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레이드 】
퀸(Queen).
여왕 혹은 왕비라는 뜻보단, 등장이 확실시되는 ‘킹’을 제외한 침략군 중 ‘가장 우수한 괴물’을 지칭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의미로써 표기된 계급.
그 명칭에 걸맞게.
우리는 퀸급 개체가 등장했을 때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지닌 괴물의 머리를 베어 버리려거든 전체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을. 몇몇 소수의 강자들만으로는 결단코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리란 점을 말이다.
인류가 이리 단정을 지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적이 가진 힘도 힘이다만.
제일 결정적인 사유는 역시나 ‘동원력(動員力)’ 때문이었다. 수십, 수백 단위를 초월해 마치 절망의 파도를 재현하는 듯 수천 단위로 투입해 버리는 군단 동원령을 고작 몇 명이서 감당키는 불가했다.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대가리를 잡기도 전에 끝을 모르고 밀려오는 물량 공세에 휩쓸려 아작 날 게 뻔하거니와, 설령 지난한 혈로(血路)를 뚫는다 해도 바닥난 체력과 마력으로 인해 이렇다 할 싸움은커녕 마구잡이로 치이다 단박에 짓뭉개질 터.
그래서.
퀸급을 상대로 교전에 나설 때면 우리는 항상 최선의 준비를 갖췄다.
완전 무장된 2~300여 명의 인원은 기본이요.
전원이 최소 원본(原本)급 기술을 익히고 있어야 하며, 체력 및 상태 이상 등에 쓰일 포션과 비상시 보조 전력으로 골렘들을 투입하는 등.
인력적으로나 물자적으로나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승부를 가리려 했다.
이른바.
‘레이드(Raid)’의 시작이었다.
- ‘종말 이후의 역사서 : 전쟁의 변천사’ 中 일부 발췌
* * *
“오빠!”
“오셨습니까.”
중천에 자리한 태양이 강렬한 햇살을 쏘아 대는 점심.
‘쌍수 증량의 폭력’을 거쳐.
과거 성십자가 클랜의 공세를 피해 도망치다 발록과 마주쳤던 현장 근처에 위치한 돌산 지대의 던전 ‘석갑충의 지하 궁’까지 경유하고 온 나는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 중이던 한세정들을 한데 모아 결과를 알려 주었다.
“포타우스 영역에서 발견했다.”
던전을 무려 세 곳이나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한 마리라니.
퍼센트로 따져도 30%라 그다지 대단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와!”
“수고하셨습니다.”
“오……. 그럼 이제 저희도 퀸급을 만나 볼 수 있는 거네요?”
의외로 한세정들의 호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일단 수확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인 데다가, 현재 우리 입장에서는 적은 쪽이 훨씬 나은 까닭이었다.
어째서?
주변에 적이 많다는 소리는 반대로 표현하면 침략군이 많다는 뜻.
다시 말해.
서너 마리가 존재한다는 건 자칫하면 권역을 벗어나 활보하던 다수의 퀸급 개체와 일시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여러모로 노력할 테니 그럴 공산은 낮다만.
단 1%의 확률이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본디 불행은 언제나 자그마한 단초로부터 발발하고, 만일 정말로 해당 사건이 발생한다면 모두가 오리지널 기술을 소유하지 않는 한 못해도 절반은 죽어 나갈지니.
어쩌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로.
지금 상황에선 딱 한 마리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고, 덕분에 한세정들의 수련 의지는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확고한 목표도 생겼으니.
그곳에 이르기 위한 열정을 불사를 타이밍이었다.
“공격하시죠.”
“오케이, 갈게요. 하아압!”
“흐읍!”
그렇게.
순식간에 나흘이 흘렀다.
이맘때쯤 거리 여기저기를 밝히던 신년회의 열기는 고사하고, 매일 밤낮을 차디찬 냉기와 맞서며 거듭해 가는 담금질.
‘단계 향상의 돌’과 ‘한계 돌파 의뢰서’를 이용해 보유한 모든 기술을 원본(原本) 등급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한편, 개중 하나라도 마스터 레벨에 도달하고자.
오전에는 개인 단련 시간을 가지고, 오후에는 서로를 향해 창칼을 휘두르는 무한 난투를 벌이며 이를 악물고 힘을 길렀다.
이 치열한 경주에서 남다른 두각을 보인 인물은 놀랍게도 ‘곽재우’였다.
“저, 3단계입니다.”
“…벌써?”
“운이 좋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나보다도 일찍 능력을 개방했던 한세정이 선두에 섰어야 할 텐데.
어찌 된 일인가.
그 원인은 전적으로 탱커라는 직업군에 있었다.
낮에는 나를 포함한 한세정들이, 밤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위시한 골렘들이 쉴 새 없이 두들겨 주니.
남들은 자야 할 시점까지도 쉬지 않고 종일토록 난타당하는 과정에서 경험치 획득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모양이었다.
일종의 자동 사냥 매크로를 설정해 둔 것과 비슷하달까.
뭐가 됐든.
“잘했다.”
“감사합니다.”
상당히 잘된 일이었다.
곽재우가 성장할수록 죽음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멀어지리니.
더구나.
방호력이 향상되었다는 말은 곧 보다 강하게 후려쳐도 된다는 이야기인 터라, 자연스레 실전 강도를 높이면서 곽재우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한발 빠른 발전을 거머쥘 수 있었다.
* * *
“다 정했어?”
“네! 우선 리스트부터 짜 놨는데, 어떠세요?”
열흘.
앞전의 4일을 더하여 자그마치 14일의 하드 트레이닝을 끝낸 한세정들의 결실을 토대로 마침내 출정을 결심한 그날 저녁.
나는 이틀 후에 원정을 나가리라 공지하며 한 가지를 주문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를 거치며 습득한 400여 개의 3등급 근원석으로 각자의 무기를 교체할 것이니 꼼꼼하게 살펴보고 목록을 작성해 오라고.
퀸급을 대적함에 있어선 기술도 기술이지만, 장비의 품질도 몹시 주요한 부분이기에 ‘단서’ 습득에 써야 할 100개를 빼고 나머지는 싹 다 투하해서라도 갈아엎을 예정이었다.
이에.
심혈을 기울여 고심하던 한세정들이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몇 장의 문서로 자신들이 선택한 무구에 대한 설명과 비용을 적어 왔다.
[구입 예정 목록]
1. 한세정
《베놈케벨의 일급 살수용 즉살검 : 모르드(moord)》
- 등급 : 유일
- 설명 : 베놈 케벨(Venom Kebel). 이름 모를 차원에서 독으로 유명하다는 살수 집단의 일급 살수만이 하사받는 최상등품의 칼.
따로 ‘살인(殺人)’이라는 의미의 네이밍이 새겨져 있을 만큼 아무나 사용치 못했기에 살수계에선 이 검 자체만으로도 실력을 증명하는 패가 되곤 한다.
- 옵션 : ‘속성 : 독’과 관련된 모든 기술의 위력 18% 증가 / 원본(原本) 기술 ‘베놈 소드’ 사용 가능 / 속성 14% 상승 / 순발력 11% 상승 / 마력 +18
*지속형 기술―베놈 소드 : 마력 주입 시 독 속성 블레이드 생성
[구매가 : 3등급 근원석 65개]
2. 조이령
《칼론드 특급 기사용 장창 : 아케시스》
- 등급 : 유일
- 설명 : 이제는 파괴된 어느 차원에 존재했던 왕국 ‘칼론드’의 특급 기사 중에서도, 신체적으로 불리한 여성의 몸으로 늘 전위를 자처하며 적군을 짓밟았던 「아케시스」의 이름을 따 제작된 창.
그저 손에 쥐는 것만으로 해악한 저주를 파훼하는 신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
- 옵션 : ‘행위 : 돌진’ 시 모든 능력치 3% 상승 / ‘위치 : 선두’ 시 모든 능력치 3% 상승 / ‘성별 : 여성’ 시 모든 능력치 1% 상승 / 지속형 기술 ‘저주 파훼’ 발동 / 근력 8% 상승
*지속형 기술―저주 파훼 : 사본(寫本) 등급 저주 무조건 파훼
[구매가 : 3등급 근원석 60개]
3. 신지유
《소환의 서》
- 등급 : 유일
- 설명 : 각 차원을 연결해 주는 특별한 책. 해당 서적에 마력을 주입한 상태로 정령 등을 불러낼 시 ‘간섭력’을 일부 해소시킬 수 있다.
- 옵션 : 소지 시 원본(原本) 등급 지속형 기술 ‘간섭력 해소’ 발동 / 소환 16% 상승 / 마력 12% 상승 / 소환 +22 / 소환수의 능력 7% 향상
[구매가 : 3등급 근원석 70개]
4. 신지운
《백전노장의 유산―만혈검》
- 등급 : 유일
- 설명 : 어떠한 의뢰든 백이면 백 수행해 냈다던 전설적인 용병이 은퇴식에서 남긴 유산이자, 끊임없는 승전을 기록하던 와중에 늘 패용하고 다녔던 네 자루 칼 중 하나다.
- 옵션 : 소지 시 원본(原本) 등급 지속형 기술 ‘만혈검’ 발동 / 소지 시 원본(原本) 등급 지속형 기술 ‘용병의 혼’ 발동 / 근력 13% 상승 / 순발력 11% 상승 / 체력 +18
*지속형 기술―만혈검 : 한 대 죽여본 상대와 재 격돌 시 모든 능력치 3% 상승
*지속형 기술―용병의 혼 : 영혼이 강건해져 불리함 속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얻는다.
[구매가 : 3등급 근원석 65개]
“흐음.”
한세정들이 고른 것들은 한눈에 봐도 제법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능력치는 능력치대로 증가하면서도 지속형 기술이나 발동형 기술이 한두 개씩은 꼭 붙어 있는…….
그에 합당하게 가격이 엄청나긴 하다만, 구매할 가치는 충분했다.
특히.
곽재우가 가져온 이 아이템은 더더욱.
5. 곽재우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소환령》
- 등급 : 유일
- 분류 : 장신구
- 설명 : 전장의 승리보다는, 유달리 보호에 힘썼던 특이한 부대의 대장이 품에 지나고 다녔던 목걸이. 이 목걸이로 하여금 죽어서까지 충정을 지키고자 하는 기사들의 영혼을 불러와 합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옵션 : 마력 주입 시 원본(原本) 등급 기술 ‘충정의 길’ 발동 / ‘행위 : 보호’ 시 모든 능력치 4% 상승 / ‘행위 : 보호’ 시 체력 및 마력 소모량 6% 감소 / 내구 14% 상승 / 내구 +17
*기술―충정의 길 : 이승을 떠도는 철혈 기사단의 혼령들을 불러와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가진다. ‘세트 아이템 : 철탑의 방벽’ 확보 시 유지력 및 전투력 향상
[구매가 : 3등급 근원석 60개]
“호.”
비록 내가 원하던 종류는 아니었으나, ‘충정의 길’이라는 기술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앞으로 치를 싸움에서 소수 정예의 단점을 극복하는 데 톡톡한 효과가 있으리라 예측되기 때문이었다.
하여.
“좋아. 가서 구매하고 와.”
지체 없이 돈 보따리를 내주었다.
상정해 두었던 300개를 살짝 넘기긴 했다만, 그 정도는 한세정들의 기존 무기를 판매하든 하면 메꿔질 터이니.
과감하게 투척하고 날이 밝는 대로 새로운 병기에 적응하며 맞이한 오늘.
“가자.”
“네!”
“네!”
“네!”
“네!”
“네!”
새벽 나절부터 만전을 기한 우리는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서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에 잠들어 있는 팔수거인(八手巨人)을 사냥하고자 거점을 나섰다.
1월 중순.
한기가 극도로 심해져야 할 계절에 맞지 않게 하늘이 청명하고 바람이 잔잔한 날씨였다.
[축하합니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에 입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