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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56화 (156/232)

156화

모두의 기대가 모인 가운데.

“으음……!”

“형님! 도윤 형님!”

마침내 기나긴 시간을 잠들어 있던 정도윤이 신음을 토해 내며 수마(睡魔)를 딛고 눈을 떴다.

한세정의 추출기 사용이 있고 대략 10여 분 만에 들려온 소식에 서둘러 달려가니.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던 그가 끼이익 하는 소음에 반응한 듯 천천히 눈을 돌렸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아 핼쑥해진 낯빛.

“…….”

데구루루 굴러와 내 앞에서 딱 정지한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완치되었을 거란 한세정의 진단이 있었으나.

혹시라도 나와 대면하면 광증이 다시 도지진 않을까 우려하던 순간.

“누…구……?”

정도윤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래.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물음표가 잔뜩 찍힌 의문문이었다.

즉.

“형니이이임!!”

환하게 기뻐하는 최홍진의 외침처럼 말끔하게 나았다는 의미였다.

다행이었다.

영양 공급에 문제가 있다거나 해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거야 잘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터.

의사가 동행했다면 퇴원 판정을 내렸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 나도 한세정도 안도감이 깃든 소성(笑聲)을 터트릴 수 있었다.

그사이.

최홍진은 정도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여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등등.

말을 떠듬거리긴 해도 듣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지라 차근차근하게 얘기를 이어 가자.

“내가, 그랬다고……?”

“예, 형님!”

정도윤이 심히 놀라 나와 최홍진을 번갈아 봤다.

당혹과 경악이 혼합된 눈빛.

아무래도.

자신이 행했던 사건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저것 또한 ‘각인’의 영향일까.

당황스러워서 그런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나는 한세정을 데리고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충격을 해소할 만한 여유를 줘야 할 것 같았다.

“상점으로 가자.”

“네!”

* * *

3레벨 차원 상점.

공간 확장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듯.

외관과 달리 거대한 내부에 발을 내디딘 나는 온갖 장비가 나열돼 있는 무기 진열대와 방어구 진열대를 통과해 쭉 걸어가 새롭게 신설된 창구.

‘단서 구매처’로 향했다.

“…….”

꿀꺽―

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곳에.

이 지옥을 끝장낼 무언가의 비밀을 담겨 있었으니까.

하여.

절로 침이 삼켜질 만큼 긴장되는 심정으로 다다른 카운터.

[단서 구매처]

“여기가…….”

엄청난 게 숨겨져 있는 것치고는 상대적으로 무난하고 수수한 현판이 나를 맞이해 준다.

그 아래로 ‘특수 퀘스트 판매처’와 비슷한 키오스크가 존재했는데.

탁―

[‘단서 구매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하자.

지이이이잉―

하는 기계음을 필두로 네 개의 투입구가 생성되며 여러 문구가 떠올랐다.

[정해진 대가를 지불하여 ‘특수 조건 ‘?’의 「단서」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1등급 근원석 : 0개 / 1,000개]

[2등급 근원석 : 0개 / 500개]

[3등급 근원석 : 0개 / 100개]

[4등급 근원석 : 0개 / 한 개]

“…이런 방식인 건가.”

이런저런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기된 덕분에 ‘단서 구매처’의 이용법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점 업그레이드 형식과 금액만 다를 뿐.

맥락 자체는 거의 동일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속이 쓰렸다.

“으음…….”

저 최하단에 위치한 ‘4등급 근원석’.

‘축제의 땅 : 심층부’에서 퀸급 살라만드라의 목만 차지했더라면 바로 채워 냈으리란 사실 때문에.

참…….

잊으려 애를 쓰는데도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고 아른거리는구나.

“쯧.”

입 안이 텁텁한 듯해 혀를 찬 나는 저걸 어디서 구해야 되나 싶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이른 시일 내에 던전 탐방을 기획했다.

퀸급 개체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도심 한복판을 떠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확률이 높으리라.

물론.

사냥감이 사냥감이니 철저한 대비가 뒤따라야겠지. 두 번째 오리지널 기술의 획득이라는 최선의 대책이.

고로.

“훈련을 나가야겠어.”

“훈련…이요?”

‘단서 구매처’에 대한 궁긍즘을 해결한 나는 곧장 외부 훈련을 나서기로 작정했다. 부단한 수련만이 원본(原本) 기술의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이 급작스러운 외출에 한세정이나 신지유 등도 본인들 역시 동참하겠다며 다가왔다.

휴가를 주었음에도 자발적으로 나서겠다니.

리더의 관점에선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풍경이었기에 딱히 말라지는 않았다.

다만.

“네? 근처에 오지 말라구요?”

“그래.”

동행을 허가한 것과는 다르게 근방 100m 이내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경고했다.

300 고지를 코앞에 둔 마력을 모조리 투입할 각오로 인근 대지를 죄다 뒤집어 놓을 요량이라 자칫하면 휩쓸릴지도 몰랐다.

한세정들쯤 되면 제아무리 체화(體化)를 목전에 둔 기술이라고 해도 수월하게 피해 낼 테지만, 굳이 사서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러한 연유로 거점에서 1km가량 떨어진 부근에서 제각기 나뉜 이후.

“음……. 없군. 해도 되겠어.”

나는 감각을 퍼트려 주위에 혼자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자마자 발끝으로 마력을 모으며 지면을 짓밟았다.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후우웅―

쿵!

쿠구구구구구궁!!

묵직한 무게감을 선사하며 뻗은 걸음에 짓눌린 땅이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며 사정없이 뒤틀려 나간다.

물경 15m에 이르는 영역이 구겨지는 장면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이 안에 근원석을 뱉어 줄 괴물들까지 포함돼 있었더라면 훨씬 좋을 텐데,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빈 공터라 우렁찬 파괴음 옆으로 약간의 허전함이 딸려온다.

그러나.

[티그리스의 대지 빝르기]

“흡.”

쿠우웅!

개의치 않고 재차 발을 굴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쉰 번, 백 번, 이백 번.

다짐한 대로.

체내의 마력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보폭을 내질렀다.

“후우, 흐읍!”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우우우웅!

쿵!

지독하기까지 한 단련이 끝난 건.

창공을 유영하던 태양이 떠오르는 달과 별에 밀려 저녁노을로 바뀔 즈음이었다.

* * *

똑똑―

고행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를 끝낼 무렵.

누군가 날 찾았다.

“저 최홍진입니다. 혹 시간 되십니까.”

“들어와.”

최홍진이었다.

그의 곁에는.

“…안녕하십니까.”

“…….”

여전히 병색이 엿보이는 하나 온종일 이루어진 곽재우의 지극정성으로 제법 기력을 되찾은 정도윤도 함께였다.

꾸벅―

정도윤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최홍진의 보조도 거절한 채 스스로의 힘으로 거진 90도 가깝게 허리를 숙이며.

“홍진이에게 들었습니다. 제가 추태를 부렸다고, 또 저희 대원들의 목숨을 살려 주셨다고.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더없이 진중한 자세로 고마움과 사죄를 표했다.

한 자, 한 자 내뱉는 대사에는 진심이 뚝뚝 묻어 나왔다.

“…됐습니다.”

나는 그 정중한 태도에 분명하게 대답했다.

괜찮다고.

애당초 모든 일의 원흉은 신(新)한국 정부의 수장 이회건과 성십자가 클랜이었다. 정도윤이나 원앙 부대나 전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난 꼴에 불과하니, 애꿎은 사람을 드잡이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물자를 나눠 주지도 않았겠지.

허니.

쓸데없는 논쟁은 치우고, 보다 생산적인 대화로 주제를 돌렸다.

“하지만, 저는―”

“정 사과를 하고 싶으면.”

“……?”

“정보로 갚으시죠. 부대장에게 많은 걸 묻기는 했지만, 대장급은 보다 많이 알고 계실 테니.”

대놓고 배신을 종용하는 이야기였으나.

“아… 예. 제가 아는 정보는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드리겠습니다.”

“가능하다면 글로 써 주시죠.”

“알겠습니다.”

정도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협조를 약속했다.

충성으로 몸바쳤던 조국이 되레 자신과 부하들을 버림 패로 써 댔다는 현실이 그를 분노케 한 모양이었다.

그런 탓에 연신 이글거리는 눈을 가만히 주시하던 나는.

“…성풍 아파트 단지라고 아십니까?”

아주 오랜만에 ‘성풍 아파트 단지’를 언급했다.

이제 정처없이 떠돌게 될 자들.

갈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살 만한 거처를 추천해 주고자 함이었다.

“성풍 아파트 단지라면… 알긴 압니다만.”

“저희가 떠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비어 있었으니 쓰기에 적당할 겁니다.”

“아.”

거기서 거주하다 운이 따른다면.

성풍 아파트 단지 남쪽으로 이동했던 황수현 무리와도 연이 닿겠지.

불곰파에게서 구원해 준 뒤로 어떻게든 날 돕고자 했던 인물이니, 내 이름을 팔면 적잖은 원조해 주리라.

이 조언에 정도윤과 최홍진은 끝까지 도움만 받는다며 몇 번이고 거듭해서 등을 굽혔다.

* * *

다음 날 점심.

“…왠지 허전하네요.”

“그러게. 여섯 명, 아니, 일곱 명이나 있다가 사라지니까 썰렁하네.”

아침 일찍부터 짐을 꾸린 정도윤과 원앙 부대가 거점을 떠났다. 그동안 미운 정이 들었는지 꽉 차 보이던 공간이 어쩐지 공허하게 다가왔다.

이래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는가.

우린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그들의 행보에 별다른 사고가 발생치 않기를 기원하며 어제와 똑같이 담금질에 돌입했다.

이른바 무제한 트레이닝의 스타트였는데.

족히 며칠을 잡고 세웠던 이 고단한 스케쥴은 예상을 깨고 금방 막을 내리게 됐다.

전날의 열정이 빛을 발했는지.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쿠웅!

콰과과과과광!!

“음……?”

개시 한 시간 만에 경험치가 풀로 차며 기술이 마스터 레벨로 승급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당히 얼떨떨해졌으나.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됐네.”

나로서는 나쁠 게 1도 없는 터라 기껍게 받아들이며 즉시 ‘한계 돌파 의뢰서’를 찢었다.

촤아악!

시원하게 갈라지는 종이 사이로 등장하는 메시지들.

[‘한계 돌파 의뢰서 : 체화’를 사용합니다.]

[기술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를 선택했습니다.]

[해당 기술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기술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한계 돌파 :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 설명 : 행성 ‘바이오스(Bioous)’의 지배종 「티그리스」만이 개화 가능한 기술을 베껴 피나는 노력 끝에 원류와 비견될 정도로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그대. 이제는 ‘남의 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가다듬을 시간입니다.

당신이 지닌 ‘특성’을 가미해 원류를 뛰어넘을 본인의 길을 제시해 보십시오.

- 과제 : 1. 특성 결합 / ?

- 현재 결합 가능한 특성 : 불굴, 반복, 센서티브

허공을 수놓는 낯익은 문장에 익숙하게 호응했을 때.

스윽―

탁!

[기술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와 특성 ‘반복’이 결합합니다.]

[스스로의 길을 찾은 그대에게 「오리지널 기술 : 영원토록 붕괴하는 대지」를 부여합니다.]

[2차 과제가 해금되었습니다.]

[과제 : 1. 특성 결합(완료) / 2. 총합 ‘10,000’분 이상 발현]

[2차 과제를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29일 23시간 59초]]

내 손엔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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