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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89화 (188/232)

189화

휘이이이이이이이익―!

이제는 초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2월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란하게 휘몰아치는 북풍한설(北風寒雪).

새벽 나절부터 불어닥친 눈보라는 오전으로 갈수록 더욱 거칠어지더니 요즈음 내린 그 어떤 폭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돼 버렸다.

“으으……. 앞이 하나도 안 보이네.”

선두에서 걷는 신지운의 투덜거림이 증명하듯.

가시거리가 채 1m도 확보되지 않을 지경이었으니까.

‘광역 탐색’ 같은 장거리 탐지 능력이 없었더라면 언제 어떻게 습격당할지 몰라 웬만해서는 피해야 하는 궂은 날씨.

헌데도 굳이 이런 악천후를 헤치며 여정을 떠나는 까닭은 아주 단순했다.

우리가 고생한다면, 그만큼 적도 고생하기 때문.

오늘 당장 신(新)한국 정부와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다만, 그건 이쪽의 희망 사항일 따름이지.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로.

상황이 틀어질 것도 염두에 두고서 움직일 요량이었다. 더군다나 우리가 진출하는 과정은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흔들바람, 바람을 막아. 얼음꽃은 겉에 눈과 얼음을 씌워서 남들이 보기엔 이상하지 않게 해 주고. 청염! 불 좀 키워 줘.”

“누나, 오른쪽 세 시 부근에 뭐 오고 있다.”

“세 시? 알겠어. 암전류. 처리해 줄래?”

파직ㅡ

파지지직!

시야, 추위, 방해꾼 제거 등.

신지유의 소환수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훌륭하게 에스코트해 주고 있던 덕분이었다.

단지.

골칫거리가 있다면.

펄럭―

“재우 씨, 여기서 어디로 가?”

“음……. 저쪽인 것 같습니다.”

“치킨 집 간판 달려있는 곳?”

“예.”

정도윤과 최홍진이 알려 준 경로를 최대한 쫓아가는 중이기는 하나.

온종일 내리는 눈으로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버려 자꾸만 방향감을 상실하는 탓에 지도를 보고 있음에도 길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점.

물론.

못해도 사나흘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보고 있는지라 느릿느릿한 이동 속도에도 그리 불만은 없었다.

“음? 아윤 형! 저쪽에 한 오십 마리는 잡히네요?”

“위치는?”

“열…한 시쯤이요.”

중간중간에 ‘던전 의심 지역’으로 짐작되는 구간을 발견할 때마다 일부러 들러 보는 것도 그래서였다.

일정이 널널하기도 하거니와.

던전이라 함은 현재가 됐든 미래가 됐든 적잖은 도움을 줄 금광과도 같으니, 되도록 많은 장소를 알아 두고자 미심쩍다 싶으면 일일이 들러 확인했다.

위의 이유들도 이유들이지만.

뭣보다.

“열한 시……. 안내해. 가 보자.”

“넵!”

“표식이 있나 없나 잘 살펴봐.”

“이령아. 나랑 같이 가자.”

“저리로 갈까?”

“그러자.”

“그럼 제가 지운이랑 함께 가겠습니다.”

“지유는 보조만 해 줘.”

“네!”

혹시라도 본 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인 ‘황금 마크’를 마주할지도 몰랐기에 빠짐없이 방문하려는 것이었다.

하여.

추후에 헷갈리지 않고 돌아올 수 있게끔 커다란 돌기둥을 표시적으로 세우며 막 세 번째로 길을 틀던 차에.

“아우우우우―!”

“아우우우!!”

“늑대 울음소리?”

왠지 낯익은 하울링이 폭설을 뚫고 들려왔다.

지구의 늑대 종(種)과 상당히 비슷한 포효.

이를 어디서 들어 봤던가.

“…아.”

곰곰이 머릿속을 되짚어 보던 나는 오래된 메모리 속에서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몇 달 전.

곽재우가 갓 능력자가 되어 ‘튜토리얼’을 받던 시점, 하필인지 우연인지 ‘기수 사냥’ 이벤트와의 연동되며 밖을 떠돌지 않고도 기수와 대면하던 그날.

늑대 무리에 둘러싸이던 당시를.

그놈들의 이름이 아마…….

툭―

[축하합니다!]

[〈던전 : 동상의 권역〉에 입장하셨습니다.]

[해당 공간에서 활동하는 동안 〈던전 전용 퀘스트 : 불태워버리다〉가 진행됩니다.]

《던전 : 동상의 권역》

- 이곳은 행성 ‘리고르(Rigor)’의 지배종 「프라구스」의 영역입니다. 하루 열여덟 시간, 1년 526일 내내 몰아치는 냉기(冷氣)에 의해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고 마는 혹한의 감옥으로.

「프라구스」들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전부를 찢어발기고 씹어 삼키며 체내에 한기를 응축시켜 두었다가, 그것을 흡사 포탄마냥 토해 내어 사냥감을 얼려 죽입니다.

그러니 만일 발을 들였다면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방심하는 순간 눈 밖으로 튀어나온 백랑의 이빨이 당신의 목을 물어뜯을 테니.

└던전 입장 시 ‘던전 전용 퀘스트’가 자동 진행됩니다.

└던전 전용 퀘스트 : 불태워 버리다

《던전 전용 퀘스트 : 불태워 버리다》

- 이 퀘스트는 오로지 ‘던전 : 동상의 권역’에서만 진행 가능합니다. 전신에 냉기(冷氣)를 축적하며 성장해 나가는 종족 「프라구스」. 그로 인해 어지간한 불꽃으로는 태워 죽일 수 없는 그들을, 일각에서는 자존심 싸움의 도구로 삼기도 했습니다.

비에 젖은 장작처럼, 아니, 폭우 속의 지푸라기인 양 제아무리 뜨거운 불꽃으로도 범접하지 못하는 살아 있는 빙하를 불살라 보십시오. 그 업적을 달성한 이후로는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니.

└최소 30% 이상의 체력을 ‘화상’으로 감소시켜야 할 것.

└현재 불태운 「프라구스」처치 수 : (0/~)

└나이트 등급 「프라구스」 처치 시 ‘x3’만큼 추가 적용

└커맨더 등급 「프라구스」 처치 시 ‘x5’만큼 추가 적용

└퀸 등급 「프라구스」 처치 시 ‘x10’만큼 추가 적용

“그래, 프라구스였지.”

때마침 등장한 메시지로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하며 질문에 마침표를 찍은 나는 수색을 맡아 좌우로 산개하는 한세정들을 잠시 바라보다.

“우리도 가자.”

“네.”

신지우와 나란히 심층부로 걸었다.

[‘칭호 : 점령하는 자’가 발동합니다.]

[현재 〈던전 : 동상의 권역〉에 존재하는 적의 숫자가 표시됩니다.]

[4등급 : 6]

[3등급 : 629]

[2등급 : 4,211]

[1등급 : 10,283]

[총합 : 15,129]

“제가 오른쪽 위주로 볼게요.”

“그래.”

각자 양쪽을 예의 주시하며 쓸데없는 분쟁을 피해 가며 표식이 있나 없나 집중하길 5분여.

혹여 놓치기라도 할까.

꼼꼼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던 그때.

후우우욱―

콰아앙!

바람을 타고 폭음이 전해졌다.

은은하되 묵직한 소음에 시선을 옮긴 나는 지체 않고 소리 난 지점으로 벌을 뻗었다. 사전에 약속을 정해 두었다.

일(一), 던전 진입 후 10분 안에 퇴장할 것.

이(二), 중도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지점으로 모일 것.

삼(三). 표식이 존재한다면 추가 행동 없이 바로 퇴각할 것.

딱히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그저.

근래 들어 던전이 퀸급 개체들의 놀이터가 되었으니, 쓸데없는 분란을 회피하고자 만든 조항들.

여하간.

정해진 규역에 따라 나와 신지유는 서둘러 진원지로 달렸다.

[풀루스의 돌진]

탓―

콰아앙!

한 발자국에 10여 미터씩.

세계 신기록이라던 100m 9초대의 기록을 가뿐하게 깨트리며 순식간에 좁혀 가는 간극.

쿠우웅―

쿵―

아우우우우우우!!

점차 접근해 갈수록 소음(消音)에서 굉음(轟音)으로 변해 가는 음폭.

급격하게 올라가는 데시벨을 귓등으로 흘리며 이동하자 곧.

“아우우우우우!!”

투우웅―

콰아아아아앙!!

7~8m가량 될 법한 체구와 푸른 눈동자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대형 늑대 한 마리와 그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수백 마리의 하위 프라구스들.

그리고.

“도, 도망가!!”

“빼지 말고 싸워!!”

“으아아아악!!”

“…사람?”

“사람, 인데요……?”

제각기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보여 주며 한 폭의 아수라장을 빚어내고 있는 수십 명의 인간을 목도할 수 있었다.

“지유야, 시야 확보.”

“아, 네!”

[감각 증폭 : 시력]

파아아앗!

정확한 정체 파악을 위하여 동공에 힘을 주며 전방을 응시하니.

금세 확장되는 안력 너머로 사람들의 생김새며, 복장 등이 하나둘 잡히기 시작했다.

개중.

‘장비 수준은… 나쁘지 않다.’

가장 먼저 눈여겨본 것은 무장 상태.

검, 도, 창, 궁 등등등.

두 손에 쥔 무기부터 몸 전체를 덮은 방어구의 질은 매우 괜찮았다.

상세한 옵션이야 실제로 정보창을 열어 봐야겠지만, 나도 그간 여러 아이템을 사고팔고 직접 착용하며 안목이란 걸 갖춘 실정이라.

좋고 나쁨이야 대충 훑어보면 안다.

실력도 마찬가지.

“장비에 비해 능력이 달리는군.”

무구야 어떻게든 자본을 끌어모아 맞춘 모양이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란 격언대로 저들의 움직임은…….

한세정들에 비해 가히 형편없었다.

“둘… 한 명이면 되겠어.”

우리 측에서 누가 나가든.

단 한 명만 나가도 저들을 죄다 때려눕히리란 확신이 들 지경이었으니까.

애초에.

무력이 바탕이 된 조직이었다면 고작 퀸급 개체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하고 빌빌거리는 장면은 안 나왔겠지.

해서 더 의아했다.

“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을까요……?”

“음.”

동일한 물음표를 띄우는 신지유처럼.

자살을 희망하는 미치광이들이 아니고서야 제 분수를 한참이나 상회하는 던전을 공략하려 들진 않을 터.

끝내 살려고 도주하는 걸로 보아 정상적인 범주의 생존자들 같은데.

대체 무슨 연유로 저 난장판을 벌이는 걸까.

“…같은 처지인가?”

퀘스천 마크가 솟구친 직후 뇌리가 번뜩이며 저들의 신부에 대한 추론이 주르륵 스쳐 지나간다.

역시나.

제일 유력한 후보는 ‘황금 마크 수색대’였다.

신(新)한국 정부를 포함해 성십자가 클랜 등 일정 규모를 갖춘 집단이라면 단서도 여럿 구매했을 것이고, 허면 ‘황금 마크’나 여타 실마리들도 꽤나 퍼져 나갔을 테니.

여유가 되는 조직의 파견 부대로 추정하는 게 정론이었다.

그 밖에는.

“사냥을 나온 건 아니겠죠?”

신지유의 의견과 같이 평범한 사냥꾼들이거나, 불가피한 원인으로 터전이 파괴되어 이주를 결심한 그룹이든가.

“가자.”

“네? 아, 네!”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판별하고자 나는 장포를 걷어붙이며 앞으로 일보를 내디뎠다.

설사 헛된 걸음이 될지라도 상관없었다.

늘상 그랬듯이.

코앞에서 괴물들의 손에 동족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담담히 나아가자.

“산지기, 사람들을 보호해 줘. 암전류와 청염은 늑대들을 쫓아내. 드라이어드와 흔들바람은…”

우우우우우웅!!!

이런 내 심정을 아는 신지유도 일말의 망설일 없이 가진 마력을 풀어내며 전장에 뛰어들었고.

그 직후.

[가속]

[강격]

[오르그의 파괴 본능]

“하아!”

후우우욱ㅡ

콰아앙!!

한 줄기 기합을 동반하며 뻗어낸 일격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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