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검(劍), 도(刀), 창(槍).
병기 활용에 최적화된 체질이 있는 반면, 순양지체나 격류지체 등 마력이나 기타 방면에 특화된 체질도 있듯이.
마땅히 소환 계열에 강점을 더욱 진보시켜 주는 부류도 있다.
예컨대.
《체질 : 소통하는 자》
- 설명 : 언어(言語)에 구애받지 않고, 영혼과 영혼을 연결해 대화하는 자들이 존재하고는 했다. 역사는 그들을 일컬어 ‘소통하는 자’라 불렀고, 그들은 벌레부터 동식물까지 살아 있는 모든 대상의 마음을 읽고 교류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일한 창구를 보호하기 위하여 천지만물이 ‘소통하는 자’의 곁을 따라다녔다고 전해진다.
- 옵션 : 특수(特殊) 등급 기술 ‘영혼의 소통’ 개화 / 특수(特殊) 등급 기술 ‘매력의 소유자’ 개화
이 ‘소통하는 자’라든지.
정령과의 친화력을 대폭 끌어올려 주는 ‘반인반령’, 혹은 속성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엘리멘탈 바디’같이.
그러니.
나는 신지유가 예시 중에서 한 가지를 채택할 거라 예견했다. 이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추론이었다.
그런데.
“이걸… 골랐다고?”
“많이, 이상…한가요?”
허.
당황스럽다.
아니.
당황스럽다기보단 신기하다고 해야 맞겠지.
그 많은 아이템 가운데에서.
[선택한 체질―단련신]
‘단련신’을 취하기로 결심했으니까.
《체질 : 단련신》
- 설명 : 수많은 갈래 중 배우고 익히는 것이 신(神)의 경지에 이른 몸. 한번 습득한 지식은 그 누구도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통달하리니.
- 옵션 : 기술 숙련 속도 25% 상승
‘단련신, 단련신이라…….’
호기심이 인다.
어째서.
이쪽으로 마음을 굳혔는지.
그 이유를 묻자.
자그맣게 웃으며 제 소환수들을 불러내는 신지유.
“청염, 얼음꽃, 흔들바람, 산지기, 암전류.”
화륵―
쩌저적!
휘융―
쿠구궁―
파직!
청명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부름에 저마다 화려한 기운을 발하며 등장하는 다섯 종류의 환수들.
신지유는 마치 본인의 친구들과 마주한 듯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대답을 이어 갔다.
“고유 능력으로 소환하는 드라이어드는 제가 성장하는 만큼 강해지지만, 이 아이들은 기술 단계가 올라가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고르게 된 것 같아요. 이 아이들이 빨리 강해질 수 있도록.”
아.
그러한 까닭이었나.
차분하게 읊조리는 말에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뭔가 의도가 있겠지 싶었는데, 듣고 나니 완벽하게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언뜻 들으면 다소 동화 속 대사같이 느껴졌기에 아직 미성숙한 아이의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기술을 보유한 생존자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져왔다는 걸.
“잘했다.”
“정말요?”
“그래.”
“헷.”
나는 꽤나 인상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에 주억거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 나은, 더 좋은 답이 있었을진 몰라도.
최소한 잘못된 결말은 아닐 거란 믿음이 생겼으므로.
더불어.
불현듯 그러한 상상이 들었다.
이러다 ‘단련신’을 필두로 오리지널 기술들을 양산해 낸 신지유가 모두를 압도하고서 정상에 서는.
다만.
상상은 상상으로 그쳤다.
검강지체나 창천지체 등으로 강화된 한세정들의 무력도 결코 약하지 않거니와, 제아무리 숙련도가 빨리 오른다 하더라도 체화(體化)급의 벽은 여전히 높으니.
* * *
“이쪽으로.”
아침 여덟 시.
든든한 식사로 배를 채우고 거점 밖으로 나섰다.
행선지는 과거를 더듬어 가며 찾아가는 ‘철갑 사슴벌레’들의 돌산.
종명(種名)도 던전의 자료도 전혀 없어, 그저 ‘돌산 지대’로 분류해 놓은 그곳으로 일행을 이끌고 떠났다. 중간중간 성십자가 클랜과의 전투로 피폐해진 시가지가 표지판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방문 자체는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탁―
[축하합니다!]
[〈던전 : 절삭의 충왕〉에 입장하셨습니다.]
[해당 공간에서 활동하는 동안 〈던전 전용 퀘스트 : 베이지 않는 것〉이 진행됩니다.]
점차 선명해지는 기억을 밟아 가며 도달한 목적지.
“적살의 충왕이라.”
힐끔 쳐다보기만 했었던지라 처음으로 대면하는 던전은 여기저기 깔린 돌무더기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명칭으로 명명돼 있었다.
많고 많은 이름 다 놔두고 ‘절삭(切削)’이라니.
독특한 네이밍에 자연스레 허공으로 눈길이 움직였다.
그 뜻이 무얼지 궁금해서.
《던전 : 절삭의 충왕》
- 이곳은 행성 ‘세그멘트(Segmentum)’의 지배종 「루카누스」의 영역입니다. 나무 수액 대신 생명의 혈액과 원기를 양분으로 빨아 먹고 사는 이들은 얼핏 보기엔 두껍게 씌워진 갑주가 그 장점이라 보이지만, 실상 주 무기는 날카롭게 자란 뿔일지니.
흡사 두 자루의 칼날을 박아 넣은 듯한 뿔은 기사의 검과 비견될 정도로 매섭습니다.
매일같이 집채만 한 바위를 숫돌 삼아 갈고 가는 「루카누스」의 뿔은 강철조차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기에 결코 무시해선 안 될 것입니다. 방심하는 순간 죽음을 선사하리니.
└던전 입장 시 ‘던전 전용 퀘스트’가 자동 진행됩니다.
└던전 전용 퀘스트 : 지휘관
《던전 전용 퀘스트 : 광전사》
- 이 퀘스트는 오로지 ‘던전 : 절삭의 충왕’에서만 진행 가능하며,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루카누스」 종(種)의 성향을 기준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참 웃기게도 그들은 스스로를 기사라 칭하나, 실지로 겪어 보면 피에 절어 사는 ‘광전사’에 가깝습니다. 뇌를 넘어 영혼까지 붉게 물들어 버린 탓인지 평소에는 잠잠한 기사 같다가도 한 방울의 선혈만 마주하면 금세 혈욕(血慾)이 도져 광분해 달려듭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 무력에 자부심이 있다면 피를 내어 자극해 보십시오. 혈전만큼 실력 향상에 도움되는 건 또 없으리니.
└현재 광분한 「루카누스」처치 수 : (0/~)
└나이트 등급 「루카누스」 광분 이후 처리 시 ‘x3’만큼 추가 적용
└커맨더 등급 「루카누스」 광분 이후 처치 시 ‘x5’만큼 추가 적용
└퀸 등급 「루카누스」 광분 이후 처치 시 ‘x10’만큼 추가 적용
“흐음.”
눈앞에 출력된 설명 창을 쭉 읽어 내려간 나는 그제야 의미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랄레오와 비슷한 내구 타입인 줄 알았더니만, 근력 또는 순발력 위주의 딜러인 모양이었다.
외부에서 만났다면 알기 힘들었을 내막.
이래서 데이터 확보가 중요한 거다.
‘축제의 땅 : 심층부’에서처럼 암전 상태에서 상대했더라면 겉모습에 속아 당했을 테니까.
아무튼.
“적당히 꺼내서 잡아 봐.”
확인을 마친 나는 한세정들에게 연습전… 정확하게는 ‘적응전(適應戰)’을 치르게 했다.
어젯밤.
간단한 대련으로 바뀐 몸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기는 했다만, 실전에 비할 바는 못 되기 마련. 그런 탓에 곧장 퀸급을 사냥하기보다는 변경 점을 세세하게 체감시켜 주기 위해 기간을 가질 작정이었다.
이에.
교전과는 연관이 없는 신지유를 제외한 네 명이 전위로 나서며 서로 눈치를 보더니 알아서 구역을 나누더니.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일부러 혈향을 풍겨 끌어모은 루카누스들과 오직 병기에 의존해 맞붙었다. 기술을 비롯해 검이나 창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보정치가 붙다 보니 차근차근하게 점검해 보려는 듯했는데.
그중 단연 압권은 곽재우였다.
“하아!”
“재우 오빠는… 맨몸이시네요?”
신지유의 말대로.
기합을 내지르며 쇄도해 가는 그는 철퇴나 방패는커녕 갑옷조차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금강불괴’라는 게 피부 조직과 근골 등 육신의 견고함을 향상시켜 주는 데에 제일 큰 비중을 두다 보니 장비 없이 겨뤄 보려는 느낌.
딱히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도검불침’이나 ‘위력 감소’에 ‘호신강기’도 있으니, 웬만한 이빨로는 흠집도 내지 못하겠지.
“세정 언니는…….”
한세정은 앞선 셋과 달리 매우 조용하게 포문을 열었다.
체내에서 독을 분비해 낼 수 있는, ‘속성’ 스탯에 수치로 그 효력이 달라지는 독인(毒人)이 된 그녀는 비수 몇 자루를 꺼내 들더니.
사각―
주르르륵―
팔등을 살포시 긁어 검붉은 색깔의 선혈을 날에 묻히고는 그걸 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전개했다.
[중급 투척술]
[‘명중률 보정’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탓―
파아아앙!
가벼운 손짓과 대비되게 파공성을 토해 내며 쏘아진 두 자루의 단검이 피 냄새를 맡고 접근해 오던 루카누스들의 등판에 틀어박힌다.
후우욱―
콰직!
콰득―
퍽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파육음.
허나.
놈들은 제 몸뚱어리에 날붙이가 꽂혔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격해 왔다.
그럴 만도 했다.
대충 봐도 고작 5~6cm 남짓한 비수는, 2m가량 되는 비대한 체구에 비해 너무나도 작았으니까.
아마도 심장 따위의 급소를 노리지 않는 한―
“키에엑?”
“키에엑― 켁…….”
털썩―
털썩―
일반적인 시선에서 불가능을 외치던 그때, 쌩쌩하던 루카누스들이 한순간에 맥없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왜 쓰러지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놈들.
그러거나 말거나.
현세에 강림한 사신의 대낫은 일대의 생명을 모조리 앗아 갔다.
암적색(暗赤色)으로 물든 상처만을 남긴 채.
* * *
삐익―
[‘반대편 신호기’에서 신호가 전달되었습니다.]
[‘반대편 신호기’의 위치가 「미니 맵」에 표시됩니다.]
[「미니 맵」은 10분 후 자동 삭제됩니다.]
“왔나.”
신지유, 조이령과 함께 커맨더급 이하 루카누스들을 막아 내던 차에 허리춤에 걸려 있던 ‘고주파 신호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공략조인 한세정, 곽재우, 신지운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퀸급 루카누스를 반쯤 죽여 놓았으니 와서 목을 베라는.
‘단서 구매처’에서 ‘칭호 : 괴물의 원수’가 실마리로 공개된 뒤, 가급적이면 나부터 퀘스트를 클리어하게끔 몰아주기로 의견을 모았기에 손수 마무리 짓지 않고 나를 부르는 것이다.
하여.
“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두 여인을 남겨 두고 던전의 중심으로 걸어가자.
“키에에에에엑!”
“재우 씨.”
“예.”
[마력 변형술 : 천라지망]
우우우우우!
촤아아악!
10m 크기의 사슴벌레가 마력으로 창조해 낸 그물을 뒤집어쓴 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하게 두들겨 팼는지.
여느 상가 기둥만 하던 여섯 개의 다리는 죄다 잘려 나갔고, 명검이라 자랑하던 뿔도 반토막이 나서 땅바닥을 굴러다닌다.
“아! 오빠! 오셨어요?”
“금방 잡았네.”
“확실히 체질 개선한 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하마터면 저놈 목까지 잘라 버릴 뻔했어요, 형.”
나는 별거 아니었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는 셋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곤,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퀸급 루카누스의 머리통을 표적 삼아 주먹을 휘둘렀다.
[강격]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우욱!
콰아아아앙!!
[축하합니다!]
[「루카누스 : 퀸급」 개체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칭호 : 종족의 원수’에 「루카누스」 종(種)이 추가됩니다.]
찌르르한 무게감을 선사하며 단박에 터져 나가는 두개골 너머로 후두둑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러 메시지들.
“이걸로 두 마리째.”
반짝이며 빛을 내는 문장을 보며 나는 한 가지를 확신했다.
지금의 저들이라면 기약했던 20일보다 빠른 시일 내에 계획을 완료할 수도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