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성장의 땅 : 2단계 】
‘성장의 땅 : 2단계’는 어떠한 세상인가.
탁―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인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아스라이 그려지는 과거를 되짚어 봤다.
50여 일 전 1단계 ‘성장의 땅’을 밟았던 그날을.
그때에 나는 광활한 숲 한가운데에서 도합 200여 마리의 괴물들과 겨뤄야 했다.
오르그, 플뤼, 티그리스, 투르바.
내 육체를 구성하는 기억의 편린들과.
“그 덕에 당황 좀 했었지.”
솔직히 말하면 당혹스러움을 넘어 절망스럽기까지 했던 거 같다.
죄다 솔져급이긴 했어도.
지형적으로나 개인적인 무력으로나 수백 개체를 한꺼번에 감당하는 건 기실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아.”
전직 퀘스트 내용을 읽자마자 지리적 이점부터 가져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였던 거 같다.
당시엔 지형지물의 힘이라도 끌어쓰지 않으면 힘들다고 판단했었기에, 고지대 등을 찾으려 했지.
그러는 와중에 근거 없이 무작정 ‘등위’를 높여 보겠다고 도전하다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게 명백하니 조심하리라 다짐도 하고.
“그게 벌써 두 달 가까이 됐다라…….”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을 음미하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새 퀘스트 설명 창이 스르륵 쓰여지는 중이었다.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키메라 「프레데터」는 자신이 사냥한 개체의 신체 조직을 흡수해 끊임없이 성장한다.
그래서였을까. ‘우주의 질서’는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에게 합당한 제약을 선사했으니, 「격의 봉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따라 더 높은 곳, 더 화려한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계라는 이름의 시험을 깨부숴야만 한다.
┗등위 상향에 필요한 평범한 파편 : (0/4,444)
┗등위 상향에 필요한 특별한 파편 : (0/2,222)
┗등위 상향에 필요한 진귀한 파편 : (0/1,111)
┗등위 상향에 필요한 고귀한 파편 : (0/1)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60초]
“음.”
쭉 살펴보니 일전에 치렀던 전쟁과 크게 달라진 구석은 없었다. 머릿수가 미친 듯이 폭증됐다는 것만 뺀다면.
방금 2백이 어쩌고 하던 이야기가 무색하게 수십 배로 늘어난 수치.
허나,
실질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확실히 한 곳이다.
“역시 있었네.”
‘등위 상향에 필요한 고귀한 파편 : (0/1)’.
퀸급의 출현을 예고하는 한 줄의 문장.
1단계 ‘성장의 땅’에서 나이트급 투르바와 마주했던 것처럼, 최후의 전투에서 퀸급과 겨루게 될 운명 같았다.
그게 앞선 구(舊) 4종 중 하나인지, 아니면 스랄레오를 비롯한 신(新) 5종인지.
아마 전자는 완벽하게 결합된 마당이니 추측하기에는 후자이긴 한데.
무슨 종이든 간에 하드한 난이도라는 사실은 매한가지였기에 두려움 대신 적당한 긴장감만 유지한 채로 화면을 닫았다.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1초]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0초]
그 타이밍에 맞춰 시곗바늘이 0을 가리키자.
콰아앙!
굉음을 동반하며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기운이 각지로 갈라지며 창공에 여러 개의 이미지를 피워 냈다.
골갑의 스랄레로, 어인 머메른, 마비 독의 크루톤, 구렁이 콜루베르, 초대형 곰 무루.
그리고.
“발록?”
흉흉한 안광이 인상적인 악마 ‘발록’도 함께였다.
그럴 만했다.
발록은 구(舊) 4종에 포함되지 않는 유형.
성십자가 클랜과의 전쟁에서 일종의 긴급 수혈용으로 받아들였던 부류라 잔향이 남아 있을 테니 정리를 해 줘야 하는 듯싶었다.
하여.
어쩌면 ‘퀸급 발록’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단 상념이 아주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찰나.
쿠구구구구궁!
땅을 울리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근처 나무들을 모조리 짓밟으며 쇄도해 오는 이 흔들림의 정체는.
“꾸이이이이이익!!”
“꾸이이이익!”
새하얀 등딱지를 뒤집어쓴 스랄레오 무리였다.
커맨더, 나이트, 솔져.
등급별로 다양하게 구성된 백여 마리의 일개 부대가 날 덮쳐 오고 있었다.
[스트랭스]
[강격]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우우욱!
나는 그 백색의 물결을 확인하는 즉시 주먹을 뻗으며 정면 대결을 택했다.
만 단위도 아니고, 고작 천 단위도 안 되는 놈들 상대로 퇴각할 리가 있나. 깔끔하게 부숴 버리면 될 일이었다.
…라고 당연하게 여겼다만.
슈우욱!
콰아아아앙!!
“끝―”
이변이 일어났다.
“꾸이이이익!”
“꾸이이익!”
“……?”
일반적이었다면 일격에 바스러졌을 스랄레오들이, 가공할 위력을 선보인 공세에도 당당하게 버텨 내며 질주해 왔으니 말이다.
한둘도 아닌 거의 절반이나.
아무리 스랄레오가 내구 능력치에 특화된 종이라고 해도, 이는 매우 기이한 광경이었다.
끽해 봐야 솔져 나이트.
한발 물러나 커맨더급은 천운이 따라 주어 생존했다고 친다지만.
나이트급은 물론이거니와 나이트급도 못 되는 솔져급조차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납득이 가질 않았다.
거기까지 사고가 이어진 직후.
“젠장.”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무언가.
뒤틀렸다는 것을.
직접 체감했기에 내리는 확신이었다.
* * *
후우욱―
빠악!
“꾸이이이익!!”
활활 타오르는 마력이 가미된 타격에 땅바닥을 구른 커맨더급 스랄레오가 분통을 터트리다 이내 머리통을 떨구며 미동을 멈췄다.
나는 녀석이 축 늘어지는 걸 보며 턱에 손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고 있던 상식이 비틀려져 있음을 깨닫자마자,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파악하려 솔져부터 커맨더까지 한 마리씩 남겨 실험을 가했다.
일반 던전에 인스턴스 던전 등.
지겹도록 사냥했던 놈들인지라 금세 차이를 알아냈고, 곧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놈들이 강해졌거나.
“혹은 내가 약해졌거나.”
어느 쪽이든 무척 곤란했다.
본래라면 한자리에 모아 놓고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만 시전해도 간단하게 쓸어버릴 수 있는 실정이었거늘.
이제는 천 단위만 돼도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허.
히든 룰이라.
“그래도 2단계라 이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안이라 한숨이 절로 나오던 차였다.
띠링!
[축하합니다.]
[〈성장의 땅 : 2단계〉의 감춰진 비밀을 깨우쳤습니다.]
[가려져 있던 안개가 사라집니다.]
갑작스러운 종소리가 들리며 몇 줄의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되더니.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키메라 「프레데터」는 자신이 사냥한 개체의 신체 조직을 흡수해 끊임없이 성장한다.
그래서였을까. ‘우주의 질서’는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에게 합당한 제약을 선사했으니, 「격의 봉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따라 더 높은 곳, 더 화려한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계라는 이름의 시험을 깨부숴야만 한다.
┗등위 상향에 필요한 평범한 파편 : (67/4,444)
┗등위 상향에 필요한 특별한 파편 : (34/2,222)
┗등위 상향에 필요한 진귀한 파편 : (2/1,111)
┗등위 상향에 필요한 고귀한 파편 : (0/1)
┗당신의 능력치 일부가 ‘잠금’되어 있습니다. / [자세히 보기▼]
┗진행률에 따라 ‘잠금’이 해제됩니다.
┗현재 진행률 : 1%
이와 같이 조정된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보아하니.
숨겨진 규칙을 알아내면 자동으로 공개되게끔 설정돼 있는 모양. 어차피 금방 알아냈을 정보인데 굳이 가려 둔 사유가 무엇일까.
혹여라도 몰이사냥을 시도하길 바랐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안일한 태도로 임하다 되레 역전당해 괴물들에게 잡아먹히기를 바라던 누군가의 고약한 취미 같은.
비슷한 농간은 벌써 몇 번이나 당하지 않았던가.
툭―
[접기▼]
- 신체 능력치 50% 이상 발휘 불가
- 기술 위력 50% 이하로 절감
- 체화(體化) 등급 기술 봉인
- 유일 등급 아이템 효과 적용 안 됨
“네 개, 안 되는 게 참 많네.”
쯧 하고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린채로 ‘자세히 보기’ 란을 터치하자 펼쳐지는 제약 사항들.
이래저래 주요 포인트가 다 막혀 있었다.
스탯이나 기술 외에 아이템마저 제한될 줄이야. 이렇게 되면 ‘기적의 조각’에 붙어 있는 ‘임시 안전지대’ 생성에도 제약이 걸리는 터라 그게 조금 아쉬웠다.
위기에 당면했을 때.
잠시라도 방패가 되어 줄 중요한 수단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격살용 알람 마법진’이나 ‘보온석’은 사용 가능하니, 수면과 관련해서는 무탈하리라.
나는 그 점을 위안 삼으며 전장을 떠났다.
* * *
[기술 ‘비밀 엿보기’가 발동되었습니다.]
[「인간성」 5%가 소모됩니다.]
[육체에 이식된 각 종(種)의 〈특수 퀘스트〉 획득 조건이 지식의 형태로 전이됩니다.]
한적한 숲속.
감각 망을 넓게 퍼트려 근방에 괴물이 없음을 체크한 후 오랜만에 ‘비밀 엿보기’를 가동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성장의 땅’은 ‘특수 퀘스트’를 수행하기에 최적의 환경. 기왕에 싸울 거라면 보상을 불려 놓고 싸우는 게 백배 나았다.
평상시라면 ‘인간성’이 소모되어 꺼렸을 터이나.
이곳에서는 괜찮았다.
정확하게는.
일부러라도 ‘인간성’을 소실시켜 놓을 필요가 있다고 해야 맞을 거다.
왜?
오늘에야말로 퀸급 포타우스와의 결전 중 활용하지 못했던 비장의 한 수를 꺼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영혼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또 다른 나’를 일깨우는 최악의 패를.
그러니.
“분노 조절 장애…는 생겼고.”
뇌리에 생겨나는 분노를 달갑게 맞이하며 ‘특수 퀘스트’ 습득 방법을 재차 살펴봤다.
[종별 습득법]
[머메른 : 찌르기 연속 5회 회피]
[크루톤 : 독성 저항]
[콜루베르 : 기습 5회 방어]
[무루 : 주먹 대결]
[발록 : 무릎 꿇리기]
“딱히 어려운 건 없네.”
전체적으로 무난한 레벨.
퀘스트를 따내는 거야 솔져급이어도 상관없으니, 기회 될 때 한 마리씩 살려서 어울려 주면 될 듯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클리어되겠지.
“보상은 뭘 주려나.”
스랄레오만 해도 ‘회피의 귀재’라는 상급의 칭호가 떴었다. 물리력뿐 아니라 정신적 공격에도 피해 내도록 도와주는.
고로.
머메른이나 여타 다섯 개의 퀘스트에서 딱 그 정만 드랍되도 두 손 들고 박수 치며 환영해 주리라.
그런 농담을 나지막하게 읊조린 나는 스탯이 50%나 깍여서인지 영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다시금 풀숲으로 들어갔다.
저벅―
저벅―
흙과 풀로 꾸며진 경관을 구경하며 나아가길 30여 초.
조용했던 사방이 살기(殺氣)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최근에 느껴본 듯 익숙한 적의의 실체는.
“쉬아아아아아악!!”
후우우욱―
터업―
10m나 하는 덩치의 구렁이 콜루베르였다.
놈이 출현한 걸로 보건데.
이 방향은 콜루베르들의 영역으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단계 ‘성장의 땅’에서의 1일 차가 무르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