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칭호 : 괴물의 원수’를 완성했을 당시.
그런 고민을 했었다.
언제쯤 떠나는 게 좋을지.
마음 같아서는 ‘황금 표식’의 실체를, 명확한 실물을 확인하고픈 호기심 때문에라도 당장 출발하고 싶었지만.
간섭력의 해소로 세계가 급변하게 되면서 그에 따른 적응 시간이 요구됐기에 꾹 참았다.
알량한 호기심의 해결보다는 일행의 생사가 훨씬 중요했으니까.
허나.
곽재우를 끝으로 모두가 만전을 기한 지금.
“이틀 뒤. 아침에 갈 거야. 기억해 둬.”
나는 한세정들이 새 장비에 익숙해지는 대로 여행을 떠날 요량이었다.
이벤트 발발까지 아직 19일이나 남은 만큼 굳이 벌써부터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지만, 금번처럼 세상이 어떤 식으로 격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바라.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정보를 확보해 두고 싶었다.
특히나.
“그런데 형님,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그동안에도 소소하게나마 조사를 다녔으나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현재와 같이 전원 ‘진실을 보는 눈’을 장착했음에도 별다른 소득이 생기지 않은 형편이라면 더더욱.
“단서를 추가로 사 올 생각이야.”
“아.”
한세정들의 장비를 맞춰 주고자 하위 근원석을 상위 근원석으로 교환하는 건 물론, 선물 상자와 교환권을 포함한 부산물들을 죄다 팔아 치우며 대금을 마련했던지라 여윳돈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예 투자조차 못 할 사정까진 아니라.
업그레이드를 완료한 곽재우에게는 가서 ‘광신’과 ‘삼각 성패’를 손에 익혀 두라 전하고는 자금을 챙겨 ‘단서 구매처’로 향했다.
“이따 식당에서 뵙겠습니다.”
* * *
[‘단서 구매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해진 대가를 지불하여 ‘특수 조건 ?’의 「단서」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1등급 근원석 : 2,000개 / 1,000개]
[2등급 근원석 : 1,000개 / 500개]
[3등급 근원석 : 200개 / 100개]
[4등급 근원석 : 2개 / 1개]
맨 나중으로 곽재우를 보내고 들른 ‘단서 구매처’.
매입을 위해 분류해 놓았던 근원석들을 각각의 투입구에 밀어 넣고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길 10여 초.
지이이이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사그라들 즈음 나타난 커다란 스크린 안에 한 자, 한 자 문장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특수 조건 ?의 실마리_No. 5]
[특수 조건 ?의 실마리_No. 6]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스타트로 ‘황금 표식’과 ‘균열’, ‘괴물의 원수’와 더불어 어느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실마리.
과연.
이번엔 무슨 응답을 내놓을 것인가.
기대감과 의문이 뒤섞인 얼굴로 응시하는 내게 주어진 글자는.
[던전]
[종말 이전의 왕]
얼추 예상했던 단어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의 조합이었다.
“종말 이전의 왕……?”
나는 꽤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전자의 경우야.
반드시 연관이 있으리라고 확신하기는 불가했지만, 던전을 배제하고서는 균열을 관측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던 터라 단초로 ‘균열’이 등장했을 때부터 대강 짐작하고 있어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헌데.
‘종말 이전의 왕’이라니.
“왕릉…을 의미하는 건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자연히 찡그려지는 이마.
하지만.
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삐이이익!
“……?”
답답해하는 나를 두고 꺼진 화면 뒤로 고막을 찌르는 괴음과 더불어.
[경고!]
[누군가에 의해 ‘다섯 개’ 이상의 「단서」가 해금되었습니다.]
[정해진 법칙에 의거하여, 이 시점을 기준으로 〈차원 : 테라〉를 침공한 모든 「침략군」에게도 단서 획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획득법 : 단서 보유자 살해]
[그에 따라 모든 「침략군」에게 특수(特殊) 등급의 ‘기술 : 사냥꾼의 본능’이 부여됩니다.]
《기술 : 사냥꾼의 본능》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우주적인 법칙에 의해 〈차원 : 테라〉를 침략한 모든 「침략군」에게 부여된 기술입니다. ‘종족 : 인간’과 대면할 시 상대가 「단서」를 갖고 있는지 그 유무를 알 수 있으며, 만약 소유 중일 시 ‘특이 사항 : 침략군’이 발동되어 등급에 따라 10분간 일정량(자세히 보기▼)의 신체 능력치가 향상됩니다.
위의 경고 문구가 출력된 탓이었다.
이따금씩 궁금하기는 했다.
본디 ‘특수 조건 : ?’은 인간과 괴물 양측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
고로 저쪽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있을 터이니, 허면 그 방식의 정체가 무얼지.
나아가.
우리도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단서 한 개를 획득하려거든 4등급 근원석에 하위 근원석 역시 수천 개나 지급해야 하는 까닭에, 그 비용을 절감할 수단이 있기를 바랐기에.
그랬는데.
“설마 이런 식일 줄은…….”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팔을 뻗어 ‘자세히 보기▼’를 터치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낌과는 별개로.
알아 둬야 할 건 다 알아 둬야 했으니 말이다.
[‘단서 보유자’ 대면 시 등급별 능력치 상승량]
- 솔져 : 20%
- 나이트 : 15%
- 커맨더 : 10%
- 퀸 : 5%
- ?
*단, 해당 효과는 중첩되지 않는다.
“20%에서 5%라……. 그나마 중첩되지 않아 다행인가.”
자세히 살펴본 결과 결코 적지 않은 증가량이었으나, 10분의 시간제한과 여럿이 있어도 중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위안 삼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가서.
‘종말 이전의 왕’에 대해 한세정들과 얘기를 나눠 볼 심산이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해석이 되질 않으니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 봐야겠지.
마침…….
타다다다다다―
“오빠!”
자발적으로 와 주고 있었고.
아무래도.
“방금 경고…….”
“너도? 나도……!”
생존자 전체에게 경고 메시지가 전송된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무슨 사고라도 벌어진 건 아닌지 놀라 달려온 듯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일행들.
저마다 수련장이 달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뛰어오는 한세정들을 지켜보던 나는, 제일 멀리 나가 있어 한발 늦게 당도한 신지유까지 모이자 여기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식당으로 가 식사를 겸하며 ‘종말 이전의 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에.
달그락―
달그락―
“음…….”
쭉 나열된 얘기를 들은 한세정이, 접시에 올려놓은 스랄레오 고기를 썰어 먹다 말고 늘상 그러했듯이 첫 순서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혹시 던전이 된 왕의 무덤 같은 거 아닐까요? 여주의 세종대왕릉이라든가, 경주 문무대왕릉 같은…….”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키며 말하는 그녀의 사고는 나와 대동소이했다.
약간의 간극이 있다면.
그저 ‘평범한’ 왕릉을 떠올린 나와 달리 한세정은 ‘던전이 된’ 왕릉이었다는 점.
여하간에.
“그것도 일리가 있네.”
“그죠? 헤헤.”
제법 괜찮은 분석이었다.
“다른 사람은?”
미소 짓는 그녀에게 칭찬을 남기며 시선을 돌리자.
골몰이 고뇌하던 곽재우가 살짝 뜸을 들이더니 묵직하고 신중한 어투로 본인의 견해를 내놓았다.
“저는…….”
“……?”
“종말 이전의 왕, 이라고 하니 이게 떠올랐습니다.”
“뭐지?”
“대통령, 입니다.”
“대통령?”
“예.”
“흐음.”
대통령이라…….
어째서 이리 판단했는지 말해달라는 의미로 쳐다보며 무언의 질문을 던지자 물 한 잔으로 입가심하고서 뒷말을 붙이는 곽재우.
“투표로 뽑는 것이니만큼 대통령을 왕으로 여기는 건 틀린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수장이자 통치자라고 보기도 하니. 왕으로 번역하는 것도 맞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이 또한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확실히.
몇몇 사람들은 권력의 최상층에 자리한 대통령을 왕이라 간주하기도 하니까. 조이령이나 신씨 남매도 동의하는지 상당히 흥미로운 눈치로 곽재우를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
여주나 경주처럼 지명을 제하면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모르는 왕릉보단, 원앙 부대와의 접촉으로 경로나 여타 주요 데이터 등을 파악해 둔 신(新)한국의 수도 한양을 노리는 게 한결 쉽다 보니 공연히 그쪽으로 힘이 실리는 듯했다.
더군다나.
“신한국이라……. 신한국…….”
참 우연하게도.
혹은 악연인지 우리와 신(新)한국의 국왕 이회건은 정리해야 할 숙제도 있으니, 꼭 ‘단서’ 때문이 아니더라도 들러 봐야 할 것 같았다.
“좋아. 신한국으로 가 보자.”
“넵!”
* * *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19일 17시간 42분 16초]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난 후.
대련을 희망하던 곽재우와 신지운을 상대로 간단히 부딪쳐 준 나는 옷을 적시던 땀을 깨끗하게 씻고서 거점을 나와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으로 길을 나섰다.
모레 있을 여정 전에.
‘상위 프레데터’로 성장한 이래 한세정들을 돕고자 미뤄 왔던 이식을 진행하기 위하여.
목적은 저놈.
“크라라라라라라!!”
“크라라라라!!”
근력 충만한 포타우스 종(種)의 ‘근육’을 취득할 계획이었다.
피부나 골격, 팔이나 다리 등.
대상이 딱딱 정해져 있던 예전과 다르게 원하는 부위를 골라 흡수할 수 있어졌기에 뭘 빼앗아야 할지 한참을 고심하나 내린 결정이다.
본래 최우선적으로 노렸던 신체는 ‘안구’였지만…….
안타깝게도 거점 주위에는 조류형 괴물이나 시력 특화형이 없어 일단은 차선으로 정해 두었던 ‘피부―골격―근육’의 3박자부터 완결지을까 싶었다.
“둘, 둘, 둘… 넷. 저깄네.”
던전의 근방.
골목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십여 마리의 포타우스 무리.
개중 선두에서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두 마리의 나이트급을 발견한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앞쪽으로 뛰었다.
[풀루스의 돌진]
쿠웅!
[웨루카의 베어 가르기]
슈우우욱!
촤아아아아악―
창졸간에 가한 일격.
왼손을 대각선으로 그으며 뻗어 낸 참격이 공기를 찢으며 괴물들의 머리통을 갈라 넘긴다.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
우우우웅―
투두두두두둑!
핏물이 솟구치는 공간에 장막을 생성해 막으며 좌측으로 스텝을 밟아 찔러 넣는 오른손.
[아쿠스의 연속 찌르기]
[포타우스의 연속 폭격]
후우우욱!
콰드드득!
손날을 세워 가한 충격(衝擊)과 주먹을 쥐며 내지른 권격(拳擊)의 조합에 여태껏 벙쪄 있던 포타우스들이 휩쓸려 나가떨어졌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괴물들을 패대기친 나는.
“이놈보단… 이놈이 낫겠어.”
탄탄한 복근이 탐스러운 나이트급 포타우스들 중 비교적 덩치가 큰 녀석의 발목을 잡아끌고 그대로 거점으로 돌아와 지체 않고 주문을 외웠다.
[프레데터의 상위 진화론]
짤막한 읊조림.
[‘기술 : 프레데터의 상위 진화론’을 발동합니다.]
[진화에 사용될 제물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이룩할 진화 과정을 선택해 주십시오.]
“흡수 이식.”
[「흡수 이식」을 선택하셨습니다. ]
[흡수할 신체 부위를 선택해 주십시오.]
“근육.”
[대상 「포타우스 : 2등급」의 ‘근육’을 선택하셨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신체 최적화’가 자동 진행됩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안내에 맞춰 답한 직후.
콰직!
콰드드드득!
통증을 동반하며 찬란한 빛무리가 나와 괴물의 육신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