다.
헤어질 때만 하더라도 흰색 털 뭉치에 이질적인 다리가 뒤섞인 기형 짐승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마치 「중위 프레데터」의 전용기인 ‘신체 최적화’가 백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 듯.
기존 체구에 비해 극단적으로 비대했던 사족의 비율을 비롯한 육체가 적절한 균형을 갖추게 되며 한 마리의 ‘신종(新種)’이 출현했다 표현해도 무방했으니까.
“허…….”
그 완벽함에 탄성이 새어 나왔다.
뜻밖의 재회가 주는 반가움과 괄목상대한 변화가 가져온 당황스러움이 뒤엉킨 호흡이었다.
정말이지.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늘, 착호 부대를 뒤따라갔던 선택이 신(新) 한국 정부까지 이어진 건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황 노인의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됐다는 점이었다.
“저게 다 몇 마리야……?”
“둘, 넷, 여섯, 여덟, 열… 스물, 어휴…….”
“최소 서른 마리는 넘어 보입니다.”
이러한 내 반응에 급하게 눈꼬리를 좁히는 한세정들의 담소마냥.
백구의 양옆으로 족히 30여 마리의 키메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군집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양각색(各樣各色).
가장 보편적인 사족 보행형부터 새들끼리 결합한 것인지 날개를 세 쌍이나 달고 있는 조류 등 종류도 다양했다.
거리가 멀어 기세만 간신히 느낄 뿐.
녀석들의 능력치가 정확히 어떤지는 측정하기가 힘들었으나.
“저 규모면… 웬만한 군대 안 부럽겠는데요?”
“재우 형이랑 다니면 던전 2인 클리어도 그냥이겠다.”
“에이, 설마.”
“요새 활성화시켜놓고 다친 개체들은 불러서 치료하고 다시 투입하는 식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려나……?”
숫자도 숫자거니와.
거기에 더불어 진정한 의미의 ‘괴수(怪獸)’가 뿜어내는 격렬한 압박감이 자연스레 긴장감을 형성케 했다.
그나저나.
‘백구가 저기 있다면, 황 노인과 유신이도 고구려에서 머무르신다는 걸 텐데…….’
문득.
두 사람이 근방에 있다고 하니, 한 번쯤 들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의 감사를 표해도 부족하지 않은 생명의 은인.
마침 관문도 통과해야 하는 참에 찾아뵙고 은혜를 갚고 가면 어떨까 싶었다.
혼자가 아니기에 한세정들에게 동의를 구해야겠지만 말이다.
“저기.”
하여 운을 떼던 찰나.
“…뵙고 갈까요?”
“…음?”
“황 어르신하고 유신이요. 어차피 돌파해야 할 길이니 유민인 척 적당히 스며들어 가면 어찌어찌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윤 오빠께도 중요한 분들이고, 또 덕분에 오빠와 저희의 인연이 닿게 되었는데 그냥 넘어가기가 좀 그래서요. 헤헤.”
이번에도 내 마음속을 읽은 것인지 한발 앞서 물꼬를 튼 한세정.
말을 마치고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날 보고 슬쩍 윙크하는 걸 봐서는… 내가 뭘 바라고 있는지 눈치챈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일부러 말미에 황 노인의 존재로 우리가 모일 수 있었음을 명시해 가야만 하게끔 분위기를 주도한다.
“…나참.”
피식―
그 과하지 않은 영악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무튼.
한세정의 발언 덕택에 상황은 희망하던 대로 흘러갔다.
“아, 안 그래도 유신이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어르신께도 감사 인사드려야 하고.”
“저도 동감입니다.”
“지운아 너 친구 생기겠다.”
“친구? 에이, 나 이제 고등학생이라니까? 초등학생하고 비교하는 건 실례지.”
“실례는 무슨…….”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스탠스.
그것에 힘입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고, 곧 우리는 ‘고구려’의 성문으로 향했다.
* * *
휘이이이이잉―
펄럭!
바람이 나부끼는 삼족오 깃발을 일직선상에 놓고 걸어가는 길.
난민인 척을 해줘야 하나 싶어 보폭에 다급함을 버무리며 최전방 외성에 다다를 즈음.
[―――정지이이이이!!!]
우리를 멈춰 세우는 남성의 외침이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곳은 신(新) 한국의 동부지부 ‘고구려’입니다. 방문객께서는 속력을 줄여주시고 좌측의 석조 건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곳은 신(新) 한국의 동부지부 ‘고구려’입니다. 방문객께서는 속력을 줄여주시고 석조 건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실 경우 위협 사격없이 공격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넉넉하게 300여 미터는 남아있음에도 이리 또박또박하게 전달되는 걸 감안하면 확성기나 여타 도구가 아닌 기술의 일종으로 보였다.
뭐가 됐든.
우린 인도에 따른다는 표시로 양팔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리곤 속도를 줄이며 안내자가 얘기한 석벽으로 이동했다.
겨울이라서인가.
폭설이 내려도 쉽게 알아보도록 검게 도색된 첨탑.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검은색 제복에 은색 휘장을 단 남자와 부하로 추정되는 남녀 셋이 척척 발을 맞춰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신(新) 한국 동부성 고구려의 제3 외성 수비대 부대장 정원철이라고 합니다.”
허리춤엔 칼 한 자루.
등에는 마름모꼴 방패를 패용하고서 자신의 이름을 멋들어지게 설명하며 우리에게 경례하는 남성.
본인의 신분이 굉장히 자랑스러운지 언뜻 자부심마저 풍기는 통성명에 나도 한 걸음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여기가 한국 정부가 맞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황수현이라고 합니다.”
혹여나 성십자가 클랜과의 연대를 고려했다.
진명(眞名) 드러냈다 사고가 터질까.
가명을 들먹이며 피난민 배용철 일행이 주었던 명분을 그대로 써먹었다.
“근래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해버린 괴물들을 피해 도망치다 이회권 전 대통령께서 안전지대를 세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게 댔습니다.”
생존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구실이라 불신이나 경계심은 없었다.
오히려.
비슷한 경험이 하도 많은 탓에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들. 물론 그게 무조건적인 입장을 뜻하지는 않았다.
“하하, 잘 오셨습니다. 헌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간단한 명부를 작성하고 통행증 발급 및 너덧 개 가량의 절차를 이행해주셔야 합니다.”
살인에 미친 사이코패스를 수장으로 삼는 「혈귀」…라고 했던가?
그 밖에도 외성 안쪽에서 자라고 있는 농작물이나 소, 돼지를 탈취하려는 약탈자들이 호시탐탐 찬스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
제법 꼼꼼하게 설치된 진입 장벽을 하나하나 거쳐야 했다.
“우선 무기는 제게 맡겨주시고요. 방명록 작성하신 분은 서류를 가져오시면…….”
* * *
《신(新) 한국 신분증 : 임시》
- 이름 / 나이 / 성별 : 황수현 / 28 / 남자
- 고유 능력 : 괴물화
- 무장 : 박투
- 본 신분증의 소지자는 한양을 포함한 각 성의 ‘외성’을 ‘신고 하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 제 3 외성수비대장 석오동 인
“여기.”
“아, 예.”
“그리고… 조이정씨?”
“네엡!”
대략 30여 분에 걸쳐 완료된 검사.
코팅은 어디서 했는지.
반명함 사진까지 박혀 빳빳하고 매끈한 패스 포트를 받아드는 내게 수비대원 중 한 사람이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반반씩 칠해진 팔찌를 권했다.
스윽―
“자. 마지막으로 이것만 팔목에 차주시면 됩니다.”
이게 뭐지?
《제약의 팔찌》
- 등급 : 비범
- 분류 : 장신구
- 설명 : 착용자의 신체 능력 및 마력의 사용을 제한하는 기능으로 달리 ‘봉쇄의 구속자’라고도 불리는 팔찌다. 혈액을 떨어뜨려 최초 각인을 이행한 이의 음성에만 반응하며, 주인의 의지 없이 해제가 불가능하다. 단, 해당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착용자에게 반드시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기에 등급이 하향 조정되었다.
- 옵션 : 원본(寫本) 등급 지속형 기술 ‘억제력’ 발동 / 사본(寫本) 등급 지속형 기술 ‘신호 유지’ 발동 / 주인 각인
- 주인 : 석오동
*지속형 기술―억제력 : 신체 능력을 절반으로 감소시키며, 마력 흐름에 제동을 건다.
*지속형 기술―신호 유지 : 강제 파괴 시 ‘주인’에게 위치 정보가 담긴 신호가 발송된다.
“아.”
물건의 정체는 ‘예쁜 수갑’이었다.
어쩐지.
몇 차례의 검증을 치렀다 한들 말뿐인 증명이기에 다소 허술하다 싶었는데, 이걸로 최소한의 신뢰를 채우는 모양이다.
“거부하시거나 추후 불시 검문에서 미착용이 발각되면 즉시 신분증명서가 폐기되고 추방 혹은 즉결 처형됨으로 거부하시려거든 당장 떠나주십시오.”
차가운 말투로 엄포를 놓는 수비대원.
이에.
우린 별 반항 않고 팔뚝을 가져다 댔다.
툭―
철컥!
[‘제약의 팔찌’가 작동되었습니다.]
[신체 능력 저하 및 마력 흐름의 제동이 시작됩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살갗에 닿자 알아서 열도 갇히는 아이템.
홀로그램 형태의 메시지로 출력된 물음에 ‘예’를 터치하자.
[해제 혹은 ‘주인’의 기능 정지 주문이 발효되기 전까지 마력 순환이 정지되며 신체 능력치가 총 수치의 50%로 고정됩니다.]
짧은 경고성 문구를 끝으로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탈력감?
그보다는 무력감에 가까운 기분에 반사적으로 차오르는 팔찌 분쇄 욕구를 억지로 억누르며 오른팔을 내밀어 검열대를 뒤로한 나는 수비대장의 직인이 찍힌 신분증을 품에 잘 접어 넣으며 한세정들을 기다렸다.
“으으… 이거 이상하네요…….”
“아, 한 사흘간 밤새우면서 싸운 거 같네.”
“예상 못했던 독특한 대비책을 강구해 놓았네요.”
“지운아, 괜찮아?”
“안 괜찮아… 물에 빠진 솜처럼 무거워. 누나는?”
“나도…….”
하나둘 통로로 모여드는 한세정들의 얼굴에는 짜증이 한가득이었다.
원체 스탯이 높다 보니.
줄어드는 낙차 폭이 남들에 비해 월등히 심하게 체감됐기 때문이리라. 본디 200에서 100이 되는 것과 300에서 150이 된다는 부분은 건 엄연히 다른 것이나끼.
그나마.
“움직일만 해?”
“스읍, 후. 스읍… 후. 저는 됐어요.”
“저도요.”
“저도…….”
후우우우우욱―
파앙!
팡!
“…됐습니다!”
“저도 거의 됐어요.”
“5번! 신지운 번호 끝!”
적응 훈련이라면 학을 뗄 만큼 익숙해져있는 우리였기에 부담을 금방 떨쳐낼 수 있었고.
꽤나 안정화된 몸으로 드디어 ‘고구려’의 내부로 발을 뻗었다.
그런 우리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풍경은…….
“와…….”
탐스러운 과실이 달린 나무와 꽃을 피워낸 풀의 향기로 물든, 추운 날씨가 아니었다면 늦여름이나 초가을이라 착각할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농작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