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물거미 아라운다들이 서식하는 ‘던전 : 파도 속의 고치’를 지나 얼마나 더 걸었을까.
쫙 늘어선 백색 물결 밑으로 주위 배경이 더욱 익숙해져 간다 싶을 즈음.
“아.”
오래된 메모리를 더듬어 가며 도시를 거닐던 나는 불현듯 어느 집 앞에서 탄성을 뱉어 내며 발걸음을 멈췄다.
허물어진 벽 너머로 늘어져 있는 가구들, 먼지와 뒤엉켜 소복하게 쌓인 눈더미…….
일견하기엔 통상의 폐가와 다를 바 없는 일반적인 구성이었으나, 딱 한 가지의 차이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바로.
“…그대로네.”
활짝 개방된 지하실 문과 꾸준히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반파된 장롱이었다.
트레이드마크라면 트레이트마크라고 해도 좋을, 오직 황 노인과 유신이의 거처에서만 관측되는 그림을 통해 단박에 알아봤다.
내가.
제대로 당도했다는 걸.
탁―
타닥―
탁―
화르륵!
장포 속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로 금세 횃불을 만들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지하실.
우리가 떠난 이후로 누군가 다녀갔었는지.
잘 정돈돼 있던 집기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그저 난장판처럼 흐트러진 거로 보아 괴물보단 먹을거리를 구하러 왔던 인간의 소행으로 추정됐다.
이에 가만히 관망하던 나는.
“…씁.”
[웨이브]
우우웅―
촤아아아악!!
짧은 한숨을 내쉬며 두 팔을 걷어붙이고 소환해 낸 물줄기로 더러워진 내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한세정들에게 예고하였듯.
길면 2~3주가량 유랑할 심산이었기에 한동안 머무를 임시 거주지로 삼을 겸, 못 봤으면 모르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공간이 너저분해진 광경을 좌시할 수 없었기에 깔끔히 씻어 낼 셈이었다.
걸레라든가 빗자루는커녕.
휴지조차 미비할 정도로 청소용품이 부재한 터라 전적으로 마력에 의지한 채로 실시해 나가는 비질.
[웨이브]
우우우웅―!
촤아아아아악!!
거의 파도에 의해 쓸려 나가는 오염 물질들.
그 바람에 캐비닛이나 상자 같은 가재가 덩달아 휘말려 아수라장이 될 뻔도 했으나.
[마력 변형술 : 천수관음]
쿠웅!
후우우욱!
타악!
탁!
전신에서 발산된 수백 개의 마수(魔手)로 붙잡아 공중에 띄우는 것으로 사태는 해결됐다.
심지어.
[마력 변형술 : 대형 선풍기]
우우웅!
가아아아아앙!
휘우우우욱!
오염수를 빼내고 젖은 물건들을 말리는 역할도 마력으로 대체해 버렸다.
정말이지.
“다 되는군.”
무궁무진한 마력의 활용법을 체감하는 대목이었다.
한바탕 때를 벗겨 낸 나는 말끔해진 실내를 돌아보다 짐을 풀며 가방에서 두 개의 아이템을 차례로 끄집어내 바닥에 부착했다.
각기.
탈깍―
딸깍―
[‘보온석’이 가동됩니다.]
[‘격살용 알람 마법진’이 설치되었습니다.]
‘보온석’과 ‘알람 마법진’이라는 아이템이었다.
《보온석》
- 등급 : 일반
- 분류 : 소모품
- 설명 : 혹한의 추위를 막아 내기 위하여 고안된 물건. 저장되어 있는 화(火) 속성 마력이 서서히 빠져나가며 최대 여섯 시간 동안 ‘보온석’ 기준 10m 내의 공간을 따듯하게 유지시켜 준다.
- 옵션 :작동 시 ‘열기 방출’ / 온―오프 기능 탑재
《격살용 알람 마법진》
- 등급 : 특별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동행자 혹은 ‘안전지대’ 등 이렇다 할 방어 수단이 없는 여행객들이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제작된 마법 도구.
지정된 범위(최소 10m~최대 30m) 안으로 무언가 침입할 시 강력한 전격이 솟구쳐 대상을 공격하며, 작은 전류가 사용자를 잠에서 깨운다.
- 옵션 : 위기 발생 시 원본(原本) 등급 기술 ‘선 더 볼트’ 발동 / 위기 발생 시 사본(寫本) 등급 기술 ‘웨이크 업’ 발동 / 최대 5회 재설치 가능 / 온―오프 기능 탑재
떠나오기 전에 한세정이 상점을 뒤져 구매해 왔던 것들로, 나처럼 홀로 외부에 나와 있을 때 무척 유용한 물건이었다.
다만.
탁―
탁―
[‘보온석’이 비활성화됩니다.]
[‘알람 마법진’이 비활성화됩니다.]
밤중에나 쓸 물품들이었기에 우선은 전원을 꺼 두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지상에 올라와.
“서쪽으로 가 볼까.”
발길 닿는 대로 거침없이 진격해 나갔다.
* * *
지난날.
이 일대는 조직 폭력배 불곰파의 권역이었다. 눈 깜짝하지 않고 학살을 저지르던 악마들의 무대.
남녀노소(男女老少).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납치해 노예로 부리던 개자식들이 미쳐 날뛰면서 근방의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붙잡혀 짐승 이하의 삶을 살아가거나, 필사의 각오로 도망치거나.
때문에 이 근방은 항시 인적이 드물었다.
그게 여태껏 이어진 걸까?
어질러진 지하실 같은 이유로 혹여나 근처에 인영이 있나 싶어 떠도는 와중에 간간이 주변을 수색해 봤거늘.
“아무도 없는 건가.”
감각망을 되도록 넓게 퍼트려 보았음에도 걸리는 건 없었다.
뭐.
나로서는 잘된 일이다.
엮여 봐야 이로울 리가 없으니 차라리 독자적인 환경이 나으리라… 하고 중얼거리던 참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세 시 방향.”
우상단 부근에서 날카로운 고성이 들렸다.
귓가를 찌르는듯한 음폭에 자연스레 회전해 상가 몇 채를 건너자 저 멀리서 후다닥 달려 나가는 물체가 시야에 포착됐다.
[감각 증폭 : 시력]
후우우욱!
확실하게 식별하고자 부릅뜬 눈동자에 걸린 생물은.
“키에에에엑!!”
“라세르타?”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악연이라면 악연이라 할.
그러나 실질적인 만남은 없었던 도마뱀 괴수 ‘라세르타’였다.
“아, 그랬었지.”
놈을 목격한 후에야 이 부근에서 라세르타와 오르그가 출현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예 서식지를 꾸려 놓았는진 알 수 없으나.
만일 영역이 마련된 거라면 한 번쯤 방문해 봐야겠단 심정으로 뒤를 쫓았다.
[풀루스의 돌진]
툭―
쿠웅!
눈발을 휘날리며 질주하길 1분여.
미행이 발각되지 않게 조용히 따라붙자 이윽고 치열한 전투 현장이 나타났다.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족히 오십여 마리는 될 법한 라세르타 무리와.
“그어어어어어!!”
“그어어어!!”
그에 맞서 싸우는 열댓 마리의 ‘크루톤’들을.
간만이었다.
2m는 될 법한 신장에 녹색 피부, 문어의 것을 확대한 듯 흐물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와 악어를 닮은 대가리에 삼지(三指) 등.
‘튜토리얼’ 이후로 대면한 적이 있었나 싶은 크루톤들까지 보게 될 줄이야.
몇 달 만의 조우에 반가움이 일었다.
또.
그 괴물 따위를 두고 반가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신기해하며 멀찍이 서서 전장을 쭉 둘러봤다.
“대부분 솔져에 나이트가 양측 너덧 마리씩, 커맨더는 없나.”
전력을 분석해 보니 전체적으로 평이한 레벨이었다.
고로.
우우웅―!
주먹에 마력을 결집시켜 단번에 정리하려던 그때.
“…잠시만.”
문득 내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어어어어어어!!”
슈화학!
슈확!
나이트급으로 올라서면 다리가 늘어나는지.
기존의 육족(六足)이 아니라 두 개가 추가된 팔족(八足)을 자랑하며 날뛰는 크루톤이 보였다.
내가 저 녀석을 주시한 까닭은 명백했다.
튜토리얼을 치르던 시절, 절체절명의 위기를 초래했던 크루톤 종(種)의 특수 능력 ‘마비 독’ 때문.
명칭이…….
‘크루톤의 촉수 독, 이었던가?’
처음 겪어 본 괴물과의 일전이었기에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크루톤의 촉수 독」에 당했습니다.]
[‘타격 부위(오른팔)’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느려집니다.]
이런 메시지가 출력됐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상기되는 그 힘을 취하면 어떨까 싶었다.
몸소 겪어 봤던 대로.
독액이 다리에서 발산되는 형식이라면 안 되겠지만, 내장 기관에서 독소가 분비되는 타입이라면 진화를 꿈꾸는 내겐 최적의 먹잇감이었으니까.
그러므로.
판별을 해 봐야 할진대.
어떻게?
“상점 레벨을 올린 보람이 있네.”
다행스럽게도 그 열쇠를 갖고 있다.
‘차원 상점’이 3레벨로 업그레이드되면서 판매를 개시한, 내 허리춤에 부착된 사각형의 자그마한 상자.
무려.
‘특별’ 등급의 아이템을.
《정보 교환기》
- 등급 : 특별
- 분류 : 장신구
- 설명 : 합당한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만 판매되는 특수한 아이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종(種)의 근원석을 소모하여 「아카식 레코드」에 기입된 기록을 불러온다. 소모된 근원석 등급에 따라 제공되는 질이 달라진다.
단, 출력된 자료는 1분 후 소멸하여 재확인이 불가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 옵션 : 근원석 주입 시 등급에 따른 데이터 확인
이걸 매입하느라 3등급 근원석이 30개나 투자됐지만, 내용을 보면 아주 만족스러운 옵션이었다.
‘혹시 모르니 한 마리는 살려 놓고.’
불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치운다.
[풀루스의 돌진]
탁―
쿠우우웅!
자문자답을 하며 주억거린 나는 부지불식간에 옆구리를 치고 들어가며 권격을 터트렸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욱―
콰아앙!!
“키에에엑!!”
“그어어어억!”
연달아 솟구치는 비명.
양떼 목장에 난입한 호랑이가 된 양.
[웨루카의 베어 가르기]
슈욱―
촤아아아악!!
왼팔에서부터 발파된 참격에 라세르타고 크루톤이고 한꺼번에 잘려 나간다.
핏물이 튀고 살점이 나뒹굴길 3분.
채 5분도 되지 않아 7~80에 이르던 괴물들의 숫자가 한 자리로 줄어들었고, 30여 초가 더 흘렀을 땐.
“그어어어어…….”
네 마리 중 제일 덩치가 컸던 나이트급 크루톤만이 양팔에 거석이 박힌 모습으로 땅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전체 추출.”
콰직!
콰드드득!
순식간에 소형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빚어낸 나는 아등바등하는 놈을 뒤로하고 근원석을 가져와 ‘정보 교환기’에 삽입했다.
달그락―
흡사 ‘단서 구매처’ 투입구에 근원석을 흘려보낸 듯한 소리가 들린 직후.
[‘정보 교환기’에 「2등급 근원석 : 크루톤」이 투입되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로부터 해당 종(種)의 기록을 불러옵니다.]
번쩍!
빔 프로젝터를 연상케 하는 박스가 빛무리를 토해 내며 허공에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을 생성해 냈다.
크루톤의 이미지가 떡하니 박혀 있는 기다란 설명문이었고.
그 중심엔.
《정보 : 크루톤(2등급)》
- 1단계 설명 : 행성 ‘어맨다(Amanda)’의 지배종 「크루톤」 . 포악한 성질로 살아 있는 모든 걸 먹어 치우는 그들은 수중 보행이 가능한 다리를 이용해 육지와 해양을 가리지 않고 사냥을 나서는 사냥꾼들입니다. 허나 아가미가 없어 수중호흡은 하지 못합니다.
주 무기는 간과 쓸개 사이의 ‘독낭’에서 분비된 마비 독으로, 다리에 난 침 형태의 촉수가 살갗을 뚫고 박히면 독을 쏘아 내 상대의 신경을 마비시켜 산 채로 씹어 먹는 고약한 취미를 가졌습니다.
- 2단계 설명 : 보유 기술은 ‘크루톤의 촉수 독(자세히 보기▼)’과 ‘크루톤의 팔연격(자세히 보기▼)’, ** 등이 존재합니다.
“…독낭!”
내가 소망하던 단어가 포함돼 있었다.
딸깍―
[이벤트 발발까지 남은 시간 : 48일 22시간 49분 1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