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흠…….’
고민이 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맞지만, 그래도 내가 보유한 기술과 결합했을 때 최고의 시너지가 발휘되는 쪽으로 취해야 할 테니.
그러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그런 점에 있어서 제일 끌리는 특성은 센서티브인가.”
손길이 가는 방향은 ‘센서티브’라는 특성이었다.
내용이 생략되었다고는 하지만.
특성명 우측에 나열된 설명문만 봐도 어떤 선결 과제를 요구할는지 얼추 추론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검은 세계’는 시간대가 밤이어야 한다든가 ‘축제의 땅 : 심층부’에서처럼 주변에 불빛이 한 점도 없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
범용성 면에서나, 과제 수행 난이도 면에서나 ‘센서티브’를 고르는 방향이 가장 적당해 보였다.
“감각계 특성이라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에 융합하기는 어렵겠지만, 오히려 잘됐지. 다음 타자로 유력한 발록의 투기나 머메른의 갑주와는 효율이 무척 좋아 보이니.”
[‘특성 : 센서티브’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대로 교환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딸깍―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특성 : 센서티브」를 습득합니다.]
《특성 : 센서티브》
- 설명 : 행성 ‘시우라(Saura)’의 지배종 「살라만드라」의 특성 중 하나. 선결 과제를 이행할 시 특별한 힘이 부여된다.
- 과제 : 체력 및 마력 10% 이하로 하락 / 체력 및 마력 5% 이하로 하락
- 옵션 : 선결 과제 달성 시, ‘오감(五感)’ 극대화. 2차 과제 달성 시 ‘육감(六感)’ 개방
“좋네.”
교환 창이 닫히며 허공에 열린 스크린을 쭉 탐독한 나는 새로운 지식을 뇌리에 입력하곤 손을 휘휘 저어 메시지들을 없앴다.
이로써 대강의 정리는 끝났다.
곰곰이 따져 보면 뭔가 할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래저래 바쁘게 돌아갔던 하루를 감안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더 이상의 노동은 멈추고 휴식할 작정이었다.
적어도 내일 정도는.
* * *
날이 밝은 아침.
“…해서 그만 가 보려고 합니다.”
스랄레오 고기와 렌티아 열매로 간단히 식사를 마무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홍진이 날 찾아왔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도 종료됐으니 굳이 동행할 까닭도 없는 바.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지기로 결정한 느낌이었다.
“…한세정.”
“네?”
“떠나기 전에 음식과 물을 받아 가. 해독제도 준비해 달라고 말해 둘 테니까.”
“아, 그러지 않으셔도―”
“가져가. 어차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갈라서려는 최홍진과 원앙 부대원들에게 편의를 봐주고자 물자를 나눠 주었다.
악연에서 비롯된 인연이나 어쨌든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합심했던 이들이니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았다.
말한 대로 우리 쪽은 언제든지 확보 가능한 품목들이라.
도리어.
기왕이면 ‘각인’에 의해 광인이나 다름없게 변한 정도윤도 완벽하게 치료해 주고 팠는데. 중급 해독 포션이나 중급 상태 이상 해제 포션까지 투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안 되는 걸로 보아 내 선에선 파훼 불가인 듯했다.
3등급 근원석 50개로 판매되는 ‘상급 해독 물약’이나 ‘상급 상태 이상 해제 물약’의 약력이라면 어찌 먹힐 것 같기도 하나…….
한 푼, 한 푼이 귀해진 현시점.
일행도 아닌 외부인에게 거금을 투척하는 일은 절대 금물이었다.
3등급 50개는.
1등급으로 환산하면 무려 125,000개나 되는 천문학적인 분량이었으니까.
따라서.
내줄 수 있는 거라도 최대한 딸려 보내려는 심산이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
꾸벅―
이러한 내 의도가 전해졌는지.
최홍진이 굉장히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고는 문고리를 붙잡던 찰나였다.
똑똑!
‘……?’
“…누가 오신……?”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노크 소리을 동반하며 바깥에서 한세정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오빠! 저 세정이인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들어와.”
뜬금없는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뭔가 사유가 있으니 왔겠지 싶어 최홍진에게는 가 보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의자에 앉았다.
이에.
꾸벅―
다시금 고개를 숙인 그가 문을 열며 나가려는데.
“어? 홍진 씨도 여기 계셨구나! 잘됐다! 찾고 있었어요!”
“예, 안녕하― 예?”
별안간 오픈된 방문에 당화하던 한세정이 입장하기 편하게끔 좌측으로 비켜서던 최홍진을 발견하고는 손뼉까지 치며 반가워한다.
대체 무슨 일이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에 절로 갸웃거려지던 그때.
“정도윤 씨가 ‘정상’으로 되돌아왔어요!”
“……?!”
“예?!”
한세정의 외침이 나와 최홍진의 고막을 두들겼다.
* * *
5분 전.
“독성 추출기라……. 주사기같이 생겼네.”
식사를 마치고서 침대에 누워 쉬던 한세정은 슬슬 훈련을 가고자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아이템을 손에 쥐며 일어났다.
금일 수련 대상은 약 10cm의 이 자그마한 주사기.
《독성 추출》
- 등급 : 특별
- 분류 : 장신구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순위 발표식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당신에게 지급된 추출기. 관을 꼽고 버튼을 누르면 해당 대상만이 갖고 있는 독성을 액체 형태로 뽑아낸다.
- 옵션 : 독액 추출 / 추출된 독액으로 상위 제품 제작 시 독 효과 14% 상승 / ‘속성 : 독’ 관련 기술 위력 7% 상승 / 속성(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11
순위 발표식에서 얻은 신상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외부에서 아무 괴물이나 한 마리 잡아 와서 실험해 볼 계획이다.
다만 그 전에.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군요.”
원앙 부대원들이 기거하는 숙소에 먼저 들렀다.
남정네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 그녀가 신방한 목적은.
“한번 보고 가려구요. 쉬고 계세요.”
“넵. 잘 부탁합니다.”
깨어날 때마다 광기(狂氣)를 뿜어내는 정도윤의 증상을 체크해 보기 위함이었다.
아윤에게 부탁을 받지 않았던가.
그를 돌봐 달라고.
해서 매일 한 번씩은 꼭 검진을 하는 중이다.
“그워어어어어어―”
“그워어어어어―!”
“안녕.”
감시자 겸 이 근방을 수호하는 골렘들에게 정겹게 손을 흔들어 주고 뚜벅뚜벅 걸어 도착한 병실.
죽은 듯 가지런히 누워 있는 정도윤을 내려다보던 한세정은 가방에서 준비한 약품들을 꺼냈다.
흔히들 접하는 양산형 포션이 아니라.
각종 재료를 따로따로 구입한 뒤 원본(原本)등급으로 성장한 ‘용독술’과 제법 큰 값을 치르고 구매한 ‘독약 총론’이라는 아이템을 이용해 직접 제약한, 가치를 논하자면 당연히 중급 포션보다 뛰어난 특등품으로.
여유가 생길 때 틈틈이 조제해 어느덧 백여 개를 돌파한 것 중에서도 정신병을 고치는 데 특화된 약재들이었다.
《탈압분》
《영혼 각성제》
《속박환》
“음……. 탈압분은 그저께 써 봤고, 영혼 각성제는 일시적이라 소용이 없고…….”
그간의 양병(養病) 기록이 적힌 차트를 살피며 이번엔 무얼 시도해 봐야 하나 고심하던 한세정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탁자에 한가득 늘어놓으며 진단서와 대조해 본 결과.
써 보지 않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
순식간에 내려앉은 침묵.
더는 동원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주는 안타까움에 탄식한 한세정은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정돈했다.
정도윤의 광증을 유발하는 병마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안 되는 걸 되게 할 힘은 없으니…….”
내심 기대했을 원앙 부대원들에겐 미안하더라도 여기서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라고 푸념하며 본래 일정대로 추출기의 성능이나 확인해 보고자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일어서던 차에.
“…잠시만.”
별안간 한 줄기 벼락 같은 가설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상대의 독성을 뽑아낸다는 이 독액 추출기를 정도윤에게 꽂아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가정이다만.
만약 시스템이 그의 정신을 장악한 ‘각인’을 독으로 인식할 경우, 추출기를 통하여 원상복귀시키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 추측됐다.
“해 보자.”
밑져야 본전.
한세정은 결심이 서자마저 뾰족한 관을 정도윤의 손바닥에 찔러 넣었다.
푹―
칼날인 양 부드럽게 박히는 추출기의 촉감을 전달받으며 끝자락에 튀어나온 버튼을 누르자.
[해당 대상의 독성을 추출합니다.]
[1%… 2%… 3%…….]
짤막한 메시지가 나타나더니, 공중에 출력된 퍼센트 게이지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를 초조한 기색으로 쳐다보길 5분여가 흐른 끝에.
[…완료!]
드디어 느릿느릿하게 치솟던 숫자가 100에 도달하며 관 내부가 붉은 물질로 가득해졌다.
[대상의 체내에서 「독성 : 정신 강압의 편린」이 추출되었습니다.]
[더 이상 추출 가능한 독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성 : 정신 강압의 편린》
- 등급 : 특별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정신 제압용 독. 매우 강력한 성분으로, 사용하기에 따라 중독된 대상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암시를 가하기도 한다.
- 옵션 : 복용 시 원본(原本) 등급 기술 ‘정신 강압’ 발동
*기술―정신 강압 :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상의 정신을 조작한다.
“아!!”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그게… 정말입니까?”
“네. 아직 깨어나시진 않으셔서 추후에 정밀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제가 받은 메시지에 의하면―”
“아, 아아……! 아아아!!”
한세정이 언급한 ‘완쾌’라는 단어에 최홍진의 몸이 무너졌다.
절망이나 슬픔 따위의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전히 희망과 기쁨이 빚어낸 눈물을 쏟아 내며.
하기야.
정도윤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남자였으니.
물론,
다 큰 남정네가 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취미는 없는 터라,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한세정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감격의 눈물이든 행복의 눈물이든 시원하게 털어 내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내준 것이다.
그렇게 복도로 나와 마주친 한세정의 눈.
“헤헤…….”
시선이 맞닿자 호선을 그리며 기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저 잘했죠?’ 하고 물어보는 모양새였다.
“…잘했어.”
“헤.”
뭔가 칭찬을 해 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어색한 기운을 깨고 한마디 툭 던져 주자 더더욱 짙어지는 웃음기.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으니 불현듯 ‘축제의 땅’에서 있었던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부디 곁에 있게만 해 달라던, 그저 그거면 된다고 애원하던 절규가.
당시만 회상하면 과연 그냥 넘어가는 게 옳았을까 모르겠어서 머리가 아팠다.
허나.
“…됐다.”
“네?”
“아냐.”
“……?”
아까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조용히 흘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별이 두렵다기보단… 누나의 그림자가 덧씌워졌던 여인의 죽음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단지.
그 이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