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허공에 새겨졌다가 사라지는 메시지들을 확인한 나는 스르륵 회전했다.
그즈음.
“쉬에에에엑!!”
복부를 얻어맞은 충격으로 땅을 굴렀던 녀석이 벌떡 기립하더니 포효와 함께 달려들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걸로 보아 지독한 분노에 이성이 잠식당한 듯 한껏 일그러진 낯빛은, 동종(同種)이 아닐지라도 그 감정을 쉬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어떻게든 나 하나는 죽이고 가리라는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흐음.”
나는 불안이나 초조함 없이 무척 느긋했다.
퀸급 개체와의 일대일은 경험도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놈의 종(種)이 ‘콜루베르’라는 점이 가장 컸다.
《칭호 : 감각의 귀재》
- 특별한 업적을 달성한 대상에게 부여되는 칭호. 향후 누군가로부터 가해진 살기(殺氣)를 인식할 시 상황 종료 전까지 감각 인지 범위가 5% 늘어납니다. 또한, 「콜루베르」를 상대로 전투가 일어날 경우 모든 신체 능력이 5% 상승합니다.
《칭호 : 종족의 원수》
- 특별한 업적을 달성한 대상에게 부여되는 칭호. 해당 칭호를 소유한 대상은 목을 베어 넘긴 대상의 종(種)을 상대할 시 무조건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 ‘특수 퀘스트 : 괴물의 원수’ 부여
- 현재까지 사냥한 종(種) 목록 : 포타우스, 루카누스, 콜루베르
‘감각의 귀재’와 ‘종족의 원수’로 5%씩.
이 두 가지가 합쳐져 10%로 적용이 되는 것인지, 혹은 ‘감각의 귀재’로 5%가 향상된 상태에서 다시 ‘종족의 원수’로 5%가 증가하는 것인진 모르겠다만.
뭐가 됐든.
[가속]
[풀루스의 돌진]
후욱―
파앙!
서로 간의 격차는 확실했다.
단번의 발구름만으로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적의 머리 위에 선다.
극쾌(極快).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묘사를 똑같이 재현하며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나는 대응조차 못 하고 꼭대기를 내준 녀석의 뇌를 내리찍었다.
[강격]
[포타우스의 연속 폭격]
후욱―
콰아앙!
“―!”
뇌진탕.
골을 제대로 흔들렸는지 권격으로 인한 쇼크에, 녀석은 주둥이를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는 멍청한 모습으로 맥없이 고꾸라졌다.
간헐적으로 떨어 대는 걸 보니.
한동안은 쭉 누워 있으리라 짐작되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순수 수치만 350에 육박하는 데다가 ‘스트랭스’나 ‘일기당천’ 등의 버프와 각종 칭호가 더해져 한껏 증폭된 근력을 바탕으로 펼쳐 낸 기술이니, 빌빌거리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다 감안하더라도 너무 쉽게 잡기는 했다만…….”
아마.
칭호들의 중첩 방식이 ‘5%+5%=10%’로 적용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 계산법대로 하면 근력은 380에 나머지 기본 스탯들도 350대에 이르는 마당이라, 설령 ‘총공세’로 보강이 되었단 퀸급 개체라고 해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지운아.”
“네! 형!”
“와서 정리해.”
* * *
‘특수 퀘스트 : 괴물의 원수’는 각기 다른 다섯 종(種)의 퀸급 개체를 잡아야 클리어되는 미션.
고로.
앞서 콜루베르 처치 업적을 달성한 나는 더 죽여 봐야 쓸모가 없기에 신지운을 불러 뒷정리를 하도록 지시하고서 나는 한세정과 신지유가 드잡이질하고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두 여인은 나만큼이나 여유로웠다.
사실.
[‘사신의 눈물’이 발동되었습니다.]
[극독의 사신이 당신의 마력을 대가로 원합니다.]
[마력이 공급되는 한 「목표 : 퀸급 콜루베르」의 체력이 매 초마다 0.01%씩 감소합니다.]
이 교전은 기습을 통해 ‘사신의 눈물’에 중독되면서 승기는 이미 넘어온 실정이었다.
안 그래도 신지운이 발현했던 ‘일도양단’에 직격당해 정상이 아니었는데.
여기에 독기로 지속적인 손실마저 발생했거니와.
[체력이 50%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오리지널 기술 : 사신의 눈물」의 특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대상의 육체 전반에 ‘부분 마비’가 일어납니다.]
“쉬엑? 쉬익! 쉭!”
“슬슬 오나 보네?”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이팩트가 따라오진 않을지언정.
철판도 갈라 버리는 매서운 절삭력을 바탕으로 가죽을 찢어발기고 독을 주입해 영원토록 고통에 허덕이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한세정의 고유 기술.
대낫에 찍힌 표적이 일정 체력 이하로 떨어지면 부분 마비, 오감 혼동, 정신 착란 등등의 증세를 앓게 만드는 ‘사신의 눈물’의 부가 옵션이 발효되어 전세를 뒤집지 못하게끔 압박하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오리지널 기술 : 천공의 문]
[「대상 : 얼음꽃」이 선택되었습니다.]
[기술 등급 및 단계 : 원본(原本)―3/5]
[‘등급’과 ‘단계’에 비례하여 〈대차원 : 환계〉에서 「대상 : 얼음꽃」이 추가 소환됩니다.]
“움직임을 봉쇄하는 데만 집중해 줘, 얘들아.”
쩌저저저적!
쩌쩌저적!
사방에서는 얼음 속성의 소환수 ‘얼음꽃’ 서른 마리가 사방을 뛰어놀며 극지방을 연상케 하는 냉기(冷氣)로 가둬 버리니.
“쉬에에에에에엑!!”
후우웅―
후욱―
후우우우욱―
목덜미를 옥죈 명부 사자의 대낫은 어떤 발악에도 풀리지 않고 서서히 생명을 앗아 갔다.
물론.
콜루베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우리가 입구에서 놓고 왔던 수백 개체에 지원 요청으로 이송된 천여 마리가 본인들의 상관을 구하고자 벌 떼같이 몰려와 윽박을 질러 댔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윽박에 불과했다.
[오리지널 기술 : 철벽의 요새]
“아무도 넘어오지 못한다.”
쿵―
쿠구구구구구궁!!
우리의 구원으로 숨구멍이 트인 곽재우가 접근을 금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후좌우(前後左右).
다가올 수 있는 모든 통로를 물 샐 틈 없이 꽉 틀어막아 단 한 번의 돌파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방어 태세에 괴물들은 안간힘을 써 보지만, 발만 동동 구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짧아도 5분.
길면 10분도 족히 저지해 낼 굳건한 방비에 힘입은 한세정과 신지유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유야, 갈게!”
“네, 언니! 얼음꽃! 꽉 붙잡아!”
즉살검 모르드(Moord)를 역수로 쥐고, 남은 손으로는 검병(칼자루)의 끝자락을 누르며 강하게 땅을 박차는 한세정.
훌쩍 점프해 근처의 두터운 나뭇가지들을 발판 삼아 연거푸 도약하는 그녀의 뒤편에 선 신지유는 서포트를 맡아 얼음꽃들을 전부 기용해 몸부림치는 퀸급 콜루베르의 신체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정형화된 기법은 따로 없었으나, 머릿속에는 확고한 이미지가 있는가.
공중을 노니는 혹한의 결정체들은 상하좌우로 비행하며 초대형 빙결수를 창조해내 짓누르고, 밧줄로 옭아매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구속의 극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언니! 밟고 가요!”
공중에 뜬 한세정이 10m에 달하는 거구를 등반하는 데 도와주려 곳곳마다 얼음으로 조각한 계단을 설치했다.
쩌저저적―
쩌저적―
“나이스! 고마워!”
그 덕에.
한 마리의 검은 매처럼 비상한 한세정은 삽시간에 목표와 대면할 수 있었다.
“쒸에에에에에엑……!”
주력 무기인 꼬리를 포함해 턱주가리도 묶여 억눌린 이빨 틈으로 새어 나오는 살기.
뾰족하게 뜬 눈이 마치 어서 풀지 못하겠느냐고 소리치는 듯 느껴졌다.
아주.
[베놈 소드]
우우우우웅!
“잘 가.”
깜찍했다.
[독살]
슈우우우우욱!
콰직!
[축하합니다!]
[「콜루베르 : 퀸급」 개체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칭호 : 종족의 원수(콜루베르)’를 습득합니다.]
* * *
퀸급 콜루베르들이 모조리 처리된 이후.
우린 ‘던전 : 거구의 수림’에서 또 하나의 임무를 거행했다.
“얼마나 남았어?”
“저는 세 마리!.”
“저는… 일곱 마리 남았네요.”
“전 끝났습니다.”
바로.
“쉬에에에엑!”
“시끄러, 이 자식아!”
후우우욱―
서걱!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 초감각〉을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으로 ‘칭호 : 감각의 귀재’를 습득합니다.]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이 3씩 상승합니다.]
“저도 지금 끝났어요!”
여왕 사냥 겸.
기술 ‘비밀 엿보기’를 통해 알아낸 획득법을 이용해 동시 진행하던 ‘특수 퀘스트 : 초감각’이었다.
던전처럼 좋은 장소를 평범한 사냥터만으로 활용하는 건 매우 바보 같은 일.
금전적으로 허덕이고 있다면 모를까.
자본도 넉넉하기에 ‘비밀 엿보기’가 됐든, ‘특수 퀘스트 판매처’가 됐든 동원해 칭호 습득에 힘을 썼다. 그 과정에서 꽤나 큰 수확이 있었으니, 최근 들어 300에 도달한 마력 스탯이었다.
아라운다, 루카누스에 더불어 뒤늦게 얻었던 포타우스까지 도합 12나 상향됐기 때문.
그 결과로.
‘마력 전개’라는 기술도 새로 생겼다.
《기술 : 마력 전개》
- 등급 : 특수
- 단계 : -
- 설명 : 신체 능력치 중 ‘마력’이 「300」을 돌파했을 시 부여되는 기술입니다. 일정 공간을 당신의 마력으로 장악해 최대 3분간 타인(他人)을 비롯한 타종(他種)의 마력 사용을 제한하여 ‘기술 시전’을 방해하고, 환경적 요소를 차단합니다.
단, 마력장이 전개되어 있는 동안에는 시전자 또한 기술 사용이 금지되며 동일 계열의 기술(혹은 고유 능력)과 부딪칠 시 함께 소멸됩니다. 1회 시전 시 하루 지난 이후에 재사용 가능합니다.
남과 나에게 한꺼번에 제약을 거는 기술이라니.
상당히 특이한 종류였다.
버프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디퍼브라고 하기도 모호하고.
다만.
내 기준으로는 나무랄 게 없는 기예였다.
박투 위주의 근접전에 특화된 나로서는 고작 3분이라도 이거저거 다 떼고 무력 싸움으로 몰고 간다면 전혀 나쁠 게 없었으니까.
몸소 검증은 못 해 봤지만, ‘환경적 요인을 차단한다’라는 문항도 마음에 들고.
단지.
자칫하다간 한세정들이 휘말려 피해를 볼 수도 있기에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좋아.”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나는 작게 주억거리며 던전을 빠져나왔다.
산불에 이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수림을 떠나 귀환한 거점.
간단히 점심을 차려 먹고 소모된 에너지를 회복하며 시간을 보낸 우린 ‘거구의 수림’ 근처를 돌며 크루톤과 무루의 영역을 찾아다녔다.
이 근방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었기에 제법 골치가 아플 뻔했지만.
[광역 탐색]
“음……. 이쪽으로 가 볼까요? 저쪽에 괴물들이 엄청나게 많이 걸리는데요?”
“그러자.”
“넵!”
신지운의 보조로 예정보다 빠르게 해결이 됐다.
“아! 오빠, 저기!”
“그어어어어어!!”
“그어어어!!”
먼저 마주친 것은 독낭을 선물해 주었던 크루톤들의 영토.
[축하합니다!]
[〈던전 : 독수의 땅〉에 입장하셨습니다.]
[해당 공간에서 활동하는 동안 〈던전 전용 퀘스트 : 저항하는 자〉가 진행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대신 보랏빛으로 물든 물줄기로 가득한 퀴퀴한 무대였다.
씨익-
이를 바라보는 한세정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