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148화 (148/232)

148화

오후 세 시.

“크아아아아아앙!!”

타다다닥!

콰앙!

집채만 한 호랑이 형상의 괴물이 포효를 터트리며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른다.

몸길이만 4m 남짓.

수백 킬로그램이 넘는 체중에서 발산되는 무게감이 발톱에 실리며 전방을 매섭게 찍어 누른다.

걸리기만 하면 뭐든 짓뭉개 버릴 기세.

그러나.

“어딜!”

후욱!

탁!

정작 타깃이 된 신지운은 왼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공격을 회피하며 되레 옆구리에 반격을 꽂아 넣었다.

[인첸트―샤프니스]

[마력 변형술 : 초대형 칼날]

쐐에에에에에에엑!

콰직!!

[‘카운터’가 발동되었습니다.]

[추가 대미지가 반영됩니다.]

끔찍한 파육음을 내며 가죽을 찢고 살점을 가르는 칼날.

상대는 분명 커맨더급 개체였으나.

근력도, 순발력도, 마력도.

기본 능력치에 한해서라면 전부 250을 찍은 신지운의 카운터엔 영락없는 고양이에 불과했다.

쿵―

쿠웅―

“후하, 다 잡았네.”

일격 필살.

벼락처럼 내지른 거검에 의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죽어 나간 괴물을 끝으로 전장이 조용해진 직후.

띠링!

[축하합니다!]

[모든 ‘절망의 파도’를 막아 냈습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가 마감되었습니다.]

[그간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낸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승전으로 기록한 업적에 대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중급 물약 세트’를 습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신체 능력치 지정 상승권’을 습득했습니다.]

[보상으로 ‘기술 등급 성장권’을 습득했습니다.]

[아직 다른 생존자들의 전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각자의 ‘공적치’를 토대로 「순위」 산정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종소리를 필두로, 마침내 이레에 걸쳐 이행되었던 ‘절망의 파도’가 종료됐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다.

“끝났나.”

신지유가 설치해 준 목책에 서서 전황을 관망하던 나는 열 줄 가까이 되는 문구들을 차근차근히 읽으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칠주야 내내 치러졌던 전쟁이 종결되었으니 기꺼워해야 마땅한데, 그보다는 아쉬움이 큰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원앙 부대의 임시 의탁이라든가, 성십자가 클랜과 결탁한 신(新)한국 정부의 급습이라든가 하는 사건·사고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십이지신(十二支神)을 포함한 골렘들을 얻는다거나 커맨더급 개체의 신체를 이식하는 등 능력과 재력을 무지막지하게 성장시켜 주었던 수단이 사라진 터라.

지난밤 3레벨로 업그레이드 상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벌써부터 어깨가 무거웠다.

그나마 거주지 인근에 던전이 많아서 돈은 어떻게든 벌 수 있을 테지만.

소득 단위가 확 낮아져서 과연 충당될는지.

“이번 이벤트를 기점으로 던전에서도 커맨더급이 등장하고 있으니, 세 개 조로 나눠서 돌다 보면 어찌어찌 되겠지…….”

나는 확신 없는 미래에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계단을 밟으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전체 추출’ 기능으로 근원석을 수거하고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을 한데 모아 불태우며 깔끔하게 일대를 청소한 이후.

10여 분간 휴식하며 정비를 마친 우리는 곧 식량과 포션 등을 담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거점을 나왔다.

타임 어택 특전과 공적치 확보.

이 두 가지 과제를 모두 달성했으니, 이제 마지막 과정을 수행할 차례였다.

이세계인지, 가상 세계인지 모를 세상.

‘축제의 땅’으로의 여행을.

* * *

툭―

[「축제의 문」이 당신의 손길에 반응합니다.]

우우우우우우!!

[〈축제의 땅〉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손가락이 닿자 빛을 토해 내며 나를 잡아당기는 석문.

이에.

나는 뒤를 바라보며 곽재우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가방을 건네주며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

설령 선봉대인 나와 한세정만이 ‘축제의 땅’을 경험하게 될지라도 상관없으니, 부디 안전하게만 다녀오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점 방어를 당부하고 주저 없이 석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축제의 땅〉으로 이동합니다.]

번쩍!

텁―

일렁거리는 빛 속으로 다리를 뻗자.

‘단거리 공간 이동’과 비슷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온 광휘가 온몸을 휘감으며 주변이 일그러트렸고.

어느 순간 현실과 동떨어진 차원이 나타났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 아래 녹음(綠陰)으로 우거진 드넓은 초원이었다.

다만.

나도.

“아앗, 차!”

뒤늦게 입장한 한세정도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여긴―”

“으아아아아악!!”

“……?!”

입성과 동시에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으니까.

뭐지?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괴성에 반사적으로 쳐다본 우측.

그곳엔.

“키에에에에엑!!”

“으아아악!!”

콰직!

2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4~5m는 될 법한 거대한 도마뱀에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제법 두꺼운 철제 갑옷을 두르고 있음에도 한입에 집어삼켜 상반신을 갈라 버리는 치악력을 선보이는 괴수의 출현에 당황하기도 잠시.

“제가!”

[단거리 공간 이동]

번쩍!

정신을 차린 한세정이 검을 뽑아 들며 기습을 시도했다.

[가속]

[독살]

후우욱!

서걱!!

단숨에 간격을 좁히며 휘두른 보랏빛 참격이 불룩해진 도마뱀의 목덜미를 자르며 지나간다.

외피의 방어력이 대단치 않은 듯 손쉽게 썰려 나가는 대가리.

신음 한 번 내뱉지 못하고 분리된 머리통이 남자의 하반신과 엉키며 바닥에 떨어진 그때.

“…어?”

자세를 고치던 한세정의 얼굴이 공중으로 향했다.

괴물 처치와 관련해서 뭐라도 뜬 모양.

내용이 궁금했지만, 일단은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끔 사주 경계에 나섰다.

[웨이브]

우우웅!

촤아아아악!

혈 향이 퍼지지 않도록 핏물을 지우는 건 덤.

그렇게 얼마간 기다리자.

“아! 아윤 오빠!”

확인을 끝낸 한세정이 손뼉을 치며 자신이 본 것을 알려 주었다.

[축하합니다!]

[솔져급 「살라만드라」를 처치했습니다.]

[보상으로 ‘퇴장권 파편’을 습득했습니다.]

[‘기여도’가 0.01% 상승합니다.]

그녀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대략 이러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하단의 두 줄로.

《퇴장권 파편》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오직 〈축제의 장〉에서만 가동되는 티켓의 파편이다. 파편을 모두 모을 시, 〈축제의 땅〉에서 〈차원 : 테라〉로 귀환할 수 있는 일회용 주문서가 완성된다.

- 옵션 : ‘축제의 땅 전용 케스트 : 복원’ 부여

《축제의 땅 전용 퀘스트 : 복원》

- 이 퀘스트는 오로지 〈축제의 땅〉 내에서만 진행 가능합니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살라만드라」를 처치하여 ‘퇴장권’의 파편을 모아 오십시오. 위기의 순간,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현재 획득한 파편 : (1/77)

└‘살라만드라’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파편을 습득합니다.

└이 퀘스트는 클리어 시 재도전이 불가능합니다.

전자는 곽재우를 위시한 후발대를 이곳으로 불러들여도 좋음을 알려 주는 아이템이었고.

《기여도》

- 설명 : 〈축제의 땅〉에서 적용되는 수치로, 축적된 양에 따라 퇴장 시에 주어지는 보상의 정도가 달라진다. 단, ‘진퇴권’과 ‘퇴장권’으로 도주형 복귀 시 「기여도」는 절반으로 하락하며, 5% 이하의 ‘기여도’는 삭제된다.

- 현재 기여도 : 0.01%

후자는 ‘축제의 땅’에서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도움말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갔다 올게요!”

설명을 다 한 한세정은 옆쪽에 짐을 내려놓으며 주머니를 뒤져 ‘진퇴권’을 꺼내 들고는 내게 허락을 구했다.

일행을 얼른 데려오고 싶은지 눈동자를 반짝이는 그녀.

“…….”

나는 그 맑고 아름다운 동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료들을 소환하기에 앞서.

“세정아, 아니, 세정 씨.”

“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둘만 있을 기회가 또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

먼저 생각해 왔던 대로, 둘만 남은 이때를 이용해 우리의 애매한 관계부터 명확하게 정리할 작정이었다.

그녀에겐 다소 급작스럽겠지만.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 이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라. 나는 그러한 심정으로 통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읊조리려 했다.

그랬는데.

“저는…….”

“알아요. 저 부담스러워하시는 거.”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한세정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존댓말을 쓰자마자 내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를 눈치챈 듯.

주먹을 꽉 쥔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확고하게 제 속내를 밝혔다.

“그치만 오빠도 아시잖아요. 사람 감정, 마음대로 못 하는 거. 그러니까… 그러니까 좋아하게만 해 주세요. 저 좋아해 달라고는 안 할게요. 전 그냥 오빠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기만 하면 돼요.”

“나는…….”

“그러다 누나분과 재회하시는 날,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셨을 때. 그때 저 한 번만 돌아봐 주세요.”

라고.

“…….”

나는 쭉 이어진 한세정의 말에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이성적으로는 단칼에 잘라 내야 ‘누나와의 재회’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 흔들림 없이 곧게 나아가리라는 판단이 섰으나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간절하게 다가온 탓이었다.

만약 저 요청마저도 거절했다가는.

단순히 갈라서는 걸 넘어… 삶 자체를 포기할 것같이 처절했기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한세정에게 있어서 ‘아윤’이란 사람은 그저 애정을 표하는 상대가 아니라, 이 지옥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형님!”

“오빠!”

석문을 통해 진입한 곽재우들이 내 곁으로 모여든다.

다시 완전체가 된 우린 ‘축제의 땅’을 떠돌며 도마뱀들을 찾아 사냥에 들어갔다.

다섯 명이서 77개씩.

‘진퇴권’이 있는 나를 빼더라도 총 385개의 파편을 구해야 하는지라 노닥거릴 겨를이 없었고.

그리 숨 가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이곳에 관한 몇 가지 규칙도 알게 되었다.

첫째, ‘축제의 땅’의 시간적 흐름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둘째, ‘축제의 땅’에 존재하는 괴물들은 현실의 동급 괴물들보다 훨씬 강하다.

셋째, ‘축제의 땅’ 곳곳에는 식량과 쉼터가 갖춰진 ‘안전 구역’이 존재한다.

넷째, ‘기여도’를 일정 수치 이상 쌓게 되면 ‘길’이 열린다.

이 룰들은 기여도가 쌓일 때마다 랜덤하게 공개가 됐는데.

그 덕분에 기여도뿐 아니라 정보 파악을 위해서라도 도마뱀들을 잡아 죽여야 함을 깨달은 우린 더더욱 박차를 가하며 사냥에 전념했다.

딱.

쿠구구구구구구궁!!

“……?”

어마 무시한 땅 울림을 동반하며 나타난 수백 마리의 도마뱀들이 일거에 달려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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